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기요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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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초대 당주로, 1056년 무쓰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젠쿠넨 전쟁과 고사넨 전쟁을 겪으며 성장했고, 1087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슈 6군을 지배하는 세력가가 되었다. 이후 히라이즈미로 거처를 옮겨 정치, 문화의 중심 도시를 건설했으며, 주손지 중창 불사를 통해 히라이즈미를 번성시켰다. 기요히라는 73세에 사망했으며, 곤지키도에 미라화된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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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노 기요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씨명 | 후지와라 씨(藤原氏) → 데와 기요하라 씨(出羽淸原氏) →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 |
| 이름 |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 清衡) |
| 원어이름 | 藤原 清衡 |
| 별명 | 곤노타로(權太郞), 오쿠노 미다테(奧御館), 병위위 기요히라(兵衛尉清衡), 헤이 기요히라(平清衡), 무쓰 압령사(陸奥押領使) |
| 가몬 | Japanese crest Sagari Fuji.svg |
| 시대 | 헤이안 시대 후기 |
| 출생 | 덴기(天喜) 4년(1056년) |
| 사망 | 다이지(大治) 3년(1128년) 7월 13일(8월 10일) |
| 개명 | 기요하라노 기요히라(清原清衡), 후지와라노 기요히라(藤原清衡) |
| 묘소 | 주손지 곤지키도(金色堂) |
| 관위 | 무쓰(陸奥) 압령사(押領使), 정6위상(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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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쓰네키요(藤原經淸) |
| 어머니 | 유카이치노 마에(有加一乃末陪, 아베 요리토키(安倍頼時)의 딸) |
| 양아버지 | 기요하라노 다케사다(淸原武貞) |
| 형제 | 기요히라, 고레모토(經元), 다케히라(武衡) |
| 의붓형 | 기요하라노 사네히라(淸原真衡) |
| 이부동생 | 기요하라노 이에히라(淸原家衡) |
| 배우자 | 정실: 기타가타 헤이시(北方平氏) |
| 자녀 | 고레쓰네(惟常), 모토히라(基衡), 마사히라(正衡), 이에키요(家淸), 기요쓰나(淸綱), 딸(사타케 마사요시(佐竹昌義)의 아내), 양녀: ''도쿠히메(徳姫, 이와시로 노리미치(岩城則道)의 아내) |
2. 생애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무쓰(훗날의 이와시로국) 와타리 군의 호족이자 재청관인이었던 후지와라노 쓰네키요와 무쓰의 대호족 아베노 요리토키의 딸 사이에서 1056년 기타카미 분지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0]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의 자손으로, 1047년 작성된 『조흥복사기』에 '쓰네키요 로쿠오쿠'로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후지와라 일족으로서 중앙의 후지와라 본가로부터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쓰네키요는 전투 능력으로도 유명했지만, 다가가의 중급 관료 자리를 버리고 아내의 가족과 함께 현재의 이와테현에서 살았다. 따라서 기요히라는 일본 당국에 의해 반역자로 여겨지는 아버지를 둔 에미시 가문에서 에미시 영토에서 태어났다.
기요히라의 초기 생애는 일본 중앙 정부와 전쟁 중인 공동체에서 보냈다. 젠쿠넨 전쟁(前九年合戦)은 1050년부터 1062년까지, 고사넨 전쟁(後三年合戦)은 1083년부터 1087년까지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1057년에 할아버지 아베노 요리토키를 전투에서 잃었고, 1062년에는 삼촌 사다토를 잃었으며, 그의 어머니의 모든 형제들은 같은 해에 규슈로 추방되었다. 그의 아버지 쓰네키요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에 의해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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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쿠넨 전쟁 중 아버지를 잃은 후, 그의 어머니는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도왔던 기요하라노 다케히라의 첩이 되었다. 기요히라는 적의 씨족에서 기요하라노 기요히라로 자라며 이복 형 사네히라와 이복 동생 이에히라와 함께 성장했다. 기미코노 히데타케가 기요하라노 다케노리의 종모제로서 또 사위가 되는 등 복잡한 혈연 관계로 이어진 일족은 내분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였다.[13] 고사넨 전쟁은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세 형제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에이호 3년(1083년), 히데타케가 사네히라와 사이가 벌어져 기요히라와 이에히라를 꾀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사네히라가 히데타케를 치고자 데와로 향한 사이 사네히라의 본거지를 치도록 했다. 이 분쟁에 당시의 무쓰노카미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개입해 사네히라를 도와 기요히라와 이에히라를 쳐서 대패시키고, 형제는 도망치던 중에 결국 요시이에에게 항복했다. 데와로 향했던 사네히라가 급사하면서 기요히라와 이에히라 형제는 요시이에의 중재로 옛 기요하라 집안 소유의 영지를 분할상속받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는 1086년에 기요히라의 저택을 급습해 그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 기요히라는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와 동복 동생 카리타노 츠네모토의 도움으로 이에히라를 멸망시켰다.
