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와인 글린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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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와인 글린두르(Owain Glyndŵr)는 1354년(또는 1359년) 웨일스 북동부에서 태어난 앵글로-웨일스 젠트리 가문의 인물이다. 그는 파위스, 데헤우바스, 그위네드 왕국의 후손이었으며, 1400년 헨리 4세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켜 웨일스 공을 자칭했다. 봉기는 초기에 성공했으나, 잉글랜드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글린두르는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1415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며, 웨일스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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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인 글린두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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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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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와인 아프 그리피드 |
웨일스어 이름 | Owain Glyndŵr |
로마자 표기 | Owain Glyn Dŵr |
발음 | /ˈoʊain ɡlɨ̞nˈduːr/ |
작위 | 글린두프르드위 남작 칸라이흐 오와인 영주 |
출생지 | 시카스, 웨일스 |
사망일 | 1415년 9월 20일 |
매장일 | 1415년 9월 21일 |
매장지 | (알 수 없는 위치) |
배우자 | 마거릿 한머 |
자녀 | 그리피드 아프 오와인 글린두르 마레두드 아프 오와인 글린두르 앨리스 페르흐 오와인 글린두르 카트린 페르흐 오와인 글린두르 이에우안 아프 오와인 글린두르 그 외 |
가문 | 마스라팔 가문 |
아버지 | 그리피드 피한 2세 |
어머니 | 엘렌 페르흐 토마스 아프 리웰린 |
서명 | Glyndwr Pennal 1406.jpg |
작위 | |
작위 | 글린두프르드위 남작 칸라이흐 오와인 영주 |
선대 영주 | 그리피드 피한 2세 |
계승 영주 | 폐지됨 |
웨일스 공 | 웨일스: 1283) 잉글랜드: 1400) |
차대 공 | 웨일스: 잉글랜드: 1471) |
웨일스 공 통치 기간 | 1400–1415 |
생애 | |
활동 시기 | 1401-c.1416 |
이전 웨일스 공 | 오와인 라우고흐 |
다음 웨일스 공 | 공석 |
이전 포이스 파도그 영주 | 그리피드 피한 2세 |
다음 포이스 파도그 영주 | 마레두드 아프 오와인 글린두르 |
기타 | |
종교 | 가톨릭 교회 |
2. 초기 생애와 배경
오와인 글린두르(Owain Glyndŵr|오웨인 글린두르cy)는 1354년(혹은 1359년) 웨일스 북동부 시카스의 유력한 앵글로-웨일스계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그리피드 피찬 2세(Gruffydd Fychan II)는 파위스 파독 공 지위를 주장했으며 글린디프드위(Glyndyfrdwy)의 남작이자 신라이스 오웨인의 영주였다. 그리피드 피찬 2세는 1370년경 사망하여, 오와인의 어머니 엘렌 페르흐 토마스 압 흘위엘린(Elen ferch Tomas ap Llywelyn)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과부가 되었다. 엘렌은 세레디기온(데헤우바스) 출신으로 그 지역 사투리를 사용했다.[2]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의 세 왕가, 즉 파위스(마스라팔 가문), 데헤우바스(디네프르 가문), 그위네드(아베르프라우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손녀 엘레오노르를 통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엘레오노르의 존재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
젊은 오와인 압 그리피드는 데이비드 한머(David Hanmer)의 집이나 리처드 피츠앨런 아룬델 3세 백작의 집에서 양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런던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유학을 갔으며,[4] 7년 이상 공부했다. 1381년 농민 반란 당시 런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5] 1384년 웨일스에 거주하며 데이비드 한머의 딸 마가렛 한머(Margaret Hanmer)와 결혼했다.[6] 결혼식은 1383년 웨일스 북동부 한머의 세인트 채드 교회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7] 다른 자료에서는 1370년대에 결혼했다고도 한다.[8] 이들은 대가족을 이루었고 오와인은 시카스와 글린디프드위(Glyndyfrdwy)에서 무사로 살았다.[9]
2. 1. 가문과 출생
오와인 압 그리피드(Owain Glyndŵr|오웨인 글린두르cy)는 1354년(혹은 1359년) 웨일스 북동부 시카스의 유력한 앵글로-웨일스계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그리피드 피찬 2세(Gruffydd Fychan II)는 파위스 파독 공 지위를 주장했으며 글린디프드위(Glyndyfrdwy)의 남작이자 신라이스 오웨인의 영주였다. 그리피드 피찬 2세는 1370년경 사망하였고,[1] 이로 인해 오와인의 어머니 엘렌 페르흐 토마스 압 흘위엘린(Elen ferch Tomas ap Llywelyn)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과부가 되었다. 엘렌은 세레디기온(데헤우바스) 출신으로 그 지역 사투리를 사용했다.[2]
오와인 글린두르는 세 웨일스 왕가(왕국)의 후손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파위스 왕국의 마스라팔 가문의 상속자였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데헤우바스의 디네프르 가문과 그위네드 왕국 아베르프라우 가문의 직계 후손이자 상속자였다. 그는 또한 손녀 엘레오노르를 통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엘레오노르의 존재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
젊은 오와인 압 그리피드는 훗날 왕실 법관이 되는 유망한 변호사 데이비드 한머(David Hanmer)의 집이나 리처드 피츠앨런 아룬델 3세 백작의 집에서 양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오와인은 런던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유학을 간 것으로 보인다.[4] 그는 7년 이상 법학원에서 공부했으며, 1381년 농민 반란 당시 런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5] 1384년, 오와인은 웨일스에 거주하며 데이비드 한머의 딸 마가렛 한머(Margaret Hanmer)와 결혼했다.[6] 이들의 결혼식은 1383년 웨일스 북동부 한머의 세인트 채드 교회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7] 다른 자료에서는 1370년대에 결혼했다고도 한다.[8] 오와인과 마가렛은 슬하에 많은 자녀를 두었고, 오와인은 시카스와 글린디프드위(Glyndyfrdwy)에 있는 조상의 땅에서 무사로서의 삶을 영위했다.[9]
오와인 글린두르는 파위스와 데헤우바르트의 마지막 통치 군주들의 직계 계보를 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 웨일스 그위네드 왕국에도 혈통적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증조할머니 그웬릴리안(Gwenllïan)을 통해 그위네드 왕 그뤼푸드 압 키난(1137년 사망)의 후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는 그뤼푸드 압 키난의 증손이자 또 다른 그위네드 통치자인 리웰린 압 이오르웨르트(리웰린 대왕, 1240년 사망)가 글린두르와 가장 가까운 그위네드 왕족 조상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그는 리웰린 대왕의 손자이자 마지막 아베르프라우 통치자 세대 중 마지막에서 두 번째 그위네드 공이었던 리웰린 압 그리피드(1282년 사망)의 후손이었다. 리웰린 압 그리피드는 그의 동생 다피드 3세 이전 마지막 아베르프라우 가문의 웨일스 통치자였다.[10]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리웰린 2세의 유일하게 기록된 자녀는 1337년 자식 없이 사망한 딸 궨릴리안뿐이라고 지적한다.[11][12] 존 에드워드 로이드 교수는 "리웰린에게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태어나 사후 평생 세인프링햄 수녀회의 수녀로 지낸 궨릴리안 외에 다른 자녀가 없다는 증거가 있다"라고 언급했다. 로이드의 평가는 다른 웨일스 역사학자들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증조할머니를 통한 그위네드 왕가 혈통 주장은 "1378년 그위네드의 직계 남성 계보가 완전히 끊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설득력을 얻는다. 마지막 남성 후계자는 오와인 라우고흐(Owain Lawgoch)였다.
