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웰린 바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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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웰린 바우르는 1173년경 태어난 기네드의 왕자이자, 1199년부터 1240년까지 기네드를 통치한 웨일스의 지배자이다. 그는 초기 생애 동안 삼촌들과의 권력 투쟁을 거쳐 기네드의 지배권을 장악했으며, 1199년에는 "북 웨일스 전체의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 존과의 관계 악화로 위기를 겪었으나, 다른 웨일스 공작들과의 연합을 통해 지위를 회복하고 웨일스 내 패권을 확립했다. 1205년 잉글랜드 왕 존의 사생녀 조안과 결혼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말년에는 아들 다비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법을 개정하여 왕위 계승을 시도했다. 리웰린은 웨일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는 웨일스 문화와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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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웰린 바우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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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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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Llywelyn Fawr (류엘린 바우르) |
라틴어 표기 | Leolinus Magnus |
출생 장소 | Dolwyddelan |
사망일 | 1240년 4월 11일 |
사망 장소 | Aberconwy Abbey |
안장 장소 | Aberconwy Abbey |
통치 정보 | |
직위 | 귀네드의 왕 아버프라우의 왕자 스노든의 영주 |
통치 기간 | 1195년 – 1240년 |
이전 통치자 | Dafydd ab Owain Gwynedd |
후임 통치자 | Dafydd ap Llywelyn |
가문 | |
가문 | 아버프라우 가문 |
아버지 | Iorwerth Drwyndwn |
어머니 | Marared ferch Madog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Joan, Lady of Wales |
자녀 | Dafydd ap Llywelyn Gruffudd ap Llywelyn Elen ferch Llywelyn Gwladus Ddu Marared ferch Llywelyn Angharad ferch Llywelyn Susanna ferch Llywelyn Tegwared ap Llywelyn |
2.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1173년 ~ 1199년)
리웰린 압 이오르워스는 오와인 기네드의 손자로, 분열된 기네드 왕국에서 태어나 교회법상 정통성 있는 계승자로 여겨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인 다피드 및 로드리와의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며 성장했다. 1190년대에 이르러 리웰린은 사촌들의 도움을 받아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기네드 내에서 점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고, 웨일스 전체의 주요 정치적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3] 1199년에는 몰드 성을 점령하고 스스로 "북 웨일스 전체의 공작"(tocius norwallie princeps|토키우스 노르왈리에 프린켑스la)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2. 1. 출생과 가계

리웰린은 약 1173년경 이오르워르트 드루이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170년 사망할 때까지 기네드의 통치자였던 오와인 기네드이다. 리웰린은 돌위델란의 왕실 영지인 난트콘위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돌위델란 성은 리웰린 자신이 건설했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계곡 바닥의 바위 언덕에 위치한 오래된 성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아버지 이오르워르트 드루이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리웰린이 어렸을 때 사망했다. 이오르워르트는 오와인 기네드가 사망한 후 아들들 사이의 권력 다툼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살아남은 맏아들이었다. 어떤 전통에 따르면 그는 신체적 장애나 기형 때문에 권력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존 에드워드 로이드는 이오르워르트가 아버지 오와인 기네드의 사망 이후 계승권을 결정하는 전쟁 중 1174년 파워스의 성 멜란겔 교회 근처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2]
1175년까지 기네드는 리웰린의 두 삼촌에게 분할되었다. 다피드 압 오와인 기네드는 콘위강 동쪽 지역을, 로드리 압 오와인 기네드는 서쪽 지역을 차지했다. 다피드와 로드리는 오와인이 크리스틴 베르치 고론위와의 두 번째 결혼을 통해 얻은 아들들이었다. 이 결혼은 크리스틴이 오와인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교회법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연대기 작가 웨일스의 제럴드는 이오르워르트 드루이눈을 오와인 기네드의 유일한 적자라고 언급한다.[3] 이오르워르트가 사망한 후, 리웰린은 적어도 교회의 눈에는 기네드 왕위의 합법적인 계승자였다.[3]
리웰린의 어머니는 파워스의 왕자 마도그 압 마레두드의 딸인 마레레드(때로는 마가렛으로 영어화됨)였다. 이오르워르트가 사망한 후 마레레드는 슈롭셔의 코르베트 가문에 속한 코 성의 영주와 결혼했으며, 리웰린이 어린 시절의 일부를 그곳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리웰린 압 이오르워르트가 위그모어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한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리웰린은 그의 어머니가 코르베트 가문의 일원임을 나타낸다.