1087년, 기요히라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1] 그러나 전쟁 중에 이복 동생 이에히라에 의해 아내와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고사넨 전쟁은 기요하라 집안의 사적인 싸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요시이에 자신도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은상도 받지 못했고, 기요히라에게도 관위가 수여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요하라 집안뿐 아니라 아베 집안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기요히라는 오쿠 6군을 지배하는 세력가가 되었으며, 친아버지의 성인 후지와라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 씨를 열었다. 이때가 간지 원년(1087년)으로, 기요히라의 나이 32세였다.
기요히라는 가호 연간(1094년 - 1095년) 즈음에는 이와이 군의 히라이즈미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 정치, 문화의 중심도시를 짓는데 착수했다. 1108년에는 주손지(中尊寺)의 중창불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훗날 일본 중세의 가장 장대한 도시로 불린 히라이즈미의 원형이자 오슈 후지와라 씨 4대 100년의 영화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기요히라는 간잔 산 정상에 야심 찬 불교 사찰 건립 계획을 시작했다. 이 사찰, 탑, 저장고 및 정원 단지는 그의 유산이 될 것이고, 그 자신, 그의 가족 및 그의 영토에 대한 그의 비전을 영원히 구현할 것이다.[2] 또한 송 (왕조)으로부터 일체경을 수입하는 등, 북방 무역에도 착수했다.
기요히라는 오미에서 주물사를 모셔다 남부철기(南部鐵器)를 만들게 했다.[21] 금은 나전을 수놓은 곤지키도(金色堂)가 낙성된 이듬해, 기요히라는 73세로 사망했다. 『주손지 공양 원문』에서는 자신을 "동이(東夷)의 원수", "부수(俘囚)의 상두"라고 표현했다.
2. 1. 출신
무쓰국(陸奧國) 와타리군의 호족이자 재청관인이었던 후지와라노 쓰네키요(藤原經淸)와 무쓰의 대호족 아베노 요리토키(安倍賴時)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0]기요히라는 후지와라 홋케(北家)의 무장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鄕)의 자손으로, 1047년에 작성된 5위 이상의 후지와라 씨 인물의 교명을 적은 『조흥복사기(造興福寺記)』에 '쓰네키요 로쿠오쿠(經淸六奧, 로쿠오쿠란 무쓰를 가리킨다)'로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후지와라 일족의 한 인물로서 중앙의 후지와라 본가로부터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쓰네키요는 전9년의 역에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에게 반기를 들고 아베 집안에 가담했다가 구리야가와(厨川)의 싸움에서 패하고 아베 씨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기요히라는 일곱 살에 불과했다. 적장의 적남(嫡男)으로서 본래는 아버지를 따라 처형당할 운명이었지만, 어머니가 아베 씨를 멸망시킨 요리요시측의 기요하라노 다케노리(淸原武則)의 맏아들 다케사다(武貞)에게 재가하면서 목숨을 건졌고, 이어서 다케사다의 양자로 들어갔다.
