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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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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민회는 1920년 5월 와세다 대학 학생들이 사회 운동 연구, 보급, 쟁의 지원, 투사 양성을 목표로 결성한 단체이다. 1921년 1월 사회주의 잡지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같은 해 3월 일본 공산당 잠정집행위원회에 조직으로 참가했다. 효민회는 선전 활동과 코민테른과의 연계를 시도했으나, 1921년 10월부터 시작된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궤멸되었고, 관련자들은 '효민공산당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효민회는 제1차 일본 공산당의 기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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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회
개요
이름효민공산당
한자 표기曉民共産黨
로마자 표기Gyomin Kyōsantō
관련 단체
효민회효민회(효민공산당)
일본공산당 연표
전사 (원류 단체 등)매문사
노동운동사(아나파)
수요회
재미일본인사회주의자단
일본사회주의동맹
코민테른 일본지부준비회
효민회(효민공산당)
제1차 일본공산당 시대1921/22년-1924년
뷰로 시대1924년-1926년
제2차 일본공산당 시대1926년-1929년
무장공산당 시대1929년-1930년
비상시공산당 시대1931년-1932년
린치공산당 시대1933년-1935년
붕괴 후 시대1935년-1945년
개요
명칭교우민카이
일본어 표기暁民会
일본어 독음ぎょうみんかい

2. 결성 배경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가타야마 센과 같이 해외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경험하고 돌아온 인물들이 일본 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와세다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고츠 마사미치와 같은 급진적인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1921년 8월 20일에는 사카이 토시히코를 의장으로 하고 야마카와 히토시, 곤도 에이조 등이 모여 계몽인민공산당을 결성했다.[2]

2. 1. 효민회 결성

1920년 5월, 와세다 대학 학생 고츠 마사미치는 학생 단체 민인동맹회를 결성한 후, 같은 와세다 대학 학생 다카세 기요시와 함께 "사회 운동의 연구와 보급·계몽, 쟁의 응원, 투사의 양성"을 목적으로 효민회를 결성했다.[1] 1921년 1월 "아나·볼 제휴"를 내걸고 『노동운동』(제2차)이 창간되자, 고츠는 이에 참여하여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이 잡지의 중심이 되었으며, 미국에서 돌아온 사회주의 운동가 곤도 에이조에게 접근했다.[1] 같은 해 3월경, 곤도 등에 의해 일본 공산당 잠정집행위원회가 결성되자, 효민회는 조직으로서 여기에 참가했다.[1]

2. 2. 일본 공산당 잠정집행위원회 참여

1921년 1월 오스기 사카에 등이 참여한 『노동운동』(제2차)이 창간되자, 고츠 마사미치는 이에 참여하여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잡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경, 미국에서 귀국한 곤도 에이조 등이 일본 공산당 잠정집행위원회를 결성하자 효민회는 조직으로서 참여했다.[2]

3. 활동

1921년 4월, 곤도 에이조는 코민테른과 연락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귀국길에 "시모노세키 유흥 사건"으로 검거되어 코민테른 자금 출처가 발각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곤도는 사카이 토시히코에게 자금 제공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이후 다카쓰 세이쿄 등에게 공산당 결성을 제안했다. 8월경 민인동맹회가 해산되자 회원들은 '일본공산당'을 칭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3]

효민회는 나카소네 겐와 등 무산사 유지들과 함께 코민테른 자금을 활용하여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등 주요 도시에서 선전 활동을 펼쳤다. 1921년 11월에는 도쿄 육군 대연습에 참가한 장병들에게 "상관에게 반역하라"는 내용의 인쇄물을 보내기도 했다. 곤도는 이러한 활동을 코민테른에 과장 보고하여 추가 자금을 요청했다.[3]

3. 1. 선전 활동

1921년 8월 결성 직후, 도쿄, 오사카, 고베, 교토에서 팜플렛 배포 등 선전 활동을 시작했다.[1] 1921년 10월 초에는 선전 포스터를 배포했다.[1] 1921년 11월에는 도쿄에서 열린 대규모 군사 훈련에 참가한 군인들에게 반군국주의 및 반전 팜플렛을 배포했다.[1] 효민회와 나카소네 겐와 등 무산사 유지들은 코민테른 자금 일부를 사용해 선전 삐라를 제작, 각지에 배포했고,[3] 11월에는 도쿄 육군 대연습에 참가한 장병들에게 "(일본)공산당 본부" 명의로 "상관에게 반역하라"는 내용의 인쇄물을 보냈다.[3]