2. 2. 기네드 왕국 내 권력 투쟁
1188년 웨일스를 여행했던 제럴드 오브 웨일스는 그의 기록에서 젊은 리웰린이 이미 그의 삼촌인 다피드 압 오와인과 로드리 압 오와인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제럴드는 오와인 기네드의 아들 중 적자는 이오르워스 드루윈둔 한 명뿐이었으며, 그의 아들인 리웰린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삼촌들에게 도전했다고 기록했다. 제럴드에 따르면, 리웰린의 삼촌들은 코난(Conan)의 땅을 제외한 북웨일스 전체를 나누어 가졌고, 특히 다피드는 헨리 2세 국왕의 누이와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리웰린은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삼촌들을 북웨일스에서 몰아냈다.[3]
1194년, 리웰린은 그의 사촌인 그루피드 압 키난 압 오와인 기네드와 마레두드 압 키난 압 오와인 기네드의 도움을 받아 아버콘위 전투에서 삼촌 다피드를 결정적으로 물리쳤다. 이듬해인 1195년에 다른 삼촌 로드리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인 콘위 서쪽 땅은 그루피드와 마레두드가 차지했으며, 리웰린은 콘위 동쪽에서 다피드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통치했다.
리웰린은 1197년에 다피드를 사로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1년 후,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는 리웰린을 설득하여 다피드를 석방하도록 했고, 다피드는 잉글랜드로 은퇴하여 1203년 5월에 사망했다.
한편, 웨일스는 웨일스 공작이 통치하는 지역인 ''Pura Wallia''와 앵글로-노르만족 남작들이 통치하는 Marchia Wallia로 나뉘어 있었다. 1170년 오와인 기네드가 사망한 후, 남부 왕국 데헤우바르트의 리스 압 그루피드가 웨일스 왕국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며 ''Pura Wallia''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리스가 1197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데헤우바르트 왕국은 분열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포위스 웬윈윈의 군주 그웬윈윈 압 오와인이 웨일스 공작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1198년, 그웬윈윈은 앵글로-노르만족 남작 브램버 4대 영주 윌리엄 드 브라우스가 지키던 페인스캐슬 성을 포위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 리웰린도 그웬윈윈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8월에 그웬윈윈의 군대는 정무관 에식스 백작 제프리 피츠 피터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했다.
그웬윈윈의 패배는 역설적으로 리웰린에게 웨일스의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제공했다. 1199년, 리웰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몰드 성을 점령했으며, 이때부터 분명히 "북 웨일스 전체의 공작"(tocius norwallie princeps|토키우스 노르왈리에 프린켑스la)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사촌 그루피드 압 키난이 잉글랜드의 존 왕에게 기네드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리웰린이 1199년에 실제로 기네드 전체를 완전히 통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3. 기네드의 통치자 (1199년 ~ 1240년)
허웰린 바우르는 1199년 이후 기네드의 통치자로서 그의 긴 치세 동안 웨일스에서의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해 나갔다. 초기에는 잉글랜드의 존 왕과 조약을 맺어(1201년)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으나, 점차 잉글랜드와의 관계는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1211년 존 왕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영토 대부분을 잃는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허웰린은 뛰어난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존 왕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다른 웨일스 공작들과 연합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외교적 지원까지 얻어내며 잃었던 영토를 빠르게 회복했다. 1215년에는 잉글랜드 남작들의 마그나 카르타 요구 당시 웨일스에 유리한 조항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1216년 아버디피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웨일스의 여러 공작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내며 사실상 웨일스 전체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존 왕 사후, 그의 아들 헨리 3세와 1218년 우스터 조약을 체결하여 자신이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변방 영주들과의 간헐적인 충돌은 있었지만, 허웰린은 조안, 웨일스 여공작과의 결혼을 비롯해 여러 유력 가문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했으며, 크리키에스 성, 돌바다른 성 등 다수의 석조 성을 건설하여 기네드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 1230년 아내 조안과 윌리엄 드 브라오스 사이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잠시 정치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를 수습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1234년 미들 평화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사망할 때까지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의 통치 아래 기네드는 웨일스의 중심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허웰린 자신은 웨일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 1. 세력 강화 (1200년 ~ 1209년)

그루피드 압 키난 압 오와인 궈네스가 1200년에 사망하면서, 리웰린은 궈네드의 확실한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1201년, 그는 반역 혐의를 들어 마레두드 압 키난에게서 에이피오니드와 린 반도를 빼앗았다. 같은 해 7월, 리웰린은 잉글랜드의 존 왕과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잉글랜드 왕과 웨일스 통치자 사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면 합의로 기록된다. 이 조약에 따라 리웰린은 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경의를 표하는 대신, 자신이 정복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고 관련 분쟁은 웨일스 법에 따라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리웰린은 1202년 8월, 웨일스 내 주요 경쟁자였던 포위스의 그웬윈윈 압 오와인 키베일리오그를 공격하며 처음으로 궈네드 경계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개입하여 평화를 중재하면서 침공은 중단되었다. 한편, 펜린의 영주 엘리스 압 마도그가 리웰린의 군사 소집에 응하지 않자, 리웰린은 처벌의 의미로 그의 땅 대부분을 빼앗았다.