2. 2. 후3년의 역
기요히라에게는 다케사다의 적자이자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형 사네히라와, 다케사다에게 재가한 기요히라의 어머니가 다케사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기요히라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 이에히라가 있었다. 기미코노 히데타케가 기요하라노 다케노리의 종모제로서 또 사위가 되는 등 복잡한 혈연 관계로 이어진 일족이 존재하여, 혈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기 쉬운 상태였다.[13]에이호 3년(1083년)에 히데타케가 사네히라와 사이가 벌어져 기요히라ㆍ이에히라를 꾀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사네히라가 히데타케를 치고자 데와로 향한 사이 사네히라의 본거지를 치도록 했다. 이 분쟁에 당시의 무쓰노카미(陸奧守)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가 개입해 사네히라를 도와 기요히라ㆍ이에히라를 쳐서 대패시키고, 형제는 도망치던 중에 결국 요시이에에게 항복했다. 한편 데와로 향했던 사네히라가 갑자기 급서하면서 기요히라ㆍ이에히라 형제는 요시이에의 중재로 옛 기요하라 집안 소유의 영지를 분할상속받는다. 요시이에의 중재는 기요히라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으며, 요시이에가 기요하라 집안의 세력 약화를 위해 일부러 그들의 대립을 부추겼다는 견해도 있다.[14] 하지만 이 중재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는 오토쿠 3년(1086년)에 기요히라의 저택을 급습해 기요히라의 처자권속을 모두 죽여버렸고, 목숨을 건져 도망친 기요히라는 요시이에에게 도움을 청하여, 요시이에와 난을 피한 동복 동생 카리타노 츠네모토(刈田経元)[15]가 기요히라를 도와 최종적으로 이에히라를 멸하게 된다.
후3년의 역은 기요하라 집안의 사적인 싸움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요시이에 자신도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은상도 받지 못했고, 기요히라에게도 관위가 수여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기요하라 집안뿐 아니라 아베 집안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기요히라는 오쿠 6군을 지배하는 세력가가 되었으며, 친아버지의 성인 후지와라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 씨를 열었다. 이때가 간지 원년(1087년), 기요히라의 나이 32세였다.
2. 3. 히라이즈미 조영
기요히라는 가호 연간(1094년 - 1095년) 즈음에는 이와이 군의 히라이즈미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 정치ㆍ문화의 중심도시를 짓는데 착수했다. 히라이즈미를 선택한 이유는 수도 및 주요 도시로 이어지는 주요 고속도로이자 그가 통제하는 북쪽 땅으로 이어지는 변경선에 위치해 있다는 점, 남쪽의 시라카와 장벽에서 북쪽의 현재의 아오모리현에 있는 소토가하마까지 측정한 결과, 그곳이 그들의 영토인 오슈의 중심지로 결정되었다는 점, 이 위치가 전통적으로 일본 영토였던 고로모 강의 남쪽에 있다는 점이었다. 이전에는 에미시 요새가 항상 동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의 북쪽에 건설되었다.[2]1108년에는 주손지(中尊寺)의 중창불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훗날 일본 중세의 가장 장대한 도시로 불린 히라이즈미의 원형이자 오슈 후지와라 씨 4대 100년의 영화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기요히라는 간잔 산 정상에 야심 찬 불교 사찰 건립 계획을 시작했다. 이 사찰, 탑, 저장고 및 정원 단지는 그의 유산이 될 것이고, 그 자신, 그의 가족 및 그의 영토에 대한 그의 비전을 영원히 구현할 것이다.[2] 또한 송 (왕조)(宋 (王朝))으로부터 일체경을 수입하는 등, 북방 무역에도 착수했다.
기요히라는 오미(近江)에서 주물사를 모셔다 남부철기(南部鐵器)를 만들게 했다.[21] 금은 나전을 수놓은 곤지키도(金色堂)가 낙성된 이듬해(다이지 3년), 당시로서는 장수인 73세로 사망했다. 덧붙여 주손지 공양 원문(中尊寺供養願文)으로 알려진 문서에서는, 자신을 "동이(東夷)의 원수", "부수(俘囚)의 상두"라고 표현하고 있다.
