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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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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아나 (카스티야)는 147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카스티야의 여왕이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은 모두 황제나 여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오빠, 언니, 조카의 죽음으로 카스티야, 아라곤, 나폴리, 시칠리아의 상속자가 되었다. 어머니 이사벨 1세 사망 후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즉위했으나, 남편 펠리페 1세와 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섭정 다툼, 펠리페의 사망으로 인해 정신 이상을 겪으며 토르데시야스 성에 유폐되었다. 그녀는 아들 카를 5세의 통치 하에서 명목상의 여왕으로 남았으며, 1555년 사망할 때까지 퇴위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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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카스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안 데 플란데스 초상화 (1500년)
후안 데 플란데스에 의한 초상화 (1500년)
군주호카스티야 여왕
아라곤 여왕
다른 이름목록 참조
출생일1479년 11월 6일
출생지톨레도, 카스티야
사망일1555년 4월 12일
사망지토르데시야스, 카스티야
매장지그라나다, 가톨릭 군주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배우자펠리페 1세 (미남왕)
자녀엘레오노르 데 아우스트리아
카를 5세
이사벨 데 아우스트리아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탈리나 데 아우스트리아
왕가트라스타마라 가문
왕조트라스타마라 가문
아버지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
어머니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
종교가톨릭
서명
통치
통치 기간1504년 11월 26일 – 1555년 4월 12일
이전 통치자이사벨 1세 및 페르난도 5세
이전 유형이전 통치자
섭정펠리페 1세 (1506년)
카를 1세 (1516년부터)
섭정 유형공동 통치자
다음 통치자카를 1세
섭정 유형1섭정
섭정1페르난도 2세 (1504–1506; 1507–1516)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1506; 1516–1517)
통치 기간21516년 1월 23일 – 1555년 4월 12일
이전 통치자2페르난도 2세
다음 통치자2카를 1세
섭정 유형2공동 통치자
섭정2카를 1세
참고 자료

2. 생애

후아나는 카스티야이사벨 1세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국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이었으나 깊은 신앙심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동맹 강화 정책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1세와 결혼하였다.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오빠 후안 왕세자, 언니 이사벨과 조카 미겔 왕자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504년 어머니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정신적인 불안정을 이유로 아버지 페르난도 2세와 남편 펠리페 1세 사이에 섭정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1506년 남편 펠리페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후아나의 정신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아버지 페르난도 2세에 의해 토르데시야스의 산타클라라 수도원 인근 왕궁에 사실상 유폐되었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한 뒤에는 아들 카를로스 1세(훗날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으로 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후아나는 계속 유폐된 상태로 지냈다. 그녀는 40년 넘게 토르데시야스에 유폐된 채 살다가 1555년 4월 12일 사망했다. 평생 공식적인 여왕 지위를 유지했으며,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후아나와 그녀의 부모, 이사벨과 페르난도; "''그라나다 정복 시의 운문''", 페드로 마르쿠엘로, 1482년경


후아나는 1479년 11월 6일 스페인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국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자녀이자 둘째 딸이었다. 부모는 모두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이었다. 후아나가 태어난 1479년, 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어머니 이사벨 1세가 다스리던 카스티야 왕국과 함께 동군연합인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었다.

피부는 하얗고 눈은 갈색이었으며, 머리카락 색은 어머니 이사벨 1세나 언니 카탈리나처럼 딸기색 금발과 적갈색 사이였다. 형제자매로는 이사벨(포르투갈 왕비), 후안(아스투리아스 공), 마리아(포르투갈 왕비), 그리고 카탈리나(잉글랜드 왕비)가 있었다.[4]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며, 독서를 즐겨 여러 언어를 익혔다.[43] 신앙심이 매우 깊었으나[44],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어머니 이사벨 1세를 실망시켰다고 전해진다.[45]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 페르난도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에게 자녀들의 이중 결혼을 제안했다.[46] 막시밀리안 1세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1495년 10월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밀라노를 침공하자 결국 제안을 받아들여 그해 11월 후아나와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의 결혼 약속이 성립되었다.[47]