1205년, 리웰린은 존 왕의 사생아인 조안, 웨일스 여공작과 결혼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이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자신의 삼촌 로드리 압 오와인 궈네스의 미망인이자 아일랜드의 로그날드 구드뢰다르손 왕의 딸과 결혼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으나, 조안과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이 계획은 철회되었다.
1208년, 포위스의 그웬윈윈이 존 왕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존 왕은 10월에 그를 슈루즈버리로 소환하여 체포하고 그의 땅을 몰수했다. 리웰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부 포위스와 북부 케레디기온을 차지했으며, 아베리스트위스 성을 재건했다. 1209년 여름에는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1세 왕을 상대로 한 존 왕의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
3. 2. 위기와 회복 (1210년 ~ 1217년)

1210년, 허웰린과 존 왕 사이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는 허웰린이 존 왕과 사이가 틀어져 영지를 몰수당한 브라오즈의 4대 영주 윌리엄 드 브라오즈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일 수 있다. 존 왕이 아일랜드에서 드 브라오즈와 그의 동맹 세력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이는 동안, 체스터의 6대 백작 란눌프 드 블론데빌과 윈체스터 주교 피터 데 로셰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기네드를 침공했다. 허웰린은 데간위에 있던 자신의 성을 파괴하고 콘위 강 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체스터 백작은 데간위를 재건했고, 허웰린은 백작의 영지를 공격하며 보복했다. 존 왕은 구에윈윈 압 오와인을 남부 포위스의 통치자로 복귀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1211년, 존 왕은 다른 모든 웨일스 공작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직접 기네드를 침공했다. 그의 목표는 ''브루트 어 티위소기온''의 기록에 따르면 "허웰린을 몰아내고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침공은 격퇴되었으나, 그해 8월 존 왕은 더 큰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침공하여 콘위 강을 건너 스노도니아 산악 지대까지 진격했다. 뱅고어는 왕의 군대에 의해 불탔고, 뱅고어 주교는 사로잡혔다. 궁지에 몰린 허웰린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아내이자 존 왕의 딸인 웨일스의 조안을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조안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남편이 완전히 축출되는 것은 막았지만, 허웰린은 콘위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잉글랜드에 넘겨야 했다.[4] 또한 막대한 양의 가축과 말을 조공으로 바치고, 사생아 아들인 그리퍼드 압 허웰린을 포함한 인질들을 보내야 했다. 더 나아가 조안과의 사이에서 적법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모든 영토가 존 왕에게 귀속된다는 굴욕적인 조건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허웰린 통치 기간 중 가장 큰 위기였으나, 그는 곧 상황을 반전시키고 자신의 지위를 회복했다. 허웰린에 맞서 존 왕을 지지했던 다른 웨일스 공작들은 곧 존 왕의 통치에 환멸을 느끼고 입장을 바꾸었다. 허웰린은 포위스의 구에윈윈, 데이허바르스의 두 주요 통치자인 마엘건 압 리스와 리스 그리그와 동맹을 맺고 존 왕에게 공동으로 대항했다. 이들은 존 왕과 오랫동안 갈등하며 그의 왕국에 성무 금지를 내렸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지지를 얻었다. 교황은 허웰린, 구에윈윈, 마엘건에게 존 왕에 대한 모든 충성 맹세를 파기하도록 허락하고, 그들이 통치하는 지역의 성무 금지를 해제했다. 허웰린은 1212년 두 달 만에 데간위 성과 러들런 성을 제외한 기네드 전역을 되찾았다.
존 왕은 1212년 8월, 기네드에 대한 또 다른 침공을 계획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가 전년에 인질로 잡았던 웨일스인 일부를 교수형에 처하려 할 때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하나는 그의 딸이자 허웰린의 아내인 조안에게서,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1세에게서 온 것이었다. 두 편지 모두 비슷한 내용으로, 만약 존 왕이 웨일스를 침공한다면 그의 휘하 영주들이 그를 살해하거나 적에게 넘길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침공은 중단되었고, 1213년 허웰린은 데간위 성과 러들런 성마저 점령했다. 허웰린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후 존 왕에게 반기를 든 잉글랜드 남작들과도 손을 잡고 1215년 저항 없이 슈루즈베리를 점령했다. 존 왕이 남작들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을 때, 허웰린은 웨일스와 관련된 여러 유리한 조항들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1211년부터 인질로 잡혀 있던 아들 그리퍼드도 돌려받았다. 같은 해 에드니페드 파찬이 기네드의 세네셜(최고 행정관)로 임명되어 허웰린의 통치 기간 동안 긴밀하게 협력하며 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5]
허웰린은 이제 웨일스의 독립 공작들을 이끄는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215년 12월, 그는 모든 하위 공작들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남부 웨일스로 진격하여 카마던, 키드웰리, 란스테판, 카디건, 킬게런 성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의 높아진 위상은 그해 공석이 된 두 주교 자리에 웨일스인을 임명하도록 관철시킨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오워스를 성 데이비드 주교로, 란디파이의 카드완을 뱅고어 주교로 임명한 것이다.