2. 4. 오슈 후지와라 씨의 초대 당주
기요히라는 본거지를 에사시군의 도요타노타테(豊田館, 지금의 오슈시)로 정하고 세력 확대를 꾀했다. 간지 5년(1091년)에는 당시 관백이었던 후지와라노 모로자네(藤原師實)에게 말을 바치며 교토의 후지와라 본가와 관계를 돈독히 했다.[21] 또한 시바타(柴田) 군의 대고산신사(大高山神社)나 캇타(刈田) 군 예전령신사(刈田嶺神社)에서 조정에 바쳐야 할 금을 대신 내주는 등 오슈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
간지 6년(1092년) 6월, 무쓰노카미가 된 후지와라노 모토이에(藤原基家)가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는 기요히라가 전투를 일으키려 한다는 혐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기요히라가 무쓰의 압령사(押領使)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압령사 임명을 간지 3년인 1089년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가호(嘉保) 연간(1094년 - 1095년) 즈음에는 이와이(磐井) 군의 히라이즈미(平泉)로 거처를 옮겨 이곳을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108년에는 주손지(中尊寺)의 중창불사를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일본 중세의 가장 웅장한 도시로 불리게 될 히라이즈미의 기틀을 다지고 오슈 후지와라 씨 4대 100년 영화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금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주손사의 곤지키도가 완공된 이듬해(다이지 3년), 기요히라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은 『주손사공양원문』(中尊寺供養願文)에서 기요히라는 스스로를 '아즈마에비스(東夷)의 원추(遠酋)', '부수(俘囚)[22]의 우두머리(上頭)'로 칭했다.
기요히라는 후지와라노 쓰네키요의 아들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베노 요리토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056년 기타카미 분지 어딘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전투 능력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쓰네키요는 다가가의 중급 관료였으나, 에미시족 여성과 결혼한 후 관직을 버리고 아내의 가족과 함께 현재의 이와테현 지역에서 살았다. 따라서 기요히라는 일본 조정으로부터 반역자로 여겨지는 아버지를 둔 에미시 가문에서 태어났다.
기요히라의 어린 시절은 일본 중앙 정부와 전쟁을 치르는 공동체에서 보냈다. 전9년 전쟁(젠쿠넨 전쟁, 前九年合戦)은 1050년부터 1062년까지, 후3년 전쟁(고사넨 전쟁, 後三年合戦)은 1083년부터 1087년까지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1057년에 할아버지 아베노 요리토키를 전투에서 잃었고, 1062년에는 삼촌 사다토를 잃었으며, 그의 어머니의 모든 형제들은 같은 해에 규슈로 추방되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에 의해 참수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요히라는 젠쿠넨 전쟁 중 아버지를 잃은 후,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도왔던 그의 적 기요하라노 다케히라의 첩이 되었다. 기요히라는 적의 씨족에서 기요하라노 기요히라로 자라며 이복 형 사네히라와 이복 동생 이에히라와 함께 성장했다. 후3년 전쟁은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세 형제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087년, 기요히라는 과거의 적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1] 그러나 전쟁 중에 이복 동생 이에히라에 의해 아내와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후3년 전쟁에서 승리한 기요히라는 현재의 에사시 구, 오슈시, 이와테현에 있는 토요타 요새 (이와야도 성)로 돌아와 미래를 계획했다. 1090년에서 1100년경에는 현재의 히라이즈미 마을에 있는 간잔 산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이 곳을 선택한 데에는 수도 및 주요 도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이자 자신이 통제하는 북쪽 땅으로 이어지는 변경선에 위치해 있다는 점, 남쪽의 시라카와 장벽에서 북쪽의 아오모리현 소토가하마까지 측정한 결과 오슈의 중심지로 결정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 위치가 전통적으로 일본 영토였던 고로모 강의 남쪽에 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기요히라는 60세가 넘을 때까지 후지와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기요하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교토 출신의 타이라 부인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두었는데, 그녀는 그의 여섯 자녀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변경에서의 삶에 지쳐 교토로 돌아갔다. 그는 또한 두 명의 에미시 아내, 기요하라와 아베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장남이자 적법한 상속인은 고레쓰네였고, 둘째 아들이자 후계자가 된 모토히라는 1105년경에 기요히라의 에미시 아내 중 한 명에게서 태어났다.
히라이즈미에 거처를 마련한 후, 기요히라는 간잔 산 정상에 웅장한 불교 사찰 주손지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 사찰, 탑, 창고 및 정원 단지는 그의 유산이 되었고, 그 자신, 그의 가족 및 그의 영토에 대한 그의 비전을 영원히 구현하는 상징이 되었다.[2]
기요히라는 본거지를 에사시군 도요다관에 두고 세력 확대를 꾀하는 한편, 간지 5년 (1091년)에 관백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에게 공마 등을 바치는 등 교토의 후지와라 씨와 교분을 돈독히 했으며, 또한 시바타군의 오타카야마 신사, 캇타군의 캇타네 신사의 연공을 대납하는 등 오우(奥羽)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구축했다.
