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레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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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휴 레티머는 16세기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가로, 워체스터 주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에드워드 6세 치하의 궁정사제 등을 역임했다. 그는 종교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를 거부했으며, 메리 1세의 박해로 순교하여 옥스퍼드 순교자 중 한 명으로 불린다. 레티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1535년 우스터 주교로 임명되어 개혁을 장려했다. 1539년 헨리 8세의 6개 조항에 반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메리 1세 치하에서 자신의 신념으로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으며, 잉글랜드 성공회 등에서 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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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레티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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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휴 레티머는 레스터셔주 서캐스턴의 농부 집안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클레어 칼리지의 펠로우를 거쳐 1515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초기에는 스스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완고한 교황주의자"라고 칭할 만큼 전통적인 신앙을 가졌으나, 토마스 빌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다.[5][6] 독일 신학자 빌리암 나아겔에 따르면 당시 잉글랜드 교회는 마르틴 루터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레티머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개혁 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레티머는 워체스터의 주교와 에드워드 6세 치세의 궁정 사제로 활동하며 토머스 크랜머, 니콜라스 리들리 등과 함께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이끄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15] 그는 교구 내에서 개혁 사상을 전파하고 성상 파괴를 장려했으며, 성경의 영어 번역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발표한 6개 조항 (1539)에 반대하여 주교직을 사임하고 런던 탑에 투옥되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걷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가 즉위하자 레티머는 다시 투옥되어 옥스퍼드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다. 그는 재판과 순교 직전 토론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를 끝까지 거부했으며, 1555년 10월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15] 순교 직전 그는 리들리에게 "존경하는 리들리 주교님. 오늘 우리는 잉글랜드에 하느님의 위대한 불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서로를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레티머는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와 함께 옥스퍼드 순교자(Oxford Martyrs)로 불리며 잉글랜드 종교개혁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레티머는 레스터셔주 서캐스턴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존 폭스를 포함한 동시대 전기 작가들은 1480년에서 1494년 사이로 추정한다. 레티머는 훗날 "아버지가 ... 나를 학교에 보내셨다"고 회상했으며,[1] 네 살 때 라틴어 문법 공부를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다.그는 14세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녔으며,[2] ''Alumni Cantabrigienses'' 기록에 따르면 존 왓슨의 제자였고, 아마도 피터하우스 소속 학자였을 것으로 보인다.[3] 1510년 2월 2일에는 클레어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펠로우)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또는 이듬해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3] 이후 1514년 4월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515년 7월 15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22년, 레티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설교자 및 채플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식적인 직무를 수행하면서 신학 연구를 계속하여 1524년에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그의 학위 논쟁 주제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새롭게 등장하던 종교 개혁 사상, 특히 필리프 멜란히톤의 교리를 반박하는 것이었다.[4] 레티머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에서 가장 완고한 교황주의자"라고 묘사할 정도로 초기에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토마스 빌니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바뀌었다. 당시 새로운 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던 빌니는 레티머의 반박 논쟁을 들은 후, 그에게 찾아와 자신의 신앙 고백을 했다.[5] 빌니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레티머는 그날 이후로 개혁된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6]
레티머는 빌니, 로버트 반스 등 다른 개혁가들과 함께 케임브리지의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 성경의 영어 번역본이 금지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1528년 초, 레티머는 추기경 토마스 울지에게 소환되어 훈계와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울지가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혼인 무효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지 못해 왕의 총애를 잃자, 레티머는 오히려 케임브리지 개혁가들 사이에서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529년 대림절 기간 동안 그는 세인트 에드워드 교회에서 두 차례 "카드에 관한 설교"를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7]
2. 2. 종교 개혁에 투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초기에는 교황주의를 강하게 따랐던 레티머는 1524년 신학사 학위 논쟁에서 필리프 멜란히톤 등 종교 개혁 사상을 반박하기도 했다.[4] 스스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완고한 교황주의자"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새로운 가르침으로 개종했던 토마스 빌니가 그의 논쟁을 듣고 찾아와 고백을 하면서 레티머는 큰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혁된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5][6]이후 레티머는 빌니, 로버트 반스 등 개혁가들과 함께 화이트 호스 선술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 성경이 금지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로 인해 1528년 초, 추기경 토머스 울지에게 소환되어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울지가 헨리 8세와 캐서린 오브 아라곤의 혼인 무효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지 못해 왕의 신임을 잃자, 반대로 레티머는 케임브리지 개혁가들 사이에서 입지를 굳히며 명성을 얻었다.[15] 1529년 대림절에는 세인트 에드워드 교회에서 개혁적 내용을 담은 설교를 하기도 했다.[7]
1535년, 레티머는 우스터 주교로 임명되어 교구 내에서 개혁 사상을 전파하고 성상 파괴 운동을 장려하는 등 토머스 크랜머와 함께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15] 1538년에는 크롬웰의 지시로[8] 화형에 처해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존 포레스트의 마지막 설교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539년, 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 교리를 일부 유지하려는 6개 조항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여 주교직을 사임했고,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사면되어 에드워드 6세 치세에는 캐서린 윌로비의 채플린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레티머는 크랜머, 니콜라스 리들리와 함께 런던 탑에 다시 투옥되었고, 옥스퍼드에서 열린 종교 재판에서 자신의 신념과 개혁 사상을 굽히지 않아 이단으로 판결받았다.[15] 결국 1555년 10월, 그는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 밖에서 니콜라스 리들리와 함께 화형에 처해지며 순교했다.