1216년, 허웰린은 아버디피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하위 공작들 간의 영토 분쟁을 직접 중재했으며, 이 자리에서 공작들은 허웰린에게 경의를 표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역사학자 J. 베벌리 스미스는 이를 두고 "군사 동맹의 지도자는 군주의 역할을 맡았고, 그의 이전 동맹들은 이제 그의 가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6] 그러나 포위스의 구에윈윈은 그해 다시 입장을 바꿔 존 왕과 동맹을 맺었다. 허웰린은 즉시 다른 공작들을 동원하여 구에윈윈을 공격했고, 결국 그를 남부 포위스에서 다시 몰아냈다. 구에윈윈은 그해 잉글랜드에서 사망했고, 미성년 상속자를 남겼다. 존 왕 또한 같은 해 사망했으며, 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잉글랜드는 섭정 통치 체제에 들어갔다.
1217년, 허웰린과 동맹을 맺고 그의 딸 과들라두스 두와 결혼했던 브레콘과 아버가베니의 영주 레지날드 드 브라오즈가 잉글랜드 왕실의 회유에 넘어가 배신했다. 허웰린은 즉시 그의 영지를 침공하는 것으로 응징했다. 먼저 브레콘을 위협하자, 도시 주민들은 인질을 제공하며 100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다음으로 스완지로 향하자 레지날드 드 브라오즈가 직접 나와 항복하고 도시를 넘겨주었다. 허웰린은 서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하버퍼드웨스트를 위협했고, 그곳 주민들 역시 그의 통치에 복종하거나 1,000마르크의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하며 인질을 바쳤다.
3. 3. 웨일스 내 패권 확립 (1218년 ~ 1229년)
존 왕이 사망한 후, 르웰린은 1218년 그의 후계자인 헨리 3세와 우스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르웰린은 최근 정복한 모든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르웰린은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였으나, 변방 영주, 특히 마셜 가문과 휴버트 드 버그, 그리고 때로는 잉글랜드 국왕과의 충돌이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르웰린은 여러 변방 영주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으며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그의 딸 글라두스 두(검은 글라두스)는 이미 브레콘과 아버게니의 레지날드 드 브라오스와 결혼했지만, 레지날드가 불안정한 동맹이었기에 르웰린은 다른 딸 마레레드를 레지날드의 조카인 거워의 존 드 브라오스와 결혼시켰다. 또한,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블론데빌과도 동맹을 맺었는데, 그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존 오브 스코틀랜드, 헌팅던 백작이 1222년경 르웰린의 딸 엘렌 페르치 르웰린과 결혼했다. 1228년 레지날드 드 브라오스가 사망한 후, 르웰린은 글라두스 두가 랠프 드 모티머와 재혼하면서 강력한 위그모어의 로저 모티머와도 동맹 관계를 맺었다.
르웰린은 잉글랜드 국왕이나 변방 영주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 신중하게 행동했다. 예를 들어, 1220년에는 리스 그리그에게 사우스 웨일스의 4개 코뮤트를 이전 앵글로-노르만 소유주에게 돌려주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그는 국경 방어를 위해 여러 성을 건설했는데, 대부분 1220년에서 123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들은 웨일스 최초의 정교한 석조 성들로, 크리키에스 성, 데간위 성, 돌바다른 성, 돌윌델란 성, 카스텔 이 베레 등이 대표적이다. 르웰린은 또한 교역 중심지 역할을 하도록 귀네드의 준 도시 정착촌 개발을 장려한 것으로 보인다.[7]
1220년,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과 적대 관계가 발생했다. 르웰린은 나버스 성과 위스턴 성을 파괴하고 해버포드웨스트 마을을 불태웠으며 펨브로크 성을 위협했으나, 마셜로부터 100GBP를 받고 공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1223년 초, 르웰린은 슈롭셔 국경을 넘어 키너리와 휘팅턴 성을 점령했다. 이에 마셜은 아일랜드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4월에 세인트 데이비드 근처에 상륙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카디건과 카마던을 탈환했다. 마셜의 군사 작전은 몽고메리를 점령한 왕실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르웰린은 그해 10월 몽고메리에서 헨리 3세와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사우스 웨일스에 있는 르웰린의 동맹국들은 마셜에게 빼앗긴 땅을 돌려받았고, 르웰린 자신은 슈롭셔에서 점령했던 영토를 포기했다.