한편 간지 6년 (1092년) 6월의 무쓰노카미(陸奥守) 후지와라노 모토이에의 해문에서는 기요히라에게 합전을 꾀한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또한 이듬해 간지 7년 (1093년)에는 기요히라의 세력권인 데와국에서 다이라노 모로묘 및 다이라노 모로스에 부자 등이 데와국부의 아키타성을 습격하는 반란이 발생했다. 반란 자체는 간지 8년 (1094년)에 무쓰노카미 미나모토노 요시쓰나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기요히라의 관여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기요히라는 이 전후에 무쓰의 압령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압령사 임명을 간지 3년 (108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곤지키도에 모셔진 기요히라의 시신
곤지키도 수미단 지하에 안치된 기요히라의 미라화된 유해를 조사한 결과, 혈액형은 AB형이며, 증손 야스히라까지 4대가 직계로 이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기요히라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진 비교적 작은 얼굴이며 콧날이 오똑하게 솟아 있다. 키는 159cm이고, 손은 작고 부드러운 형태를 띠고 있다. 사지는 잘 발달되어 있으며, 체형은 비교적 여윈 편이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왼쪽 반신에 현저한 골위축증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뇌일혈, 뇌경색, 뇌종양 등으로 인한 반신불수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병 시기는 거의 완쾌되기 어렵게 된 무렵에 기요히라의 아내가 사경(寫經)을 시작했다는 1117년 또는 1119년 사이로 추측된다. 사망 당시의 연령은 치아 상태로 볼 때 70세 이상으로, 기록에 나타난 73세 사망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다.
4. 계보
기요히라의 아내는 '기타카타 헤이시(北方平氏)'로, 그의 정실로 여겨지지만 정확한 계보는 알 수 없다. 기요히라의 아버지 쓰네키요의 외가 친척인 다이라노 구니타에(平國妙)와 관련이 있다는 설, 에치고의 조씨(城氏), 가이도 헤이시의 분파인 이와키씨(岩城氏), 히타치의 다이죠씨(大掾氏), 수도의 헤이시(平氏) 등 여러 설이 있다. 또한, 기요하라노 다케히라의 딸이라는 설도 존재한다.[17]
겐에이(元永) 2년(1119년) 무렵, 기요히라에게는 6남 3녀의 자녀가 있었다.[18] 한편, 『주우키(中右記)』에 등장하는 '병위위(兵衛尉) 기요히라' 또는 '다이라노 기요히라(平淸衡)'를 동일 인물로 보고, 간지(寬治)에서 고와(康和) 연간에 아내의 성인 '다이라(平)'를 칭하며 교토에서 관직을 맡았다는 설도 있다.
기요히라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후지와라노 쓰네키요
- 양아버지: 기요하라노 다케사다
- 어머니: 아유카이치노 마후 - 아베노 요리토키의 딸
- 의형: 기요하라노 사네히라 - 고산넨 전투에서 기요히라와 대립
- 이복 동생: 기요하라노 이에히라 - 고산넨 전투 초반에는 기요히라와 함께 사네히라에 맞섰으나, 이후 기요히라와 대립하다 멸망
- 정실: 기요하라씨의 딸 - 기요하라노 다케사다의 딸로 추정. 고산넨 전투에서 이에히라에 의해 자녀와 함께 살해됨
- 계실: 기요하라씨의 딸
- 후지와라노 고레쓰네 - 후지와라노 모토히라의 이복 형. 별명은 고다테 고레쓰네
- 계계실: 시노부 사토씨의 딸
- 계계계실: 호쿠호 헤이시
- 후지와라노 모토히라 - 차남. 이복 형 고레쓰네와의 후계 다툼에서 승리하여 후지와라 씨를 계승
- 생모 불명
- 후지와라노 마사히라 - 삼남. 별명은 고다테 사부로 마사히라
- 후지와라노 기요쓰나 - 사남. 별명은 와타리 곤주로, 또는 히즈메 도시히라
- 딸 - 사타케 마사요시의 부인
- 그 외 성명이 불분명한 남자 2명과 여자 2명
5. 기요히라공 천도행례
이와테현 오슈시 및 주변 지역에서는 2008년 10월 4일에 오슈 후지와라 씨를 기념하기 위한 '기요히라공 천도행례'가 개최되었으나, 이후 중단되었다. 이 행사는 히라이즈미 문화를 쌓아올린 창시자이자 오슈 후지와라 씨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기요히라가 에사시의 도요타노타테에서 히라이즈미로 본거지를 옮긴 것을 재현하는 행사였다. 마쓰리 당일 오전 중에는 행렬이 도요타노타테 유적에서 출발 제사를 지낸 뒤, NHK 대하드라마 『불타오르다』(1993년) 촬영장이기도 했던 에사시 후지와라노 사토와 미즈사와 구 시가지, 이사와 구의 하치만 신사와 마에사와 구의 시라토리노타테 유적 인근 오슈 시 소의 박물관, 고로모가와 구의 쵸자가하라 폐사터[23]에서 행렬 및 행사를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히라이즈미정 동사무소에서 기요히라의 아들 후지와라노 모토히라(基衡)의 아내가 세웠다는 관자재왕원 유적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행렬의 앞뒤로는 에사시 시시오도리라는 일본 전통 무용을 배치하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쓰리 행렬에서 기요히라 역은 드라마 『불타오르다』에서 기요히라 역을 맡았던 배우 무라카미 히로아키가 연기했다.