2. 2. 교육과 군 복무
글린두르는 1384년 유명한 웨일스인 그레고리 사이스 경(Sir Gregory Sais) 휘하에서 벌윅어폰트위드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에서 주둔 근무를 하며 왕을 위한 군 복무에 참여했다. 그의 성인 사이스는 웨일스어로 "잉글랜드인"을 의미하며, 당시 웨일스에서는 드물었던 그의 영어 구사 능력을 나타낸다. 1385년 8월에는 다시 스코틀랜드에서 존 오브 곤트의 지휘 아래 리처드 2세 국왕을 섬겼다. 1386년에는 기사원(High Court of Chivalry)에서 그해 9월 3일 체스터에서 열린 ''스크로프 대 그로브너(Scrope v Grosvenor)''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1387년 3월, 오웬은 리처드 피츠앨런(Richard FitzAlan), 아룬델 백작 4세의 무관(squire)으로 복무하며, 켄트 해안에서 프랑스-스페인-플랑드르 연합 함대가 패배한 영국 해협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해 말 장인인 데이비드 해너머 경(Sir David Hanmer, 같은 해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음)이 사망하자 글린두르는 그의 유산 집행자로서 웨일스로 돌아왔다. 이후 존 오브 곤트의 아들인 헨리 불링브룩(후에 헨리 4세 국왕이 됨)의 무관으로 1387년 12월 래드콧 브리지 전투(Battle of Radcot Bridge)에 참전했다. 1384년부터 1388년까지 그는 군 복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서로 다른 전장에서 3년간의 군사 경험을 쌓았고, 중요한 사건들과 주목할 만한 인물들을 직접 목격했다.이때부터 리처드 국왕은 반역 귀족(Lords Appellant)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분주해졌다. 1390년 그레고리 사이스 경의 사망과 피츠앨런의 몰락으로 글린두르의 기회는 더욱 제한되었고, 그는 아마도 자신의 웨일스 영지로 돌아가 40대 10년 동안 조용히 살았을 것이다. 웨일스 귀족이었던 시인(bard) 이올로 고흐(Iolo Goch)는 1390년대에 시카스스(Sycharth)에 있는 글린두르를 방문하여 오웬을 칭찬하는 여러 송가를 지었고, 그의 주인의 관대함과 시카스스의 글쓰기에 대해 "거기서는 볼트나 자물쇠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썼다.
3. 결혼과 가족
오와인 글린두르는 1384년 마가렛 한머(Margaret Hanmer)와 결혼했다.[10] 마가렛은 데이비드 핸머 경(Sir David Hanmer, 1332년-1387년)(영문판)의 딸이었으며, 웨일스어 이름으로는 마레드 페르흐 다피드(Marred ferch Dafydd)로 알려져 있었다.[10] 그들의 결혼식은 1383년 웨일스 북동부 한머의 세인트 채드 교회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1370년대에 결혼했다고도 한다.
이올로 고흐(Iolo Goch)는 글린두르의 아내 마가렛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야곱 유드 윌리엄 로이드(Jacob Youde William Lloyd, 1816년-1887년)[11]에 따르면, 오와인과 마가렛은 다섯 명의 아들과 네 명[10] 또는 다섯 명[10]의 딸을 두었다.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그리피드(Gruffudd) | 1375년-1412년 | 영국군에 붙잡혀 노팅엄 성에 투옥된 후 1410년 런던탑으로 이송되어 1412년경 선페스트로 감옥에서 사망 |
마독(Madog) | ||
마레두드(Maredudd) | 출생년도 불명 | 1421년 사면을 받음 |
토마스(Thomas) | ||
존(John) | ||
알리스(Alys) | 존 스큐다모어 경(John Scudamore)과 결혼.[12] 글린디프르드위(Glyndyfrdwy)(영문판)와 킨라이스(Cynllaith)(영문판)의 영부인으로, 웨일스 남부 파이스와 그위네드의 공국의 상속인. | |
제인(Jane) | ||
재닛(Janet) | 헤리퍼드셔 크로프트 성(Croft Castle)(영문판)의 존 드 크로프트 경과 결혼 | |
마가렛(Margaret) | 헤리퍼드셔 모닝턴(Monnington)(영문판)의 리처드 모닝턴 경과 결혼 |
다섯 번째 딸인 카트린(Catrin ferch Owain Glyndŵr, 1413년 사망)는 로이드의 저서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다른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아들인 에드먼드 모티머 경(Edmund Mortimer, 1376년-1409년)과 결혼했다.
오와인의 아들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거나 전사했으며, 자식이 없었다. 오와인에게는 그 외에 사생아로 데이비드, 귄릴리안(Gwenllian), 이우안(Ieuan), 미반위(Myfanwy)가 있었다.[10]
오와인의 딸 알리스는 왕에 의해 헤리퍼드셔 보안관(Sheriff)(영문판)으로 임명되었던 존 스큐다모어(John Scudamore)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는 봉기를 극복하고 직책을 유지했다. 오와인은 마지막으로 켄트처치(Kentchurch)(영문판)에 있는 그들의 집에 숨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큐다모어의 손자는 키드웰리(Kidwelly)의 존 던 경(Sir John Donne, 1420년대-1503년)으로, 성공한 요크 왕조의 궁정인(courtier)(영문판), 외교관, 군인이었다. 그는 1485년 이후 같은 웨일스 출신인 헨리 7세와 화해했다. 던 가문을 통해 많은 유명한 영국 귀족 가문이 오와인의 후손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옥스퍼드 백작 작위를 소유한 드 비어 가문과 데번셔 공작 작위를 가진 캐번디시 가문(House of Cavendish)(영문판) 등이 포함된다.
