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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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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무라 신이치는 일본의 고고학자로, 구석기 유물 조작 사건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50년 미야기현에서 태어나,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본 전기·중기 구석기 시대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았으나, 2000년 언론 보도를 통해 자신이 미리 만든 유물을 발굴지에 묻는 방식으로 유물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모든 업적은 조작으로 밝혀졌고, 일본 고고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교과서 내용 수정 등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후지무라는 조작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이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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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무라 신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후지무라 신이치
로마자 표기Fujimura Shin'ichi
출생일1950년 5월 4일
출생지미야기현 가미군 나카니다정(현 가미정)
국적일본
별칭신의 손(ゴッドハンド)
직업고고학 연구자
소속특정비영리활동법인 "도호쿠 구석기 문화 연구소" 전 부이사장
출신 학교센다이 이쿠에이 고등학교 졸업
죄명구석기 유물 날조 사건
활동 기간
종교
가족
경력
경력아마추어 고고학자
활동구석기 시대 유물 주장 (후기 구석기 시대, 중기 구석기 시대)

2. 생애와 초기 활동

후지무라 신이치는 1950년 미야기현 가미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조몬 시대 토기 파편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8] 센다이 이쿠에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호쿠 전력 자회사인 도호쿠 계기공업에 취직하여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휴일에 고고학을 독학하며 구석기 시대 유물을 찾기 시작했다.[1][8]

1975년 아마추어 및 학계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어 '세키 분카 켄큐카이'(石器文化硏究会, 석기 문화 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1] 동료들 사이에서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8] 1981년 '자자라기 유적', 1983년 '나카미네 C 유적', 1984년 '바바단 A 유적' 등 미야기 현에서 많은 구석기 시대 석기 유물을 발굴했는데,[1] 이 석기들은 발견된 지층의 연대 측정 결과 약 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1]

이러한 발견으로 "신의 손"을 가진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명성을 쌓았고,[1] 이후 일본 북부에서 180여 곳의 고고학 발굴에 참여하여 거의 항상 유물을 발견했다.[1] 그의 발견으로 일본 구석기 시대의 역사는 약 30만 년 전으로 확장되었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그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이 발견은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었다.[1]

이후 사립 NGO 단체인 '도호쿠 구석기 문화 연구소'의 부소장직을 얻었다.[1] 1992년에는 아이자와 타다히로상(제1회)을 수상했고(사건 이후 반납),[8] 1999년에는 회사를 퇴직하고 연구소 직원이 되었다.[8]

2. 1. 성장 배경

후지무라 신이치는 1950년 미야기현 가미군(Kami, Miyagi)에서 태어났다.[1][8] 어린 시절 집 뒷마당에서 조몬 시대 토기 파편을 발견하면서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8] 센다이 이쿠에이 고등학교(仙台育英高等学校)를 졸업한 후, 도호쿠 전력(東北電力) 자회사인 도호쿠 계기공업(東北計器工業)에 취직하여 공장에서 근무했다.[8]

2. 2. 고고학 입문

후지무라 신이치는 1950년 미야기현 가미군에서 태어났다.[1][8] 어린 시절 집 뒷마당에서 조몬 시대 토기 파편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8] 센다이 이쿠에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호쿠 전력 자회사인 도호쿠 계기공업에 취직하여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휴일에 고고학을 독학하며 구석기 시대 유물을 찾기 시작했다.[1][8]

1975년에는 아마추어 및 학계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어 '세키 분카 켄큐카이'(石器文化硏究会, 석기 문화 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임명되었다.[1] 동료들 사이에서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유물 발견 효율이 높았다.[1][8]

3. 유물 조작과 "신의 손"

후지무라 신이치는 1972년부터 고고학을 독학하며 휴일에 유물을 찾았다. 1981년 미야기현 사사라기 유적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굴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일본 고고학계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 3만 년 전이었기 때문에 후지무라의 발견에 크게 주목했다. 그는 일본에 최초 인류가 60만 년 전에 출현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적을 여러 곳 발굴했다.[1]

