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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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드릭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다가,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해안에 표류했다. 하멜과 선원들은 조선에 억류되어 서울에서 2년간 왕의 호위병으로 복무하고 전라도로 이송되어 7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1666년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 데지마에 도착한 후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했으며, 조선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하멜표류기》를 저술했다. 하멜은 이후 인도에서 생활하다가 1692년 네덜란드에서 사망했다. 하멜의 기록은 유럽에 조선을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 한국과 네덜란드 간의 문화 교류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향과 한국의 여러 지역에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대중문화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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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 하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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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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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헨드릭 하멜 |
로마자 표기 | Hendeurik Hamel |
한글 표기 | 헨드릭 하멜 |
한자 표기 | (정보 없음) |
출생 | 1630년 |
출생지 | 네덜란드 호린험 |
사망 | 1692년 이후 (최소 61–62세) |
직업 | 선원 |
알려진 이유 | 한국에 대한 최초의 서양인 기록 저술 |
경력 | |
소속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직책 | 선원 및 서기 |
2. 생애
1630년 네덜란드 고린켐에서 태어난 헨드릭 하멜은[2][3]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8] 1650년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항해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다.[2]
1653년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무역선 "데 스페르베르"(De Sperwer, 네덜란드어로 '송골매')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난파되었다.[24] 하멜을 포함한 36명의 생존자는 대정현 관원에게 구속되어 제주로 호송되었고,[24] 효종에게 보고서를 올린 지방관 이원진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다.[2] 몇 달 후, 이원진은 새로운 지방관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는 하멜 일행에게 가혹했다.[2]
1655년 6월, 효종의 명으로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 소속 박연의 통역으로 국왕을 알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효종은 조선의 정책을 이유로 거절했다.[2] 조선 정부는 하멜 일행이 조선을 떠나는 것을 금지했지만,[2] 이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며 훈련도감에서 왕을 호위하는 병사로 복무하며 급여를 받았다.[2] 1656년에는 청나라 사신에게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2]
1659년 효종 사망 후, 현종 초 식량난으로 인해 하멜 일행은 전라도 남원, 순천, 좌수영 (현 여수) 세 곳으로 분산 수용되어 7년간 억류 생활을 했다.[27] 1660년부터 1663년까지 이어진 기근으로 전라 병영이 이들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전라 좌수영, 순천, 남원으로 분산되었다.
1666년 심각한 식량난과 일부 관리의 학대에 시달리던 하멜 등 8명은 어선을 타고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도착했다.[27] 이들은 여수를 출발한 지 2일 만에 고토 열도의 작은 섬에 도착했고,[24] 고토 모리카츠는 그들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보냈다. 나가사키 봉행의 마쓰다이라 진자부로는 이들이 기독교 선교사가 아닌지 심사한 후 네덜란드 상관에 인계했다.[24]
1668년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은[8],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조선과 일본에서 지낸 12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요구하여 보상금을 받았다. 이때, 하멜은 정식 보고서인 1653년 바타비아발 나가사키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를 회사에 제출했는데, 이 문서가 《하멜표류기》이다. 하멜은 평생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남겼다.[8] 그는 1692년까지 독신으로 미혼이었다.[8]
2. 1. 조선 표류 이전
고린켐(네덜란드)에서 1630년에 태어났다.[2][3] 하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8] 1650년,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항해하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다.[2]2. 2. 조선에서의 억류 (1653년 ~ 1666년)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회계원이었던 헨드릭 하멜은 무역선 "데 스페르베르"(De Sperwer, 네덜란드어로 '송골매')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난파되어 조선에 억류되었다.[24] 하멜을 포함한 36명의 생존자는 대정현의 관원에게 구속되어 제주로 호송되었다.[24]1655년 6월, 효종의 명으로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 소속 박연의 통역으로 국왕을 알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효종은 조선의 정책을 이유로 거절했다.[2]
조선 정부는 하멜 일행이 조선을 떠나는 것을 금지했지만,[2] 이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며 훈련도감에서 왕을 호위하는 병사로 복무하며 급여를 받았다.[2] 1656년에는 청나라 사신에게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2]
1659년 효종 사망 후, 현종 초 식량난으로 인해 하멜 일행은 전라도 남원, 순천, 좌수영 (현 여수) 세 곳으로 분산 수용되어 7년간 억류 생활을 했다.[27] 1660년부터 1663년까지 이어진 기근으로 전라 병영이 이들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전라 좌수영, 순천, 남원으로 분산되었다.