2. 2. 결혼과 자녀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차녀로 태어났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위기감을 느꼈다.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 두 왕가는 혼인을 추진하였다.[82] 이 결혼은 프랑스의 세력 확장에 맞서 양측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트라스타마라 가문 사이에 맺어진 일련의 가문 간 동맹 중 하나였다.[6]

1495년, 후아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와 약혼하였다. 펠리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첫 부인 부르고뉴 공작 마리의 아들이었다. 후아나는 1469년 부모가 비밀리에 결혼했던 바야돌리드 시의 비베로 궁전에서 대리 결혼을 했다. 1496년 8월, 후아나는 2만 2천 명의 수행원과 130척의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북부 카스티야의 라레도 항구를 떠나 저지대 국가로 향했다.[48] 그녀는 1506년 여동생 카탈리나를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형제들을 보지 못했다. 젤란트에 도착했을 때 펠리페가 마중 나오지 않아 후아나는 실망했지만,[49] 펠리페의 여동생이자 스페인으로 시집갈 예정이었던 마르그리트가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50]

후아나와 필리프의 결혼 계약서(1496년).


카스티야의 후아나와 미남왕 필리프, 브뤼헤 성혈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혼례 전날 처음 만난 펠리페와 후아나는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다. '미남공'이라는 별명처럼 아름다운 외모의 펠리페에게 후아나는 매료되었고, 펠리페 또한 카스티야 출신의 후아나에게 끌려, 두 사람은 정식 혼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페인 사제에게 간소한 결혼 의식을 치러 달라고 요청했다.[51] 정식 결혼식은 1496년 10월 20일, 오늘날 브뤼셀 북쪽에 있는 리에르에서 거행되었다.[1] 후아나의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역시 펠리페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이듬해 1497년 4월 3일에 결혼하여 이중 결혼을 형성했다.

결혼 초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성실한 성격의 후아나는 남편 펠리페의 잦은 외도를 용납하지 못했다. 후아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편이나 그의 정부들에게 격분하는 일이 잦았고, 이로 인해 펠리페의 마음은 점차 멀어져 갔다.[83] 남편에 대한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힌 후아나는 1503년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성격이 포악하게 변하고 주술이나 마법에 빠져들었다.

후아나와 펠리페 사이에서는 1498년부터 1507년까지 여섯 명의 자녀(아들 둘, 딸 넷)가 태어났으며, 이들은 모두 훗날 황제나 여왕이 되었다.[7]

필립과 후아나의 자녀들


이름출생사망비고
엘레오노르1498년 11월 15일1558년 2월 25일 (59세)1518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 1530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하여 자녀 없음.
카를1500년 2월 24일1558년 9월 21일 (58세)1526년 포르투갈의 이사벨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
이사벨1501년 7월 18일1526년 1월 19일 (24세)1515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
페르디난트1503년 3월 10일1564년 7월 25일 (61세)1521년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
마리아1505년 9월 18일1558년 10월 18일 (53세)1522년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루이 2세와 결혼하여 자녀 없음.
카탈리나1507년 1月 14일1578년 2월 12일 (71세)1525년 포르투갈의 주앙 3세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음.



처음에는 이 결혼이 단순히 양가의 동맹을 강화하는 의미였으나, 후아나의 왕위 계승 순위에 변화가 생겼다. 1497년 오빠 후안이 결혼 직후 사망했고,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는 사산했다. 1498년에는 포르투갈 왕비가 된 언니 이사벨이 사망했고, 1500년에는 이사벨의 아들인 조카 미겔마저 사망하면서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2. 3.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왕세자였던 오빠 후안이 1497년 막시밀리안 1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사망했고, 장녀인 언니 이사벨 역시 1498년 미겔 왕자를 낳다가 사망했다. 조카 미겔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면서, 후아나는 카스티야 연합왕국, 아라곤 왕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스페인 제국의 광대한 해외 영토(멕시코, 페루, 카리브 제도 등)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녀의 남은 형제자매는 마리아(1482–1517)와 카탈리나(1485–1536)뿐이었다.

