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스트 베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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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르스트 베셀은 1907년 독일에서 태어난 인물로,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자 나치당 돌격대(SA)의 대원이었다. 그는 1929년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가사를 썼으며, 이 노래는 나치 독일의 공식 국가가 되었다. 1930년 베셀은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었고, 나치당은 그의 죽음을 선전하여 순교자로 숭배했다. 그의 이름은 도시와 군사 부대에 붙여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묘지는 훼손되었고, 네오 나치 단체들이 그의 이름을 상징으로 사용하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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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스트 베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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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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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호르스트 루트비히 게오르크 에리히 베셀 |
출생일 | 1907년 10월 9일 |
출생지 | 빌레펠트, 베스트팔렌 주, 독일 제국 |
사망일 | 1930년 2월 23일 |
사망지 | 독일, 베를린 |
사망 원인 | 총상 치료 중 패혈증 |
소속 | 돌격대 (SA) |
정당 | 나치당 (1926–1930) |
관련 항목 |
2. 초기 생애
호르스트 루드비히 게오르크 에리히 베셀은 1907년 10월 9일 독일 베스트팔렌의 빌레펠트에서 루터교 목사인 빌헬름 루드비히 게오르크 베셀(1879년 7월 15일 출생)과 그의 아내 베르타 루이제 마르가레테 베셀(결혼 전 성씨: 리히터) 사이에서 태어났다.[9]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루터교 목사 집안 출신이었다.[9] 베셀의 부모는 1906년 5월 1일에 결혼했다.[9] 그는 누나 잉게보르크 파울라 마르가레테(1909년 5월 19일 출생)와 남동생 베르너 게오르크 에리히 루드비히(1910년 8월 22일 출생)와 함께 자랐다.[9] 1913년 베셀의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위덴슈트라세에 살았다.[9]
베셀은 베를린에서 여러 중등학교에 다녔다. 쾨르니셰스 김나지움 (1914년-1922년), Königstädtisches Gymnasiumde, 프로테스탄트 그레이 클로이스터 김나지움을 거쳐 Luisenstädtisches Gymnasiumde에서 아비투어 시험에 합격했다.[1] 1926년 4월 19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이후 베셀은 "올림피아 독일 체육 협회" 등 평판이 좋지 않은 단체에도 가입했다.[9]
1929년 12월 22일, 베셀의 동생 베르너와 돌격대 및 나치당의 다른 당원 3명이 스키 여행 중 사망했다.[2]
2. 1. 청소년기 활동
호르스트 베셀은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으로 군주주의 성향의 독일 국가 인민당(DNVP)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15세에 DNVP의 청소년 단체인 비스마르크유겐트에 가입했다.[9] 1925년에 이 단체에서 탈퇴했다.베셀은 "우리 소년들을 진정한 독일인으로 키우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자신의 청소년 단체인 '크납샤프트'를 설립했다. 또한 헤르만 에르하르트가 설립한 준군사 단체인 비킹 리가에 가입했는데, 이 단체의 명시된 목표는 "회원들의 정신 교육을 통해 국가적, 민족적 기초 위에 독일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9] 베셀은 바이킹 연맹을 "국가 독재 정권 수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고 묘사했다. 그는 곧 지역 지도자가 되어, 독일 사회민주당(SPD) 및 독일 공산당(KPD)과 같은 적대 단체의 청년들과 거리에서 싸움을 벌였다.
3. 나치당 입당과 활동
베셀은 1926년 12월, 19세의 나이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과 돌격대(SA)에 입당했다.[2] 바이킹 리그 활동 당시 의회 정치 시스템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실망하여 나치당에 합류했으며, 바이킹 리그 동료 대다수가 이미 SA와 나치당에 가입했다고 언급했다.[3]
베셀은 베를린의 가울라이터(지역 지도자)였던 요제프 괴벨스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괴벨스를 "당 동지들은 그에게 깊이 헌신했다. SA는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괴벨스 - 그는 히틀러 그 자체였다."라고 묘사했다.[4]
1926년 베를린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한 베셀은 법학 공부와 동시에 나치당 및 돌격대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베를린 돌격대 제4연대 제1중대에 배속되어 두각을 나타냈으며, 1929년 제54소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제54소대는 제4연대 제5중대로 승격되었고, 베셀은 중대장으로 승진했다. 프리드리히스하인구는 독일 공산당의 근거지였다.