1666년 심각한 식량난과 일부 관리의 학대에 시달리던 하멜 등 8명은 어선을 타고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도착했다.[27] 이들은 여수를 출발한 지 2일 만에 고토 열도의 작은 섬에 도착했고,[24] 고토 모리카츠는 그들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보냈다. 나가사키 봉행의 마쓰다이라 진자부로는 이들이 기독교 선교사가 아닌지 심사한 후 네덜란드 상관에 인계했다.[24]
2. 2. 1. 제주도 표착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회계원이었던 헨드릭 하멜은 무역선 "데 스페르베르"(De Sperwer, 네덜란드어로 '송골매')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이었다.[24] 1653년 7월, 한반도 남부 해안의 "켈파르츠 섬"(제주도)에서 난파되었고,[24] 8월 17일에는 가파도에서 난파되면서 제주도 해안 근처에 있던 당시 조선의 궨파트(현재는 대한민국의 제주)에 표착하게 되었다.[4][5][6] 승무원 64명 중 하멜을 포함한 36명이 생존하여 현지 대정현의 관원에게 구속되어 제주로 호송되었다.[24]나흘 뒤, 하멜과 선원들은 제주시로 이송되었다. 조선 효종에게 보고서를 올린 지방관 이원진은 10월에 27년 전 한국에서 난파되었던 네덜란드인 얀 얀세 벨테브레를 데려와 하멜과 그의 선원들과 대화하게 했다. 벨테브레의 도움으로 네덜란드인들은 이원진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다.[2]
제주도에 머무른 지 몇 달 후, 이원진은 새로운 지방관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는 하멜과 그의 선원들에게 가혹했다. 새로운 지방관은 이원진이 몇 달 전에 조선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 대한 답신을 받았는데, 답신은 선원들의 석방 가능성은 없지만, 한국 정부가 "그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줄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난파된 사람들을 서울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2] 한편, 일행은 버려진 배를 이용해 탈출하려 했으나 돛대가 부러져 무산되기도 했다.
2. 2. 2. 한양 압송과 훈련도감 근무
1655년 6월, 하멜과 일행은 효종의 명으로 서울로 압송되었다.[2] 이들은 한양에서 훈련도감 소속으로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의 통역으로 국왕을 알현했다.[2] 벨테브레의 도움으로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효종은 조선의 정책을 이유로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2] 대신 효종은 이들에게 고향의 노래와 춤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2]조선 정부는 관례에 따라 하멜 일행이 조선을 떠나는 것을 금지했지만,[2] 이들은 조선 사회 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2]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왕을 호위하는 병사로 복무하며 급여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인 지주가 관리하는 곳에서 살면서 왕을 호위하는 임무 외에도 집안일을 도왔다.[2]
2. 2. 3. 탈출 시도와 실패
1656년, 하멜 일행 중 두 명이 서울로 가는 청의 사신에게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2] 이 사건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2][5] 하멜은 청나라 사신이 조선 국왕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에 탈출 시도가 실패했다고 주장했다.2. 2. 4. 전라도 유배와 분산 수용
1659년 조선 효종이 사망한 후, 현종 1년에서 3년 사이에 닥친 식량난으로 인해 하멜 일행은 전라도 각지로 분산 수용되었다.[27] 이들은 남원, 순천, 좌수영 (현 여수) 세 곳으로 보내져 7년간 억류 생활을 했다.[27]하멜과 선원들은 전라도에서 "그 나라 풍습에 따라 잘 갖춰진 집, 가구, 정원"을 제공받았지만,[2] 이들의 안락함은 지휘관의 태도에 따라 달랐다. 어떤 지휘관은 가혹하게 대하며 추가적인 임무를 부과하기도 했다.[2] 때때로 이들은 구걸에 의존하기도 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신분 덕분에 많은 군중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었다.[2]
1660년 (현종)부터 1663년 (현종 3년)까지 이어진 기근으로 인해 전라 병영이 이들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되자, 하멜 일행은 전라 좌수영, 순천, 남원으로 분산되었다. 조선은 점차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하멜 일행은 때때로 면화 거래를 위해 주변을 항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후 탈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2. 5. 일본으로의 탈출