1501년 11월, 후아나는 남편 펠리페와 함께 카스티야로 향했다. 펠리페는 뱃길을 싫어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숙적인 프랑스를 경유하는 육로를 택했다.[53]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왕비 안 드 브르타뉴는 펠리페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와 과거 악연이 있었으나[54], 펠리페는 이를 개의치 않고 프랑스 궁정의 환대를 즐겼다. 반면, 이러한 상황과 프랑스 왕가의 평판 때문에 후아나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꼈다.[55]

스페인에 도착한 펠리페는 후아나의 부모인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후아나가 정신 이상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다.[56] 1502년, 카스티야의 토로 코르테스는 후아나를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로, 펠리페를 그녀의 배우자로 인정하고, 후아나에게 카스티야 상속자의 전통적인 칭호인 아스투리아스 공주 작위를 수여했다. 같은 해 아라곤 코르테스도 사라고사에서 후아나에게 상속자로서 충성을 맹세했지만, 사라고사 대주교 알론소 데 아라곤은 이 맹세가 코르테스와 왕 사이의 정식 합의를 거쳐야만 법적 효력을 가진다고 명확히 했다.

펠리페는 스페인의 메마른 환경과 엄격한 분위기를 싫어했고, 결국 1503년 임신한 후아나를 마드리드에 홀로 남겨둔 채 궁정의 대부분과 함께 저지대 국가로 돌아갔다. 후아나는 마드리드에 남아 훗날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되는 넷째 아이 페르디난트를 낳았다. 남편에게 버려진 충격으로 후아나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아이들을 직접 양육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장남 카를로스(훗날 카를 1세 = 황제 카를 5세)와 딸들(레오노르, 이사벨, 마리아)은 네덜란드 총독이 된 형수 마르가리타가, 차남 페르난도(훗날 페르디난트 1세)는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양육했다.[57] 후아나는 출산 후 네덜란드로 돌아갔으나, 이후 카스티야 여왕으로 즉위한 뒤에 낳은 넷째 딸 카탈리나만이 그녀의 곁에 남게 되었다.

이사벨 여왕은 사위 펠리페가 군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딸 후아나와 그의 남편 펠리페를 카스티야의 후계자로 한다"고 유언하면서도[58], 후아나가 통치 능력이 없거나 스페인에 부재할 경우에는 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섭정으로서 손자 카를로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정무를 맡는다는 단서를 달았다.[59][60] 이는 후아나의 통치 능력이 없다면 펠리페의 공동 통치권 역시 인정되지 않음을 의미했다.[61] 그럼에도 일부 귀족들은 다루기 쉬워 보이는 펠리페를 지지하며 그를 추대하려 했다.[62]

2. 4. 즉위와 권력 투쟁

1504년 11월 어머니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후아나는 유언에 따라 카스티야레온의 여왕, 나폴리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페르난도 2세와 남편 펠리페는 후아나의 정신 상태를 문제 삼으며 서로 섭정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후아나는 남편의 이러한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다[63]

페르난도 2세는 딸의 아라곤 왕위 계승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505년 제르멘 드 푸아와 재혼하여 새로운 후계자를 얻으려 시도했다. 이는 후아나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한편, 스페인 왕국은 카스티야-레온과 아라곤-카탈루냐의 통합이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이사벨 여왕의 사망으로 국내는 혼란에 빠졌다. 남편 펠리페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페르난도 2세와 대립해서라도 스페인의 실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었다[64]

1506년 1월 7일, 후아나와 펠리페는 플리싱겐 항구에서 배를 타고 카스티야로 향했다.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잉글랜드에 표류하게 되었고, 헨리 7세의 보호를 받았다. 1월 31일, 윈저 성에 도착한 이들은 환대를 받았다. 이 기회를 통해 펠리페와 헨리 7세는 정치·군사적 동맹을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65]。이 조약으로 펠리페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헨리 왕자(훗날의 헨리 8세), 그리고 후아나 부부의 장남 카를(카를로스)과 메리 공주의 약혼이 결정되었다[66]。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후아나는 펠리페의 방해로 외출이 제한되었고, 당시 잉글랜드 왕세자비였던 여동생 카탈리나와도 거의 만나지 못했다[67]

