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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아그리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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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기원전 5년에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성장하여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지지를 받아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을 통치했다. 그는 칼리굴라 시대에 정치적 부상을 얻어 영토를 확장했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 즉위에 기여하여 헤로데 대왕과 거의 같은 판도를 다스렸다. 44년에 카이사리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서 엇갈린다. 유대교 율법을 존중하는 한편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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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아그리파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헤로데 아그리파 1세 메달
헤로데 아그리파 1세 메달
전체 이름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출생기원전 11년경
사망서기 44년경 (54세)
사망 장소카이사레아 마리티마
통치
왕조헤로데 왕조
유다 왕41년 – 44년
선임자마룰루스 (로마 유다 속주 총독)
후임자쿠스피우스 파두스 (로마 유다 속주 총독)
가족 관계
아버지아리스토불루스 4세
어머니베레니케
배우자키프로스, 파사엘 2세의 딸, 파사엘 1세 (헤로데 대왕의 형제)의 아들
자녀헤로데 아그리파 2세
베레니케
마리암네
드루실라

2. 약력

어린 시절 로마에서 살았으며,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자라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어머니 베레니케 사후 재산을 낭비하여 생활고를 겪었고, 중동에서 숙부 헤로데 안티파스 등을 의지하려 했으나 관계가 악화되어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소 안토니아의 도움으로 빚을 해결했다. 그는 소 안토니아의 손자인 칼리굴라와 친분을 쌓았으나, 티베리우스를 비방하는 발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 투옥되기도 했다.[119]

37년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자 석방되었으며, 34년에 사망하여 영지가 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었던 숙부 헤로데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트라코니티스, 가우라니티스, 바타네아 등의 영주로 임명되었다. 39년에는 숙부 헤로데 안티파스파르티아와 손잡고 로마에 모반을 꾀한다고 고발하여, 칼리굴라로부터 추방된 안티파스의 갈릴리와 페레아 통치권도 얻었다[119].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에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데 협력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 보답으로 아그리파에게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이 다스렸던 유대 속주(이드마야 포함)와 사마리아의 지배권을 맡겼고, 추가로 동쪽의 아빌라와 레바논 산맥 부근의 땅까지 확보하여 헤로데 대왕 시절과 거의 같은 판도를 통치하게 되었다[120]. 또한 클라우디우스에게 청하여 형제인 헤로데가 칼키스 땅을 받도록 돕기도 했다[120].

그러나 유대 지역 전체를 다스린 기간은 3년에 불과했으며, 44년 카이사리아에서 열린 축제 도중 갑자기 사망했다. 사도행전 12장 19-23절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제XIX권 8장 2절[121]에 따르면,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 신처럼 칭송받았으나 이를 제지하지 않다가 급사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사망했을 때 장남 아그리파 2세는 17세였기 때문에[122], 로마는 그의 지위를 바로 인정하지 않고 유대 지역을 다시 총독 관할 하에 두었다. 아그리파 2세는 48년이 되어서야 삼촌 헤로데의 영지였던 칼키스를 받았고, 이후 아버지의 영지 중 일부를 돌려받았으나, 아버지의 영토 전체를 계승하지는 못했으며, 이후 유대 전쟁이 발발했다[123][129].

2. 1. 어린 시절과 로마에서의 성장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기원전 11년경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헤로데 대왕과 하스몬 왕조 출신의 마리암네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4세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헤로데 대왕의 누이인 살로메 1세의 딸 베레니케였다.[2] 따라서 헤로데 대왕은 아그리파의 친할아버지이자 외증조부가 된다. 그의 부모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이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지어주었는데, 이는 유대 왕족으로서 그의 로마적 지위를 나타낸다.[2]

