한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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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일섭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의 국악인으로, 대금과 가야금의 명인이었던 한덕만의 손자이다. 그는 판소리를 배우다 변성기로 인해 기악으로 전향하여 대금, 피리, 태평소, 가야금,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악기 귀재로 불렸다. 1947년부터 창극단 반주 악사로 활동하며 아쟁 산조, 호적 산조 등을 창작했고, 신민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박동진, 김연수 등 명창들과 함께 판소리 고수로 활동했으며, 박종선, 이생강, 김청만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47년 창극단 반주악사로 악사 생활을 시작했고, 1958년에는 여성국극단 악사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주로 창극단 계통 단체의 전속 악사로 활동했다. 1960년대에는 서울에서 국악협주단을 조직하고, 1968년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박종선, 이생강, 김청만, 원장현 등을 제자로 길러냈다.
2. 생애
1946년을 전후해 정악기인 아쟁을 민속악기로 바꾸는 과정에서 정철호, 장월중선 등과 함께 《아쟁산조》[3], 《호적산조》를 발표하였다.
부인은 판소리 명창 남해성이며, 아들은 피리 연주자 한세현이다.
2. 1. 가계와 유년 시절
전라남도 화순(和順)에서 태어났다. 한일섭의 가계는 본래 국악인 가계로, 조부는 대금과 가야금의 명인이었던 한덕만(韓德萬, 1867~1934)이다. 부친 한경태는 한덕만의 장남[1]이며, 한일섭은 한경태의 막내 아들이다. 조부 한덕만 외에 한일섭의 일가로 국악계에 종사한 이가 많은데, 숙부는 일제시대의 판소리 명창 한성태(韓成泰, 1890-1931)이고, 사촌 형제들로는 한영호라는 예명의 창극배우로 활동했던 한갑순(韓甲順, ?~1946),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 예능보유자 한갑득(韓甲得, 1919-1987),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한승호(韓承鎬, 1923~2010)가 있다. 이 외에도 호남 명무 한진옥(韓振玉, 1911-1991), 광주무형문화재 제1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한애순(韓愛順, 1924~) 또한 먼 친척이다.
어려서부터 매부 성원목(成元睦, 1912~?)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는데, 목이 좋아서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2] 그러나 15~6세를 전후하여 변성기로 인해 목이 상하자 그 뒤로는 기악으로 전향하였다. 그 이후의 정확한 사승관계는 알 수 없으나 대금, 피리, 태평소, 가야금, 거문고 등 능하지 않은 악기가 없어 악기의 귀재로 통했으며, 또한 남도소리의 속을 잘 알아 남도 민속악의 귀신이라는 소리도 들은 바 있다.
2. 2. 변성기와 기악 전향
어려서부터 매부 성원목(成元睦, 1912~?)에게 판소리를 배웠는데, 목이 좋아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2] 그러나 15~16세 무렵 변성기로 인해 목이 상하자 기악으로 전향하였다. 그 이후 정확한 사승관계는 알 수 없으나 대금, 피리, 태평소, 가야금, 거문고 등 능하지 않은 악기가 없어 악기의 귀재로 통했으며, 남도소리의 속을 잘 알아 남도 민속악의 귀신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2. 3. 악사 활동과 창작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부 성원목(1912~?)에게 판소리를 배웠는데, 목이 좋아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2] 그러나 15~16세를 전후하여 변성기로 인해 목이 상하자 기악으로 전향하였다. 대금, 피리, 태평소, 가야금, 거문고 등 능하지 않은 악기가 없어 악기의 귀재로 통했으며, 남도소리의 속을 잘 알아 남도 민속악의 귀신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1947년 창극단 반주악사로 악사 생활을 시작하여 1958년 한때 여성국극단의 악사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주로 창극단 계통 단체의 전속 악사를 도맡아 하였다. 1960년대에는 서울에서 국악협주단을 조직하고 1968년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박종선, 이생강, 김청만, 원장현 등을 제자로 길러냈다.
1946년을 전후해 정악기인 아쟁의 민속악기화가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철호, 장월중선 등과 함께 《아쟁산조》[3], 《호적산조》를 발표하였다.
