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고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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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사건으로, 원나라의 쇠퇴와 홍건적의 발흥, 그리고 고려의 반원 정책이 배경이 되었다. 1359년 1차 침공 당시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서북 지역을 약탈하고 평양을 점령했으나, 고려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1361년 2차 침공에서는 개경이 함락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고려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홍건적은 다시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여 고려 말 정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 조선 건국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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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고려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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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일부 | 홍건적의 난 |
시기 | 1차 - 1359년 12월, 2차 - 1361년 10월 |
장소 | 고려 서북면 서경, 개경 |
원인 | 원나라에서 홍건적의 난 발발 홍건적의 세력 확장 및 고려로의 도피 |
결과 | 고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고려 |
교전국 2 | 홍건적 |
지휘관 | |
고려 지휘관 (1차) | 안우 이음 이인우 김득실 이방실 김원봉† 김진 이암 경천흥 김득배 이춘부 이인임 이승경 |
고려 지휘관 (2차) | 정휘 안우 정세운 김득배 이방실 황상 안우경 이구수 최영 이성계 조천주 이여경 안우경 김경제 |
홍건적 지휘관 (1차) | 모거경 관선생 파두반 위평장 |
홍건적 지휘관 (2차) | 관선생† 파두반 사류† 주원수 위평장 |
병력 규모 | |
고려 병력 (1차) | 약 20,000명 |
고려 병력 (2차) | 개경 함락 이후 징집 인원 약 200,000명 |
홍건적 병력 (1차) | 약 40,000명 |
홍건적 병력 (2차) | 약 100,000명 |
피해 규모 | |
고려 피해 (1차) | 군인 약 10,000명 민간인 약 50,000명 |
고려 피해 (2차) | 군인 약 30,000명 민간인 약 300,000명 |
홍건적 추정 피해 (1차) | 고려는 약 39,700명으로 추측 |
홍건적 추정 피해 (2차) | 고려는 약 100,000명으로 추측 |
2. 침공 배경
14세기 중반, 원나라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은 고려 침공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357년 유복통의 지휘 아래 시작된 홍건적의 대규모 북벌은 초반에 기세를 올렸으나, 원나라 군대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일부 홍건적 세력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관선생과 파두반이 이끄는 부대는 1359년 주요 거점이었던 변량(개봉)을 원나라에 다시 빼앗기면서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요동으로 이동한 홍건적은 그곳에 거주하던 고려 유민들의 인력과 물자를 이용해 세력을 재건하려 했지만, 고려 유민들은 홍건적의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로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고려 조정은 이들 유민을 서북면 지역에 정착시켜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다. 안정적인 기반 없이 약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던 홍건적에게 이러한 상황은 큰 타격이었다. 결국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홍건적은 고려 유민들의 비협조에 대한 보복과 군사 활동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위해 고려 침공을 결정했다.[2] 이 시기 고려는 공민왕이 원 간섭기에서 벗어나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1]
2. 1. 원나라의 쇠퇴와 홍건적의 발흥
14세기 중반, 홍건적의 난 등으로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고려의 공민왕은 자주 개혁을 추진하여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공민왕은 정동행성과 같은 몽골 군사 기지를 폐지하고, 친원 세력을 숙청했으며, 원나라에 빼앗겼던 북쪽 영토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한편, 중국에서는 1357년 한족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유복통의 지휘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규모 북벌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원나라 군대의 반격과 내부 분열로 인해 북벌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일부 홍건적 세력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관선생과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부대는 원나라의 여름 수도였던 상도(上都)와 그 주변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1359년, 홍건적의 주요 거점이었던 변량(개봉)이 원나라 군대에 의해 다시 함락되면서, 홍건적 주력 부대는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홍건적은 요동과 심양 일대에 거주하던 고려 유민들의 인력과 물자를 이용해 세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고려 유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고려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고려 조정은 돌아온 유민들을 서북면 지역에 정착시켜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다. 당시 홍건적은 안정적인 기반 없이 약탈을 통해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 유민들의 이탈과 고려 조정의 정책은 홍건적에게 타격을 주었다. 결국 홍건적은 이에 대한 보복과 물자 확보라는 군사적 필요 때문에 고려를 침공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2]