헤로데 대왕은 로마 제국에는 충성했지만,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무자비한 통치자로 여겨졌다.[5] 그의 통치 기간은 폭력과 끊임없는 가족 간의 음모로 얼룩졌으며, 그는 10명의 아내를 두었다.[3] 기원전 29년, 헤로데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그리파의 할머니인 마리암네 1세를 처형했다.[4] 기원전 7년, 아그리파가 겨우 서너 살이었을 때,[6] 헤로데는 또 다른 궁중 음모를 이유로 아그리파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 4세와 삼촌 알렉산더를 처형했다. 3년 후에는 헤로데의 다른 아들 안티파테르와 아그리파의 외할아버지 코스토바루스마저 처형되었다.[7] 헤로데는 하스몬 왕조 구성원들과 지지자들을 대거 숙청하여 거의 멸족시켰다.[5]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불루스의 자녀들인 아그리파, 헤로데, 아리스토불루스 마이너와 딸들인 헤로디아, 마리암네는 살려두었다.[7] 이처럼 아그리파는 하스몬 왕조와 헤로데 왕조 양쪽의 후손이었지만, 아버지의 반역죄 처형으로 인해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2]

기원전 5년,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 4세가 처형된 지 2년 후, 어린 아그리파는 어머니 베레니케 및 형제자매들과 함께 로마로 보내져 황실에서 교육받게 되었다.[8] 그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안토니아 마이너(티베리우스 황제의 형수이자 미래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와 할머니 마리암네 1세의 친구였던 황후 리비아의 후원을 받았다.[6] 아그리파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 그리고 자신과 동갑이었던 티베리우스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등 황실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며 친분을 쌓았다. 특히 드루수스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4] 그는 어린 시절을 제국의 수도에서 보내며 거의 모든 황실 가족 구성원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당시 아그리파의 미래는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지던 드루수스 및 클라우디우스와의 관계로 인해 밝아 보였다.

젊은 시절, 아그리파는 친구인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함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9] 이러한 생활 방식으로 인해 그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삼촌인 헤로데 안티파스로부터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10] 그러나 23년, 절친했던 드루수스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아그리파의 미래는 어두워졌다.[11] 그는 로마에서 고립되었고 빚 독촉에 시달렸다.[12] 그의 어머니 베레니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9] 아들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그리파와 클라우디우스를 궁정에서 내쫓았다.[13]

로마에서 쫓겨난 아그리파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중동으로 건너가 숙부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친구였던 시리아 총독 플라코스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두 사람 모두와 관계가 악화되어 결국 다시 로마로 돌아와야 했다. 로마에서 그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소 안토니아의 도움으로 빚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119]

2. 2. 유대 귀환과 정치적 부상

로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그리파 1세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자라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어머니 베레니케가 사망한 후, 그는 재산을 낭비하여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14] 결국 그는 빚 때문에 급히 로마를 떠나 유대 속주로 향했다.[12]

유대 속주에서도 아그리파는 이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수입 부족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11] 대략 26년경, 그는 사촌인 키프로스와 결혼하여 아들 아그리파 2세를 낳았다.[12][15] 가족은 이두매의 말라타 요새에서 로마 궁정과는 거리가 먼 검소한 생활을 해야 했다.[13]

아그리파의 아내 키프로스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아내인 헤로디아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헤로디아스의 도움으로 안티파스는 아그리파를 지원하게 되었다.[13] 안티파스는 아그리파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가족이 티베리아스에 정착하도록 도왔으며, 도시의 시장 관리자(아고라노모스) 직책을 주어 안정적인 수입원을 마련해주었다.[12] 하지만 아그리파는 이러한 지원에 만족하지 못했고,[12] 로마와 비교하여 편의 시설이 부족한 지방 도시에 머무는 것을 점차 지루하게 여겼다. 결국 그는 레바논 티레에서 열린 연회에서 안티파스와 크게 다투게 되었다.[13]

안티파스와의 관계가 틀어진 후, 아그리파는 친구인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가 총독으로 있던 시리아 속주로 갔다.[13]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의 평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형제 아리스토불루스 마이너는 아그리파가 다마스쿠스시돈 사이의 국경 분쟁에서 다마스쿠스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플라쿠스에게 고발했고, 이로 인해 아그리파는 또다시 망신을 당하고 플라쿠스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13]

티베리우스의 청동 흉상. 아그리파는 젊은 시절 그의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자랐다.