2.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한덕만 | 대금과 가야금의 명인 |
숙부 | 한성태 | 판소리 명창 |
사촌 형제 | 한갑순 | 예명 한영호, 창극배우 |
사촌 형제 | 한갑득 |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 예능보유자 |
사촌 형제 | 한승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
먼 친척 | 한진옥 | 호남 명무 |
먼 친척 | 한애순 | 광주무형문화재 제1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
부인 | 남해성 | 판소리 명창 |
아들 | 한세현 | 피리 연주자 |
[1]
한일섭의 예술 세계는 판소리, 신민요, 아쟁산조, 호적산조, 판소리 고수, 후학 양성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3. 예술 세계
3. 1. 판소리 기반
그의 집안은 본래 판소리와 관련된 집안이었다. 조부 한덕만은 가야금 산조와 병창에 일가를 이루었고, 작은아버지 한성태는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했다. 사촌 형제인 한갑순과 한승호, 먼 친척인 한애순까지 판소리 창자를 중심으로 가계가 넓게 분포했다. 그의 예술적 본령 역시 판소리에서 찾아야 하지만, 16세에 목이 상해 판소리 창작 활동을 시작하지 못해 관련 기록은 없다. 다만, 김채만, 공창식, 공대일 등 광주판 서편제 명창들이 화순에서 활동했고, 첫 스승인 성원목이 김채만의 제자로 서편제 판소리 명창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의 판소리는 서편제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1947년 악사 활동 이후 1958년 여성국극단의 악사장을 지내며 창작 창극과 국극을 많이 작곡했는데, 이때 사용된 곡들이 '신민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금강산타령, 동백타령, 신풍년가 등이 있으며, 이들 남도 신민요는 지금도 남도 민요 명창들에 의해 민요 소품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한일섭은 판소리 명고수로도 활동하며 박동진, 김연수 등 당대 명창들과 호흡을 맞췄다. 그의 북가락은 정확하고 가락이 화려하지 않아 고제 고법의 풍모가 있었으나, 다소 기계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1968년 박동진의 흥보가 5시간 완창 당시 고수로 참여해 5시간 동안 북을 쳤고, 창극 녹음에도 자주 참여했다. 박동진과 함께 지구레코드에서 녹음한 단가, 토막소리 녹음이 가장 유명하다.
3. 2. 신민요 작곡
한일섭은 1947년부터 악사로 활동하면서 1958년 여성국극단의 악사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창작 창극과 국극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때 사용된 곡들이 '신민요'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금강산타령, 동백타령, 신풍년가 등이 있다. 이 남도 신민요들은 현재도 남도 민요 명창들이 즐겨 부르는 곡들이다.
3. 3. 아쟁산조 창시
아쟁은 본래 정악기였으나 1940년대 이후 민속악기로 개량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정철호류, 장월중선류, 한일섭류 아쟁산조가 창시되었고, 한일섭은 장덕화의 반주로 녹음한 바 있다. 한일섭은 판소리의 허튼가락을 차용하여 아쟁산조의 가락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으며, 선율이 유장하고 격정적이기보다는 절절한 맛이 있어서 정철호류와는 차이를 보인다.
3. 4. 호적산조 작곡
호적, 즉 태평소는 본래 시나위나 행진 취주악 등에 많이 사용되었고, 그로 인하여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시나위, 능게가락 등 두 개에 불과하였다. 이를 산조 형식에 얹어 처음으로 작곡한 이가 바로 한일섭이다.[1] 이 이후로 무악에서의 태평소 연주를 기반으로 한 김석출의 호적 산조가 출현하기도 하는 등, 그의 호적산조 발표는 태평소 연주 레퍼토리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일이었다.[1]
3. 5. 판소리 고수 활동
그의 집안은 호남 계통으로, 판소리와 관련된 집안이었다. 조부 한덕만은 가야금 산조와 병창에 능했고, 작은아버지 한성태는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했다. 사촌 형제인 한갑순과 한승호, 먼 친척인 한애순까지 판소리 창자를 중심으로 가문이 넓게 퍼져 있었다. 16세에 목이 상해 판소리 창작 활동을 시작하지 못했지만, 김채만, 공창식, 공대일 등 광주판 서편제 명창들이 화순에서 활동했고, 첫 스승인 성원목 역시 김채만의 제자로 서편제 판소리 명창이었던 점을 볼 때, 그의 판소리는 서편제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1]
한일섭은 판소리 명고수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박동진, 김연수 등 당대 명창들과 자주 호흡을 맞췄다. 그의 북가락은 정확하고 고제 고법의 풍모가 있었으나, 다소 기계적으로 친다는 평가도 있었다. 1968년, 박동진의 흥보가 5시간 완창 당시 성경린과 함께 박동진을 지지하여 고수로 참여해 5시간 동안 북을 쳤으며, 창극 녹음에도 자주 참여했다. 박동진과 함께 지구레코드에서 녹음한 단가, 토막소리 녹음이 가장 유명하다.[1]
3. 6. 후학 양성
1960년부터 한일섭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 시기에 그에게서 배운 사람으로는 아쟁의 박대성, 박종선, 윤윤석, 관악기의 이생강, 아쟁과 고법의 김청만 등이 있다.[1] 박대성, 박종선, 윤윤석은 한일섭의 아쟁산조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산조를 만들었다. 특히 윤윤석은 무용음악에서 아쟁 반주로 유명했고, 박종선은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아쟁산조를 창시하였다.[1] 이생강은 한일섭 외에 한주환에게서 배운 가락을 다시 정리하여 이생강류 대금산조를 창시하였으며, 김청만은 한일섭에게서 아쟁과 북의 기초를 배우고 김동준에게서 북을 다시 배워 전업 고수로 활동하고 있다.[1]
참조
[1]
논문
한승호 명창의 판소리에 관한 연구
동국대
2010
[2]
기타
변강쇠타령 완창공연 실황
1990-07-28
[3]
백과사전
한일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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