후지무라는 발굴하는 유물마다 엄청난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신(神)의 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특히, 그가 발굴한 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은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기존 학설을 뒤집고, 일본에 더 오래전부터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의 직책까지 맡게 되었다.[14]

하지만, 마이니치 신문의 제보와 조사로 인해 그의 유물 발굴은 조작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후지무라가 발굴한 유물은 정밀 조사를 거쳐 가짜로 판명되었고, 국가 사적 지정이 취소되었으며, 교과서 내용도 삭제되었다. 후지무라 본인은 고고학계에서 추방되었다.[14]

후지무라의 발굴은 초기부터 여러 의혹을 받아왔다. 갓 파낸 유물에 마른 흙이 묻어 있거나, 뗀석기 제작 방식이 수십만 년 전의 것이 아니라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서로 들어맞는 등 이상한 점이 많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언론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14]

3. 1. 조작 방법

후지무라 신이치는 자신이 미리 만들어 둔 유물을 발굴 예정지에 몰래 묻고, 나중에 공식 발굴 작업을 통해 찾아내는 방식을 사용했다.[14] 이 수법은 발굴 현장에서의 부자연스러움, 예를 들어 갓 파낸 유물에 마른 흙이 묻어 있거나, 뗀석기 제작 방식이 수십만 년 전의 것이 아니라거나, 30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서로 정확하게 들어맞는 등의 문제점을 낳았다.[14]

2000년 11월 5일, 마이니치 신문은 후지무라가 미야기현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구덩이를 파고 61개의 유물을 묻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유물 발견 발표 하루 전에 찍힌 것이었다.[4] 후지무라는 기자회견에서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조작을 했다고 자백하며 사과했다.[1]

마이니치 신문은 제보를 받고 2000년 8월부터 조사를 시작하여, 동영상 카메라로 후지무라가 유물을 몰래 묻는 현장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14] 이후 11월 4일 센다이 시의 한 호텔에서 후지무라에게 비디오를 보여주며 확인했고, 후지무라는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14]

3. 2. "신의 손" 별명

1981년 미야기(宮城) 현 사사라기(座散亂木) 유적지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굴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그가 발굴하기만 하면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신(神)의 손”이라고 칭송받았다.[1]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후지무라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이 발견은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었다.

후지무라는 “영예심에서 조작을 시작했지만, ‘신의 손’ 등으로 칭찬받게 되어, 압력으로 인해 조작을 계속했다”고 말한다.

4. 조작 폭로와 사회적 파장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발굴은 마이니치 신문의 보도로 조작임이 밝혀졌다. 마이니치 신문은 제보를 받고 2000년부터 조사하여, 후지무라가 유물을 몰래 묻는 현장을 촬영하고 11월 4일 인터뷰에서 그의 조작을 인정받았다.[14]

이 사건으로 후지무라 발굴 유물은 가짜로 판명되어 국가 사적 지정이 취소되고, 교과서 내용도 삭제되었다.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추방되었고, 고단샤도서 환수 및 편집이사 사퇴 등의 조치를 취했다.[14]

후지무라의 발굴은 초기부터 여러 의혹을 받아왔다. 뗀석기 제작 수법, 석기들의 아귀 등에 대한 지적이 있었으나, 사람들의 관심과 언론 보도가 부족했다. 일본 고고학회 검토 결과, 후지무라는 42개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심었으며,[5] 연대 측정 결과도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6] 학계는 이러한 의혹을 무시하거나 방관해왔다.

