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바이칼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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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바이칼 철도는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 남동쪽의 바부시킨까지 1890년대에 건설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일부 구간이다.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건설 과정에서 많은 터널, 옹벽, 교량이 필요했으며, 1905년 완공 후에는 화물 및 여객 수송에 사용되었다. 1917년 혁명과 내전, 그리고 이후 이르쿠츠크 수력 발전소 건설 등으로 인해 주요 노선이 변경되면서, 현재는 슬류잔카에서 바이칼까지의 지선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구간은 자연재해에 취약하며, 산사태와 토석류로 인해 잦은 사고와 교통 중단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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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세계 최장 철도 노선으로, 러시아 주요 도시 연결 및 유라시아 대륙 물류와 여객 운송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19세기 말 건설이 시작되어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러시아와 주변 국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환바이칼 철도 | |
---|---|
노선 정보 | |
노선 명칭 | 환바이칼 철도 |
러시아어 명칭 | Кругобайка́льск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크루고바이칼스카야 젤레즈나야 도로가) 또는 Кругобайка́лка (크루고바이칼카) |
위치 | 러시아, 이르쿠츠크 주 남서부, 바이칼 호 연안 |
노선 길이 | 89 km (55 mi) |
건설 기간 | 1899년 ~ 1905년 |
개통 | 1905년 |
폐쇄 구간 | 1956년 (이르쿠츠크-바이칼 구간, 수몰) |
궤간 | 1,520 mm (4 ft 11+27⁄32 in) 광궤 |
역사적 중요성 | 러시아 제국의 건축 기념물 |
상태 | 관광 노선으로 운영 |
운영 주체 | 러시아 철도 (Российские железные дороги) |
![]() | |
역사 | |
건설 배경 |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일부로 건설 |
건설 목적 | 바이칼 호를 우회하는 철도 노선 확보 |
초기 노선 | 미소바야 역 - 바이칼 항 간 운행 (페리 연결) |
건설 난이도 | 매우 어려움 (험준한 지형, 바이칼 호 인접) |
건설 인력 | 죄수, 군인, 외국인 노동자 등 |
건설 비용 | 당시 러시아 제국 예산의 상당 부분 투입 |
운행 중단 | 이르쿠츠크 댐 건설로 일부 구간 수몰 |
현재 | 관광 노선으로 재개통, 역사 유적지로 보존 |
구조물 | |
터널 | 39개 |
교량 및 고가교 | 16개 |
갤러리 | 248개 |
옹벽 | 268개 |
역사 및 시설물 | 다수 존재 (보존 상태 양호) |
주요 건축 양식 | 19세기 말 ~ 20세기 초 러시아 건축 양식 |
관광 정보 | |
주요 관광 포인트 | 바이칼 호, 철도 역사, 터널, 교량, 자연 경관 |
관광 열차 | 운행 중 (정기 및 특별 관광 열차) |
하이킹 및 트레킹 코스 | 철도 노선 따라 조성 |
사진 촬영 명소 | 바이칼 호수와 철도 시설의 조화 |
접근 방법 | 이르쿠츠크 또는 바이칼스크에서 출발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환바이칼 철도 관련 역사 및 관광 안내 서적 다수 |
관련 웹사이트 | 바이칼 국립공원 웹사이트 (러시아어) |
기타 정보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검토 중 |
2. 역사
시베리아 철도 노선 설계 당시, 7개의 구간 중 하나로 이르쿠츠크에서 미소바야 부두(현재 바이칼 호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바부시킨 마을)까지의 구간이 포함되었는데, 이 구간이 바로 환바이칼 철도였다.