기요히라는 후지와라노 쓰네키요의 아들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베노 요리토키의 딸 사이에서 1056년 기타카미 분지기타카미 분지/北上盆地일본어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전투 능력으로 유명한 후지와라 씨족의 히데사토 계열이었다. 쓰네키요는 에미시인 아내와 결혼한 후 관직을 버리고 아내의 가족과 함께 현재의 이와테현에서 살았다. 그전에는 다가가(현재의 센다이시, 미야기현)의 중급 관리였다. 따라서 기요히라는 일본 당국에 의해 반역자로 여겨지는 아버지를 둔 에미시 가문에서 태어났다.
기요히라의 초기 생애는 일본 중앙 정부와 전쟁 중인 공동체에서 보냈다. 전9년 전쟁(젠쿠넨 전쟁, 前九年合戦)은 1050년부터 1062년까지, 후3년 전쟁(고사넨 전쟁, 後三年合戦)은 1083년부터 1087년까지 벌어졌다. 그는 1057년 할아버지 아베노 요리토키를 전투에서 잃었고, 1062년에는 삼촌 사다토를 잃었으며, 그의 어머니의 모든 형제들은 같은 해에 규슈로 추방되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에 의해 참수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삶을 형성하고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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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젠쿠넨 전쟁 중 아버지를 잃은 후,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전쟁에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를 도왔던 그의 적 기요하라노 다케히라의 첩이 되었다. 기요히라는 적의 씨족에서 기요하라노 기요히라로 자랐으며, 이복 형 사네히라와 이복 동생 이에히라와 함께 자랐다. 후3년 전쟁은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세 형제 간의 갈등을 포함했다.
기요히라는 1087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1] 그러나 기요히라는 전쟁 중에 아내와 아들을 잃었는데, 이는 그의 이복 동생 이에히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후3년 전쟁에서 승리한 기요히라는 토요타 요새 (이와야도 성)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미래를 계획했다. 1090년에서 1100년 경에 그는 현재의 히라이즈미 마을에 있는 간잔 산에 새 집을 지었다. 그가 그곳을 선택한 데에는 세 가지 주요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그곳이 수도 및 기타 주요 도시로 이어지는 주요 고속도로이자 그가 통제하는 북쪽 땅으로 이어지는 변경선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남쪽의 시라카와 장벽에서 북쪽의 현재 아오모리현에 있는 소토가하마까지 측정한 결과, 그곳이 그들의 영토인 오슈의 중심지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 위치가 전통적으로 일본 영토였던 고로모 강 남쪽에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에미시 요새가 항상 동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의 북쪽에 건설되었다.
기요히라는 1117년 60세가 넘을 때까지 후지와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기요하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기요히라는 교토 출신의 타이라 부인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아내와 첩을 두었는데, 그녀는 그의 여섯 자녀의 어머니로 불렸다. 그는 또한 두 명의 에미시 아내, 기요하라와 아베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장남이자 상속인은 고레쓰네였다. 그의 둘째 아들이자 계승자가 된 모토히라는 1105년경에 기요히라의 에미시 아내 중 한 명에게서 태어났다.