1228년, 르웰린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치안 판사이자 당시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였던 휴버트 드 버그에 맞서 군사 작전을 벌였다. 휴버트는 국왕으로부터 몽고메리의 영지와 성을 하사받은 뒤, 인근에 있는 르웰린의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휴버트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휴버트는 세리(Ceri) 코뮤트에 또 다른 성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10월, 왕실 군대는 르웰린의 반격에 밀려 후퇴해야 했고, 헨리 3세는 르웰린에게 2000GBP를 받는 대가로 반쯤 지어진 성을 파괴하는 데 동의했다. 르웰린은 이 비용을 전투 중 포로로 잡은 아버게니 영주 윌리엄 드 브라오스의 몸값과 같은 금액을 요구하여 마련했다.
3. 4. 결혼 생활의 문제 (1230년)
윌리엄 드 브로즈는 체포된 후 리웰린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그의 딸 이사벨라와 리웰린의 아들인 다비드 압 리웰린 사이의 결혼이 추진되었다. 1230년 부활절, 윌리엄은 리웰린의 궁정을 방문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리웰린의 아내 조안과 함께 리웰린의 침실에서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의 결과로 1230년 5월 2일, 윌리엄 드 브로즈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조안은 1년 동안 가택 연금되었다. 당시 연대기인 ''브루트 어 티위소기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해 아버가베니 영주인 윌리엄 드 브로즈 더 영거가 리웰린의 침실에서 잉글랜드 왕의 딸이자 리웰린의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발각된 후 리웰린에 의해 기네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 직후, 리웰린은 윌리엄의 아내 에바 마샬에게 편지를 보내 다비드와 이사벨라 사이의 결혼을 여전히 원하는지 물었다. 결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며, 다음 해 조안은 용서받고 공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3. 5. 마지막 군사 활동과 미들 평화 조약 (1231년 ~ 1240년)
1231년에 추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리웰린은 휴버트 드 버그의 커져가는 권력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의 병사 중 일부가 몽고메리 주둔군에게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자, 리웰린은 이에 대응하여 몽고메리, 뉴 래드너, 헤이, 브레콘을 불태웠다. 이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니쓰와 키드웰리 성을 점령하고, 카디건 성을 되찾으며 군사 작전을 마무리했다. 헨리 3세는 침략을 시도하여 페인스캐슬에 새로운 성을 지으려 했지만, 웨일스 깊숙이 들어오는 데는 실패했다.협상은 1232년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휴버트 드 버그는 해임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의 권력 대부분은 남부 웨일스의 여러 성에 대한 통제권을 포함하여 피터 드 리보에게 넘어갔다. 한편, 1231년에 사망한 윌리엄 마셜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 리처드가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다. 1233년, 리처드 마셜과 국왕의 지지를 받던 피터 드 리보 사이에 적대감이 커지면서 충돌이 발생했다. 리웰린은 리처드 마셜과 동맹을 맺었고, 1234년 1월에는 리처드와 함께 슈루즈버리를 점령했다. 리처드는 그해 4월 아일랜드에서 사망했지만, 국왕 헨리 3세는 반군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결정했다. 6월 21일에 체결된 미들 평화 조약은 리웰린과 2년간의 휴전을 약속했으며, 리웰린이 카디건과 빌스를 계속 소유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 휴전은 리웰린이 통치하는 동안 해마다 갱신되었다.
4. 후계 구도와 죽음 (1237년 ~ 1240년)
리웰린은 말년에 자신의 유일한 적자인 다비드 압 리웰린이 기네스 왕국의 통치권을 계승하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기존의 웨일스 법 관습에서 벗어나 적자를 우선시하는 변화였으며, 이 과정에서 서자인 그리피드는 후계 구도에서 제외되었다.[8][9] 리웰린은 다비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인정을 확보하고 웨일스 내부 군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1237년 아내 조안이 사망한 해, 리웰린 역시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증세를 보이며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후계자인 다비드가 점차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리웰린은 1240년 4월 11일, 자신이 세운 시토회 수도원인 아베르코니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다비드가 기네스의 통치권을 계승했다.