3. 1. 돌격대 활동

1926년 12월 7일, 베셀은 19세의 나이로 바이킹 리그에서 사임한 후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무장 조직인 돌격대(SA)에 입대했다.[2] 그는 바이킹 리그 동료들 상당수가 이미 SA와 나치당에 가입했다고 언급했다.[3]
베셀이 나치당에 매력을 느낀 이유 중 하나는 베를린의 ''가울라이터''(지역 지도자) 요제프 괴벨스였다. 베셀은 괴벨스에 대해 "당 동지들은 그에게 깊이 헌신했다. SA는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괴벨스는 히틀러 그 자체였다."라고 묘사했다.[4]
괴벨스가 조성한 분위기는 우익 청년들이 기존 조직을 떠나 나치당으로 합류하도록 만들었다.[5] 베셀은 중산층 대학 법대생이자 주로 노동계급의 SA 회원이자 두 개의 삶을 살았지만, 이념적으로는 두 세계가 수렴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결투 클럽에 가입하여 신체적, 도덕적 적합성을 시험하는 데 전념했으며, SA에서는 반유대주의적 태도에 몰입했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법 적용이 권력의 도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반유대주의적 신념을 굳혔다.[6]
1927년 8월, 베셀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당 전당 대회에 참석하여 큰 인상을 받았다. 당시 SA는 베를린에서 금지된 상태였지만, 베셀은 괴벨스가 이끄는 베를린 기반 나치 그룹과 함께 참석했다.[7]
1928년, 베셀은 괴벨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비엔나로 보내져 나치당의 조직 및 전술적 방법을 연구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그는 지역 청년들을 모집하고 독일 공산당(KPD)과 유사한 세포 구조로 도시의 NSDAP를 재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
1929년, 베셀은 SA 알렉산더플라츠 돌격대의 거리 세포 지도자가 되었고, 5월에는 프리드리히샤인의 SA 지역 지도자(''슈투름퓌러'')로 임명되었다. 10월에는 나치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다. 그해 베셀은 ''"깃발을 높이!"''("Die Fahne hoch!")의 가사를 썼는데, 이는 나중에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로 알려지게 된다. 베셀은 적색 전선 전사 연맹을 의식적으로 모방하여 SA를 위한 노래를 만들었으며, ''"깃발을 높이!"''의 음악은 공산주의 노래 책에서 가져온 것이었다.[9] 1929년 첫 11개월 동안 56번의 NSDAP 행사에 연설하여 괴벨스와 베를린 나치 지도부에 의해 효과적인 거리 연설가로 인정받았다.[10]
베셀의 프리드리히샤인 제5돌격대는 "폭력배 집단, 잔혹한 부대"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의 부하 중 한 명은 그들이 공산주의자(KPD)와 싸우는 방식에 대해 "테러는 반테러로만 파괴할 수 있다"는 히틀러의 원칙을 따랐다고 묘사했다.[11]
1929~30년, 베를린에서 나치당과 공산당 및 좌익 정당들 간의 폭력은 사실상 내전 상태였고, 경찰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폭력은 히틀러로부터 "붉은 베를린"에서 나치 세력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은 괴벨스에 의해 장려되었다. 베셀은 비스마르크 청년단과 바이킹 연맹에서의 경험과는 달리 괴벨스의 폭력적인 접근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베셀은 학창 시절 승마 사고로 팔을 여러 번 부러뜨려 변형되었고, 체육 수업 면제를 영구적으로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킹 연맹에서 복싱과 무술을 연습했고, 유술을 숙달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의 신체적 한계는 거리 싸움에서 완전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는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보상하기 위해 수사법을 높였을 것이다.