1899년 말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초기에는 미소바야에서 탄호이 구간에 집중되었고, 1901년부터는 탄호이에서 슬류댄카 구간이 건설되었다. 1902년 봄부터는 가장 복잡한 구간인 슬류댄카에서 바이칼역 구간의 건설이 시작되어 1905년에 완공되었다.[3]
1905년 러일 전쟁의 영향으로 건설이 가속화되었고, 1904년 10월 1일에 작업 열차가 운행을 시작, 1905년 10월 29일에 노선이 영구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3] 바이칼역에서 미소바야까지의 철도 길이는 260km였으며, 1km당 건설 비용은 약 13만러시아 루블으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다른 구간(약 9.3만러시아 루블)보다 높았다.[3]
환바이칼 철도는 초기에 단선으로 건설되었으나,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복선화 공사가 진행되어 수송 능력이 증가했다. 1917년 혁명과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에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1940년대에는 철도 강화 및 교통 안전 확보를 위한 탐사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1947년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 문제로 인해 바이칼 호반을 따라 건설된 철도에 대한 추가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대신 이르쿠츠크에서 슬류잔카까지 산을 가로지르는 단선 철도를 전철화된 복선으로 전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이르쿠츠크에서 볼쇼이 루그를 거쳐 슬류잔카까지의 전기 환승 철도가 건설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주요 노선이 변경되었다. 1950년대에는 이르쿠츠크 수력 발전소 건설로 인해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마을까지의 구간이 해체 및 수몰되면서, 현재는 스류잔카-2에서 쿠르투크, 마리투이, 바이칼을 잇는 89km의 구간만이 남아있다.
현재 환바이칼 철도는 4개의 역이 기능하고 있으며, 하루에 한 번 디젤 기관차가 운행되고 있다. 또한, 증기 기관차를 이용한 관광 열차도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1982년에는 포트 바이칼역에서 쿠르투크역까지의 구간이 건조물 및 경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1980년대 초부터 관광객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2005년 가을에는 환바이칼 철도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으며, 포트 바이칼역과 스류잔카 II역이 재건되었다.
2. 1. 건설 배경 및 초기 조사 (1894-1900)
시베리아 철도(이후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불림) 노선 설계 당시, 7개 구간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에서 미소바야 부두(현재 바부시킨 마을)까지의 환바이칼 철도였다.1894년,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의 첫 번째 구간 노선 조사가 실시되었다. 초기에는 부교를 건설하고 앙가라강의 오른쪽(동쪽) 제방으로 철도를 내려가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앙가라강의 수위 변동과 봄철 해빙기 강을 건너는 어려움 때문에 이 계획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되어, 이르쿠츠크에서 왼쪽 제방을 따라 철도를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호수의 바라치크 곶(포르트 바이칼)까지 앙가라강을 따라 철도를 건설하는 데는 3470000RUB이 소요되었으며,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진행되었다. 한편, 호수 동쪽의 스레텐스크에서 미소바야까지의 철도가 완성되었다. 환바이칼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는 기차 페리로 호수 해안을 연결하기로 했다. 기차는 기차 갑판에 세 개의 평행 선로가 있는 특별 쇄빙선 페리 "바이칼"로 운송되었다. 승객과 물품을 운송하는 소형 쇄빙선 페리 "앙가라"도 건설되었다. 1903/04년 추운 겨울에는 얼음 위에 철도 선로를 놓아 철도 차량을 견인 동물이 끌기도 했다.[1]
한편,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미소바야에서 쿨투크 (호수 남서쪽 끝)까지의 동쪽 구간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 구간은 경로가 어렵지 않았지만, 이르쿠츠크와 쿨투크를 연결하는 서쪽 구간은 가장 큰 복잡성을 보였다. 이반 바실리에비치 무쉬케토프 교수의 지휘 하에 연구 그룹은 다음 네 가지 노선 옵션을 연구했다.
