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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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회묘는 조선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이다. 처음에는 윤씨지묘로 불렸으나, 연산군에 의해 회릉으로 격상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다시 회묘로 강봉되었다. 1969년 서울 회기동에서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회묘라는 이름은 연산군이 생모를 그리워하며 붙인 회릉에서 유래되었으며, 현재 서울 회기동 지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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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는 질투심과 후궁을 해하려 했다는 의혹 등으로 폐위되어 사사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회묘 | |
---|---|
기본 정보 | |
![]() |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200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
제작 시기 | 조선 |
2. 역사
회묘는 조선 왕실 무덤 중 하나로, 1482년(성종 13년) 조선 성종의 계비 윤씨가 폐비되어 사사된 후 경기도 장단군에 묻히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3][4] 1489년(성종 20년) 성종은 무덤에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이름을 내리고 묘지기를 두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5]
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의 묘를 이장하라고 명했으며,[6] 1504년(연산군 10년) 폐비 윤씨가 제헌왕후로 복위되면서 묘는 '''회릉'''으로 격상되었다.[7] 연산군은 '회(懷)'자를 사용하여 어머니를 왕후로 추존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고, 제헌왕후의 시호는 삭탈되었다.[8] 이후 회묘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1969년 회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1]
2. 1. 폐비 윤씨의 죽음과 초기 무덤 조성 (1482년 ~ 1498년)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 16일, 조선 성종의 계비 윤씨가 폐비되어 사사되고,[3] 경기도 장단군에 매장되었다.[4] 1489년(성종 20년) 음력 5월 20일, 성종은 폐비 윤씨의 무덤에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이름을 내리고 묘지기 2명을 두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5] 이는 폐비 윤씨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춘 것으로 해석된다.2. 2. 회릉으로의 격상과 연산군의 추숭 (1498년 ~ 1506년)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윤3월 13일,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의 묘를 천장하라는 명을 내렸다.[6] 이는 단순한 이장이 아니라,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하고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4일,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복위되었고, 묘는 '''회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7] 연산군은 생모를 왕후로 추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가 선왕이자 아버지였던 조선 성종에 의해 폐비지묘로 안장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 '회(懷, 그리울 회 또는 품을 회)'자를 따서 폐비윤씨지묘를 회릉으로 격상시켰다.2. 3. 회묘로의 강봉과 연산군 시대의 종식 (1506년 ~ 1969년)
1506년 (중종 1년) 음력 9월 3일,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고 제헌왕후의 시호는 삭탈되었다.[8] 이는 연산군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중종의 의지를 보여준다. 중종반정 이후 회묘는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하였다.2. 4. 현대의 이장 (1969년)
1969년 10월 25일, 회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의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1] 이는 도시 개발과 문화재 보존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3. 명칭의 유래와 변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폐비 윤씨를 추모하고, 왕의 생모로서 합당한 예우를 갖추고자 '회(懷, 그리워할 회 또는 품을 회)'자를 따서 묘의 이름을 지었다.[1]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중종은 연산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묘의 이름을 다시 격하시켰다.[9]
원래 이 지역은 묘의 이름이 회릉이었을 때는 회릉동(懷陵洞)으로 불렸다가, 격하된 후에는 회묘동(懷墓洞)으로 불렸다.[9] 이후 '회(懷)' 자가 어려워 '회(回)'로, '묘(墓)' 자가 불길하다 하여 '기(基)' 자로 바뀌어 오늘날의 '회기동(回基洞)'이 되었다.[9]
3. 1. '회릉'의 의미와 연산군의 효심
'회릉'이라는 이름은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지은 것이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추모하고, 왕의 생모로서 합당한 예우를 갖추고자 하였다. 연산군은 생모가 성종에 의해 폐비지묘(廢妃之墓)로 안장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회(懷, 그리워할 회 또는 품을 회)'자를 따서 회릉으로 고쳐 격상시켰다.[1]3. 2. '회묘'로의 격하와 중종의 정치적 결단
조선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가 선왕이자 부왕(父王)이었던 조선 성종에 의해서 폐비지묘(廢妃之墓)로 안장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왕의 생모이자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그리움을 뜻하는 한자인 회(懷, 그리울 회 또는 품을 회)를 본따서 폐비윤씨지묘를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이 폐위되어 교동도로 귀양을 가게 됨에 따라, 조선 중종은 폐주인 연산군의 행적을 지우거나 고치기 위한 일환으로 회릉을 묘(墓)로 격하하여 회묘로 고치게 되었다.[9]3. 3. '회기동' 지명의 유래
조선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가 조선 성종에 의해 폐비지묘(廢妃之墓)로 안장된 것에 불만을 품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폐비윤씨지묘를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회릉은 다시 회묘(懷墓)로 격하되었다.[9]'회기동'이라는 지명은 회묘에서 유래했다.[9] 윤씨의 묘가 회릉으로 불리던 시절에는 이 지역이 회릉동(懷陵洞)으로 불렸고, 회묘로 격하된 후에는 회묘동(懷墓洞)으로 불렸다.[9] 이후 '회(懷)' 자가 어려워 '회(回)'로, '묘(墓)' 자가 불길하다 하여 '기(基)' 자로 바뀌어 오늘날의 '회기동(回基洞)'이 되었다.[9]
4. 묘역의 특징
회묘는 조선 전기 왕릉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석물로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2] 이는 폐비 신분으로 죽었지만 왕의 생모라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4. 1. 조선 전기 왕릉 양식
회묘는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석물들은 여타 왕릉처럼 문인석, 무인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2]4. 2. 석물 배치
여타 왕릉처럼 문인석, 무인석을 모두 갖추고 있다[2]. 이는 폐비의 신분으로 죽었지만, 왕의 생모라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회릉
https://terms.naver.[...]
[2]
뉴스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2-06-19
[3]
조선왕조실록
성종 144권, 13년(1482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8월 16일(임자) 1번째기사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폐비윤씨사사사건
https://terms.naver.[...]
[5]
조선왕조실록
성종 228권,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5월 20일(정축) 7번째기사
[6]
조선왕조실록
연산 14권, 2년(1496 병진 / 명 홍치(弘治) 9년) 윤3월 13일(경신) 1번째기사
[7]
조선왕조실록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4일(을유) 3번째기사
[8]
조선왕조실록
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9월 3일(기묘) 1번째기사
[9]
네이버 백과사전
회기동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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