결국 아그리파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재기를 노리기로 결심했다.[16] 그는 로마로 가기 위해 20,000 드라크마를 빌려[17] 안테돈에서 배를 타려 했으나, 로마의 야브네 총독 헤레니우스 카피토가 그에게 제국 재무부에 진 빚을 상기시키며 출항을 막으려 했다.[16] 아그리파는 밤을 틈타 몰래 배를 타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는 알라바르크이자 필로의 형제인 알렉산더 리시마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2] 리시마쿠스는 아그리파의 낭비벽을 알고 직접 돈을 빌려주기를 꺼렸지만, 결국 아내 키프로스를 보증인으로 하여 200,000 드라크마를 빌려주었다.[17] 이 자금으로 아그리파는 36년 봄, 이탈리아로 향할 수 있었다.[2]

카프리에 은둔하고 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옛 아들의 친구인 아그리파를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야브네 총독이 보낸 편지로 인해 그의 빚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16]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그리파는 어머니 베레니케의 친구였던 안토니아 소에게 도움을 받았다. 안토니아는 아그리파가 갚아야 할 빚 300,000 드라크마 전액을 대신 갚아주었고,[18][17] 덕분에 아그리파는 다시 황제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16] 이는 그의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2. 3. 칼리굴라와의 관계와 왕위 계승

어린 시절 로마에서 황제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함께 자랐으나, 어머니 베레니케 사후 씀씀이가 헤퍼져 어려움을 겪었다. 중동에서 숙부 헤로데 안티파스 등에게 의지하려 했으나 관계가 악화되어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는 어머니의 친구였던 소 안토니아의 도움을 받았는데, 아그리파는 그녀의 손자인 칼리굴라에게 경의를 표하며 친분을 쌓았다.[14] 코마게네의 왕자 안티오쿠스와 함께 칼리굴라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18]

그러나 아그리파는 칼리굴라에게 티베리우스가 빨리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이 말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전해지면서 투옥되었다.[16] 약 6개월간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고 칼리굴라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면서 석방되었다.[18] 칼리굴라는 친구였던 아그리파에게 그가 감옥에서 찼던 쇠사슬과 같은 무게의 금사슬을 선물하며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23]

칼리굴라는 아그리파에게 왕(바실레우스) 칭호와 왕의 상징인 디아뎀을 수여했으며, 34년에 자녀 없이 사망하여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었던 삼촌 헤로데 필리포스의 옛 영지(이투레아, 트라코니티스, 가울라니티스, 바타네아, 아우라니티스, 파네아스)를 다스리도록 했다.[12][119] 이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 또한 칼리굴라는 아그리파에게 프라에토리아 장식을 수여하여 그의 지위를 높여주었다.[24] 이 시기 칼리굴라는 본디오 빌라도를 해임하고 마룰루스를 유대의 히파르크(ἱππάρχης, 총독)로 임명했다.[25]

38년 여름, 아그리파는 자신의 왕국으로 가던 중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심했는데, 아그리파는 축제 기간 동안 '카라바스'라는 이름의 바보에게 왕의 역할을 시키는 연극을 통해 조롱당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내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갈등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아그리파가 왕의 칭호를 얻자, 그의 누이 헤로디아는 남편이자 갈릴리와 페레아의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로마로 가서 칼리굴라에게 왕의 칭호를 요구하도록 부추겼다. 39년 안티파스가 로마로 떠나자, 아그리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자유민을 보내 칼리굴라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에서 아그리파는 안티파스가 파르티아와 손잡고 로마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황제의 허락 없이 티베리아스의 무기고에 무기를 쌓아두고 있다고 고발했다.[119][21] 파르티아와의 모반 혐의는 의심스럽지만, 무기 비축 혐의는 안티파스가 이전에 자신을 패배시킨 나바테아의 아레타스 4세에게 복수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어 사실일 수 있다. 칼리굴라는 아그리파의 고발을 받아들여 안티파스를 갈리아 남부(현재의 프랑스 리옹 근처 루그두눔 콘베나룸)로 추방하고, 그의 영지였던 갈릴리와 페레아, 그리고 몰수한 재산을 모두 아그리파에게 넘겨주었다.[119] 이로써 아그리파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2. 4. 유대 통치와 칼리굴라 암살

37년 티베리우스 사후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아그리파 1세를 석방하고, 사망한 숙부 헤로데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트라코니티스, 가우라니티스, 바타네아 등의 영주로 임명했다. 이어 39년에는 헤로데 안티파스파르티아와 공모하여 로마에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하여, 칼리굴라로부터 안티파스의 영지였던 갈릴리와 페레아의 통치권까지 확보했다[119].