1666년 심각한 식량난과 일부 관리의 학대에 시달리던 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은 어선을 타고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도착했다.[27] 이들은 일본 관리에게 심문을 받은 후 약 1년간 체류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27]물가에 위치한 하멜과 해군 기지에 있던 일행들은 탈출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빠르게 인지했다. 원래 12명에서 8명으로 줄어든 일행은 조금씩 물품을 모으고, 현지 조선인으로부터 작은 어선을 구입하는 협상을 벌였다. 1666년 9월 4일, 조수 간만의 차가 좋은, 특히 어두운 날에 그들은 숙소를 떠나 배에 짐을 싣고 바다로 나섰다. 4일 후, 일본 배가 고토 열도 근처에서 하멜과 그의 선원들을 발견했다.[2]
하멜과 그의 선원 7명은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곳에서 네덜란드는 나가사키 항구의 인공 섬인 데지마에서 작은 무역 거점을 운영했다.[2] 협상 과정에서, 하멜의 요청에 따라 일본은 한국에 남아 있는 나머지 선원들에 대해 문의했다. 2년 후, 일본은 그들의 석방도 확보했다.
1666년 당시 여수를 출발한 지 2일 만에 고토 열도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24]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와 우호 관계에 있었고, 고토 열도의 영주였던 고토 모리카츠는 그들을 보호하여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보냈다. 나가사키 봉행의 마쓰다이라 진자부로는 표류를 위장한 기독교 선교사가 아닌지 엄격하게 심사한 후 네덜란드 상관에 인계했다.[24]
2. 3. 귀국과 하멜표류기 저술 (1668년 ~ 1692년)
1668년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과 동료들은 소속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조선과 일본에서 지낸 12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요구하여 보상금을 받았다. 이때 하멜은 정식 보고서인 1653년 바타비아발 나가사키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를 회사에 제출했는데, 이 문서가 《하멜표류기》이다. 하멜은 평생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를 남겼다. 이후 하멜은 인도로 항해하기도 하였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정보 외에는 이후 생활은 미상이다. [8] 그는 1692년까지 독신으로 미혼이었다.[8]하멜은 고향 홀쿰으로 돌아와 1692년에 사망했다.
3.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
하멜이 남긴 기록은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로 나뉜다. 《하멜표류기》는 표류와 억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이며, 《조선왕국기》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풍습 등을 서술한 부록이다.
《하멜표류기》의 네덜란드어 원제는 《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ie van 't Jacht de Sperwer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이다. 문맹이었던 대다수 선원과 달리, 하멜은 글을 아는 서기였기에 조선에서의 체험을 날짜, 마을 이름, 거리, 언어 등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다.[29]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피고용인으로서의 임무이기도 했다.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는 서구인의 시각에서 당시 조선을 관찰한 귀중한 자료다. 조선의 정치·외교·교육·종교[30]·문화·사회상·언어를 다루고 있으며, 서양에 조선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하여 알린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하멜표류기》를 근거로 조선과 무역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포기했다.
하멜의 책은 1670년 프랑스어, 1672년 독일어, 1705년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 여러 차례 재출판 및 재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한글의 예시는 없지만, 한국인들이 한자 외의 다른 문자를 사용한다는 최초의 서양 기록 중 하나를 담고 있다.[9]
하멜은 1627년 (인조 5년)에 일본으로 가던 중 조선에 표류한 얀 야너스 벨테브레를 만났다.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왕을 섬기며 통역과 심문을 담당했다. 하멜 일행은 왕에게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조선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거절당했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병사로 배속되어 조선 국왕으로부터 급여를 받으며 생활했다.