2. 3. 우스터 주교와 종교 개혁
토머스 빌니와의 만남 이후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레티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내 개혁가 그룹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6]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 추기경 토머스 울지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다. 울지가 헨리 8세의 신임을 잃자 레티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15]1535년, 레티머는 우스터 주교로 임명되어 교구 내에서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개혁된 가르침을 장려하고 성상 파괴를 지지했다.[15] 1538년에는 토마스 크롬웰의 요청으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존 포레스트가 화형에 처해지기 전 마지막 설교를 하기도 했다.[8] 그러나 1539년, 헨리 8세가 가톨릭 교리를 일부 유지하려는 6개 조항을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여 주교직을 사임했고, 런던 타워에 투옥되었다. 이후 사면되어 에드워드 6세 치세에는 궁정 사제로 활동하며 개혁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레티머는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와 함께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옥스퍼드에서 열린 종교 재판에서 이단으로 판결받았다.[15] 재판과 순교 직전 토론회에서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를 끝까지 거부했다. 1555년 10월, 레티머는 리들리 주교와 함께 옥스퍼드의 베일리얼 칼리지 밖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순교 직전 리들리에게 "존경하는 리들리 주교님. 오늘 우리는 잉글랜드에 하느님의 위대한 불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서로를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크랜머 대주교와 함께 옥스퍼드 순교자(Oxford Martyrs)로 불리며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 4. 메리 1세 치하의 박해와 순교
에드워드 6세 치세에 궁정 사제로 활동했던 휴 레티머는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가 즉위하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 했고, 이 과정에서 종교 개혁을 지지했던 성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레티머는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와 함께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15].1554년 4월 14일, 레티머, 리들리, 크랜머는 옥스퍼드에서 교황 측 위원들(에드먼드 보너, 스티븐 가디너 포함)에게 심문을 받았다. 고령이었던 레티머는 토론 대신 서면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미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 화체설, 그리고 미사의 속죄적 공로에 대한 가톨릭 교리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위원들이 저명한 교부들의 신앙과 다르다고 지적하자, 레티머는 "그들이 옳게 말하고 성경을 제시할 때, 나는 그들의 신앙을 따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거스틴은 그를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9]라고 답하며 성경의 최종 권위를 강조했다. 레티머는 복음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를 지키는 것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결국 레티머는 이단으로 선고받고 화형 판결을 받았다. 판결 후 레티머는 "하나님께서 이 목적으로 내 삶을 연장해 주셔서, 내가 이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10]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레티머는 니컬러스 리들리와 함께 옥스퍼드에서 화형에 처해졌다[15]. 화형대 위에서 그는 리들리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용감하게 행동하시오, 리들리 선생.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국에 결코 꺼지지 않을 횃불을 밝힐 것입니다.[11]
레티머, 리들리, 그리고 나중에 순교한 크랜머는 오늘날 옥스퍼드 순교자로 불린다. 이들의 순교는 옥스퍼드의 브로드 스트리트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 순교자 기념비와 실제 처형 장소에 표시된 십자가로 기념되고 있다. 처형 장소는 옛 도시 북문 밖 도랑 자리였다.
3. 평가 및 기념
휴 레티머와 니컬러스 리들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미국 성공회 및 캐나다 성공회에 의해 10월 16일에 기념일로 기념된다.[12][13][14]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클레어 칼리지에 있는 레티머 룸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시내의 레티머 스퀘어도 마찬가지이다.
참조
[1]
서적
Seven Sermons before Edward VI
1549
[2]
ODNB
Latimer, Hugh (c.1485–1555)
[3]
acad
[4]
Harvnb
1978
[5]
Harvnb
1998
[6]
Harvnb
1978
[7]
Harvnb
1978
[8]
서적
Hugh Latimer: a biography
Religious Tract Society
1904
[9]
서적
Hugh Latimer
1904
[10]
서적
Hugh Latimer
1904
[11]
문서
[12]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4-09
[13]
서적
Lesser Feasts and Fasts 2018
https://books.google[...]
Church Publishing, Inc.
2019-12-17
[14]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prayerbook.ca[...]
2013-10-16
[15]
브리태니커
ラティマー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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