칼리굴라 통치 기간 중,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유대인과 그리스인 간 충돌 이후,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 예루살렘 성전제우스 형상의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했다[61]. 이는 유대인의 우상 혐오 사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계획이었기에 제국 내 유대인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62][63]. 칼리굴라는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에게 동상 건립을 강행하도록 명령했고[64], 페트로니우스는 두 개의 로마 군단을 동원하여 프톨레마이스에 주둔시켰다[65][66]. 유대인들은 티베리아스 등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며[67], 농작물을 불태우고 전쟁까지 준비하는 등 봉기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66][67]. 페트로니우스는 반란의 위험성을 느끼고 황제에게 상황의 어려움을 알리며 시간을 벌었다[68][69]. 당시 로마에 머물던 아그리파 1세는 이 소식을 듣고[67], 연회 자리 등에서 칼리굴라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존중해 줄 것을 간청했다[71][72][73]. 칼리굴라는 아그리파 1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계획을 잠시 보류하는 듯했으나[75], 곧이어 마음을 바꾸어 동상 건립을 재차 추진하려 했다[76]. 요세푸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페트로니우스에게 자살 명령까지 내렸으나, 이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칼리굴라 자신이 암살당하면서 동상 건립 계획은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67]. 아그리파 1세의 이러한 노력은 로마 권력 핵심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유대인 동족들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낸다[73].

41년 1월 24일[77], 칼리굴라친위대 사령관 카시우스 카에레아 등이 포함된 공모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78]. 공모자들은 공화정 복귀를 시도했으나, 아그리파 1세의 역할로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55]. 요세푸스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78], 아그리파 1세는 암살 후 혼란 속에서 숨어있던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어 친위대의 지지를 얻도록 설득했으며[79][80], 이후 원로원과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여 클라우디우스의 즉위를 확정짓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79][80].

클라우디우스는 즉위에 대한 보답으로 아그리파 1세에게 큰 영토를 하사했다. 기존 영토에 더해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이 통치했던 핵심 지역인 유대 속주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의 통치권을 부여받았고, 추가로 아빌라 지역까지 얻어 헤로데 대왕 시절과 거의 같은 판도를 다스리게 되었다[80]. 또한 집정관 지위와 함께 로마 원로원과 시민 앞에서 포룸에서 우호 동맹 조약을 갱신하는 영예를 누렸으며, '로마 인민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왕'(rex amicus et socius Populi Romanila)으로 선포되었다[78][82][83].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 1세의 형제인 칼키스의 헤로데에게도 칼키스 공국을 맡기고 왕의 칭호를 부여했다[82][84]. 아그리파 1세는 이로써 명실상부 유대의 왕으로서 할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보였으나, 유대 지역 전체를 직접 통치한 기간은 44년 사망하기까지 약 3년에 불과했다.

2. 5. 클라우디우스와의 관계와 통치 영역 확장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 아그리파 1세는 칼리굴라의 삼촌이자 어린 시절 친구였던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5][79] 요세푸스와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아그리파는 암살의 두려움에 숨어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 친위대를 설득하여 그를 황제로 추대하도록 이끌었다.[78][79][80] 또한, 공화정 복귀를 논의하던 원로원에 직접 찾아가 클라우디우스와 원로원 사이를 중재하며 클라우디우스의 즉위를 관철시키는 데 기여했다.[79][80][81]