-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트강의 왼쪽 제방을 따라 지르쿠준스키 산맥을 건너 쿨투크까지
- 이르쿠츠크에서 볼샤야 올하강과 크루타야 구바강 계곡을 거쳐 바이칼 호수 해안을 따라 쿨투크 정착지까지
- 바이칼역에서 호숫가를 따라 쿨투크까지
- 벨레크투이 마을(이르쿠츠크 서쪽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위치)에서 툰킨스키 산맥을 건너 쿨투크까지
1889년 6월 29일, 시베리아 철도 건설 위원회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옵션을 선택했다. 1899년부터 1900년까지 최종 측량 작업 결과, 엔지니어들은 해안선을 따라 노선을 놓는 세 번째 옵션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판단했다.[1]
1901년 시베리아 철도 건설 위원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해당 구간 건설 비용은 52520000RUB이었으며, 수송 엔지니어 볼레슬라프 카브리모비치가 건설 책임자로 임명되었다.[1]
2. 2. 건설 과정 (1899-1905)
시베리아 철도가 설계될 당시, 환바이칼 철도는 이르쿠츠크에서 미소바야 부두(현재 바이칼 호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바부시킨 마을)까지의 구간이었다.환바이칼 철도의 건설은 1899년 말에 시작되었다. 원래 건설자들은 미소바야에서 탄호이까지의 구간에 노력을 집중했다. 1901년부터 탄호이에서 슬류댄카까지의 구간이 부설되었다. 이 구간의 건설은 주로 알렉산드로프스키 교도소의 수감자와 중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3]
1902년 봄, 슬류댄카에서 바이칼역까지 가장 복잡한 구간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1905년까지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원래 계획은 530만 루블의 비용으로 33개의 터널을 건설하고, 370만 루블의 옹벽, 160만 루블의 고가교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호수 물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바이칼 호수 수면 위 트랙 경로의 최소 높이는 2.5
평평한 해안선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자재(현장에서 채석된 석재 제외)는 건설 현장으로 물로 운송되었다(여름에는 바지선으로, 겨울에는 동물이 끄는 수레로). 바위가 많은 해안의 복잡한 지형으로 인해 건설자들은 터널이나 암석에서 파낸 인공 플랫폼에 노선의 대부분을 부설해야 했으며, 철도의 측면은 옹벽으로 강화되었다. 덥고 혹독한 겨울에 이미 고통받고 있던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건설을 수작업으로 수행해야 했다.[3]
노선 1km마다 약 1마차 분량의 폭발물이 필요했다. 토공 작업은 약 400마차에 해당하는 규모로 수행되었다.[3] 제방은 도로 길이의 28.7%를 차지했고 절개는 71.3%를 차지했다(바위 토양에서 상당량).[2] 철도 트랙 자체의 건설은 더 강하고 무거운 트랙을 사용하고 침목의 수를 늘려 더 무겁게 만들어야 했다. 어려운 지형 때문에 회전의 최소 반경이 줄어들었다.[3]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은 철도 건설을 가속화시켰다.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약 9,000명의 노동자가 철도에 고용되었고, 1903–1904년에는 그 수가 13,500명으로 증가했다. 주요 노력은 철도 노선 자체의 건설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노선 경로에 있는 역과 도시의 개발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업 열차는 1904년 10월 1일에 철도에서 운행을 시작했고, 1905년 10월 29일에 노선이 영구적으로 운영되었다. 바이칼역에서 미소바야까지의 철도 길이는 최종 형태에서 244
2. 3. 운영 및 쇠퇴 (1905-현재)
1905년 러일 전쟁의 발발은 철도 건설을 가속화시켰다.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약 9,000명의 노동자가 철도에 고용되었고, 1903–1904년에는 그 수가 13,500명으로 증가했다. 철도 노선 자체의 건설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노선 경로에 있는 역과 도시의 개발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업 열차는 1904년 10월 1일에 철도에서 운행을 시작했고, 1905년 10월 29일에 노선이 영구적으로 운영되었다. 바이칼역에서 미소바야까지의 철도 길이는 최종 형태에서 244환바이칼 철도가 운행을 시작했을 때, 바이칼 양쪽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연결되어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환바이칼 철도는 "러시아 강철 벨트의 황금 버클"이라고 불렸다.
처음에는 단선으로 건설되었지만,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복선 건설이 진행되어 환바이칼 철도의 수송 능력이 하루 48쌍의 열차로 증가했다. 이 단계에서 교량 및 기타 엔지니어링 구조물 건설에 새로운 재료인 철근 콘크리트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역과 역 마을 건설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바이칼에서 스류잔카에 이르는 구간에만 10개의 정차 지점이 설치되었다. 교통 안전을 개선하고 산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1917년 혁명과 그 이후의 러시아 내전 동안 환바이칼 철도는 격렬한 전투의 현장이었으며, 이 사건의 희생자들의 집단 묘지가 이를 증명한다. 체코 군단으로부터 후퇴하는 붉은 군대는 1918년 7월 23일 키르키다이스키 터널(39번 터널, 슬류댄카를 지나 미소바야로 가는 길)을 폭파시켰다. 터널은 나중에 복구되었지만, 약 20일 동안 노선 운행이 중단되었다.