4. 1. 다비드 압 리웰린의 후계자 지명
말년의 리웰린은 외아들이자 적자인 다비드가 자신의 뒤를 이어 기네스의 통치자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기네스에서 시행되던 웨일스 법을 수정했다.[8] 리웰린은 교회가 인정한 결혼에서 태어난 적자를 후계자로 선호하도록 웨일스 법을 개정했는데, 이는 데헤이버스의 군주였던 리스 대공이 적자인 마엘군 압 리스 대신 그리피드 압 리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과 유사한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생아라는 불리함을 없애 아들들이 더 넓은 앵글로-노르만 정치 체제 및 가톨릭 교회와 더 나은 관계를 맺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다비드의 형이지만 사생아였던 그리피드는 리웰린의 주요 상속자에서 제외되었으나, 통치할 영토는 받게 되었다. 이는 부모의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장남이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기존 웨일스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9]리웰린은 다비드의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국내외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1220년: 어린 헨리 3세 국왕의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다비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 1222년: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다비드의 계승을 확정해 달라고 청원했다. 교황은 답변에서 "그의 땅에서 시녀의 아들이 자유로운 여인의 아들과 동등한 상속자가 되고, 사생아가 적자와 같이 상속을 얻는 혐오스러운 관습"에 대해 언급하며, 리웰린이 이 관습을 폐지하는 것을 환영했다.
- 1226년: 교황을 설득하여 아내 조안을 존 왕의 적녀이자 다비드의 어머니로 선언하게 하여 다비드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 1229년: 잉글랜드 왕실은 다비드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아들였다.
- 1238년: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서 회의를 열어 다른 웨일스 군주들이 다비드에게 봉건적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리웰린은 본래 군주들이 다비드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원했으나,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다른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금지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이는 무산되었다.
- 결혼 정책: 리웰린은 아들 다비드를 윌리엄 드 브라오즈의 장녀인 이사벨라 드 브라오즈와 결혼시켰다. 윌리엄 드 브라오즈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리웰린은 다비드와 이사벨라 사이의 후손이 남웨일스에 있는 광대한 드 브라오즈 영지를 상속받도록 계획했다.
한편,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서자 그리피드는 메이리오니드와 아르디뒤 지역을 분봉받았으나, 그의 통치가 압제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1221년 리웰린에 의해 영지에서 쫓겨났다. 1228년에는 투옥되었다가 1234년에야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린 반도의 일부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번에는 그의 통치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1238년까지 그는 린 반도의 나머지 지역과 포위스의 상당 부분을 영지로 받았다.
4. 2. 리웰린 대왕의 죽음과 유산

1237년 조안이 사망한 해, 리웰린 역시 뇌졸중으로 추정되는 증세를 겪었다. 이때부터 후계자인 다비드가 점차 왕국의 통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다비드는 리웰린이 이복 형제 그리피드에게 부여했던 영지를 빼앗았고, 이후 그리피드와 그의 장남 오와인을 크리키에스 성에 감금했다.
1240년, ''브루트 어 티위소기온'' 연대기는 "웨일스 공, 오와인 기네드의 아들, 두 번째 아킬레우스인 리웰린 압 요르베르트 경이 아베르코니에서 종교적 서약을 하고 명예롭게 묻혔다"고 기록했다. 리웰린은 자신이 세운 시토회 수도원인 아베르코니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안장되었다. 이 수도원은 후에 마에난으로 이전하여 마에난 수도원이 되었으며, 리웰린의 석관은 현재 란루스트 근처의 세인트 그루스트 교회, 란루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인 에이니온 완은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진정한 땅의 군주 – 오늘날 얼마나 이상한가
그는 기네드를 다스리지 못하네;
그의 무덤에 쌓인 돌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군주,
그가 누워있는 7피트 깊이의 무덤.
리웰린의 뒤를 이어 다비드가 기네드의 공작이 되었으나, 잉글랜드의 헨리 왕은 다비드가 아버지의 지위를 웨일스 전역으로 확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비드는 자신의 권력을 크게 제한하는 조약을 강요받았으며, 이복 형제 그리피드를 헨리 왕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헨리 왕은 그리피드를 다비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리피드는 1244년 런던 타워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다비드에게는 잠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으나, 그 역시 1246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결국 리웰린의 유산은 조카이자 그리피드의 아들인 리웰린 압 그리피드에게 계승되었다.
5. 역사적 평가
리웰린은 40년 이상 웨일스를 지배했으며, 그의 조상인 로드리 마워(로드리 더 그레이트)와 함께 "위대한 자"라고 불린 두 명의 웨일스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리웰린에게 "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그의 거의 동시대인이었던 영국의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였던 것으로 보인다.[10]
존 에드워드 로이드는 리웰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앵글로-노르만 세력에 맞서 싸운 지도자들 중에서 그는 모든 이들 중 최고는 아니더라도 항상 높은 자리에 위치할 것이며, 이는 웨일스 민족의 고유한 힘을 적절한 국가적 목적을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현명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의 애국적인 정치력은 항상 그에게 리웰린 더 그레이트라는 칭호를 사용할 자격을 부여할 것이다."
데이비드 무어는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 "리웰린이 1240년에 사망했을 때, 그의 웨일스 '프린키파투스'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비록 그는 웨일스를 지배하고, 전례 없는 복종을 강요했으며, 기네스의 왕자의 지위를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렸지만, 그의 세 가지 주요 야망 – 영구적인 패권, 왕의 인정, 그리고 그의 상속자에 의한 전체 상속 –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지배는 그루피드 압 리웰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지 개인적인 성격이었으며, 그의 생전이나 사후에 이를 유지할 제도적 틀이 없었다."