4. 글린두르 봉기 (웨일스 반란)
오와인 글린두르는 1400년 9월 16일,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글린두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어 웨일스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지만, 몇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란군은 대포가 부족하여 요새화된 성을 함락하기 어려웠고, 함선이 없어 해안 방어가 취약했다.[8] 결국 잉글랜드군의 막대한 물량에 압도되었다.
글린두르는 1409년 마지막 거점에서 쫓겨났지만 체포되지 않았고, 1412년 이후 목격 기록이 사라졌다. 그는 헨리 5세가 제시한 사면을 거부하고 웨일스를 배신하지 않았다. 1415년 그의 옛 부하가 글린두르의 죽음을 기록했다.[9]
글린두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 1부』에 영어식 이름인 오웬 글렌도워로 등장하며, 마법과 감정에 휩싸인 야만적이고 이국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의 죽음 이후, 글린두르는 카드왈라드, 키난, 아서 왕과 함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돌아올 영웅으로 신화화되었다. 19세기 후반, 슼므 푸드(젊은 웨일스) 운동은 글린두르를 웨일스 민족주의의 아버지로 재창조했다.[9]
4. 1. 봉기의 배경
1390년대 후반, 오와인을 궁지에 몰아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나중에 웨일스 반란, 글린두르 봉기(웨일스 내에서), 또는 마지막 독립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이웃인 루딘의 그레이 남작이 일부 토지를 빼앗자, 글린두르는 잉글랜드 의회에 호소했지만, 그의 구제 청원은 무시되었다.[1] 1400년, 그레이 남작은 스코틀랜드 국경 방위를 위한 봉건 군대 동원에 대한 왕명을 글린두르에게 제때 알리지 않아, 런던 법원에서 그를 반역자로 몰 수 있게 했다.[1] 그레이 남작은 헨리 4세의 왕실 법원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법원은 그의 사건을 듣기를 거부했거나, 그레이 남작이 오와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지연되었다.[2]여러 자료에 따르면 글린두르는 그레이 남작에게 보낸 격앙된 편지에서 자신의 소유가 된 토지에 대해 자랑하고 그레이 남작의 말을 몇 마리 훔쳤다고 쓴 후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그레이 남작이 자신의 땅을 "불태우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믿고, 동일한 방식으로 보복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그레이 남작은 처음에 불태우고 죽이겠다고 위협한 것을 부인하고, 그 증거가 되는 편지를 헨리 4세의 의회에 가져가 글린두르가 그 편지에 적힌 도둑질과 반역죄를 인정하여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답했다.[3] 폐위된 왕 리처드 2세는 웨일스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1400년 1월 리처드 2세의 한 관리가 공개 처형된 후 잉글랜드 국경 도시 체스터에서 심각한 시민 불안이 발생했다.[4][5]
4. 2. 초기 봉기 (1400-1401)
1390년대 후반, 오와인을 궁지에 몰아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나중에 웨일스 반란, 글린두르 봉기(웨일스 내에서), 또는 마지막 독립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이웃인 루딘의 그레이 남작이 일부 토지를 빼앗자, 글린두르는 잉글랜드 의회에 호소했지만, 그의 구제 청원은 무시되었다. 1400년, 그레이 남작은 스코틀랜드 국경 방위를 위한 봉건 군대 동원에 대한 왕명을 글린두르에게 제때 알리지 않아, 런던 법원에서 그를 반역자로 몰 수 있게 했다. 그레이 남작은 헨리 4세의 왕실 법원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법원은 그의 사건을 듣기를 거부했거나, 그레이 남작이 오와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지연되었다. 이는 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1] 여러 자료에 따르면 글린두르는 그레이 남작에게 보낸 격앙된 편지에서 자신의 소유가 된 토지에 대해 자랑하고 그레이 남작의 말을 몇 마리 훔쳤다고 쓴 후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그레이 남작이 자신의 땅을 "불태우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믿고, 동일한 방식으로 보복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그레이 남작은 처음에 불태우고 죽이겠다고 위협한 것을 부인하고, 그 증거가 되는 편지를 헨리 4세의 의회에 가져가 글린두르가 그 편지에 적힌 도둑질과 반역죄를 인정하여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답했다.[2] 폐위된 왕 리처드 2세는 웨일스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1400년 1월 리처드 2세의 한 관리가 공개 처형된 후 잉글랜드 국경 도시 체스터에서 심각한 시민 불안이 발생했다.[3][4]1400년 9월 16일, 글린디프드위의 시카스에서 오와인 글린두르는 자신의 직계 가족, 처가 식구들, 버윈 출신의 웨일스인, 웨일스 북동부 출신 친구들, 그리고 세인트 아사프 대성당장을 포함한 3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잉글랜드의 침략으로부터 웨일스 국민을 구원할 사람이라고 예언하며 웨일스 공을 자칭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15년간의 반란을 일으켜 헨리 4세의 통치에 맞섰다. 그 후 1400년 9월과 10월에 헨리 4세와 오웨인의 추종자들 사이에 여러 차례 초기 충돌이 발생하면서 반란이 웨일스 북부로 확산되기 시작했다.[5] 웨일스 공으로 자칭한 글린두르와 그의 수백 명의 추종자들은 그레이 경의 영토를 공격하여 루딘을 불태웠고, 덴비, 르들란, 플린트, 홀트, 오스웨스트리, 웰시풀 등 웨일스 내의 잉글랜드 도시로 여겨지는 곳들을 계속 공격했다. 초기 반란은 웨일스 반군과 싸우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가 전달된 후 잉글랜드 국왕의 주목을 받았다.[6] 웨일스 북부와 중부의 상당 지역이 글린두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 글린두르는 은신하며 적을 공격할 때만 나타났으며, 그의 군대는 웨일스를 점령한 잉글랜드군에 대해 효과적인 게릴라전 전술을 사용했다.[7][8]
4. 3. 봉기의 확산 (1402-1405)
1401년 봄, 글린두르는 남웨일스에 나타났다. 그해 4월 1일 성금요일, 글린두르의 사촌인 리스 앱 투두르와 궨일림 앱 투두르가 이끄는 40명의 부하들이 북웨일스의 코누이 성을 점령했다. 헨리 4세는 헨리 퍼시(핫스퍼)를 임명하여 질서를 회복하게 했다. 3월 10일, 국왕과 영국 의회는 오와인과 그의 사촌인 투두르 가문을 제외한 모든 반란군에게 사면을 선포했지만, 투두르 가문은 결국 사면받았다.