1930년대, 40년대, 50년대에는 마을들이 활발히 개발되었고, 주택, 병영,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40년, 환바이칼 철도의 선로를 강화하고 교통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탐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작업은 1947년에야 완료되었다. 개발을 담당한 그룹은 예상치 못한 결론에 도달하여, 막대한 비용을 이유로 바이칼 호반을 따라 건설된 철도에 대한 어떠한 작업도 수행하지 않을 것을 제안했다. 대신, 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슬류잔카까지 산을 가로지르는 단선 철도를 전기 복선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이르쿠츠크에서 볼쇼이 루그를 거쳐 슬류잔카까지의 전기 환승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이는 환바이칼 지선보다 거리를 눈에 띄게 단축시켰다. 따라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주요 노선은 새로운 구간으로 이전되었다.
1950년에는 이르쿠츠크 수력 발전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 마을까지 앙가라강을 따라 지나가는 환바이칼 철도 구간이 해체되었고, 1956년 이르쿠츠크 저수지가 채워지면서 수몰되었다(바이칼 마을 근처 앙가라 강변에는 댐의 잔해만 남았다). 결국, 스류잔카-2에서 쿠르투크, 마리투이, 바이칼까지의 "막다른" 노선만이 남게 되었다. 철도는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고, 철도 운행 횟수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터널과 다리에서 경비가 철수되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자, 환바이칼선의 두 번째 선로는 해체되었다. 1980년대 초, 일부에서는 이 노선을 폐쇄하거나 그 자리에 도로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도로를 따라 위치한 마을들은 점차 쇠퇴했고, 사람들은 집을 버리기 시작했다. 이 지역 주민들이 내륙 지역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은 드물게 운행되는 디젤 기관차였으며, 이후에는 슬류잔카, 쿨투크, 바이칼을 연결하는 기관차가 운행되었다(포트 바이칼은 앙가라 강 반대편 해안에 있는 리스트뱐카 마을과 자동차 페리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환바이칼 철도는 스류잔카 II - 쿠르투크 - 마리투이 - 바이칼 (포트 바이칼역)을 잇는 89km의 지선을 가리킨다. 쿠르투크, 마리투이, 우라노보, 바이칼의 4개 역이 현재도 기능하고 있다. 이 구간에는 총 38개의 터널이 있으며, 가장 긴 터널은 파라비니 곶을 통과하는 777.5m의 터널이다. 또한, 15개의 석조 통로, 3개의 콘크리트 통로, 248개의 교량, 268개의 옹벽이 있다. 러시아 국내에서 이처럼 토목 건축 기술이 구사된 노선은 다른 예가 없다고 한다. 터널과 석조 통로는 유례없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개축되지 않아 20세기 초의 설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두 량의 열차를 연결한 디젤 기관차가 하루에 한 번 운행되고 있다. 스류잔카 II에서 바이칼까지는 4시간 40분이다. 이 외에도 증기 기관차를 사용한 관광 열차도 정기적으로 운행하고 있다. 여행객은 인차 궤도를 대여할 수도 있다.
1982년 12월 21일 이르쿠츠크 지방 의회의 결정에 따라, 포트 바이칼역에서 쿠르투크역까지의 환바이칼 호반 지역은 건조물 및 경관 보호 구역으로 선언되어 주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환바이칼 철도에 여행객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몇몇 관광 명소가 생겨났다.
환바이칼 철도 연선에는 많은 자연 보호 구역도 있다. 그 중 하나에는 "Белая выемкаru"라고 불리는 암반층이 있다. 마리투이 등 연안의 집락에는 20세기 초두의 근대주의 형식의 도구 등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바이칼 호반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위치 | 시설 종류 | 시설명 |
---|---|---|
80km 지점 | 역사 문화 유산 보호 센터 | |
106km 지점 | 핵 연구 기관 | 기지 |
119-120km 지점 (마리투이) | 이르쿠츠크 국립 대학교 연구 구역 | 생물 토양 학과 |
현재 환바이칼 철도는 슬류잔카-2 - 쿠르투크 - 마리투이 - 바이칼을 잇는 89km 길이의 지선으로 운영되고 있다. 쿨투크, 마리투이, 울라노보, 바이칼의 4개 역이 현재도 기능하고 있다. 이 구간에는 총 38개의 터널이 있으며, 가장 긴 터널은 폴로빈니 곶을 통과하는 777.5m의 터널이다. 또한, 15개의 석조 통로, 3개의 철근 콘크리트 통로, 248개의 교량, 268개의 옹벽이 있다. 환바이칼 철도는 러시아 국내에서 이처럼 토목 건축 기술이 구사된 노선은 다른 예가 없다고 한다. 터널과 석조 통로는 유례없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개축되지 않아 20세기 초의 설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1]
2005년 가을에는 환바이칼 철도의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 기념식에 맞춰 포트 바이칼역이 재건되었고,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또한, 스류잔카 II역도 재건되었다.