6. 가족 관계
르웰린의 아버지는 이오르워르트 드루이눈이며, 할아버지는 1170년까지 기네드의 통치자였던 오와인 기네드이다. 아버지 이오르워르트 드루이눈은 오와인 기네드의 유일한 적자로 알려져 있으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계승에서 제외되었다는 설이 있다.[3] 그는 르웰린이 어릴 때 사망했다.[2] 르웰린의 어머니는 포위스의 왕자 마도그 압 마레두드의 딸인 마레레드(Margaret)이다. 이오르워르트 사후 마레레드는 슈롭셔의 코르베트 가문 사람과 재혼했으며, 르웰린은 어린 시절의 일부를 그곳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르웰린은 1205년 잉글랜드 존 왕의 사생녀인 조안(Joan)과 결혼했다. 조안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은 존 왕 생전에 완전히 인정받았다. 르웰린에게는 탕귀스틀 고흐(Tangwystl Goch)라는 첩도 있었는데, 그녀는 '고흐' 르웰라르치의 딸이었으며, 이 관계는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11] 조안이 사망한 후, 르웰린은 풀크 피츠와린의 딸인 에바(Eva)와 결혼했다.
르웰린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조안과의 자녀:'''[11]
- 다피드 압 르웰린 (c. 1212–1246): 이사벨라 드 브로스와 결혼했다.
- 그왈라두스 두 (Gwladus Ddu, 1206–1251): 첫 번째로 레지날드 드 브로스와 결혼했고, 두 번째로 랄프 드 모티머와 결혼하여 로저 모티머, 위그모어의 초대 남작 등을 낳았다.
- 엘렌 페르치 르웰린 (Elen ferch Llywelyn, 1207–1253): 첫 번째로 헌팅던의 존과 결혼했고, 두 번째로 로버트 2세 드 퀸시와 결혼했다.
- 수산나 페르치 르웰린 (Susanna ferch Llywelyn): 1228년 11월 이후 사망.[11]
- 마레라드 페르치 르웰린 (Marared/Margaret ferch Llywelyn, 1268년 이후 사망): 1219년 존 드 브로스와 결혼하여[11] 자녀를 두었고,[13] 두 번째로 (c. 1232) 월터 3세 드 클리포드와 결혼했다.
- 엘렌 (어린) 페르치 르웰린 (Elen the Younger ferch Llywelyn, 1230년 이전 출생; 1295년 2월 16일 이후 사망): 마 백작부인. 첫 번째로 파이프 백작 마엘 콜루임 2세와 결혼했고, 두 번째로 (1266년 이후) 마 백작 돔날 1세와 결혼했다. 그녀의 딸 마의 이사벨라는 로버트 1세 브루스와 결혼하여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2세의 어머니인 마조리 브루스를 낳았다.
'''탕귀스틀 고흐(Tangwystl Goch)와의 자녀:'''
- 그루피드 압 르웰린 압 이오르워르스 (Gruffydd ap Llywelyn Fawr, c. 1196–1244): 르웰린의 장남. 앵글시의 카라독 압 토마스의 딸 세네나(Senana)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로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웨일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르웰린 압 그루피드와 잠시 기네드를 통치했던 다피드 압 그루피드가 있다.
- 웬릴리언 페르치 르웰린 (Gwenllian ferch Llywelyn): 미스 경의 윌리엄 드 레이시와 결혼했다.[14]
'''부모가 불확실한 자녀:'''
- 앙하라드 페르치 르웰린 (Angharad ferch Llywelyn, c. 1212–1256): 조안의 딸일 가능성이 높으며, 마엘건 피찬과 결혼했다.
- 테그와레드 이 바이스 웬 압 르웰린 (Tegwared y Bais Wen ap Llywelyn, c. 1215): 일부 기록에는 크리스텐(Crysten)이라는 여성의 아들이며, 앙하라드의 쌍둥이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15][16]
아래는 12세기 후반 르웰린 대왕의 출생부터 14세기 후반 그위네드 가문의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그의 직계 후손 가계도이다.