괴벨스의 명령에 따라 베셀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출몰하는 극빈 지역인 피셔키에즈에 SA를 이끌고 여러 차례 침공하여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이러한 선동 중 일부는 사소한 충돌이었지만, 한 번은 지역 공산당(KPD) 본부로 사용되던 술집 밖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으로 공산주의자 5명이 부상을 입었고, 공산주의 신문과 나치 신문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베셀은 KPD에 의해 죽음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얼굴과 주소가 거리 포스터에 실렸다. KPD와 적색 전선 전사 연맹의 슬로건은 "파시스트를 발견하는 곳마다 공격하라"가 되었다.
1926년 베를린 대학교법학부에 입학, 같은 해 12월 17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스) 및 돌격대에 입당했다. 1928년 대학교를 중퇴하고 택시 운전사 등의 일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다.
베를린 돌격대 제4연대 제1중대에 배속된 후 두각을 나타내 1929년에는 동 중대 제54소대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동 소대는 제4연대 제5중대로 승격, 본인도 중대장으로 승진했다. 동 중대가 관할하는 프리드리히스하인구는 독일 공산당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3. 2.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작사
Horst-Wessel-Lied|italic=node(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베셀이 1929년에 작사한 "캄프리트"(Kampflied, 투쟁가)라는 나치 투쟁가에서 유래했다. 이 가사는 9월에 괴벨스의 신문인 ''데어 안그리프''에 "데어 운베칸테 SA-만"(Der Unbekannte SA-Mann, 미지의 SA-사나이)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게재되었다.[3] 이 노래는 나중에 "디 파네 호흐"(Die Fahne Hoch, 깃발을 높이)로 알려졌고, 최종적으로 "Horst-Wessel-Lied|italic=node"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3] 나치는 이 노래를 공식 국가로 지정했고, 권력을 잡은 후에는 Deutschlandliedde(독일의 노래)의 첫 번째 절과 함께 나치 독일의 공동 국가가 되었다. 이 노래는 또한 독일 개신교 교회의 일부가 과거 기독교 순교자 모델을 기반으로 괴벨스가 구축한 호르스트 베셀 숭배를 수용하고 선포했기 때문에 일부 개신교 예배 장소에서도 연주되었다.나치 측은 나중에 베셀이 이 노래의 음악도 작곡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 곡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의 노래를 개작한 것이며, 원래 민요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졌다. 1937년 독일 법원은 최종적으로 베셀이 멜로디의 작곡가가 아니라고 결정했다.
4. 사망
1930년 1월 14일, 호르스트 베셀은 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독일 공산당원 알브레히트 횔러에게 총격을 당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약 한 달 후인 2월 23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11]
이후 베셀의 장례식은 나치당의 주요 선전 행사로 활용되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베셀의 죽음을 이용하여 나치즘 선전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4. 1. 피격 배경
1930년 1월 14일, 호르스트 베셀은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 조직 적색 전선 전사 동맹 대원 Albrecht Höhler|알브레히트 횔러de에게 총격을 받았다.[11] 베셀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2월 23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22세였다.이 사건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베셀은 매춘부 Erna Jaenichen|에르나 예니헨de과 애인 관계였고, 엘리자베트 잘름(Elisabeth Salm) 미망인의 집에서 함께 하숙하며 동거했다. 잘름 미망인이 두 사람 몫의 집세를 요구하자 베셀은 이를 거부했다. 남편이 적색 전선 전사 동맹 대원이었던 잘름 미망인은 횔러에게 베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견책"을 의뢰했다.
그러나 베셀과 적대 관계에 있던 횔러는 집세 문제는 무시하고 베셀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에르빈 뤼케르트(Erwin Rückert)와 함께 베셀의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베셀이 문을 열자 횔러는 베셀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고, 총알은 입을 관통했다.[11]
4. 2. 암살범과 재판
1930년 1월 14일, 호르스트 베셀은 독일 공산당의 준군사 조직 적색 전선 전사 동맹의 대원인 알브레히트 횔러에게 총격을 받았다.[11] 베셀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2월 23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22세였다.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베셀은 매춘부 에르나 예니헨(Erna Jaenichen)과 애인 관계가 되어 프랑크푸르트 거리에 있는 엘리자베트 잘름(Elisabeth Salm) 미망인의 집에 함께 하숙하며 동거했다. 잘름 미망인이 두 사람 몫의 집세를 요구하자 베셀은 이를 거부했다. 사망한 남편이 적색 전선 전사 동맹의 대원이었던 잘름 미망인은 횔러에게 베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견책"을 의뢰했다.