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을 노예처럼 취급하며 행동을 제한했다. 일행 중 두 명은 청나라 사신에게 송환을 호소했지만, 조선은 청 사신에게 뇌물을 보내 이를 무마했다. 이후 하멜 일행은 전라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관리의 의향에 따라 급여를 받지 못해 구걸을 하거나, 열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1660년(현종 원년)부터 1663년(현종 3년)까지 이어진 기근으로 인해 순천, 남원 등으로 분산되기도 했다.
하멜은 조선 왕조가 청나라에 종속되어 있지만, 만주족을 "오랑캐"로 멸시하는 점, 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군현제를 시행하는 점, 형벌의 잔혹성, 남존여비 사상, 조선인의 의식주 빈곤 등을 기록했다.
하멜의 유산은 네덜란드와 대한민국 간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의 수단이 되었으며, 양국 모두에 그의 기념관이 존재한다.[11][10]
3. 1. 긍정적/부정적 묘사
하멜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보고 느낀 조선 사회의 모습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 측면 모두 기록했다.하멜은 조선의 사회 제도와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이 청나라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만주족을 "오랑캐"로 멸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봉건 사회에서의 영주가 존재하지 않는 군현제 사회라고 설명했다.
하멜은 조선의 가혹한 형벌 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특히, 남편을 살해한 아내를 길가에 묻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톱으로 목을 썰게 하는 형벌이나, 과실치사범에게 시큼한 물을 먹이고 막대기로 배를 때려 죽이는 형벌 등을 상세히 묘사하며 조선의 잔혹성을 부각했다.[25]
또한, 하멜은 일반 백성들의 집은 초라한 반면, 대관들의 집은 훌륭하지만, 이는 신분에 따라 건축 양식이 제한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멜은 조선 사회의 남존여비 사상과 여성 차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조선인들이 아내를 여자 노예와 같이 취급하며, 사소한 이유로 아내를 내쫓는다고 기록했다.
하멜은 조선인들의 부정직함과 잔인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조선인들이 도둑질, 거짓말, 속임수에 능하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묘사했다.
또한, 전염병 환자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침을 뱉는 풍습을 언급하며 조선인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했다.
이러한 하멜의 부정적인 묘사는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인들에게 자아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26]
3. 1. 1. 긍정적 묘사
하멜은 조선의 풍습과 생활에 대해 기록하면서, 조선인의 자녀 교육 열의와 유교 도덕에 따른 예절 중시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25]3. 1. 2. 부정적/비판적 묘사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 처음에는 정중한 대우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이 해안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싶어하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일본에서 온 스파이라는 억측까지 더해져, 이들의 운명은 더욱 불확실해졌다.[25] 하멜 일행은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끌려가 왕(효종)에게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고, 훈련도감의 병사로 배속되어 조선 국왕으로부터 급여를 받게 되었다.조선인들은 하멜 일행을 노예와 다름없이 취급하며 행동을 제한했다. 참다못한 일행 중 두 명이 청의 사신에게 송환을 호소했지만, 이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조선은 청 사신에게 뇌물을 보내 이 사건을 무마했고, 하멜 일행은 전라도로 보내졌다.[25] 그곳에서의 생활은 관리의 의향에 따라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구걸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1659년(효종 9년)에는 열병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1660년(현종 원년)부터 1663년(현종 3년)까지 이어진 기근으로 인해 전라 병영이 이들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순천, 남원 등으로 분산되었다.[25]
하멜은 조선의 풍습과 체류 중 생활에 대해 기록하면서, 조선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묘사했다. 그는 조선의 형벌이 잔혹하며, 특히 국왕에 대한 반역죄는 심한 고문과 극형에 처해진다고 기록했다. 또한,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하여 여성을 노예와 같이 취급하고, 사소한 죄로 아내를 내쫓는 일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25]
하멜은 조선인들이 도둑질, 거짓말, 속임수에 능하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또한, 환자, 특히 전염병 환자를 매우 싫어하여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환자 옆을 지날 때는 침을 뱉는다고 기록했다.[25] 이러한 하멜의 기록은 당시 조선인에 대한 악의적인 인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 내에서도 자학적으로 인용되기도 한다.[26]
4. 평가와 영향
하멜의 기록은 서양에 조선을 알린 최초의 상세한 기록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 기록에는 한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한국인들이 한자 외의 다른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기록 중 하나이다.[9] 이 기록은 당시 조선 사회에 대한 중요한 1차 사료로 활용된다.