6월, 글린두르는 펌러먼의 히드겐 산에서 첫 번째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해 10월 헨리 4세는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 보복했다. 반란은 북웨일스 전체로 확산되었고, 노동자들은 무기를 빼앗았고, 농부들은 무기를 사기 위해 가축을 팔았다. 비밀 회합이 도처에서 열렸고, 음유시인들은 "선동의 사자"로 활동했다. 헨리 4세는 레스터에서 웨일스 반란 소식을 듣고 북웨일스를 거쳐 앵글시로 진군하여 리처드 2세를 지지했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을 몰아냈다. 1400년 11월 9일 국왕은 글린두르의 시카스 재산을 존 보퍼트, 섬머셋 1대 백작에게 몰수했다. 가을까지 그위네드와 세레디기온, 파위스는 영국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1401년에서 1402년 사이, 영국 의회는 웨일스인에 대한 형벌법을 제정했지만, 이는 오히려 많은 웨일스인들을 반란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해, 글린두르는 숙적인 그레이 드 루신 남작을 사로잡아 몸값을 받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 1402년 6월, 글린두르는 필레 근처에서 브린 글라스 전투를 벌여 에드먼드 모티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을 물리치고 모티머를 사로잡았다. 헨리 4세는 모티머의 몸값 지불을 거부했고, 이에 모티머는 글린두르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1402년에는 프랑스와 플랑드르 사람들이 오와인의 딸 자넷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글린두르는 스코틀랜드와 브르타뉴로부터 해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의 샤를 6세의 지원을 받았다. 1403년 글린두르는 12,000명의 군대를 모았다. 글러머건과 론다 계곡 지역 출신의 병력을 주축으로 프랑스 부대를 포함한 웨일스 군대는 글러머건의 스탈링 다운 전투에서 영국 침략군을 물리쳤다.

1403년 봄, 헨리 왕자는 글린두르의 시카스와 글린디프드위의 집, 에데이르니온의 코뮤트와 파위스 일부를 불태웠다. 글린두르는 계속해서 도시를 포위하고 성을 불태웠다. 그 해 7월 10일 동안 그는 웨일스 남부와 남서부를 순회했고, 남부 전체가 영국 통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행동은 퍼시 가문이 반란에 가담하면서 영국 국왕에 대한 내부 반란을 일으켰다. 글린두르의 생애 이 시점에서 웨일스 왕자의 사촌인 휴엘 셀레가 난나우 영지에서 글린두르를 암살하려 했다.
1403년, 반란은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다. 왕실 관리들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웨일스 학생들이 학업을 그만두고 글린두르에게 합류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웨일스 노동자와 장인들이 영국 고용주를 버리고 웨일스로 돌아오고 있다고도 보고했다. 오와인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영국 원정으로 단련된 웨일스 군대를 활용할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웨일스 궁수와 기병들이 영국군 복무를 그만두고 반란에 가담했다.
1404년, 글린두르의 군대는 아베리스트위스 성과 하를레히 성을 점령했고, 카디프 성을 불태우며 남부를 황폐화시켰다. 하를레히에서 법원이 열리고 그루피드 영이 웨일스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에게 웨일스 항구를 프랑스 무역에 개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4. 4. 웨일스 공 선포와 삼자 협정 (1404-1405)
1400년 9월 16일, 오와인 글린두르는 세인트 아사프 대성당장을 포함한 3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을 자칭했다. 이후 15년간 잉글랜드의 헨리 4세에 맞선 반란을 일으켰다. 1400년 9월과 10월, 헨리 4세와 오와인의 추종자들 사이에 여러 차례 충돌이 발생하며 반란이 웨일스 북부로 확산되었다. 글린두르는 루딘을 불태우고, 덴비, 르들란, 플린트, 홀트, 오스웨스트리, 웰시풀 등 잉글랜드 도시로 여겨지는 곳들을 공격했다.1401년 4월 1일 성금요일, 글린두르의 사촌들이 이끄는 부하들이 북웨일스의 코누이 성을 점령했다. 헨리 4세는 헨리 퍼시(핫스퍼)를 임명하여 질서를 회복하게 했다. 3월 10일, 국왕과 영국 의회는 오와인과 투두르 가문을 제외한 모든 반란군에게 사면을 선포했지만, 투두르 가문은 5월 28일 코누이 성을 포기한 후 사면받았다. 1401년 봄, 글린두르는 남웨일스에 나타났다.
6월, 글린두르는 펌러먼의 히드겐 산에서 첫 번째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0월 헨리 4세의 스트라타 플로리다 수도원에 대한 보복이 뒤따랐다. 1401년에서 1402년 사이, 영국 의회는 웨일스인에 대한 형벌법을 제정했지만, 많은 웨일스인들을 반란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해, 글린두르는 숙적인 그레이 드 루신 남작을 사로잡아 헨리로부터 상당한 몸값을 받았다. 1402년 6월, 글린두르는 필레 근처에서 에드먼드 모티머 경이 이끄는 영국군을 물리쳤다(브린 글라스 전투). 모티머는 사로잡혔고, 글린두르는 몸값을 제안했지만 헨리 4세는 지불을 거부했다. 모티머는 글린두르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반란 성공 소식이 퍼지면서 글린두르는 스코틀랜드와 브르타뉴로부터 해상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의 샤를 6세 국왕의 지원을 받았다. 1403년 글린두르는 12,000명의 군대를 모아 글러머건의 스탈링 다운 전투에서 헨리 4세 국왕이 이끈 영국 침략군을 물리쳤다.
1403년, 웨일스에서 반란은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다. 왕실 관리들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웨일스 학생들이 학업을 그만두고 글린두르에게 합류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웨일스 노동자와 장인들이 영국 고용주를 버리고 웨일스로 돌아오고 있다고도 보고했다. 수백 명의 웨일스 궁수와 경험 많은 기병들이 영국군 복무를 그만두고 반란에 가담했다.
1404년, 글린두르의 군대는 아베리스트위스 성과 하를레히 성을 점령했고, 카디프 성을 불태우며 남부를 황폐화시켰다. 하를레히에서 법원이 열리고 그루피드 영이 웨일스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404년, 그는 지지자들에 의해 웨일스 공(Tywysog Cymru)으로 선포되었고 마친렛과 하를레히에서 의회를 열었다. 그는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두 개의 국립 대학교를 설립하고, 히웰 다의 웨일스 법을 재도입하고, 독립적인 웨일스 교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 스코틀랜드, 레온 왕국(스페인)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에서도 사절들이 왔다. 1405년 여름, 웨일스의 모든 코못에서 네 명의 대표가 하를레히로 파견되었다.