히라이즈미에 집을 짓고 기요히라는 간잔 산 정상에 주손지(中尊寺) 건립 계획을 시작했다. 이 사찰 단지는 그의 유산이 될 것이고, 그 자신, 그의 가족 및 그의 영토에 대한 그의 비전을 영원히 구현할 것이다.[2]
텐닌(天仁) 원년(1108년), 토바 상황의 칙선에 의해 후지와라노 모토히라가 데와국모가미군(현 야마가타현사가에시)의 지온지를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다([19] 『즈이호잔 지온지 가람기(隨法寺伽藍記)』). 아미타당(상행당)・석가당(일체경당)・장륙당을 새로 짓고, 토바 인(院)으로부터 하사받은 아미타 삼존을 아미타당에, 석가 삼존과 하사받은 일체경 5천여 권을 석가당에, 모토히라가 봉납한 장륙척의 석가상을 장륙당에 안치했다. 다만, 모토히라는 1100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므로 실제로는 기요히라가 재건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재건 연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19].
관련 작품소설
- 곤도 고토, 『푸른 에조의 피』
- 다카하시 가쓰히코, 『불타오르다』
TV 드라마
- 『불타오르다』 (NHK 대하 드라마, 1993년 - 1994년, 배역: 무라카미 히로아키)
TV 애니메이션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E 텔레, 2018년 12월 5일 방송, 성우: 하마조에 신야)
6. 기타
후지와라노 기요히라와 관련된 작품으로는 곤도 고토의 소설 『푸른 에조의 피』와 다카하시 가쓰히코의 소설 『불타오르다』가 있다.
TV 드라마로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방영된 대하 드라마 『불타오르다』에서 무라카미 히로아키가 기요히라 역을 맡았다.
TV 애니메이션으로는 2018년 12월 5일 E 텔레에서 방송된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에서 하마조에 신야가 기요히라의 성우를 맡았다.
6. 1. 일화
텐닌(天仁) 원년(1108년), 토바 상황의 칙선에 의해 후지와라노 모토히라가 데와국모가미군(현 야마가타현사가에시)의 지온지를 재건했다는 기록이 있다([19] 『즈이호잔 지온지 가람기(隨法寺伽藍記)』). 아미타당(상행당)・석가당(일체경당)・장륙당을 새로 짓고, 토바 인(院)으로부터 하사받은 아미타 삼존을 아미타당에, 석가 삼존과 하사받은 일체경 5천여 권을 석가당에, 모토히라가 봉납한 장륙척의 석가상을 장륙당에 안치했다. 다만, 모토히라는 1100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므로 실제로는 기요히라가 재건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재건 연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19].6. 2. 관련 작품
소설- 곤도 고토 『푸른 에조의 피』 (신인물 왕래사/도쿠마 문고)
- 다카하시 가쓰히코 『불타오르다』 (일본 방송 출판 협회/고단샤 문고)
TV 드라마
- 『불타오르다』 (NHK 대하 드라마, 1993년 - 1994년, 배역: 무라카미 히로아키)
TV 애니메이션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E 텔레, 2018년 12월 5일 방송, 성우: 하마조에 신야)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Monuments hint at glory of Hiraizumi's golden age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2018-01-20
[3]
문서
大治3年7月16日
[4]
문서
有加一乃末陪
[5]
문서
白石氏系図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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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奥話記
[7]
문서
清原家衡
[8]
문서
藤原惟常
[9]
문서
紺紙金銀字交書一切経 大品経 巻二十二
[10]
문서
清原真衡
[11]
문서
有加一乃末陪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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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原国衡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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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橋克彦
[14]
문서
義家の裁定
[15]
문서
白石氏系図
[16]
문서
亥の刻関白殿
[17]
서적
前九年・後三年合戦と兵の時代
吉川弘文館
[18]
문서
執筆修行僧堯
[19]
문서
寒河江市史 上巻
[20]
문서
와타리향토사
[21]
문서
고니조모로미치키
[22]
문서
에미시
[23]
문서
金賣吉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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