2. 2. 고려의 상황과 홍건적의 침공 결정
14세기 중반,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자 고려의 공민왕은 원 간섭기(1270년~1356년) 동안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 군사 기지를 폐지하고 친원 세력을 숙청했으며, 빼앗겼던 북쪽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1]한편, 1357년 유복통이 이끈 홍건적의 대북벌은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 통제를 벗어난 일부 홍건적 세력, 특히 관선생과 파두반이 이끄는 무리는 1359년 근거지였던 변량(개봉)을 원나라에 빼앗기자 요동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요양과 심양 일대에 거주하던 고려 유민들과 물자를 이용해 세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고려 유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고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려 조정은 돌아온 유민들을 서북면에 정착시켜 이 지역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결국 홍건적은 안정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식량과 물자를 현지에서 약탈하여 조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건적은 고려 유민들의 비협조에 대한 보복과 함께 군사 활동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2]
3. 1359년의 1차 침공
1359년 12월, 요동반도에 머물던 홍건적 군대의 일부는 군수 물자 부족과 중국 본토로의 퇴각로 차단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자 고려를 침공했다. 모거경이 이끄는 약 4만 명[5]의 홍건적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남하하여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360년 초, 안우와 이방실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홍건적은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고려군은 평양을 비롯한 점령지를 되찾았으며,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던 홍건적 대부분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쟁 후 요녕으로 돌아간 홍건적 병력은 300명에 불과했다.
3. 1. 침공 초기
홍건적은 본격적인 침공에 앞서 공민왕에게 자신들에게 충성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 1359년 11월 말에는 3,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북쪽 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에 고려는 서북 지방의 방어력을 보강하고 경계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1359년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이들은 침공 후 의주, 정주, 인주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특히 의주에서는 양민 1천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정주에서는 고려의 도지휘사 김원봉을 살해했다[5].
인주를 점령한 홍건적은 철주를 공격하던 중, 안주군민만호 안우가 이끄는 고려군의 반격을 받았다. 이 반격으로 홍건적은 인주와 정주 일대로 물러나야 했다. 전열을 정비한 홍건적은 1천여 명의 병력으로 선주를 다시 공격했지만, 안우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또다시 패배하여 물러났다. 안우의 군대는 기세를 몰아 적진 깊숙이 진격했으나, 홍건적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다.
이 무렵, 홍건적이 장악하고 있던 청천강 북쪽 지역에서 김진이 홍건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방을 공격당한 홍건적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3. 2. 고려의 반격과 서경 탈환
고려 조정은 12월 중순에 홍건적의 침략 소식을 접했다. 공민왕은 즉시 서북면 도원수에 이암(李嵒), 부원수에 경천흥, 도지휘사에 김득배, 서경윤에 이춘부, 서경존무사에 이인임을 임명하여 북쪽으로 급파했다.그러나 이암이 서경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중앙군이 완전히 집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암은 제대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서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청야전술로 홍건적이 사용할 식량과 물자를 불태우려 했으나, 호부낭중 김선치가 이는 오히려 적을 더 깊숙이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암은 김선치의 건의를 받아들여 물자를 그대로 남겨두고 황주 일대로 퇴각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홍건적의 주된 목적이 물자 확보에 있음을 간파하고, 물자를 내주어 남진을 지연시키려는 의도였다. 이 전략은 성공하여 홍건적은 서경에 무혈입성한 뒤 더 이상 남진하지 않고 머물렀고, 고려군은 병력을 모으고 전투를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6]
이후 이암이 겁이 많아 지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자, 평장사 이승경(李承慶)이 대신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전임 찬성사 권직(權適)에게는 승병을 이끌고 홍건적을 공격하도록 명했다.[7]
1360년 1월 하순, 고려군은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도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홍건적 수천 명을 사살하며 서경을 되찾았다. 패배한 홍건적은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달아났다.