1405년 2월, 글린두르는 에드먼드 모티머, 험버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삼자 계약서(Tripartite Indenture)를 체결했다. 이 계약서는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세 사람 사이에 분할하는 데 동의했다. 웨일스는 세번 강과 머지 강까지 확장되어 체셔주, 슈롭셔주, 헤리퍼드셔주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마치의 모티머 가문 영주들은 잉글랜드 남부와 서부 전체를, 퍼시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를 차지할 것이었다.
글린두르는 그리피드 융과 그의 매부(마가렛의 형제) 존 핸머를 프랑스와 협상하기 위해 파견했다. 그 결과, 프랑스가 글린두르와 웨일스를 지원한다는 공식 조약이 체결되었다. 웨일스와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은 키드웰리 성을 공격하고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1405년은 웨일스에서 "프랑스의 해"였다. 웨일스와 프랑스 사이에 공식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서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하버포드웨스트를 불태우고 펨브로크 성을 점령하려 했지만 매수되었다. 프랑스와 웨일스 연합군은 카마선을 점령했다.

1405년 초, 웨일스군은 일련의 패배를 당했다. 글린두르의 형인 투두르 아프 그루피드 경은 1405년 5월 풀 멜린 전투에서 전사했다. 영국군은 아일랜드에서 앵글시에 상륙하여 웨일스군을 몰아붙였고, 1406년 말에는 앵글시의 저항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4. 5. 페널 편지와 프랑스의 지원 (1405-1406)
1405년 2월, 글린두르는 에드먼드 모티머, 험버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삼자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 계약에서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세 사람 사이에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웨일스는 세번 강과 머지 강까지 확장되어 체셔주, 슈롭셔주, 헤리퍼드셔주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마치의 모티머 가문 영주들은 잉글랜드 남부와 서부 전체를, 퍼시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를 차지하기로 했다.아일랜드 영주들과의 협상은 실패했지만, 글린두르는 프랑스와 브르타뉴가 더 호의적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그리피드 융과 그의 매부( 마가렛의 형제) 존 핸머를 프랑스와 협상하기 위해 파견했다. 그 결과, 프랑스가 글린두르와 웨일스를 지원한다는 공식 조약이 체결되었다. 웨일스와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은 키드웰리 성을 공격하고 포위했다. 웨일스는 브르타뉴 공국과 스코틀랜드로부터 준공식적인 형제적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략선들은 오와인의 전쟁 내내 웨일스 주변에서 활동했다. 스코틀랜드 선박들은 1400년과 1401년에 린 반도의 잉글랜드 정착지를 습격했다. 1403년, 브르타뉴 함대는 해협에서 잉글랜드를 물리치고 저지, 건지, 플리머스를 황폐화시켰으며, 프랑스는 와이트 섬에 상륙했다. 1404년까지 그들은 웨일스 군대를 태우고 잉글랜드 해안을 습격하여 다트머스에 불을 지르고 데번주 해안을 황폐화시켰다.
1405년은 웨일스에서 "프랑스의 해"였다. 웨일스와 프랑스 사이에 공식 조약이 체결되었다. 대륙에서는 프랑스 군대가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아키텐 공국을 침략하면서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압박했다. 동시에 프랑스는 서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하버포드웨스트를 불태우고 펨브로크 성을 점령하려 했지만 매수되었다. 프랑스와 웨일스 연합군은 1403년에 오와인이 점령했지만 다시 잃은 카마선을 점령했다. 점령자들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었고, 그들은 도시 성벽을 불태웠다. 후대의 역사가인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는 헤리퍼드셔를 거쳐 워스터셔주의 우드베리 힐(워스터에서 약 16.09km 떨어진 곳)까지 진군했다는 미확인 보고서를 남겼다. 그들은 잉글랜드 군대와 만나 진지를 구축하고 8일 동안 서로 약 1.61km 떨어진 곳에서 매일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큰 전투는 없었다. 그러자 양측 모두 교전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떠났다.
1405년까지 파리의 정치 상황이 평화 쪽으로 기울면서 대부분의 프랑스군이 철수했고,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1406년 3월 31일, 글린두르는 페널의 성 베드로 교회(St Peter ad Vincula church)에서 샤를 6세에게 보낼 편지를 썼는데, 편지의 이름은 작성 장소를 따서 명명되었다. 글린두르의 편지는 웨일스에서 잉글랜드를 물리치기 위해 프랑스의 군사 지원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글린두르는 그 대가로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편지는 스스로 웨일스 공으로서 이끄는 독립적인 웨일스 의회를 가진 독립 웨일스에 대한 글린두르의 야망을 보여준다. 이러한 야망에는 강제된 잉글랜드 법이 아닌 히웰 다의 전통법의 회복, 독립적인 웨일스 교회의 설립, 그리고 웨일스 남부와 북부에 각각 하나씩 두 개의 대학 설립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 이후, 고위 성직자들과 사회의 중요 인물들이 글린두르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고, 잉글랜드의 저항은 몇몇 고립된 성, 성벽 도시, 그리고 요새화된 영지로 줄어들었다.
글린두르의 대인장과 그가 1406년 프랑스에 쓴 편지는 파리의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있다. 이 편지는 현재 파리 국립문서보관소(Archives Nationales)에 소장되어 있다. 웨일스 국립도서관은 전문적인 숙성 기술과 글린두르 인장의 금형을 사용하여 복제본을 만들었고, 2009년 문화유산부 장관 알룬 프레드 존스가 6개의 웨일스 기관에 이를 증정했다. 1404년의 왕실 대인장은 샤를 4세에게 주어졌으며, 이미지와 글린두르의 칭호를 담고 있다. 글린두르는 이 편지에서 자신을 "웨일스 공"이라고 지칭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5. 봉기의 쇠퇴와 글린두르의 최후
1405년 초, 웨일스군은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다. 1405년 5월 풀 멜린 전투에서 글린두르의 형인 투두르 아프 그루피드 경이 전사했다. 영국군은 아일랜드에서 앵글시에 상륙하여 웨일스군을 몰아붙였고, 1406년 말에는 앵글시의 저항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프랑스군의 개입 이후 수년간 전투가 계속되었고, 1406년 헨리 왕자는 웨일스 병사들이 벌금과 속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전투 후 포로가 잡혔고, 성은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되었다. 같은 해 글린두르의 아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1408년까지 글린두르는 노섬벌랜드의 동맹을 잃고 웨일스 북부로 피신했다.