그러나 횔러는 집세 징수를 제쳐두고 베셀을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에르빈 뤼케르트(Erwin Rückert)와 함께 베셀의 방으로 향했다. 베셀이 문을 열자 횔러가 베셀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고, 그 총알이 입을 관통했다.[11]
횔러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이후 나치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1933년, 게슈타포 수장 루돌프 딜스와 SA(돌격대) 대원들에 의해 감옥에서 끌려 나와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베셀 암살 5년 후이자, 횔러가 SA에 의해 살해된 지 2년 후인 1935년 4월 10일, 베셀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된 유대인 화가 샐리 엡스타인과 이발사 한스 지글러는 베를린의 플뢰첸제 감옥에서 참수되었다. 이 두 사람은 1933년 8월에 체포되었고, 재단사 페터 스톨과 함께 1934년 5월에 재판을 받았다. 2009년, 베를린 검찰청은 이 세 사람에 대한 모든 판결을 취소했다.
5. 나치 순교자로의 숭배
요제프 괴벨스는 호르스트 베셀의 죽음을 이용하여 그를 나치 운동의 순교자로 만들었다. 베셀의 죽음은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괴벨스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베셀의 장례식 참석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1933년 1월 22일 베셀 사망 3주년 기념비 헌정식에서 히틀러가 연설하도록 했다. 히틀러는 베셀을 "피의 증인"이라 칭하며, 그의 노래가 "수백만 명을 위한 투쟁 찬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베셀의 희생은 "돌과 청동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기념비"라고 덧붙였다.[4]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SA와 SS 16,000명은 카를 리프크네히트 하우스 앞, 뷜로플라츠(로자 룩셈부르크 광장)를 행진했다. 괴벨스는 이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의적인 도발이자 "끔찍한 패배"라고 칭하며, "당을 위한 SA의 자랑스럽고 영웅적인 승리"라고 불렀다.
같은 날 밤 히틀러는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추도식을 열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중 "장송 행진곡"을 연주하게 했다. 무대는 "월계수 나무, 가지, 촛대, 베셀의 실물보다 큰 초상화"로 꾸며졌다. 히틀러는 "자신의 시대의 위대한 임무에 헌신하는 광신자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나중에 그들의 투쟁의 순교자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수확의 씨앗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33년 3월 21일, 포츠담의 날에 괴벨스는 정교한 축하 행사를 조직하여 새로운 국회의사당 개원을 기념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교회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베셀을 포함한 나치 "혁명의 순교자"의 무덤에 화환을 바쳤다.
베셀의 죽음과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레오 슈라게터와 1923년 뮌헨 폭동에서 사망한 나치 당원들을 포함하는 나치 순교자 숭배의 연장선이었다.[4]
괴벨스는 베셀의 "순교"를 계속해서 선전에 사용했다. 1934년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서 히틀러 유겐트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호르스트 베셀을 따른다"라는 가사를 포함한 반기독교적 노래를 불렀다. 베셀의 이름은 나치 독일에서 국가 사회주의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자주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베셀을 "갈색 혁명의 영웅"이라고 부르며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수백만 명을 열정적으로 불태웠다"고 언급했다.
베셀은 요제프 괴벨스가 발행하던 신문 데어 아그리프에 정치시를 기고하여 괴벨스의 주목을 받았다. 괴벨스는 베셀을 순교자로 영웅화하는 캠페인을 벌여, 베셀이 쓴 시를 가사로 한 "깃발을 높이 든다"를 작곡하게 했다. 이 노래는 후에 나치당의 당가가 되었다.