1360년 2월, 안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함종의 홍건적을 공격했으나 첫 전투에서는 패배했다. 그러나 이어진 2차 전투에서 안우와 이방실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홍건적 2만여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승세를 탄 고려군은 이방실, 안우, 김득배가 함께 홍건적의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홍건적은 태주, 귀주, 선주를 거쳐 북쪽으로 도주했으나, 고려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거의 전멸했다.
처음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던 4만 명의 홍건적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자는 불과 300명에 불과했다. 이로써 고려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3. 3. 고려의 피해
1차 침공에서 홍건적은 서북면을 장악하고, 서경까지만 진격했기 때문에 이남 지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인명 피해는 민간인 1만여 명을 포함하여 2만 명에 달했다.4. 1361년의 2차 침공
1361년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 세력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8] 이는 1차 침입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두 번째 대규모 침공으로, 고려는 다시 한번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침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하는 등 국가적인 혼란을 겪었으나, 최영, 이성계, 정세운, 이방실 등 고려 장수들의 활약으로 결국 홍건적을 격퇴하고 국토를 회복했다.
4. 1. 침공 시작
1360년 11월, 홍건적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북서쪽 국경을 넘어 침략했다.[1] 이 침공으로 인해 고려의 수도 개성이 일시적으로 함락되었고,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해야만 했다.[1]4. 2. 고려의 초기 대응과 개경 함락
1361년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쫓긴 홍건적 세력이 하북 지방으로의 퇴로가 막히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이는 홍건적의 2차 침입이었다.[8]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와 이성을 함락시킨 후, 11월 초에는 무주(영변)에 집결했다.결국 1361년 11월, 20만 명에 달하는 홍건적 대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점령했고, 공민왕은 경상북도 복주(현재의 안동)로 피난해야 했다.
4. 3. 고려의 반격
홍건적이 개경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사이,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 명의 병력을 모았다. 복주(현재 안동시)에 머물던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다.[8]1362년 1월, 정세운은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등 주요 장수들에게 20만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개경에 주둔하던 홍건적의 정예 병력은 동쪽 외성문인 숭인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려군은 홍건적이 예상하지 못한 숭인문을 제일 먼저 공격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
1월 18일 새벽, 고려군은 방심하고 있던 홍건적의 방어선을 뚫고 숭인문을 돌파하며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홍건적 수장 사류와 관선생을 포함한 10만여 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원나라 황제가 사용하던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비롯한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11][12]
그러나 개경 탈환의 기쁨도 잠시, 비극적인 내부 갈등이 발생했다. 총병관 정세운이 김용의 시기를 받아 그의 음모로 안우와 이방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김용은 공민왕의 칙서를 위조하여 안우와 이방실에게 정세운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공민왕은 김용의 거짓 보고만을 듣고, 안우와 이방실이 임금을 속이고 함부로 대신을 살해했다는 죄를 물어 이들을 처형하고 말았다.[13]
한편, 개경을 되찾은 고려군 지휘부는 홍건적을 섬멸하기보다는 퇴로를 열어주는 전략을 선택했다. 궁지에 몰린 홍건적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경우 고려군 역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동쪽의 숭인문과 동북쪽의 탄현문을 의도적으로 열어두었다.
전투 의지를 잃은 홍건적은 고려군이 열어준 두 길을 통해 개경을 빠져나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흩어져 달아났다.[12] 고려군은 홍건적이 완전히 물러나도록 퇴로를 열어주면서도, 곳곳에서 요격과 추격을 계속하여 이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결과 여름에는 홍건적의 또 다른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14]
4. 4. 전후 처리
개경 환도 후, 공민왕은 전란 중에 공을 세운 275명에게 공신 책봉을 시행했다. 이들 중에는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기 직전 임시로 머물던 흥왕사에서 일어난 김용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도 포함되었다.그러나 공신으로 책봉된 275명 가운데 문관은 12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263명은 모두 무관이었다. 이는 사실상 무신들을 위한 공신 책봉이나 다름없었다.[15] 이 과정에서 이성계를 비롯한 새로운 무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후 계속된 왜구 토벌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에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커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6]
한편, 전쟁 이후 홍건적에게 항복했던 양광도 지역의 행정 구역에는 일부 변화가 있었다. 수원부는 가장 먼저 홍건적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수원군으로 강등되었고, 수원부 아래에 있던 4개 고을은 안성현으로 편입되었다. 반면, 안성현은 유일하게 홍건적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안성군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공민왕이 피난 중에 머물렀던 복주목(현재의 안동시)은 임금을 극진히 모신 공을 인정받아 안동대호부로 승격되었다.[14]
5. 전후 영향과 평가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수도 개경을 포함한 서북 지역이 크게 파괴되었고,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고 민생은 피폐해졌다. 이러한 혼란은 왜구의 침입과 맞물려 고려의 국력을 급격히 쇠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군사적으로 고려는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인명 피해를 입었으나, 수세전략과 기습 등을 활용하여 전략적으로는 성공적인 방어를 해냈다. 특히 2차 침입 당시에는 적의 퇴로를 열어주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면서도 국경 밖으로 몰아내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였다.