1407년부터 영국은 병력, 자원, 재정 면에서 우위를 바탕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5. 1. 잉글랜드의 반격 (1407-1409)
1407년, 영국은 병력, 자원, 재정 면에서 우위를 바탕으로 웨일스 반란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훨씬 크고 장비가 잘 갖춰진 영국군은 점차 웨일스군을 압도했다. 헨리 왕자는 경제적 봉쇄 전략을 채택하여, 영국 통제하에 남아 있는 성을 거점으로 웨일스를 점차 탈환하며 무역과 무기 공급을 차단했다. 1407년까지 이 전략은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1408년, 영국군은 아베리스트위스 성을 탈환한 후 북쪽의 하를레히 성으로 진군했고, 1409년 혹독한 겨울 동안 하를레히 성도 함락되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포위 공격 중에 사망했고, 오와인의 아내 마가렛과 그의 두 딸(카트린 포함) 및 모티머의 세 손녀는 사로잡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모두 1413년 탑에서 사망하여 세인트 스위신, 런던 스톤에 묻혔다. 몰락하기 전에 글린두르는 모든 웨일스인 중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글린두르는 노인으로 변장하여 성에서 빠져나와 영국군의 봉쇄를 피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지지자들과 함께 웨일스 황야로 후퇴했고, 항복을 거부하며 웨일스와 영국 국경 지대에서 산발적인 습격과 매복을 가하는 게릴라 전술로 전쟁을 계속했다.

5. 2. 게릴라전과 실종 (1410-1415)
1410년, 오와인은 반군이 장악한 슈롭셔로 습격을 이끌었다. 1412년에는 브레콘에서 매복 작전을 펼쳐 헨리 왕의 주요 지지자였던 다피드 감을 사로잡아 몸값을 받았다. 이것이 적들이 마지막으로 오와인을 살아있는 모습으로 본 때였지만, 스쿠다모어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해 가을, 글린두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베리스위스 성이 항복했다.헨리 5세는 웨일스에 대해 더 화해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고, 반란 주동자들과 선왕 반대자들에게 왕실 사면을 제안했다. 1414년 후반까지도 롤라드 지도자 존 올드캐슬이 오와인과 소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북쪽과 남쪽 주요 성에 증원군이 파견되었다.
1411년 12월 21일, 잉글랜드 국왕은 지도자와 트럼핑턴의 토마스를 제외한 모든 웨일스인에게 사면을 발표했다(1413년 4월 9일까지, 그 이후로 글린두르는 제외되지 않았다). 글린두르는 여러 차례 사면 제안을 무시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1410년대까지 전쟁 범죄로 처벌을 받았다. 그의 사망은 전 추종자에 의해 1415년에 기록되었다.
1412년 이후 글린두르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이 없다. 막대한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그는 체포되거나 배신당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사면을 무시했고, 1415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며, 확실히 1417년 이전에는 사망했다. 아담 우스크는 1415년 연표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밤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매장 사실이 그의 반대자들에게 발각되었고, 그래서 다시 매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 토마스 페넌트는 글린두르가 1415년 9월 20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이는 그의 출생을 약 1354년으로 추정하게 한다).[1]
글린두르는 남부 헤리퍼드셔주 켄트처치에 있는 스쿠다모어 가문의 집에서 여생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시인 르위스 글린 코시는 글린두르의 사생아 딸인 궨릴리안을 위한 만가를 지었는데, 웨일스 독립 전쟁 당시 웨일스 전역이 글린두르의 지휘 아래 있었고, 40명의 공작이 왕자의 동맹국이었으며, 그는 말년에 62명의 여성 연금 수급자를 부양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반란 중 적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변장을 했다는 글린두르에 관한 많은 민담이 있으며, 그의 실종 이후 웨일스의 종교 시인 시온 켄트가 스쿠다모어 가문의 가족 사제로서 변장한 오와인 글린두르라는 지속적인 추측이 있었다.[2]
오와인과 마가렛의 아들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죽거나 전투 중 사망하여 자녀를 남기지 못했다.
이름 | 비고 |
---|---|
그루피드 | 1411년 사망 |
마독 | |
마레두드 | 1421년 생존 |
토마스 | |
존 |
그루피드는 헨리 왕자에게 검트에서 사로잡혀 노팅엄 성에 투옥되었고, 1410년에 런던탑으로 이감되었다. 마레두드는 1416년 2월 24일 존 탈보트와 잉글랜드 왕실과 소통하고 1421년에 왕실의 사면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몇 년 후 사망했다.
5. 3. 최후와 유산
글린두르는 1412년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고, 큰 현상금이 걸렸음에도 체포되거나 배신당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사면을 거부했고, 141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확실히 1417년 이전에는 사망했다. 한때 글린두르를 지지했던 아담 우스크는 1415년 연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토마스 페넌트는 글린두르가 1415년 9월 20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출생을 약 1354년으로 추정하게 한다.[1]글린두르는 남부 헤리퍼드셔 주 켄트처치에 있는 스쿠다모어 가문의 집에서 여생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시인 르위스 글린 코시는 글린두르의 사생아 딸인 궨릴리안을 위한 만가를 지었는데, 웨일스 독립 전쟁 당시 웨일스 전역이 글린두르의 지휘 아래 있었고, 40명의 공작이 왕자의 동맹국이었으며, 그는 말년에 62명의 여성 연금 수급자를 부양했다고 언급했다.
반란 중에 적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변장을 했다는 글린두르에 관한 많은 민담이 있으며, 그의 실종 이후 웨일스의 종교 시인 시온 켄트가 스쿠다모어 가문의 가족 사제로서 변장한 오와인 글린두르라는 지속적인 추측이 있었다.[2]
오와인 글린두르의 매장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랫동안 그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에 대한 추측이 이어져 왔다. 1875년, 프랜시스 킬버트 목사는 자신의 일기에 와이강변 모닝턴 교회 묘지에서 "오웬 글린두어"의 묘를 보았다고 적었다. "교회 현관 바로 옆,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거친 오벨리스크 모양의 희끄무레한 회색 평평한 돌이며, 잔디가 깎여 나간 직사각형의 흙덩이 한가운데 땅속 깊이 묻혀 있고, 아아,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오와인 글린두르 협회 회장인 에이드리언 존스는 인근의 또 다른 장소를 제시하며 "4년 전, 우리는 글린두르의 직계 후손인 존 스키드모어 씨를 아버가베니 근처 켄트처치 코트에서 방문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헤리퍼드셔의 모닝턴 스트래들로 데려갔는데, 그곳은 글린두르의 딸인 앨리스가 살았던 곳입니다. 스키드모어 씨는 글린두르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결국 그곳에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600년 동안의 가족 비밀이었고, 우리가 방문하기 직전에 사망한 스키드모어 씨의 어머니조차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했습니다. 모닝턴 스트래들에는 그가 묻혔다고 여겨지는 언덕까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역사가 그루피드 알레드 윌리엄스는 2017년 저서에서 매장지가 레민스터 근처 킴볼턴 예배당에 있다고 제안한다. 현재 성 야고보 대성당인 이곳은 과거 레민스터 수도원의 예배당이었다. 이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여러 사본을 근거로 한다. 킴볼턴은 헤리퍼드셔 외곽에서는 평범하고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스쿠다모어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와인은 마가렛 핸머(웨일스 이름으로는 마레드 페르흐 다피드)와 결혼했는데, 그들 사이에는 다섯이나 여섯 명의 아들과 네댓 명의 딸이 있었다. 또한 오웨인은 사생아를 두었다.