4. 1. 마이니치 신문의 잠입 취재

마이니치 신문은 후지무라 신이치의 부정을 제보하는 전자우편을 받고, 2000년 8월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14] 2000년 9월 5일 미야기현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지에서 유물을 몰래 묻는 현장을 촬영하고, 10월 22일에는 더 선명한 현장 촬영에 성공했다.[14]

마이니치 신문은 조작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일반 사진기 대신 동영상 카메라를 사용했고, 먼 거리에서 숨어서 촬영했다.[14] 11월 4일 센다이시의 한 호텔에서 후지무라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유물을 몰래 묻는 VCR 영상을 보여주자 후지무라는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14]

마이니치 신문 홋카이도 지사는 후지무라의 수상한 행동에 대한 제보를 받고 팀을 꾸려 취재했다.[9] 발굴 현장을 감시하여 후지무라가 유물을 미리 묻는 장면을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했고, 2000년 11월 5일 조간에 이를 보도했다.[9]

4. 2. 사회적 파장

마이니치 신문의 특종 보도로 후지무라 신이치의 유물 조작 사건이 밝혀진 후,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가짜 유물들은 국가 사적 지정이 취소되었고, 교과서에 실린 관련 내용도 모두 삭제되었다.[14] 또한,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추방되었으며, 그의 을 출판한 고단샤도서를 회수하고 당시 편집이사가 사퇴하는 등 일본 출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4]

후지무라의 조작은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홋카이도에서 관동 지방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유적에서 이루어졌으며, 조작된 유적의 수는 자료에 따라 60개에서 200개 정도로 추정된다.[12] 이로 인해 지난 25년간의 일본 전기·중기 구석기 시대 연구 대부분이 가치를 잃었고, 매장 문화재 포함지 삭제, 검정 교과서 수정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9]

후지무라는 고발되었으나 현행법상 처벌이 어려워 보류되었고, 2003년에는 사기업무방해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사건 이후 후지무라는 즈이간지 수행 전문 도장에 머물렀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아내와 이혼했으며, 가족들은 심각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10] 후지무라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아 장애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오른손 손가락을 스스로 절단하기도 했다.[11]

후지무라는 "영예심 때문에 조작을 시작했지만, '신의 손' 등으로 칭찬받으면서 압박감 때문에 조작을 계속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그는 후쿠시마현의 장애인 취업 지원 NPO에서 근무했으며, 2010년 인터뷰에서는 정신 질환으로 인해 조작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고 밝혔다.[11]

5. 조작 사건 이후

후지무라 신이치의 조작 사건은 일본 고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의 전기·중기 구석기 시대 연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사건은 학계의 성과주의와 권위주의적 분위기, 그리고 내부 자정 능력 부족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마이니치 신문의 보도로 후지무라의 조작이 밝혀진 후, 일본 고고학회는 그의 "발견"을 검토했고, 그가 42개의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심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 인해 지난 25년간의 일본 전기·중기 구석기 시대 연구 대부분이 가치를 잃었고, 널리 알려진 유적(매장 문화재 포함지) 삭제, 문부과학성 검정 교과서 수정 등 막대한 영향이 발생했다. 조작된 유적은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홋카이도부터 관동 지방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으며, 그 수는 자료에 따라 60개에서 200개 정도로 차이가 있다.

이 사건은 학문적 진실성과 연구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계 내부의 자정 능력과 비판적 검증 시스템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5. 1. 후지무라 신이치의 행적

2000년 11월 5일, 마이니치 신문은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구멍을 파고 61개의 유물을 묻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 유물들은 그와 그의 팀이 나중에 발굴한 것이었다.[4] 사진은 가미타카모리 발견을 발표하기 하루 전에 찍은 것이었다. 후지무라는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며 자백하고 사과했다.[1]

일본 고고학회는 후지무라의 모든 "발견"을 검토하여 그가 42개의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심었다는 결론을 내렸고,[5] 후지무라가 발견했다고 주장한 유물 중 어떤 것도 제대로 연대 측정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공식적으로 내렸다.[6] 일부 유물에는 금속 도구의 흔적이 있었고, 일부는 단순한 돌멩이였다.[6] 후지무라는 일본 고고학회와 도호쿠 구석기 연구소에서 모두 추방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연구소장이 사임했다.[4]

마이니치 신문 홋카이도 지사는 발굴 현장에서 후지무라의 수상한 행동에 의문을 가진 사람의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팀을 편성하여 취재에 착수했다. 발굴 현장을 감시하여 후지무라가 미리 유물을 유적에 묻어 놓는 장면을 사진 및 비디오 촬영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본인에 대한 직접 취재와 조작 확인을 거쳐 2000년 11월 5일 조간에 보도했다. 그동안의 업적 대부분이 조작이었던 것이 밝혀졌고, 일본에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전기·중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 사라졌다.[9]