한편,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와 같은 신흥 무인 세력이 백성의 지지를 얻으며 크게 성장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권문세족과 대립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이성계는 개혁적인 사대부 세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이는 훗날 위화도 회군을 거쳐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고 새로운 왕조의 등장을 예비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5. 1. 고려에 미친 영향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려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2차 침입 당시 홍건적에게 점령당한 수도 개경의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11월 24일 개경에 입성한 홍건적은 고려 궁궐인 만월대를 불태웠다.개경을 비롯한 서북 지방의 직접적 피해 이외에도, 공민왕이 남쪽(경상북도 안동)으로 피신하고 홍건적을 격퇴하기 위해 군사를 징집하는 등의 전쟁 준비로 인한 국가적 출혈도 컸다.[17]
이러한 혼란은 남쪽의 왜구 침입과 더불어 1356년 이후 활발히 추진되던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점차 쇠퇴하게 만들었으며, 오히려 개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경향마저 보였다.
한편, 왜구 및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인 세력이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통해 국내에서 막대한 영향력과 권력 기반을 얻게 되었다. 특히 이성계는 개혁적인 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았다. 향후 고려의 정국은 이들 신흥 무인 집단과 사대부 집단, 그리고 기존의 보수적인 권문세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고려에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하게 하였으며,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장한 이성계는 결국 1392년 조선 왕조를 건국하였다.
5. 2. 군사적 측면의 평가
홍건적은 한족으로 구성된 농민군이었으나, 원나라 정규군과 전투를 통해 그들을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습득한 군대였다. 당시 공민왕의 개혁 정치 이후 재건 과정에 있던 고려군은 20만 홍건적을 맞아 약 30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입는 피해를 입었다.그러나, 당시 고려군이 보여준 전략은 일종의 수세전략으로서 열세의 전력으로 적의 진출을 가능한 한 지연시키고 적들을 안심시킨 후, 가용 병력을 집결한 후 기만과 기습을 통해 공세의 주도권을 잡아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특히 2차 침공 당시 홍건적의 퇴로를 일부러 열어주어 고려군의 불필요한 피해를 막으면서 동시에 “적을 국경 밖으로 축출한다.”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며 당시 고려군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19]
5. 3. 조선 건국에 미친 영향
고려가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훗날 조선 태조), 정세운, 이방실과 같은 장군들이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은 신흥 무인 세력으로 부상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홍건적의 침입 이후에도 왜구는 계속해서 한반도 남부를 괴롭혔다.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은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왜구 토벌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국내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권력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이성계 장군은 개혁을 지향하는 신진 사대부 세력과 연대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388년, 명나라의 요동 정벌 명령에 대해 이성계 장군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반대하며 우왕과 정벌을 주장하던 최영 장군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수도 개경으로 진격, 정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위화도 회군이라고 한다.
1392년, 결국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였다. 홍건적의 침입과 이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 특히 이성계의 부상은 결과적으로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가져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Columbia Chronologies of Asian History and Culture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7-02-01
[2]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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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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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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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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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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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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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고려말 대외관계의 격동과 무장세력의 정치적 지향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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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고려시대군사전략
[17]
문서
[18]
웹사이트
조선 왕조의 성립
[19]
서적
고려시대군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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