한편 공산당은 총격 사건 다음 날 "사건은 호객꾼끼리의 싸움으로 베셀은 호객꾼이었다"라고 발표했다.[4] 실제로는 베셀은 매춘부와 동거했을 뿐 호객꾼은 아니었지만, 공산당은 사건을 사적인 대립으로 축소하려 했다.[4]
괴벨스는 베셀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만, 공산당원들은 장례식을 조롱하며 방해했다. 괴벨스는 당시 상황을 "그의 관이 차가운 흙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밖의 문 앞에서는 하등 인간들이 방탕한 외침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있는 죽은 자는 그 연약한 손을 들어 저물어 가는 저편을 가리켰다. '무덤을 넘어 나아가라. 목표로 하는 곳에 독일이 있다!'"라고 묘사했다.[4]
아돌프 히틀러는 처음에는 베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중에 베셀이 영웅화된 후에야 그의 묘소를 참배했다.[4]
베셀의 전설은 나치당의 의도적인 선전보다는, 공산당의 "베셀은 호객꾼"이라는 주장과 이에 대한 나치당의 반발이 결합된 결과였다.[4]
5. 1. 장례식과 선전
요제프 괴벨스는 호르스트 베셀의 죽음을 나치 선전에 적극 활용했다. 베셀의 장례식은 대규모 선전 행사로 기획되었으며, 괴벨스는 이를 통해 나치 지지자들의 결속을 다지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려 했다.[4] 1930년 3월 1일 베를린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프란츠 페퍼 폰 잘로몬, 헤르만 괴링,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등 나치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다.[5]장례 행렬은 베를린 중심부를 지나 뷜로플라츠(현재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야유를 보내고 방해를 시도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큰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6] 하지만, 누군가가 묘지 벽에 "포주 베셀에게 마지막 히틀러 만세"라는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7]
괴벨스는 베셀을 나치 운동의 주요 순교자로 격상시켰고,[8] 그의 죽음은 나치 선전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베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붉은 베를린"에서의 공격 위험이 크다는 헤르만 괴링의 조언 때문이었다.[9]
5. 2.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확산
베셀이 작사한 Horst-Wessel-Lied|호르스트 베셀의 노래de는 나치당의 공식 당가(黨歌)로 지정되었고, 나치 집권 후에는 Deutschlandlied|독일의 노래de 첫 번째 절과 함께 나치 독일의 공동 국가(國歌)가 되었다.[4] 이 노래는 나치 독일 전역에서 널리 불렸으며, 베셀의 순교자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베셀은 금관악기인 마르틴스호른을 연주했는데,[4] 이는 "샬마이 오케스트라 또는 밴드"라고 불리는 그룹에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민속 축제에서 사용된다.[4] 베셀은 SA 행사에서 음악을 제공하는 "SA 샬마이카펠레" 밴드를 창설했다.[4] 1929년 초, 베셀은 새로운 나치 투쟁가 "캄프리트"(Kampflied, "투쟁가")의 가사를 썼고, 이 가사는 9월에 괴벨스의 신문인 데어 안그리프에 "데어 운베칸테 SA-만"(Der Unbekannte SA-Mann, "미지의 SA-사나이")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게재되었다.[4] 이 노래는 나중에 "디 파네 호흐"(Die Fahne Hoch, "깃발을 높이")로 알려졌고, 최종적으로 Horst-Wessel-Lied|호르스트 베셀의 노래de로 불리게 되었다.[4]
나치 측은 나중에 베셀이 이 노래의 음악도 작곡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 곡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의 노래를 개작한 것이며, 원래 민요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졌다.[4] 1937년 독일 법원은 최종적으로 베셀이 멜로디의 작곡가가 아니라고 결정했다.[4]
이 노래는 또한 독일 개신교 교회의 일부가 과거 기독교 순교자 모델을 기반으로 괴벨스가 구축한 호르스트 베셀 숭배를 수용하고 선포했기 때문에 일부 개신교 예배 장소에서도 연주되었다.[4]
베셀은 나치당 베를린 대관구 지도자 요제프 괴벨스가 발행하던 신문 데어 아그리프에 정치 시를 투고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괴벨스의 관심을 끌었다. 괴벨스는 즉시 베셀을 순교자로 철저하게 영웅화하는 캠페인을 벌여, 베셀이 쓴 시를 가사로 '깃발을 높이 든다'를 작곡하게 했다. 그리고 베셀이 아직 생존해 있던 2월 7일에 이미 스포츠궁전에서 당 집회를 열어 그것을 부르게 했다.[4] 이 '깃발을 높이 든다'는 후에 당가가 된다.