자녀 이름 | 설명 |
---|---|
그루피드 | 1411년 사망 |
마독 | |
마레두드 | 1421년 생존 |
토마스 | |
존 | |
앨리스 | 존 스쿠다무어(John Scudamore)와 결혼. |
제인 | |
재닛 | 존 드 크로프트 경(Croft Castle)과 결혼. |
마가렛 | 리처드 모닝턴 경과 결혼. |
캐서린 | (1) 에드먼드 모티머(Edmund Mortimer)(사망 1409년), (2) 로저 모티머(Earl of March)와 결혼. 1413년 사망. |
오와인과 마가렛의 결혼으로 태어난 모든 아들들은 포로로 잡혀 감옥에서 죽거나 전투 중 사망하여 자녀를 남기지 못했다. 그루피드는 헨리 왕자에게 검트에서 사로잡혀 노팅엄 성에 투옥되었고, 1410년에 런던탑으로 이감되었다. 마레두드는 1416년 2월 24일 존 탈보트와 잉글랜드 왕실과 소통하고 1421년에 왕실의 사면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몇 년 후 사망했다.
오와인의 실종과 사망 후, 그의 장녀이자 (후손이 있는) 가장 나이 많은 딸인 앨리스는 글린디프드위와 킨라이스의 여자이자 파위스, 남웨일스, 그위네드의 공국들의 법률상 상속녀(de jure)로 알려지게 되었다. 1431년, 그녀는 1400년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오와인의 몰수된 토지를 하사받은 존, 섬머셋 백작에 대항하여 글린디프드위의 시카스 상속녀로서 자신의 상속권을 되찾기 위해 메리오니드의 법정에 성공적으로 출두하였다. 앨리스의 후손들은 스쿠다무어 가문과 결혼하였고, 그녀의 직계 후손인 존 루시 스쿠다무어는 19세기 초 하퍼드 존스-브리지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딸은 1852년 아일랜드의 캐슬셰인 저택의 에드워드 루카스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또 다른 딸인 제인은 헨리, 루딘의 그레이 남작(Lord Grey de Ruthin)과 결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그런 다음, 재닛은 헤리퍼드셔의 귀족 가문인 크로프트 성과 결혼하였고, 그 후손들은 오늘날 크로프트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다. 마가렛은 헤리퍼드셔의 모닝턴 출신 기사와 결혼하였다.
오와인 글린두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4세 1부』(Henry IV, Part 1)에서 영어식 표기인 오웬 글렌도워(Owen Glendower)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마법과 감정에 사로잡힌 야만적이고 이국적인 인물로 묘사된다.[8]
그의 죽음으로 오웨인 글린두르는 카드왈라드르, 키난, 아더 왕과 함께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영웅으로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9] 19세기 후반에는 슼므 푸드(Cymru Fydd)(젊은 웨일스) 운동이 웨일스 민족주의의 아버지로서 글린두르의 이미지를 재창조했다.
6. 유산과 평가
오와인 글린두르는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웨일스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그의 군사 경력과 웨일스 독립을 위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글린두르는 1384년 그레고리 사이스 경 휘하에서 벌윅어폰트위드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385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존 오브 곤트의 지휘 아래 리처드 2세를 섬겼으며, 1386년에는 기사원(High Court of Chivalry)에서 열린 ''스크로프 대 그로브너(Scrope v Grosvenor)''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1387년에는 아룬델 백작의 무관(squire)으로 켄트 해안에서 프랑스-스페인-플랑드르 연합 함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이후 헨리 4세가 되는 헨리 불링브룩의 무관으로 래드콧 브리지 전투(Battle of Radcot Bridge)에 참전하는 등 다양한 군사 경험을 쌓았다.
1390년대에 글린두르는 웨일스 영지로 돌아와 이올로 고흐(Iolo Goch)와 같은 시인(bard)들의 방문을 받으며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는 마가렛 핸머(웨일스 이름으로는 마레드 페르흐 다피드)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사생아도 있었다.
글린두르는 웨일스의 주요 왕가인 파위스, 데헤우바르쓰, 그위네드의 혈통을 모두 주장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파위스 | 데헤우바르쓰 |
---|---|
블레드딘 압 킨핀 (사망 1075년) | 리스 압 테우드르 (사망 1093년) |
마레두드 압 블레드딘 (사망 1132년) | 그뤼푸드 압 리스 (사망 1137년) |
마독 압 마레두드 (사망 1160년) | 리스 압 그뤼푸드 (로드 리스) (사망 1197년) |
그뤼푸드 마엘로르 1세 (사망 1191년) | 그뤼푸드 압 리스 2세 (사망 1201년) |
마독 압 그뤼푸드 마엘로르 (사망 1236년) | 오웨인 (사망 1235년) |
그뤼푸드 마엘로르 2세 (사망 1269년) | 마레두드 압 오웨인 압 그뤼푸드 (사망 1265년) |
그뤼푸드 피찬 1세 (사망 1289년) | 오웨인 (사망 1275년) |
마독 크뤼플 (약 1275년 – 1304년) | 리웰린 압 오웨인 (사망 1308년) |
그뤼푸드 (사망 1343년) | 토모스 압 리웰린 (사망 1343년) |
그뤼푸드 피찬 2세 (약 1330년 - 1369년) | 엘렌 |
오와인 글린두르 (약 1354년 – 1415년) |
6. 1. 웨일스 민족 영웅
글린두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4세 1부》에서 영어식 표기인 오웬 글렌도워(Owen Glendower)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마법과 감정에 사로잡힌 야만적이고 이국적인 인물로 묘사된다.[8] 그의 죽음 이후, 오와인 글린두르는 카드왈라드르, 키난, 아서 왕과 함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영웅으로서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9] 19세기 후반, 슼므 푸드 (젊은 웨일스) 운동은 웨일스 민족주의의 아버지로서 글린두르의 이미지를 재창조했다.웨일스 문화에서 글린두르는 왕들, 예를 들어 카드왈라드르, 키논, 아서 왕과 같은 중세 인물들과 함께 신화적인 지위를 갖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는 고전적인 웨일스 신화적 역할인 "Y Mab Darogan|예언된 아들cy"처럼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올 부름을 기다리는 민중 영웅으로 여겨졌다. 이 신화는 1000년간의 잉글랜드 지배 후 어느 날 '예언의 아들'이 돌아와 웨일스 백성을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지배자로 만들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웨일스 민속에서 오와인이라는 이름은 '운명의 아들' 전설과 관련이 있다.