2002년 FIFA 월드컵을 계기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 소개되면서 하멜도 함께 알려졌다. 하멜의 고향인 호린헴에는 하멜 동상이 세워졌고, 그가 7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에는 2007년 8월에 하멜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일본 나가사키시에도 하멜 기념관이 있다. 한국방송의 다큐멘터리 〈KBS스페셜〉에서는 서양인 배우의 재연극과 네덜란드 현지 취재를 통해 하멜의 조선 억류 생활과 귀국 후 생활을 보도했다. 2003년에는 국립제주박물관에서 《하멜표류기》 육필 원고 원본을 공개[31]했고, 서귀포시는 당시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을 85% 규모로 축소 제작하여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다.[32]
하멜의 책은 1670년 프랑스어, 1672년 독일어, 1705년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여러 차례 재출판 및 재번역되었다.
하멜의 유산은 네덜란드와 대한민국 간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의 수단이 되었으며, 양국 모두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11][10]
5. 기념 사업
2002년 FIFA 월드컵을 통해 유명해진 축구 감독 거스 히딩크가 네덜란드에 소개되면서 헨드릭 하멜도 알려지게 되었다. 하멜의 고향 호린험에는 하멜 동상이 세워졌고, 하멜이 조선에 억류되어 7년간 체류했다고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에도 2007년 8월경 하멜 기념관이 완공되었다. 일본 나가사키시에도 하멜 기념관이 있다.[31] 대한민국 국립제주박물관에서는 《하멜표류기》 육필 원고 원본을 공개하였고, 서귀포시에서는 당시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을 85% 규모로 축소 제작하여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다.[32]
1930년 7월 7일, 고린켐의 링게 지구에 있는 거리가 그의 이름을 기려 "헨드릭 하멜 거리"(Hendrik Hamel straatnl)로 명명되었다. 이 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하멜의 조각상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고린켐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강진군에 있다.[8] 2015년 6월 4일, 고린켐에 헨드릭 하멜 박물관이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2009년 대한민국 외교부와 하멜 재단 간의 협약을 통해 설립되었다.[10][11]
대한민국에는 하멜을 기리는 여러 박물관과 기념물이 있다. 강진에는 박물관이 있으며,[13][14] 제주도에는 배 모양의 전시관이 있고,[15] 여수 하멜 전시관이 있다.[16] 또한 여수에는 높이 10m의 "하멜 등대"가 서 있다.[17] 1997년 12월 30일, 하멜의 책에 언급된 것으로 여겨지는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가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18]
2012년, 네덜란드 국립 기록원은 하멜의 일기 사본을 여수 하멜 전시관에 기증했다.[19]
6. 대중문화 속 하멜
- 헨드릭 하멜은 잭 런던의 1915년 소설 '''''스타 로버''''' (영국에서는 '''''더 재킷'''''으로 출판)에 등장하며, 17세기 한국에서 난파된 주인공의 동료로 나온다.
- 2007년 만화 ''탐나는도다''와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2009년 대한민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등장인물 윌리엄은 하멜을 모델로 하고 있다. 드라마의 일부 줄거리와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하멜의 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23]
참조
[1]
서적
The Tragedy of Korea
https://books.google[...]
Hodder and Stoughton
2024-02-26
[2]
서적
The Dutch Come to Korea
Royal Asiatic Society
[3]
웹사이트
Hendrick Hamel
http://www.hendrick-[...]
[4]
웹사이트
Gapado Island (가파도)
http://english.visit[...]
2023-10-01
[5]
서적
Corea Without and Within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6]
서적
Korea: A Walk Through the Land of Miracles
Prentice Hall Press
[7]
웹사이트
[Seoul travels] Walking in Hamel's footsteps in the Gwanghwamun area
https://english.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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