후지무라에 대한 고발도 검토되었지만, 현행법으로는 처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2003년에 후쿠오카현의 고고학자가 사기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지만, 센다이 지방검찰청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사건 후, 후지무라는 마쓰시마정의 즈이간지 수행 전문 도장에 11월 말까지 수주일 머물렀다. 그 후 후쿠시마현의 정신병원에 잠시 입원했지만, 병상을 이유로 입원처는 공개되지 않았다. 2001년 2월에는 아내와 이혼했다. 가족은 사건을 원인으로 격렬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10] 사건 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발병하여 장애인으로 인정받았다. 한편, 2003년 입원처에서 만난 여성과 재혼했다. 또한, 오른손의 집게손가락·가운데손가락을 도끼로 스스로 절단했다.[11]

후지무라는 “영예심에서 조작을 시작했지만, ‘신의 손’ 등으로 칭찬받게 되어, 압력으로 인해 조작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후에 후쿠시마현의 장애인 취업 지원 NPO에 근무했다.

2010년 취재에서, 조작에 대한 기억은 사건 후의 정신 질환으로 인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11] 당시 관계자들과의 연락도 끊었다고 한다.[12] 2019년 취재에서도 사건에 대해서는 “잊었다”고 하며, “떠올리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라고 말하고 있다.[13]

5. 2. 사건의 교훈과 윤리적 문제

2000년 11월 5일, 마이니치 신문은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미타카모리 유적에서 구덩이를 파고 유물을 묻는 사진을 공개했고, 이를 통해 후지무라의 "발견" 대부분이 조작이었음이 밝혀졌다.[9] 이 사건으로 일본의 전기·중기 구석기 시대 연구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널리 알려진 유적과 검정 교과서 내용까지 수정해야 했다.[9]

이는 학계에서 소수 의견이나 의혹 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가 이를 무시하거나 방관해 온 결과였다. 마이니치 신문의 끈질긴 취재와 증거 확보가 없었다면, 후지무라의 조작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후지무라는 "영예심" 때문에 조작을 시작했고, "신의 손"이라는 칭찬과 압박감에 휩싸여 조작을 멈추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개인의 윤리 의식 부족뿐만 아니라, 학계의 지나친 성과주의와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빚어낸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후지무라 신이치 사건은 학문적 진실성과 연구 윤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특히 고고학과 같이 과거를 다루는 학문에서는 조작이나 왜곡이 발생할 경우 그 피해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학계 내부의 자정 능력과 비판적 검증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6. 비판과 의혹

후지무라 신이치는 자신이 만든 유물을 발굴 예정지에 몰래 묻고 나중에 발굴하는 방식으로 유물을 조작했다. 이 사건은 일본 고고학계를 뒤흔들었고, 교과서에 실린 그의 업적을 변경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14]

1981년 미야기 현 사사라기 유적지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굴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며, 이후 일본 최초 인류가 60만 년 전에 출현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유적을 여러 곳 발굴했다. 그는 “신(神)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유물을 발굴했지만, 이는 모두 조작으로 밝혀졌다.

마이니치 신문2000년 8월부터 후지무라의 조작 의혹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5일 미야기 현 가미타카모리 유적지에서 유물을 몰래 묻는 현장을 촬영했고, 10월 22일에는 더 선명한 영상을 확보했다. 11월 4일 센다이 시의 한 호텔에서 후지무라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는 영상을 본 후 "마(魔)가 낀 것 같다"라며 조작 사실을 인정했다.[14]

이 사건으로 후지무라가 발굴한 유물은 정밀 조사 결과 가짜로 판명되어 국가 사적 지정이 취소되었고, 교과서 내용도 삭제되었다. 후지무라는 고고학계에서 추방되었으며, 그의 을 출판한 고단샤도서 환수 조치와 편집 이사의 사퇴로 책임을 졌다.[14]