아그리파 1세 왕국의 변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을 황제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아그리파 1세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고,[78]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격적인 영토 확장을 허락했다. 아그리파는 기존에 다스리던 영토에 더해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이 통치했던 유대 속주(이두매 포함)와 사마리아의 지배권을 얻었으며, 추가로 동쪽의 아빌라와 레바논 산맥 부근의 땅까지 확보하여 할아버지 시절과 거의 맞먹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80][120]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파에게 집정관 지위를 부여하고 원로원에서 그리스어로 연설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 또한 로마 포룸에서는 아그리파와의 우호 및 동맹 조약이 공식적으로 비준되었으며, 그는 할아버지처럼 '로마 인민의 친구이자 동맹자인 왕'(rex amicus et socius Populi Romani|렉스 아미쿠스 에트 소키우스 포풀리 로마니la)으로 선포되었다. 이 조약 내용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청동판에 새겨졌다.[82][83]

같은 해, 아그리파의 형제인 칼키스의 헤로데 역시 클라우디우스로부터 왕의 칭호와 함께 칼키스 지역(과거 이투레아 왕국 일부)을 영지로 받았고, 로마에서는 프라이토르 직위도 얻었다.[82][84] 클라우디우스는 헤로데 왕조와 하스몬 왕조의 후손이자 자신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아그리파를 통해, 고질적인 문제가 많았던 유대 지역을 안정시키고 제국의 직접적인 행정 부담을 덜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84]

아그리파 1세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도 (서기 37-44년).


카이사리아의 헤로데 궁전 유적


아그리파 1세는 할아버지처럼 화려함을 추구하고 국경 너머에서도 인정받기를 원했다.[90] 그는 유대인 신민과 비유대인 신민 모두를 만족시키려 노력하며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과 로마화된 행정 수도 카이사리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다.[90]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북쪽으로 확장하는 대규모 공사를 벌였는데,[82][90] 이는 성전 재정을 사용했기에 일부 유대인들에게 독립 왕국의 부활이나 주권 회복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91] 또한 할아버지의 에우에르게티즘(공공 기부) 정책을 따라 베리투스 등 로마 식민지와 페니키아, 시리아 도시에 극장, 원형 경기장, 목욕탕 등을 건설해주며 환심을 사려 했다.[90][84] 그는 검투 경기를 포함한 쇼와 게임을 열기도 했는데, 이는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나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들을 이용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려 했다.[84]

종교적으로 아그리파는 유대에 도착하자마자 경건한 통치자라는 평판을 얻으려 노력했다. 미쉬나에는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을 낭독하는 의식을 거행하며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2] 할머니 마리암네 1세를 통해 하스몬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할아버지 헤로데와 달리 제사장 가문에 속했기에 성전 의식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92] 그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세 차례나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94]

그러나 유대와 사마리아 등을 포함한 확장된 영토 전체를 다스린 기간은 불과 3년 남짓이었다. 44년 아그리파 1세는 카이사리아에서 열린 축제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가 백성들로부터 신격화되는 찬사를 받았는데, 이를 제지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급사했다. 이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12장 19-23절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제19권 8장 2절에 남아있다.[121]

그가 사망했을 때 장남 아그리파 2세는 17세에 불과하여[122] 아버지의 광대한 왕국을 즉시 계승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로마는 유대 지역을 다시 총독의 직접 통치 하에 두었다. 아그리파 2세는 48년에야 삼촌 헤로데가 다스리던 칼키스 영지를 받았고, 이후 아버지의 영지 중 일부(옛 필리포스 영지 등)를 돌려받았지만, 아버지의 왕국 전체를 회복하기 전에 유대 전쟁이 발발하여 완전한 계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23]

2. 6.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산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얻었으나, 그의 통치는 불과 3년 만인 44년에 갑작스럽게 끝났다. 그의 사망 장소는 카이사리아였으며, 당시 황제를 기리는 축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아그리파 1세가 발행한 주화


사망 경위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사도행전 12장 19-23절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제XIX권 8장 2절[121]에 남아 있다. 두 기록은 세부적인 묘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핵심 내용은 비슷하다. 아그리파 1세가 호화로운 옷을 입고 식전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칭송했고, 그가 이를 제지하지 않자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천사가 그를 쳤고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98][2][99] 이는 신성 모독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해석을 반영한다.[94] 반면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1세가 심한 복통으로 5일간 고통받다가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하며,[97] 죽기 직전 자신을 신격화한 이들을 꾸짖고 테슈바(회개)의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묘사한다.[100]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당시부터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97] 특히 그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던 로마 측의 개입 가능성이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된다.[84]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는 아그리파 1세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여러 차례 보고했으며,[82] 아그리파 1세가 티베리아스에서 주변 왕들과 회동했을 때 이를 로마에 대한 음모로 간주하여 해산시키기도 했다.[95][97]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로마 측, 혹은 마르수스 개인의 판단에 따른 독살 가능성도 거론된다.[97]