1세대 | 2세대 | 3세대 | 4세대 | 5세대 |
---|---|---|---|---|
르웰린 대왕 (c. 1173–1240) | 그루피드 압 르웰린 (c. 1200–1244) | 오와인 고흐 (d. 1282) | ||
르웰린 압 그루피드 (c. 1223–1282) | 웬리안 (1282–1337) | |||
(후계 단절) | ||||
다비드 압 그루피드 (1238–1283) | 르웰린 압 다비드 (1267–1287) | |||
오와인 압 다비드 (1275–1325) | ||||
로드리 압 그루피드 (c. 1230–1315) | 토마스 압 로드리 (c. 1300–1363) | 오와인 라우고흐 (c. 1330–1378) | ||
(후계 단절) | ||||
다비드 압 르웰린 (c. 1212–1246) | (자녀 없음) |
7. 문화적 영향
리웰린은 40년 이상 웨일스를 지배했으며, 그의 조상인 로드리 대왕과 함께 "위대한 자"(Fawr|파우르cy)라는 칭호를 받은 단 두 명의 웨일스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리웰린에게 "위대한 자"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그의 거의 동시대인이었던 영국의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였던 것으로 보인다.[10]
웨일스의 저명한 역사가 존 에드워드 로이드는 리웰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앵글로-노르만 세력에 맞서 싸운 지도자들 중에서 그는 모든 이들 중 최고는 아니더라도 항상 높은 자리에 위치할 것이며, 이는 웨일스 민족의 고유한 힘을 적절한 국가적 목적을 위해 그 어떤 사람보다 더 훌륭하고 현명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의 애국적인 정치력은 항상 그에게 리웰린 더 그레이트라는 칭호를 사용할 자격을 부여할 것이다."
반면, 데이비드 무어와 같은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무어는 리웰린이 웨일스를 지배하고 기네스 왕자의 지위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개인적인 역량에 크게 의존했으며 제도적 기반이 취약했다고 지적한다. 즉, 영구적인 패권 확립, 잉글랜드 왕의 공식적인 인정, 그리고 그의 후계자에게 온전한 영토를 물려주는 것과 같은 그의 주요 목표들은 결국 달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지배력은 그루피드 압 리웰린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틀이 부족하여 그의 사후 통일 웨일스는 유지되지 못했다.
리웰린의 시대에는 킨델루 브리디드 마우르, 다비드 벤프라스, 리워치 압 리워린 (별칭 '프리디드 어 모크'로 더 잘 알려짐)과 같은 뛰어난 웨일스 시인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은 리웰린에게 여러 찬양 시를 헌정했다. 하지만 이 시들 중 영어 등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리웰린은 현대 웨일스 문학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다. 사운더스 루이스의 유명 희곡 《시완》(1956)은 리웰린의 아내 조안이 윌리엄 드 브로스와 함께 침실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리웰린이 드 브로스를 처형하는 사건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토마스 패리 역시 Llywelyn Fawr|리웰린 파우르cy라는 제목의 희곡을 통해 리웰린의 삶을 조명했다.
리웰린은 여러 영어 소설에서도 주요 인물 또는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 레이먼드 폭스(Raymond Foxall)의 《왕자를 위한 노래: 리웰린 대왕 이야기》(Song for a Prince: The Story of Llywelyn the Great, 1959)는 1211년 존 왕의 침공부터 윌리엄 드 브로스의 처형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 샤론 케이 펜먼의 소설 《Here Be Dragons》(1985)는 리웰린과 조안의 결혼 생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같은 작가의 《용의 굴》(Dragon's Lair, 2003)은 리웰린이 권력을 잡기 전 젊은 시절을, 《그림자가 드리우다》(Falls the Shadow, 1988) 역시 리웰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 에디스 파제터의 "천국의 나무 삼부작"(The Heaven Tree Trilogy, 1960–1963)은 리웰린, 조안, 윌리엄 드 브로스, 그리고 리웰린의 여러 아들들을 주요 등장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 가이우스 데메트리우스(Gaius Demetrius)의 《독수리의 비상》(Ascent of an Eagle, 2006)은 리웰린 통치 초기를 배경으로 한다.
리웰린이 아끼던 충실한 사냥개 젤러트를 실수로 죽였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진다. 오늘날 "젤러트의 무덤"은 베드젤러트 마을의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지만, 이는 18세기경 지역의 한 여관 주인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이야기 자체는 브라만과 몽구스 설화와 같이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흔한 민담 유형의 변형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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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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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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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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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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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sg Carreg Gwalch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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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1846
[6]
서적
Llywelyn ap Gruffudd: Prince of Wales
University of Wales Press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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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guin Books
[8]
서적
A history of Wales: from the Norman invasion to the Edwardian conquest
Barnes & Noble
[9]
서적
The Ancient Laws of Wales
google book
[10]
서적
Chronica Majora
[11]
서적
JOAN (SIWAN) (died 1237), princess and diplomat
[1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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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ortimer[...]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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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LACY (DE) – lords of Ewyas, Weobley and Ludlow.
[15]
서적
Welsh Genealogies, A.D. 300–1400
University of Wales Press
[16]
서적
Burke's Peerage, Baronetage & Knightage, 107th ed., 3 vol.
Genealogical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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