1506년 4월 말, 후아나 일행은 라 코루냐 항구에 도착했다. 페르난도 2세의 재혼 등에 불만을 품고 있던 카스티야 귀족들은 후아나 부부를 열렬히 환영하며 지지를 보냈다[68]。수도 바야돌리드로 향하는 도중, 귀족으로 변장한 아버지 페르난도 2세와 마주쳤다[69]。페르난도 2세는 펠리페와의 내전을 피하면서 스페인의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후아나의 카스티야 여왕 즉위와 펠리페의 섭정 취임을 인정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70]。이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후아나의 즉위와 펠리페의 섭정 취임이 선언되면서 양측은 표면적으로 화해한 듯 보였다[71]

이렇게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 여왕 자리에 올랐다. 남편 펠리페는 자신을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라 칭하며 아내와의 공동 통치를 주장했지만, 코르테스(의회)는 그를 여왕의 배우자, 즉 왕배(王配)로만 인정했다.

2. 4. 1. 펠리페 1세의 죽음과 유폐

1506년 9월 25일, 남편 펠리페 1세부르고스에서 펠로타 경기를 한 뒤 마신 찬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72] 당시 나폴리에 머물고 있던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 2세는 출국 전 시스네로스 추기경을 국왕 대리로 지명해 두었기에 큰 혼란은 막을 수 있었다.[73]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후아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남편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고, 방부 처리된 시신이 담긴 관을 마차에 싣고 수년 동안 카스티야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왕실 예배당이 있는 그라나다를 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미치광이 후아나가 죽은 남편인 미남왕 필리페의 관을 지키고 있다. 프란시스코 프라디야(Francisco Pradilla Ortiz), 1877.


1507년경 잉글랜드의 헨리 7세로부터 재혼 제안이 있었으나[74][75], 후아나의 여동생 아라곤의 캐서린 문제 등이 얽혀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고 헨리 7세는 1509년에 사망했다.

한편, 페르난도 2세는 딸의 상태를 빌미로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다. 1507년 7월 30일, 오르니요스에서 후아나를 만난 페르난도 2세는 그녀에게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통치권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강요했다. 8월 17일에는 후아나의 이름으로 왕실 자문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의 권력 복귀를 귀족들에게 알리도록 지시했으나, 후아나는 이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임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후아나는 이름뿐인 여왕이 되었고, 모든 문서는 후아나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지만 실제로는 페르난도 2세가 "나 국왕(Yo el Rey)"이라고 서명하며 통치권을 행사했다. 1510년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페르난도 2세를 왕국의 행정관으로 공식 인정했다.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의 충성스러운 시종들을 모두 해고하고 자신에게만 보고하는 소수의 감시인들을 붙인 뒤, 1509년 2월 바야돌리드 근처 토르데시야스의 산타클라라 수도원에 인접한 왕궁에 후아나를 사실상 감금했다.[10][13] 이 시기 일부 기록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으며, 남편의 시신을 곁에 두기 위해 토르데시야스로 가져갔다고 전한다.[13]

후아나와 남편 그리고 스페인 신하들


유폐된 후아나는 플랑드르에서 낳은 네 자녀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지만, 유일하게 곁에 있던 막내딸 카탈리나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 훗날 장남 카를로스가 카탈리나의 참상을 보고 그녀를 데려가려 하자 후아나가 격렬하게 반대하여, 결국 카탈리나는 토르데시야스로 돌아와야 했다고 전해진다.[76]

1516년 아버지 페르난도 2세마저 사망하자, 플랑드르에 있던 장남 카를로스가 스페인으로 와 카스티야-레온과 아라곤 등을 통합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로서 어머니 후아나와 명목상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카를로스 1세가 행사했다. 이로써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가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자란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측근들에 대한 반발, 그리고 스페인에서 자란 차남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세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520년 코무네로스의 반란이 발발했다. 반란군은 유폐된 후아나 여왕의 승인을 얻어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후아나는 정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반란은 동력을 잃고 국왕군에 의해 진압되었다.[77]

후아나는 40년 넘게 토르데시야스에 유폐된 채 살다가 1555년 4월 12일 사망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공식적인 여왕 지위를 유지하며 퇴위를 거부했다. 서명을 할 때는 항상 "Yo la reina"(나는 여왕)라고 썼다고 전해진다. 아들 카를로스 1세는 원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토르데시야스를 방문하여 어머니의 생존을 확인했으며[78], 후아나의 죽음은 이미 노년에 접어든 카를로스 1세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79] 그는 같은 해 10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 통치권과 금양모 기사단 단장직 등을 양위하고 은퇴했다.