아그리파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장남 아그리파 2세는 17세에 불과하여[122] 아버지의 모든 영토와 지위를 즉시 계승하지는 못했다. 로마는 유대 속주를 다시 총독의 직접 통치 아래 두었다. 아그리파 2세는 48년에야 삼촌 헤로데가 다스리던 칼키스 지역을 받았고, 이후 이 지역과 교환하는 형태로 아버지의 영지 중 일부(옛 필리포스의 영지 등)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영토 전체를 회복하기 전에 유대 전쟁이 발발하여 완전한 계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23][129]

아그리파 1세의 통치는 짧았기 때문에 그의 뚜렷한 정치적 방향성을 평가하기는 어렵다.[84]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대인들 사이에서 되살아났던 주권 회복에 대한 기대는 그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져, 약 20년 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평가된다.[101]

3. 인물 평가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대한 평가는 기록에 따라 상반되게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아그리파 1세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바리사이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으며 베드로를 투옥시킨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죽음 역시 오만한 태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묘사된다.[130][109]

반면,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는 그를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과 달리 온화하고 겸손하며 신앙심 깊은 인물로 평가한다.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우상을 세우려 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설득했고,[124] 율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했다고 전한다.[125]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1세 사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그를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고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 동족에게는 더욱 많은 공감을 보였다"[106]고 기록하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아그리파"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107] 랍비 문학에서도 그는 경건한 인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108]

그러나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1세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특히 카이사리아와 세바스테의 주민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축하했다고 기록했다.[130][97] 또한 그는 유대 영토 밖에서는 헬레니즘 문화를 중시하여 베리투스(현 베이루트)에 검투사 경기장을 세우거나,[127] 자신의 영토 내 헬레니즘 도시들에 딸의 우상을 세우는 등[128] 유대 전통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130]

3. 1. 사도행전의 평가

사도행전 12장에서는 아그리파 1세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한 인물로 묘사한다. 당시 아직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지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아그리파 1세는 바리사이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박해를 가했다고 전해진다.[130] 그는 사도 야고보를 체포하여 처형했으며, 베드로 역시 투옥시켰으나 베드로는 탈출에 성공했다.[109] 사도행전은 아그리파 1세의 죽음조차 그의 거만한 태도 때문에 천사가 내린 벌이라고 기록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상당수의 비평가들은 기독교 전통에 따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헤롯 왕'을 아그리파 1세와 동일시한다.[109] 그러나 사도행전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며, 편집 과정에서 내용이 가감되거나 재배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사도행전 기록의 역사성을 전면 또는 부분적으로 부정하기도 한다.[110][111]

특히 사도행전 내부의 연대기적 모순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변호하며 데다스의 죽음을 언급하는 연설(사도행전 5장)은 실제 데다스가 사망한 시기(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 재임기, 44–46년)와 맞지 않으며,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및 탈출(사도행전 12장)은 가말리엘의 연설보다 시간상 뒤에 배치되어 있지만, 데다스 사건보다는 이전 시점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113][114] 이러한 연대기 문제 때문에 사도행전의 '헤롯 왕'이 아그리파 1세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아그리파 2세를 가리킬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아그리파 1세의 죽음 이야기는 요세푸스의 기록과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84] 백성들이 자신을 신격화하려 할 때 이를 거부하지 않은 불경함으로 인해 신의 벌을 받아 치명적인 병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보인다. 이는 두 기록이 공통된 유대교 전승에 기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15]

3. 2. 유대 고대사의 평가

유대 고대사』에서는 『사도행전』 12장의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헤로데 아그리파 1세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그리파 1세는 젊은 시절 씀씀이가 헤펐지만, 그의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과는 달리 성품이 온화하고 겸허했으며 신앙심이 깊었다. 칼리굴라 황제가 자신의 우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려 했을 때, 아그리파 1세는 이를 막기 위해 황제를 설득했으며[124], 유대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때에도 변명하기보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125].