한편 공산당은 총격 사건 다음 날 "사건은 호객꾼끼리의 싸움으로 베셀은 호객꾼이었다"라고 총괄했다.[4] 실제로는 베셀은 매춘부와 동거했을 뿐 호객꾼은 아니었지만(참고로 횔러는 정말 호객꾼이었다), 공산당으로서는 사건에 당의 운동상의 대립의 면이 있다는 것을 은폐하고 사적 대립으로 치부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4]
3월 1일에는 괴벨스가 베셀의 장례식을 거행했지만, 공산당원들은 "호객꾼 베셀에게 마지막 하일 히틀러"라고 장례식을 조롱하는 현수막을 내걸거나, 묘지 밖에서 투석하는 등의 방해를 했다. 괴벨스는 그 당시의 정경을 비장하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의 관이 차가운 흙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밖의 문 앞에서는 하등 인간들이 방탕한 외침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있는 죽은 자는 그 연약한 손을 들어 저물어 가는 저편을 가리켰다. '무덤을 넘어 나아가라. 목표로 하는 곳에 독일이 있다!'"[4]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는 사건 당시 베셀이 나치당의 영웅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괴벨스가 평소처럼 죽은 돌격대원을 아무렇게나 순교화하고 있을 뿐이라고 냉담하게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베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히틀러는 베셀이 영웅화된 후에야 비로소 묘소를 참배했다).[4]
결국, 베셀의 전설은 나치당이 의도적으로 퍼뜨렸다기보다는, 공산당이 자당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베셀은 호객꾼"이라는 대대적인 선전을 했고, 이에 반발한 나치당이 더욱 베셀을 순교자화했으며, 그 화려한 선전전의 끝에 태어난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르스트 베셀 전설은 나치당과 공산당의 합작품이었다.[4]
6. 나치 시대의 유산
요제프 괴벨스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베셀의 장례식 참석을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히틀러는 1933년 1월 22일 베셀의 사망 3주년 기념비 헌정식에서 연설했다.[4] 히틀러는 베셀을 "피의 증인"이라 칭하며, 그의 노래가 "수백만 명을 위한 투쟁 찬가"가 되었다고 말했다.[4] 그는 베셀의 희생이 "돌과 청동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기념비"라고 말했다.[4]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돌격대(SA)와 친위대(SS) 16,000명이 카를 리프크네히트 하우스—공산당 본부 앞, 뷜로플라츠(현재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를 행진했다.[4] 괴벨스는 이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끔찍한 패배"이자 "당을 위한 SA의 자랑스럽고 영웅적인 승리"라고 칭했다.[4] "히틀러, 괴벨스, 에른스트 룀과 [당]의 다른 고위 관리들이 이끄는 거대한 행렬이... 성 니콜라스 묘지로 행진하고... 히틀러는 베셀의 죽음을 상징적인 희생으로 언급했다."[4]
그날 밤 히틀러는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추도식을 열어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의 "장송 행진곡"을 연주하고 무대를 제단처럼 꾸몄다.[4] 히틀러는 "자신의 시대의 위대한 임무에 헌신하는 광신자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나중에 그들의 투쟁의 순교자일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수확의 씨앗[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4]
1933년 3월 21일, 괴벨스가 조직한 포츠담의 날 행사에서 히틀러와 괴벨스는 베셀을 포함한 나치 "혁명의 순교자"의 무덤에 화환을 바쳤다.[4] 베셀의 죽음과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레오 슈라게터와 1923년 뮌헨 폭동에서 사망한 나치 당원들을 포함하는 나치 순교자 숭배의 연장선이었다.[4]
괴벨스는 수년간 베셀의 "순교"를 선전했다. 1934년 뉘른베르크 당 대회에서 히틀러 유겐트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호르스트 베셀을 따른다"라는 반기독교적 노래를 불렀다.[4] 나치 소유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베셀을 "갈색 혁명의 영웅"이라 칭하며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수백만 명을 열정적으로 불태웠다"고 언급했다.[4]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베셀이 사망한 병원은 "호르스트 베셀 병원"으로 개명되었고, 그의 이름을 딴 지명 변경도 잇따랐다. 베셀의 살해범 알브레히트 횔러는 1933년 9월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서 사살되었다.