후지무라는 마쓰시마정의 즈이간지에서 잠시 머물렀고, 이후 후쿠시마현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2001년 2월에는 아내와 이혼했으며, 가족들은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10] 그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게 되었고, 오른손 손가락을 스스로 절단하기도 했다.[11]

후지무라는 영예심 때문에 조작을 시작했고, 칭찬에 대한 압박감으로 조작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조작 범위가 광범위하게 밝혀지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장애인 취업 지원 NPO에서 근무했으며, 2010년 인터뷰에서는 조작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밝혔다.[11]

6. 1. 초기 의혹과 묵살

후지무라 신이치의 발굴은 초기부터 여러 의혹을 받아왔다. 방금 파낸 유물에 마른 이 묻어 있거나, 뗀석기 제작 수법이 수십만 년 전의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석기들의 아귀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점 등 이상한 점이 많아 여러 차례 지적이 있었다.[14] 그러나 이러한 의혹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언론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몇몇 지질학자와 인류학자들은 유적지의 지질학적 분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지무라의 발견에 의문을 제기했다. 타케오카 도시키(Takeoka Toshiki)는 논문을 통해 가미타카모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석기 유물들이 후기 구석기 시대 석기의 특징과 매우 다르며, 조몬 시대의 석촉과 형태나 제작 방법이 동일하다고 지적했다.[2] 오다 시즈오(Shizuo Oda)와 찰스 T. 켈리(Charles T. Keally)도 논문에서 미야기 현에 기원전 3만 년 이전의 인류 유래 유물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3]

이러한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후지무라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그의 발견은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었다. 이후 그는 사립 NGO 단체인 '도호쿠 구석기 연구소'의 부소장직을 얻었다. 학계는 후지무라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그의 발견은 역사 교과서에 기록되었다는 내용은 중복되므로 삭제한다.

발견 효율이 지나치게 좋았다는 점이나 발견 상황이 부자연스럽다는 의견, 그리고 후지무라 신이치를 비롯한 도호쿠 구석기 문화 연구소의 “업적”에 대한 의문 등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학계에서는 소수 의견이었고, 고고학계는 이러한 의견을 거의 무시하거나 방관해 왔다. 후지무라가 소속된 단체의 조사 결과에 의문을 품는 고고학 관계자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적었다.

6. 2. 공범 의혹

일부 지질학자와 인류학자들은 후지무라 신이치의 발견이 유적지의 지질학적 분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 오다 시즈오와 찰스 T. 켈리는 논문에서 미야기현에 기원전 3만 년 이전의 인류 유래 유물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3]

발견 효율이 지나치게 좋고 발견 상황이 부자연스럽다는 의견, 그리고 후지무라 신이치를 비롯한 도호쿠 구석기 문화 연구소의 “업적”에 대한 의문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학계에서는 소수 의견이었고, 고고학계는 이러한 의견을 거의 무시하거나 방관했다. 그러나 마이니치 신문 홋카이도 지사가 팀을 편성하여 취재한 결과, 후지무라가 미리 유물을 유적에 묻어 놓는 장면을 사진 및 비디오로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2000년 11월 5일, 마이니치 신문의 보도를 통해 그동안의 업적 대부분이 조작이었던 것이 밝혀졌다.[9]

후지무라에 대한 고발도 검토되었지만, 현행법으로는 처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2003년에는 센다이 지방검찰청이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후지무라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고 있으며, 조작에 대한 기억은 사건 후의 정신 질환으로 인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11] 2019년 취재에서도 사건에 대해서는 “잊었다”고 하며, “떠올리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라고 말했다.[13]

7. 수상 내역

1992년 9월 15일, 재야 고고학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아이자와 타다히로 상(제1회)을 수상하였다.[8] 그러나 이후 조작 사건이 밝혀지면서 2000년 11월 12일 이 상을 반납하였다.[8]