3. 2. 코민테른과의 연계

당은 코민테른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당 창당 전, 곤도 에이조는 1921년 여름에 열린 코민테른 제3차 대회에 직접 참석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당 창당 직후, 와세다 대학 학생 시게타 요시가 당의 여러 문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1921년 11월 25일, 시게타 요시는 유럽 코민테른 대표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2]

또한, 당은 극동 인민 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달라는 코민테른 대표의 방문을 받았다. 당은 출판 위원회 대표인 다카세 기요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다카세 기요시는 이 회의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4명 중 한 명이었다.[4]

같은 해 4월, 코민테른과의 연락을 위해 상하이에 건너간 곤도 에이조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당 결성 자금으로 6500JPY을 수령했지만, 귀로에 "시모노세키 유흥 사건"으로 검거되어 구금되었고, 소지품의 출처를 간파당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후 곤도 에이조는 공산당 잠정 집행위원회에서 정식 공산당 결성을 준비하고 있던 사카이 토시히코에게 자금 제공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다카세 기요시 등에게 공산당 결성을 제안했다. 8월경에 대학 당국에 의해 민인동맹회가 해산되자, 회원들은 "일본공산당"을 칭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카세 기요시 등 효민회 유지에 나카소네 겐와 등 무산사의 유지들을 더한 사람들은 코민테른 자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선전 삐라를 제작하여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등 각지에 배포했고, 11월에는 도쿄에서의 육군 대연습을 향해 각지에 분숙 중인 '''장병들에게 "(일본)공산당 본부" 명의로 "상관에게 반역하라" 등의 인쇄물을 보냈다'''. 곤도 에이조는 이것들을 "공산당 결성"으로 상하이의 코민테른 뷰로에 과장되게 보고하고, 더 나아가 자금을 요청했다.

4. 탄압과 해산

효민회는 1918년 일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로, 계몽인민공산당 결성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초기부터 일본 제국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4. 1. 체포 및 탄압

1921년 10월 12일, 효민회 활동가들에 대한 첫 번째 체포가 이루어졌다. 1921년 11월, 도쿄에서 반군사주의 운동이 있은 후,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2] 같은 해 11월 25일, 곤도 에이조, 시게타 요시, 코민테른 대표 "B. 그레이"가 체포되었다. 일주일 안에 40명의 당 활동가가 체포되었으며, 이는 사실상 당의 해체를 의미했다. B. 그레이는 일본에서 추방되었고, 그가 가져간 자금은 압수되었다.[2]

11월 25일 곤도 에이조 등이 체포되면서, 12월 1일에는 관련자 40명이 검거되는 '효민공산당 사건'(군대 적화 사건)이 발생했다. 곤도 에이조, 다카쓰 토모와 나카소네 겐신 등은 8월 20일 협의를 통해 '효민공산당'을 결성했다고 당국에 의해 단정되었지만, 실제로는 결성되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피검거자 중 15명이 출판법 및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22년 4월 25일, 곤도 에이조는 금고 10개월, 다카쓰, 나카소네 등 총 8명에게 금고·벌금형이 선고되었다. 그 외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사건으로 효민회는 궤멸되었지만, 그 멤버의 대다수가 같은 해 7월 일본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효민회는 '''제1차 일본공산당의 기원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4. 2. 재판

체포된 당원 중 15명이 출판법 및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22년 4월 25일, 곤도 에이조에게는 금고 10개월 형이 선고되었고, 다카세 기요시, 나카소네 겐와 등 총 8명에게는 금고 및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5. 역사적 의의

효민회는 1921년 가타야마 센의 영향을 받은 곤도 에이조가 야마카와 히토시,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함께 결성한 일본 최초의 공산주의 정당 중 하나인 계몽인민공산당의 다른 이름이다.[2] 1921년 11월 25일 곤도의 체포와 12월 1일 관계자 40명이 검거된 '''효민공산당 사건'''('''군대 적화 사건''')으로 궤멸되었지만,[3] 효민회는 이후 일본 공산주의 운동과 일본공산당 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효민회 멤버 대다수가 일본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제1차 일본공산당의 기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1. 참가자

우라타 다케오

참조

[1] 서적 The Japanese Communist Party 1922–1945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Japanese Communist Party 1922–1945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Japan's First Student Radical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Japanese Communist Party 1922–1945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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