베셀과 아버지의 묘는 베를린 판코구의 St.-Marien- und St.-Nikolai-Friedhof Ide에 있었다. 이 묘석은 독일 재통일 후 극우의 순례, 더 나아가 극좌의 파괴 행위의 대상이 되어, 2013년에 철거되었다.
6. 1. 개명과 명명
베셀이 사망한 후, 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은 "호르스트 베셀 시"로 개명되었고, 미테 지역의 뷜로플라츠는 1933년 5월 26일에 "호르스트-베셀-플라츠"로 개명되었다.[5] 인근의 U-Bahn역도 개명되었다.[5] 전쟁 후, 프리드리히샤인이라는 이름이 복원되었고, 호르스트-베셀-플라츠(당시 동베를린에 위치)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이름을 따서 "리프크네히트플라츠"가 되었다.[5] 1947년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룩셈부르크-플라츠"로 개명되었으며, 1969년부터는 "로자-룩셈부르크-플라츠"로 불리고 있다.[5] 파사우는 "호르스트-베셀-슈트라세"라는 거리를 명명했다.[5]1936년, 나치 독일의 ''크리그스마리네(해군)는 삼돛 훈련선을 건조하여 ''호르스트 베셀''로 명명했다.[6] 이 선박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 의해 전리품으로 획득되었다.[6] 수리와 개조를 거쳐 1946년 5월 15일 미국 해안 경비대에 USCGC ''이글''(WIX-327)로 취역했으며, 오늘날까지 운용되고 있다.[6]
1938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이더슈테트 농촌 지역의 간척지는 "호르스트 베셀 간척지"로 명명되었다.[7] 1년 후, 베셀이 ''아비투어'' 시험을 치른 베를린의 학교는 호르스트-베셀-김나지움으로 개명되었다.[1]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시대 "순교자"의 이름을 채택한 독일 군사 부대로는 "호르스트 베셀" 사단으로 알려진 제18 SS 의용 기갑척탄병 사단과 루프트바페의 제26 구축함(또는 중전투기) 비행단 ''체르슈토러게슈바더 26'' 및 그 후계 주간 전투기 부대 ''야크트게슈바더 6''가 있으며, 이 또한 "호르스트 베셀" 비행단으로 명명되었다.[8] 1936년에 창설된 야크트게슈바더 134와 야크트게슈바더 142 역시 베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6. 2. 영화 "한스 베스트마"
요제프 괴벨스는 베셀의 생애를 다룬 영화 한스 베스트마: 많은 이들 중 하나의 선전 방식이 조잡하다며 상영을 금지했다.[4] 이 영화는 나치 시대에 베셀의 삶을 이상화한 최초의 영화 중 하나였다.[4] 영화 음악을 작곡한 푸치 한프슈탱글은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친구이자 이 영화의 후원자로, 금지령에 대해 히틀러와 괴벨스에게 직접 항의했고, 결국 나치당 고위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아 금지령은 철회되었다.[4]괴벨스는 영화 수정을 요구했는데, 주인공의 이름을 허구의 인물인 "한스 베스트마"로 변경하는 것이 주된 수정 사항이었다.[4] 이 영화는 돌격대의 폭력적인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했지만, 권력을 잡은 나치는 이와 다른 모습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4] 베셀과 달리 베스트마는 계급 간 화해를 주장하고 가족을 소외시키지 않는다.[4] 이 영화는 히틀러를 위해 죽는 것을 독일을 위한 영광스러운 죽음과 연결 지었으며, 그의 정신이 동지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4]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셀의 묘는 동독에 묻힌 다른 나치 당원들의 묘와 마찬가지로 훼손되었고, 그의 유해는 파괴되었다.[1] 묘비 대부분은 잘려나가 금속 상징과 베셀의 이름이 제거되었다.[1] 2000년, 한 반파시스트 단체는 묘를 파헤쳐 그의 해골을 근처 슈프레 강에 던졌다고 주장했으나, 베를린 경찰은 묘가 훼손되지 않았고 유해도 제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1] 2011년에는 반나치 활동가 그룹이 베셀의 묘를 공격하여 묘비 잔해에 "Keine Ruhe für Nazis!"("나치에게 휴식은 없다!")라는 문구를 뿌렸다.[2] 2013년 8월, 묘비가 제거되었고 베셀의 아버지의 묘도 평평하게 만들어졌다.[3]
7. 1. 네오 나치의 상징 시도