2. 5. 아들 카를 5세의 통치와 사망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사망하면서 후아나는 명목상 아라곤 등 페르난도 2세가 가졌던 모든 왕위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플랑드르에서 성장하여 스페인으로 온 아들 카를로스(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있었다. 카를로스는 1517년 10월 스페인에 도착하여, 11월 4일 토르데시야스에서 어머니 후아나를 만나 공동 왕으로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치할 권한을 확보했다.[19]

후아나는 법적으로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여왕이었으나, 카를로스는 어머니를 토르데시야스의 왕궁에 계속 유폐시킴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23] 당시 카스티야의 코르테스는 카를로스에게는 '전하'(Su Alteza)라는 칭호만을 사용하고 후아나에게만 '폐하'(Majestad)라는 존칭을 사용하며 카를로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으나,[11] 현실적으로 후아나의 직접 통치를 기대하지는 않았다.[13]

1519년, 카를로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5세가 되었고, 스페인의 왕(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한편, 토르데시야스에 감금된 후아나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돌보는 수녀들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믿는 등 정신적인 불안정을 보였으며, 식사, 수면, 목욕과 같은 기본적인 일상생활조차 어려워했다고 전해진다.[24] 카를 5세는 "폐하와 아무도 대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고 적절한 일"이라는 편지를 보내 어머니를 외부와 철저히 고립시키도록 지시했다.[24]

오랜 감금 생활 끝에 후아나는 1555년 4월 12일 성 금요일, 토르데시야스의 왕궁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그녀의 유해는 스페인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Capilla Real)에 안장되어 부모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남편 펠리페 1세 등과 함께 잠들어 있다.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Capilla Real), 후아나의 묘

3. 유산과 평가

젊은 시절 후아나는 매우 지적인 여성으로 알려졌으며, 그녀가 "미쳤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널리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25] 후아나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심은 그녀가 결혼한 이후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우울증, 우울 장애, 정신병, 혹은 유전적 요인에 의한 조현병 등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26]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의 남편인 필리프와 아버지 페르난도가 정치적 이득을 위해 후아나가 병들었거나 통치 능력이 없다고 선언하며 부당하게 "미쳤다"는 낙인을 찍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27][28][29] 이러한 의혹은 그녀의 외할머니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가 남편 사후 의붓아들에 의해 아레발로 성에 유폐되어 정신 질환을 앓았던 전례와 연결되기도 한다.[26]

역사가 베서니 아람은 후아나가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해 보였을 수 있지만, 그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역할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권을 확보하고 후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후아나가 남편 필리프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편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그라나다로 옮기려 했던 행동이나 구혼자들을 물리친 것은 아들 카를로스와 카스티야 사이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코무네로스 반란 당시 반란 지도자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편을 선택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더불어 후아나가 많은 자녀를 낳은 것은 카를로스에게 그의 통치를 지지할 강력한 합스부르크 형제자매들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라 T. 낼은 아람의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아람이 후아나를 바라보는 동시대 사람들의 시각을 간과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낼은 후아나가 본질적으로 고통받는 인물이었으며, 정치 세계에 대한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강한 성격의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극심한 잔혹함과 속임수를 경험해야 했다고 평가한다.[30]

4. 작위

(로티어 공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룩셈부르크 공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나뮈르 후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부르고뉴 여백작
(팔라틴 부르고뉴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투아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샤롤레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플랑드르 여백작
(플랑드르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에노 여백작
(에노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홀란트 여백작
(홀란트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제일란트 여백작
(제일란트 백작 부인)1496년 10월 ~ 1506년 9월 25일



'''문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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