3. 현재
현대 환바이칼 철도의 킬로미터는 이르쿠츠크 교환역에서부터 측정된다. 바이칼 역은 72km, 슬류잔카-2 역은 161km 지점에 위치한다.[1]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철도 재건 및 보강 조치가 시작되었다. 2005년 가을에는 철도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으며, 바이칼 역과 슬류댠카 역이 재건되고 환바이칼 철도 관련 전시회가 열렸다.[1]
3. 1. 관광 노선
현대 환바이칼 철도는 일반적으로 슬류댠카-2–쿨투크–마리투이–바이칼 노선을 잇는 89km 길이의 지선으로 운영되고 있다. 쿨투크, 마리투이, 울라노보, 바이칼 등 4개의 역이 운영 중이며, 137km 구간에 복선 구간이 있다. 환바이칼 철도는 총 길이 9063m의 38개 터널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긴 폴로빈니 곶을 통과하는 터널은 777.5m이다. 또한, 총 길이 295m의 15개의 석조 갤러리와 3개의 철근 콘크리트 갤러리, 248개의 교량 및 고가교, 268개의 옹벽이 있다. 환바이칼 철도는 공학적 구조물의 풍부함에 있어서 러시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환바이칼 철도의 터널과 석조 갤러리는 특이하게 건설되었고 이후 재건축되지 않아, 20세기 초 건축가와 엔지니어의 초기 설계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1]
현재는 일반적으로 하루에 한 대의 열차(디젤 기관차와 객차 2량)가 운행된다. 슬류댠카에서 바이칼 역까지의 여행 시간은 4시간 40분이다. 철로변 정착지의 주민들은 이 열차를 'передача' 또는 "이송"이라고 부르며, 빵, 소금, 성냥, 보드카, 담배와 같은 필수품 공급을 위한 이 교통 수단의 가치를 반영한다. 이 열차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은 '모타냐'인데, 이는 열차가 역 사이를 빠르게 왕복하기(모타테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증기 기관차와 레트로 스타일의 객차를 포함한 관광 열차가 주기적으로 환바이칼을 따라 운행된다. 관광객들은 수동차를 대여할 수도 있다.[1]
1982년 12월 21일 이르쿠츠크 지방 의회의 결정에 따라 바이칼 역에서 쿨투크 역까지의 환바이칼 철도 구간은 건축 및 경관 보호 구역으로 지정(현재 바이칼 국립 공원의 일부)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환바이칼 철도의 관광 잠재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철도의 초창기부터 별장 및 휴양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역들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타이가"(134km), "센세이션"(102km), "침엽수"(98km), "레트로"와 "실버 키"(80km) 등 일련의 관광 구역이 운영되고 있다.[1]
실제 철도 명소와 함께, 환바이칼 노선의 관광객들은 "벨라야 비엠카"와 같은 암석 지형을 포함한 수많은 자연 보호 구역에 매료된다. 환바이칼을 따라 위치한 정착지, 특히 마리투이에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양식의 많은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1]
환바이칼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도 위치해 있다:[1]
철도 100주년은 2005년 가을에 기념되었다. 이 행사를 위해 바이칼 역이 재건되었으며, 환바이칼에 헌정된 전시회가 열렸다. 슬류댠카 역도 재건되었다.[1]
거리 (km) | 이름 | 위치 |
---|---|---|
159 | 159km 정차역 | 쿨투크 |
156 | 쿨투크역 | 쿨투크 |
154 | 154km 정차역 | 154km 정착지 |
149 | 149km 정차역 | 앙가솔스키 마을 |
139 | 139km 정차역 | 샤리지갈라이 마을 |
138 | 샤리지갈라이 정차역 | 로코모티프 소련 자발적 스포츠 협회 |
137 | 137km 정차역 | ВСЖД 휴게소 |
134 | 134km 정차역 | 134km 마을 |
129 | 129km 정차역 | 바클란 마을 |
120 | 120km 정차역 | 마리투이 정착지 |
119 | 마리투이역 | 마리투이 정착지 |
110 | 110km 정차역 | 폴로비니 마을 |
107 | 107km 정차역 | 포노마레바 정착지 |
106 | 106km | 이바노프카 정착지 |
102 | 102km 정차역 | 슈미하 마을 |
98 | 울라노보역 | 흐보이니 관광 센터 |
80 | 80km 정차역 | "레트로" 관광 센터 |
80 | 79km 정차역 | "실버 키" 관광 센터 |