그러나 요세푸스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아그리파 1세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그의 사망 소식에 카이사리아와 세바스테의 주민들이 기뻐하며 축하했다고 기록했다[97]. 또한 아그리파 1세는 유대 영토 밖에서는 헬레니즘 문화를 중시하여, 페니키아의 로마 식민지였던 베리투스(현재의 베이루트)에 유대인들이 꺼리는[126] 검투사 투기장을 건설하기도 했다[127]. 자신의 영토 내에서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강했던 카이사리아나 세바스테 같은 도시에서는 자신의 딸의 우상을 세우기도 했다고 요세푸스는 전한다[128][130].

이러한 상반된 면모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1세 사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그를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고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며 (...) 동족에게는 더욱 많은 공감을 보였다"[106]고 평가하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아그리파"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107]. 랍비 문학에서도 아그리파 1세는 경건한 인물로 긍정적으로 묘사된다[108].

3. 3.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관점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과 달리 온화하고 겸손하며 신앙심 깊은 인물로 묘사된다.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우상을 세우려 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설득했으며,[124] 율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으면 겸허히 받아들였다고 한다.[125] 또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권리를 재확인하고,[85] 제국 전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까지 특권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86] 도라의 회당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동상이 세워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대인의 권리를 옹호했다.[87] 이러한 행적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2장에서는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당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지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바리새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박해한 인물로 그려진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고 베드로를 투옥시키는 등[130] 기독교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으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오만한 태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여겨졌다.

요세푸스는 아그리파 1세가 유대인 외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사리아와 세바스테의 주민들이 이를 축하했다고 한다.[130]

한편 아그리파 1세는 자신의 영토 밖에서는 헬레니즘 문화를 중시하기도 했다. 페니키아의 로마 식민지였던 베리투스(베이루트)에 검투사 경기장을 건설하거나,[127] 자신의 영토 내에서도 카이사리아나 세바스테 같은 도시에 딸의 우상을 세우는 등[128] 헬레니즘 문화를 장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행동은 신앙심 깊은 일부 유대인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126]

3. 4. 헬레니즘 문화와의 관계

아그리파 1세는 할아버지 헤로데 대왕처럼 화려함을 추구하고 국경 너머에서 인정받으려는 열망을 가졌다.[90] 그는 유대인 신민과 이교도 신민 모두를 만족시키려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헬레니즘 문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그의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과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던 "작은 로마" 카이사레아 마리티마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90]

그는 헤로데 대왕의 공공 기부(에우에르게티즘) 정책을 이어받아 유대 영토 밖에서 명망 있는 공공 건축 사업을 지원했다. 특히 페니키아에 있던 로마 식민지 베리투스(현 베이루트)에 극장, 원형 경기장, 목욕탕 등을 건설하는 데 많은 지원을 했으며,[90] 다른 페니키아시리아의 도시들도 잊지 않았다.[84] 베리투스에서는 검투사 경기를 포함한 쇼와 게임을 제공했는데,[127] 이는 신실한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것이었다.[126] 아그리파는 이러한 비판을 의식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들을 검투사로 사용함으로써 유대교 규범 위반이라는 비판을 완화하려 했다.[84]

또한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그리파 1세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도 헬레니즘 문화가 강했던 카이사레아 마리티마나 세바스테 중 한 곳 또는 양쪽 모두에 자신의 딸들의 우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 우상들은 일반 시민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된다.[130][128]

4. 가족 관계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헤로데 왕조와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모두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헤로데 대왕과 마리암네 1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4세이며, 어머니는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살로메 1세의 딸인 베레니케이다.[2] 이로 인해 헤로데 대왕은 아그리파 1세의 친할아버지이자 동시에 외증조부가 된다.