6. 2. 현대의 유산
오와인 글린두르는 현대에 이르러 웨일스 민족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상징은 웨일스 독립이나 웨일스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여러 소규모 단체에서 사용되고 있다. 1980년대에는 Meibion Glyndŵr(글린두르의 아들들)라는 단체가 웨일스 내 영국인 소유 휴가용 주택 방화 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했다.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글린두르를 최초의 효과적인 게릴라 지도자로 묘사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에서 글린두르의 전술을 일부 모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은 카디프 시청에 글린두르 동상을 제막했다. 1995년 코르웬 광장에는 조각가 사이먼 반 데 풋의 글린두르 동상이 세워졌고, 2007년에는 콜린 스포포스의 더 큰 기마상이 설치되었다.
2003/2004년 100명의 웨일스 영웅 투표에서 글린두르는 아뉴린 비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74년과 2008년에는 그의 초상이 담긴 우표가 발행되었고, 웨일스 전역의 거리, 공원, 광장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글린두르가 기치를 든 날인 9월 16일(오와인 글린두르의 날)을 웨일스의 공휴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며, 데이피드 위글리가 2021년에 이를 주장했다.
RGC 1404(Rygbi Gogledd Cymru/North Wales Rugby) 럭비 유니온 팀은 오와인 글린두르가 웨일스 공으로 즉위한 해를 기념하여 이름 붙여졌다. 아베리스트위스의 한 도로는 "오와인 글린두르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글린두르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마친레쓰 플라스 마친레쓰 부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코르웬의 오웨인 글린드르 호텔(Owain Glyndwr Hotel)은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여관이다. 카디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오웨인 글린드르(Owain Glyndŵr) 펍(잠시 오웬 글린두르(Owen Glendower)로 변경)이 있다. 그의 고향 근처 미드웨일즈에는 표지판이 설치된 132마일 길이의 장거리 도보 여행로인 글린드르의 길(Glyndŵr's Way)이 있다.
글린드르의 이름을 딴 선박과 기관차도 있다.
- 1808년 영국 해군은 36문의 5등함 프리깃함인 HMS 오웬 글렌도워(HMS Owen Glendower)를 진수했다. 이 함선은 보트 전쟁 동안 발트해에서 복무했고, 안홀트 섬(Anholt (Denmark)) 점령 후 해협에서 활약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서아프리카 함대(또는 "예방 함대")에서 노예선을 추적하여 최소 두 척을 나포했다.
- 1839년 건조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이자 블랙월 프리깃인 오웬 글린두르(Owen Glendower)호가 있었다.
- 1923년 2-6-2T 베일 오브 레이돌 기관차가 글린드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기관차는 현재도 운행 중이며, 영국철도에서 사용된 몇 안 되는 기관차 중 하나로 민영화 전까지 운행되었다.
- 1951년 크루 공장에서 건조된 70010 ''오웬 글린두르''(Owen Glendower)는 ''오웨인 글린드르(Owain Glyndŵr)''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5년 6월 퇴역했다. 이 기관차는 영국철도 표준 7형 혼합형 증기 기관차였다.
2002년 런던탑 근처에는 글린드르의 딸 카트린과 그의 자녀들의 죽음을 기리는 명판이 설치되었다.
2008년부터 2023년까지 렉섬 대학교(Wrexham University)는 (렉섬) 글린드르 대학교((Wrexham) Glyndŵr University)로 불렸다. 2023년 명칭 변경 후에도 대학은 오웨인 글린드르 학회(Owain Glyndŵr Society)와 협력하여 매년 졸업생 상을 수여하고 있다.
6. 3. 문학과 예술
글린두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헨리 4세 1부》에서 영어식 이름인 오웬 글렌도워(Owen Glendower)로 등장하며, 마법과 감정에 지배받는 야만적이고 이국적인 인물로 묘사된다.[8] 셰익스피어는 글린두어를 "평범한 사람들의 목록에 있지 않고", "훌륭한 신사로, 굉장히 박식하며, 기묘한 비밀에 정통하고, 사자처럼 용감하고, 인도 광산처럼 놀랍도록 상냥하고 관대하다"고 묘사했다.[8] 그의 적들은 그를 "저 저주받은 마법사"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전투에서 날씨가 그의 편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8]19세기 후반 젊은 웨일스(Cymru Fydd) 운동은 글린두르를 웨일스 민족주의의 아버지로 재창조했다.
글린두르는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돌아올 부름을 기다리는 영웅으로 신화적인 지위를 얻었다. 토마스 페넌트는 그의 《웨일스 여행》(1778, 1781, 1783)에서 글린두르의 기억과 관련된 많은 전설과 장소를 찾아내어 출판했다.[1] 글린두르는 존 카우퍼 파위스의 소설 《오웬 글린두어》(1941)와 에디스 파게터의 1972년 작품 《슈루즈베리의 피투성이 들판》을 포함한 여러 현대 소설 작품에 등장했다.
매기 스티프바터의 YA 시리즈 까마귀 순환(The Raven Cycle)에는 고도로 허구화된 글린두어가 오웬 글린두어로 등장한다. 셰넌도어 계곡에서 벌어지는 이 시리즈에서 등장인물들은 글린두어의 시신이 사후 웨일스에서 버지니아로 옮겨졌다고 믿고 있으며, 그를 "깨우는" 사람은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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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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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wain Glyn Dwr (c.1354 – c.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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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4回------映画『ウェールズの山』のモーガンとジョーンズ師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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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賀憲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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ヨーロッパの歴史風景 中世編 西暦1400年、イギリスのウェールズでオーウェン・グリンドゥールの反乱が始ま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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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ェールズ歴史研究会
201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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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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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야코브 유드 윌리엄 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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