74 | 74km 정차역 | 바이칼 정착지 |
72 | 바이칼역 | 바이칼 정착지 |
3. 2. 시설
환바이칼 철도는 초기에 단선으로 건설되었으나,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복선화 공사가 진행되어 하루 48쌍의 열차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가 교량 및 기타 구조물 건설에 도입되었다. 역과 역 마을 건설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바이칼에서 슬류댄카 구간에만 10개의 정차 지점이 설치되었다. 교통 안전 및 산사태 방지를 위한 조치도 이루어졌다.[1]1917년 혁명과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환바이칼 철도는 격렬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붉은 군대는 체코 군단으로부터 후퇴하면서 1918년 7월 23일 키르키다이스키 터널을 폭파시켰다. 터널은 이후 복구되었지만, 약 20일 동안 운행이 중단되었다.[1]
현재 환바이칼 철도는 슬류댄카-2–쿨투크–마리투이–바이칼을 잇는 89km 길이의 지선으로 운영되고 있다. 쿨투크, 마리투이, 울라노보, 바이칼 등 4개의 역이 운영 중이며, 137km 지점에 복선 구간이 있다. 환바이칼 철도는 총 길이 9063m의 38개 터널(가장 긴 터널은 777.5m), 15개의 석조 갤러리와 3개의 철근 콘크리트 갤러리, 248개의 교량 및 고가교, 268개의 옹벽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공학적 구조물의 다양함은 러시아 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터널과 석조 갤러리는 20세기 초 건축가와 엔지니어의 초기 설계를 보존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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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환바이칼 철도의 킬로미터는 이르쿠츠크 교환역에서부터 측정된다. 바이칼 역은 72km, 슬류댄카-2 역은 161km 지점에 위치한다.[1]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철도 재건 및 보강 조치가 시작되었다. 현재는 하루에 한 대의 열차(디젤 기관차와 객차 2량)가 운행되며, 슬류댄카에서 바이칼 역까지 4시간 40분이 소요된다. 철로변 정착지 주민들은 이 열차를 필수품 공급 수단으로 이용하며, '모타냐'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증기 기관차와 레트로 스타일 객차를 이용한 관광 열차도 주기적으로 운행되며, 관광객들은 수동차를 대여할 수도 있다.[1]
1982년 12월 21일, 바이칼 역에서 쿨투크 역까지의 구간은 건축 및 경관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국가 보호를 받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관광 잠재력이 발휘되기 시작하여 여러 관광 구역이 운영되고 있다.[1]
환바이칼 철도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도 위치해 있다:[1]
- 80km 지점: 연구 실험 기지, 역사 및 문화 유산 보존 센터
- 106km 지점: 핵 연구소 기지
- 119–120km 지점(마리투이): 이르쿠츠크 국립 대학교 생물학 및 토양 연구 학과의 학생들을 위한 연구 구역
2005년 가을, 철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바이칼 역과 슬류댄카 역이 재건되었고, 환바이칼 철도 관련 전시회가 열렸다.[1]
4. 자연재해
환바이칼 철도에서는 산사태, 토석류, 홍수 등 다양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특히 슬류댠카 강에서 발생한 토석류는 1934년과 1960년에 역과 철로를 덮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1971년에는 폭우로 인한 홍수로 다리와 터널 입구, 선로 기초가 파괴되어 거의 일주일 동안 열차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4] 바이칼 호 남쪽에서는 얼음 퇴적 현상으로 인해 해안에 수 미터 높이의 얼음 덩어리가 만들어져 철도를 덮는 경우도 있었다.[4]
1932년부터 1947년까지 16년 동안 721건의 붕괴가 발생했으며, 이 중 502건은 철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201건은 단일 구간 폐쇄 및 철도 상부 구조 교란을, 18건은 열차 사고 및 제방 파괴를 유발했다. 1930년부터 1984년까지는 약 1,200건의 붕괴 및 토석류와 약 500건의 개별 암석 낙하 사고가 기록되었다.[4] 이러한 기록들 때문에 엔지니어들은 환바이칼 철도 여행을 흥미로우면서도 위험하다고 평가했다.[5]