8. 저작물


  • 후지무라 신이치 (2000년 11월). “파고 파서 고고학의 정설을 뒤엎은 사나이 나에게는 50만 년 전의 지형이 보인다”. 《현대》 (고단샤) 34 (11): 112-119.
  • 쿠리시마 요시아키; 후지무라 신이치; 노자키 타카미야 (2000년 5월). “흥분 토론 지치부 원인을 만난 날”. 《정론》 333: 250-260.
  • 카지와라 요; 후지무라 신이치; 카마다 토시아키 (2000년 3월). “과학의 눈 세계 최고(最古)의 석기 매납 유구 일본 최고(最古)의 석기군: 카미타카모리 유적에서의 신발견”. 《과학》 (이와나미 쇼텐) 70 (3): 163-165.
  • 후지무라 신이치; 카마다 토시아키; 카지와라 요 외 (1999년 1월). “속보 카미타카모리 유적 제4차 조사에 대해”. 《월간 고고학 저널》 440: 22-25.
  • 후지무라 신이치; 카마다 토시아키; 요코야마 유헤이 외 (1997년). “제사 유적 소개 미야기현 치쿠타테정 카미타카모리 유적 발견의 석기 매납 유구 세계 최고(最古)의 제사 유구”. 《제사 고고학》 1: 81-83.

9. 관련 서적 및 참고 문헌


  • 毎日新聞旧石器遺跡取材班일본어 편, 《발굴 날조》 (신초사, 2003년) ISBN 4-10-146823-0
  • 毎日新聞旧石器遺跡取材班일본어 편, 《고대사 날조》 (신초사, 2003년) ISBN 4-10-146824-9
  • 후지무라 신이치, 〈나는 50만 년 전의 지형이 보인다〉 (《월간 현대》 2000년 11월호) pp.112-119[1]
  • 오쿠노 마사오, 《신들의 더러운 손―구석기 날조・아무도 쓰지 않았던 진상》 (아즈사 서방, 2004년) ISBN 4870352214[2]
  • 오카무라 미치오, 《구석기 유적 「날조 사건」》 (야마카와 출판사, 2010년 10월) ISBN 978-4634150089
  • 다케오카 도시키, 《고고학 붕괴-전기 구석기 날조 사건의 심층》 (勉誠出版, 2014년) ISBN 978-4585220916

참조

[1] 서적 発掘捏造 毎日新聞社 2001
[2] 간행물 『前期旧石器』とはどのような石器群か 石器文化談話会 1998
[3] 논문 A Critical Look at the Palaeolithic and "Lower Palaeolithic" Research in Miyagi Prefecture. 1986
[4] 웹사이트 God's Hands Did the Devil's Work - Archaeology Magazine Archive https://archive.arch[...] 2023-07-14
[5] 웹사이트 Archaeologist faked finds at 42 sites https://www.japantim[...] 2001-10-08
[6] 웹사이트 Archaeological probe dismisses 'findings' of disgraced Fujimura https://www.japantim[...] 2002-05-27
[7] 논문 旧石器ねつ造のゴッドハンド「藤村新一」廃人説 https://ndlsearch.nd[...] 新潮社 2001-05
[8] 웹사이트 アカデミズムという虚構 旧石器遺跡捏造事件 http://blogos.com/ar[...] 2012-06-21
[9] 논문 敗軍の将、兵を語る 人物:甘粕 健 氏 [日本考古学協会会長] 捏造事件、学界にも責任ある https://ndlsearch.nd[...] 日経BP 2002-07
[10] 잡지 2001-10-26
[11] 잡지 旧石器発掘ねつ造 ~今何を思う~ https://news.tbs.co.[...] 2010-11-11
[12] 뉴스 「神の手」にだまされた研究者、「お前はグルかバカか」迫られた問い…2000年11月「あれから」 https://www.yomiuri.[...] 読売新聞オンライン 2022-02-13
[13] Youtube 【旧石器発掘ねつ造】次々と石器を発掘し“ゴッドハンド”と呼ばれた男…実は200か所以上の遺跡で“ねつ造”していた【平成の記憶】 https://www.youtube.[...] 2023-06-05
[14] 서적 편집이란 무엇인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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