아그리파 1세의 형제자매로는 칼키스의 헤로데, 아리스토불루스가 있었고, 누이로는 헤로디아와 마리암네가 있었다.[7]

그는 키프로스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 헤롯 아그리파 2세와 세 딸 베레니케, 마리암네, 드루실라이다.[104] 이 외에 유아기에 사망한 아들 드루수스가 있었다.[105]

4. 1. 부모와 조부모

헤로데 아그리파 1세는 기원전 11년경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리스토불루스 4세였는데, 그는 헤로데 대왕과 하스몬 왕조 출신의 아내 마리암네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아그리파 1세의 어머니는 베레니케로, 그녀는 헤로데 대왕의 누이인 살로메 1세의 딸이었다. 살로메 1세는 안티파테르의 딸이기도 했다.[2] 이러한 혈연 관계로 인해 헤로데 대왕은 아그리파 1세에게 아버지 쪽 할아버지이자 동시에 어머니 쪽 증조부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이었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이 유대인 왕자의 로마적인 지위를 나타냈다.[2]

아그리파 1세의 할아버지인 헤로데 대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무자비한 찬탈자로 여겨졌지만, 로마 제국의 헌신적인 지지자였으며 그의 왕국 전체에 걸쳐 로마의 대의를 옹호했다.[5] 그의 통치는 폭력과 수많은 가족 간의 음모로 특징지어졌으며, 그는 10명의 아내를 두었다.[3]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29년,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의 아내이자 아그리파 1세의 할머니인 마리암네 1세를 처형했다.[4] 기원전 7년, 아그리파 1세가 겨우 세 살 혹은 네 살이었을 때,[6] 헤로데 대왕은 더 많은 궁중 음모에 따라 아그리파 1세의 아버지 아리스토불루스 4세와 삼촌 알렉산더를 처형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또한 3년 후 헤로데가 도리스와 낳은 아들 안티파테르와 아그리파 1세의 외할아버지인 코스토바루스의 처형으로 이어졌다.[7] 헤로데 대왕은 하스몬 왕조와 그 지지자들의 많은 구성원들을 죽게 하여 거의 완전히 멸망시켰다.[5]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불루스 4세의 자녀들인 아그리파 1세, 헤로데, 아리스토불루스 마이너를 포함한 자녀들과 헤로디아와 마리암네 딸들을 살려두었다.[7] 따라서 아그리파 1세는 하스몬 왕조와 헤로데 왕조 모두의 후손이지만, 그의 아버지의 반역죄에 대한 사형 선고는 그를 계승 논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2]

4. 2. 형제 자매

키프로스와의 결혼을 통해 아그리파는 성인이 된 네 자녀, 아들 아그리파 2세와 세 딸 베레니케, 마리아므, 드루실라를 두었다.[104] 또 다른 아들 드루수스는 유아기에 사망했다.[105]

4. 3. 아내와 자녀

베레니케는 오빠 헤롯 아그리파 2세와 함께 사도 바울의 재판을 지켜보는 모습. 멜버른의 세인트 폴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아그리파 1세는 키프로스와 결혼하여 성인이 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은 헤롯 아그리파 2세이며, 딸은 베레니케, 마리아므, 드루실라이다.[104] 다른 아들인 드루수스는 유아기에 사망했다.[105]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헤로데 아그리파는 주세페 마리아 부이니가 작곡하고 클라우디오 니콜라 스타파가 대본을 쓴 이탈리아 오페라 ''L’Agrippa tetrarca di Gerusalemme'' (1724)의 주인공이다. 이 오페라는 1724년 8월 28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테아트로 두칼레에서 초연되었다.[116]

또한 아그리파는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클라우디우스 신''과 이를 각색한 BBC 텔레비전 드라마 ''나, 클라우디우스''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는 성인 역을 제임스 폴크너가, 아역을 마이클 클레멘츠가 연기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평생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특히 클라우디우스의 마지막이자 가장 믿음직한 친구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며, "누구도 믿지 말라,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라는 중요한 조언을 남긴다. 그러나 드라마 후반부에는 스스로를 예언된 메시아라 믿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여 클라우디우스를 실망시킨다. 결국 그는 초자연적인 병으로 쓰러지고, 죽기 전 클라우디우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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