4. 1. 산사태 및 토석류
환바이칼 철도의 가장 큰 과제는 빈번한 산사태와 토석류였고, 지금도 그렇다. 측량 당시에도 기술자들은 암반층의 강한 풍화와 많은 너덜을 발견했다. 선로 부설 중 산비탈과 가파른 경사면이 철거되면서 지형 동역학적 과정이 파국적으로 심화되었다. 도로 건설 중, 특히 1904년 4월 5번 터널에서 약 3000m3 규모의 붕괴가 발생했고, 공사 종료 한 달 전에는 9번 터널에서 약 1000m3 규모의 붕괴가 발생하여 터널 석조 구조물이 손상되는 등 심각한 산사태가 발생했다.[4]
이후 철도 노선을 따라 암석에 대한 연구 결과, 암석이 초기 조사에서 예상했던 것만큼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철도 건설과 관련된 작업(특히 폭발물을 사용한 작업)으로 인해 암반 아래에 수많은 균열이 생겼다. 이러한 위험을 인지한 당국은 옹벽 건설, 산비탈 제거 및 기타 조치를 승인했다. 일부 위험한 구간은 새로운 터널을 통해 우회되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사태는 환바이칼에서 빈번하고 위험한 현상이었으며, 종종 열차 사고와 교통 중단을 초래했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4]
- 1913년 4월 초, 16번 터널의 이르쿠츠크 쪽에서 4000m3 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했다. 그 결과 열차 운행이 10일 동안 중단되었다.
- 1929년 4월, 지진으로 인해 143 km 지점의 암반이 이동하여 높이 200m에서 붕괴되었다. 암석은 옹벽을 부수고 두 개의 선로를 모두 손상시켰다(일부 암석 조각의 크기는 30m3에 달했으며, 폭파를 통해 제거되었다). 붕괴로 인한 교통 지연은 12시간이었다.
- 1937년, 지름 약 4m의 암석 조각이 열차 객차에 떨어져 지붕과 바닥을 뚫고 들어가 열차 사고를 유발했다.
- 1941년 5월, 철도 87 km 지점에서 높이 30미터에서 떨어져 나온 8m3의 블록이 증기 기관차와 함께 움직이던 열차를 호수로 밀어냈다. 인기 있는 광경이 된 이 바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 차량을 고정하고 있다.
- 1948년 9월 27일, 104 km 지점에서 (길이 100m, 높이 35m) 사면이 붕괴되어 총 부피가 약 20000m3에 달했다. 그 결과 교통이 4일 동안 중단되었다.
- 1982년, 900m3의 붕괴가 발생하여 일주일 동안 교통이 중단되었다.
- 1991년, 약 700m3의 붕괴로 인해 140 km 지점의 터널 입구가 폐쇄되었다.
1936년에는 안전을 위해 마리투이스카야 구간이 건설되었다. 이 구간은 국내에서 가장 복잡한 철도 구간 중 하나였다. 1939년에는 서시베리아 철도에 이동 기계 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이는 산사태 방지 작업자(심지어 암벽 등반가 포함)에 의해 수행되었다. 위험한 경사면의 레벨링 및 정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4]
다른 자연 현상 중에는 토석류와 홍수가 환바이칼 교통 안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큰 활동은 슬류댠카 강에서 발생했다. 1934년 7월 29일, 이 강에서 발생한 토석류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여러 아파트 건물을 휩쓸고 역을 두꺼운 층의 실트와 모래로 덮었다. 1960년 슬류댠카의 토석류는 다시 철로를 휩쓸고 일련의 댐을 파괴했다. 1971년의 강력한 폭우는 가장 심각한 홍수를 유발하여 여러 다리와 터널 입구, 환바이칼의 선로 기초를 파괴했다(교통 중단은 거의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4] 바이칼 호 남쪽에서도 또 다른 특이한 자연 현상이 발생한다. 얼음 퇴적이 때때로 해안에 수 미터 높이의 얼음 덩어리를 만들어 철도를 얼음으로 덮는다.[4]
1932년부터 1947년까지 16년 동안 721건의 붕괴가 발생했으며, 이 중 502건은 철도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201건은 단일 구간을 폐쇄하고 철도 상부 구조를 교란했으며, 18건은 열차 사고와 제방 파괴를 유발했다. 동시베리아 엔지니어링 서비스 데이터에 따르면 1930년부터 1984년까지 약 1200건의 붕괴와 토석류가 기록되었다. 이 외에도 약 500건의 개별 암석 낙하 사고가 철도와 차량에 피해를 입혔다.[4] 엔지니어들은 환바이칼 여행을 흥미롭지만 위험하다고 묘사했다.[5]
4. 2. 홍수 및 기타