현대 시대에 일부 네오 나치 단체들은 호르스트 베셀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부활시키려 시도했다.[4] 독일 국가민주당(NPD)의 청년 조직인 청년 국가민주당(JN)은 과거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회원들에게 영감을 주려 했다.[4]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독일 사회에서 큰 반발을 샀으며, 베셀의 묘는 네오 나치의 집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3년 8월에 평평하게 만들어졌다.[4] 교회는 이 장소가 네오 나치의 집결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1989년 이후 베셀의 묘비를 재건하고 성 니콜라스 묘지로 복원해 달라는 두 건의 청원은 모두 거부되었다.[4]8. 대중문화 속 묘사
9. 비판적 관점
호르스트 베셀은 나치 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신격화된 인물이다. 앨런 와이케스(Alan Wykes)는 "호르스트 베셀은 살아있는 당원으로서 했던 것보다 죽은 포주로서 나치 이미지에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했다.[4] 그는 폭력적인 돌격대(SA) 활동을 주도했으며, 그의 죽음 역시 개인적인 갈등과 정치적 폭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나치는 그의 실제 삶과 달리 선전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활용했다.
나치 정권은 베셀의 죽음을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화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 히틀러는 베셀을 "피의 증인"이라 칭하며, 그의 노래가 "수백만 명을 위한 투쟁 찬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SA와 SS 16,000명이 공산주의자 당 본부 앞을 행진했는데, 이는 괴벨스가 매우 자랑스러워했던 고의적인 도발 행위였다. 괴벨스는 베셀의 "순교"를 계속해서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한 그룹은 "우리는 어떤 기독교적 진리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호르스트 베셀을 따른다"라는 가사를 포함한 반기독교적 노래를 불렀다.[4] 베셀의 이름은 나치 독일에서 국가 사회주의 이념의 핵심 원칙을 강화하기 위해 자주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나치 소유의 신문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베셀을 "갈색 혁명의 영웅"이라고 부르며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수백만 명을 열정적으로 불태웠다"고 언급했다.
참조
[1]
웹사이트
Geschichte: HSG Berlin
https://hsg-berlin.d[...]
2024-02-05
[2]
논문
Street Fighters with Insurance Coverage: The Insurance System of the Nazi Storm Section (Sturmabteilung)
2021-12
[3]
웹사이트
Horst Wessel
https://spartacus-ed[...]
2022-11-01
[4]
뉴스
16 NAZI MARTYRS GET HONORS TODAY; Victims in the Munich Putsch of 1923 Will Be Placed in Memorial Temples.
https://timesmachine[...]
2022-09-02
[5]
서적
Hitlers Nibelungen
Samples Grafenau
[6]
웹사이트
Extremely Rare Nazi Book SA / Luftwaffe Squadron Horst Wessel
http://www.usmbooks.[...]
2018-01-03
[7]
웹사이트
Jagdgeschwader Horst Wessel
https://digitalcolle[...]
2018-02-22
[8]
웹사이트
Babylon Berlin Season 3 Review
https://matthewlegar[...]
Matthew Legare - Thriller Author
2020-03-15
[9]
문서
Lebendiges Museum Online(LeMO)
[10]
서적
Werke. Große kommentierte Berliner und Frankfurter Ausgabe. Suhrkamp
Suhrkamp, Frankfurt/M.
[11]
문서
Jewish Virtual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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