환바이칼 철도 건설의 가장 큰 난관은 잦은 산사태와 토석류였다. 측량 당시 기술자들은 암반층이 심하게 풍화되었고 너덜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선로를 놓기 위해 산비탈과 가파른 경사면을 깎아내면서 지반이 더욱 불안정해졌다. 1904년에는 5번 터널과 9번 터널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터널 구조물이 파손되기도 했다.[4]이후 암석을 조사한 결과, 예상보다 암석이 단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철도 건설, 특히 폭발물 사용으로 인해 암반 아래에 수많은 균열이 발생했다. 당국은 옹벽을 쌓고, 산비탈을 정리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일부 위험 구간은 새 터널을 뚫어 우회했다.[4]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사태는 빈번하게 발생하여 열차 운행 중단과 사고를 일으켰다. 주요 산사태 사례는 다음과 같다.[4]
- 1913년 4월: 16번 터널에서 4000 m3 규모 산사태 발생, 열차 운행 10일 중단.
- 1929년 4월: 지진으로 143 km 지점 암반 붕괴, 옹벽 파괴 및 선로 손상, 12시간 운행 지연.
- 1937년: 지름 약 4m 암석 조각이 열차 객차에 추락, 열차 사고 발생.
- 1941년 5월: 87 km 지점에서 8 m3 크기 바위가 증기 기관차와 함께 열차를 호수로 밀어냄.
- 1948년 9월 27일: 104 km 지점에서 20,000 m3 규모 사면 붕괴, 4일간 운행 중단.
- 1982년: 900 m3 붕괴로 일주일간 운행 중단.
- 1991년: 약 700 m3 붕괴로 140 km 지점 터널 입구 폐쇄.
토석류와 홍수 역시 환바이칼 철도 안전을 위협했다. 특히 슬류댠카 강에서 발생한 토석류는 1934년과 1960년에 역과 철로를 덮쳤다. 1971년에는 폭우로 인한 심각한 홍수로 다리, 터널, 선로 기초가 파괴되어 거의 일주일 동안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4] 바이칼호 남쪽에서는 얼음이 쌓여 해안에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이 철로를 덮치는 현상도 발생한다.[4]
1932년부터 1947년까지 16년 동안 721건의 붕괴가 발생했고, 그중 18건은 열차 사고와 제방 파괴로 이어졌다. 1930년부터 1984년까지는 약 1200건의 붕괴 및 토석류, 약 500건의 개별 암석 낙하 사고가 발생했다.[4] 엔지니어들은 환바이칼 철도 여행을 흥미롭지만 위험한 여정으로 묘사했다.[5]
5. 문화적 묘사
시베리아 작가 킴 발코프의 저서 ''바이칼: 성스러운 바다'' (1989)에는 환바이칼 철도의 건설이 묘사되어 있다. 유리 레비탄스키의 시 "И вот расступаются горы"("여기 산이 갈라진다")에서는 환바이칼 철도가 찬양받고 있다. 블라디미르 토밀로프스키를 비롯한 여러 화가와 이고르 베르진스키, 갈리나 코로보바와 같은 사진작가들은 환바이칼 구간을 포함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묘사했다.[1]
6. 참고 문헌
참조
[1]
웹사이트
О Прибайкальском национальном парке на сайте «Особо охраняемые природные территори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Минприроды РФ
http://pribpark.zapo[...]
2007-09-27
[2]
논문
Кругобайкальск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3]
웹사이트
«Из Листвянки на Кругобайкальскую железную дорогу»
http://baikal.irkuts[...]
[4]
웹사이트
Кругобайкальск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Мысли вслух
http://kbzd.irk.ru/G[...]
2007-11-24
[5]
뉴스
Подвиг у Байкала
Восточно-Сибирская правда
[6]
웹사이트
О Прибайкальском национальном парке на сайте «Особо охраняемые природные территории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Минприроды РФ
http://pribpark.zapo[...]
[7]
문서
各地点の距離はイルクーツク起点で表示されている。バイカル駅が72km地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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