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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리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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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컬러스 리들리는 16세기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로, 1555년 화형당한 옥스퍼드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채플린과 로체스터 주교, 런던 주교를 역임하며 종교 개혁을 지지했다. 특히 예복 논쟁에서 존 후퍼와 대립하며,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종교 개혁을 추진했으나, 메리 1세의 즉위 후 이단으로 몰려 투옥, 재판을 거쳐 휴 라티머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순교는 잉글랜드 성공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옥스퍼드 순교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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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리들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세기 후반 니컬러스 리들리 초상화
16세기 후반 국립 초상화 미술관, 런던에 있는 니컬러스 리들리 초상화
출생명니컬러스 리들리
직함주교
소속 교단성공회
다른 직책로체스터 주교 (1547–1550)
출생지사우스틴데일, 노섬벌랜드 주, 잉글랜드
사망1555년 10월 16일
사망지옥스퍼드, 옥스퍼드셔 주, 잉글랜드
기념일10월 16일
숭배성공회 공동체
칭호옥스퍼드 순교자
경력
런던 및 웨스트민스터 주교1550년
임기 종료1553년
이전에드먼드 본너, 런던 주교
이후에드먼드 본너, 런던 주교
서품알 수 없음
축성1547년 9월 5일
축성자헨리 홀베치

2. 초기 생애와 성장 (c.1500–1550)

니컬러스 리들리는 노섬벌랜드 타인데일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랜슬롯 리들리의 사촌이자 크리스토퍼 리들리의 차남이었다. 그는 고대 감시탑 또는 펠 타워가 있던 부지에 위치한 언탱크 하우스에서 성장했다.[3]

1540~1541년 국왕 명예 채플린 겸 캔터베리 대성당 성직록 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 학장 및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7] 1543년 이단 혐의를 받았으나 벗어났다.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는 영국 종교 개혁을 지지하며 교구의 구세력을 점진적으로 대체했다.[8]

1547년 로체스터 주교가 된 리들리는 교구 교회 제단 대신 성찬례 테이블을 놓도록 지시했다. 1548년 크랜머의 1549년 공동 기도문 편찬을 도왔고, 1549년 스티븐 가디너와 에드먼드 보너 주교 조사 위원으로 활동하며 그들의 해임에 동의했다. 존 포넷이 리들리의 뒤를 이었다.[9] 1550년 4월 1일 특허장으로 런던 교구에 임명되면서 "런던 및 웨스트민스터 주교"로 불렸다.[1]

2. 1. 교육

리들리는 로열 그래머 스쿨, 뉴캐슬과 케임브리지 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3] 1525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4][5] 그 후 곧 사제로 서품되었고 추가 교육을 위해 프랑스 파리소르본 대학교로 갔다.

2. 2. 사제 서품과 초기 활동

리들리는 1525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곧 사제로 서품되었고, 추가 교육을 위해 파리소르본 대학교로 갔다.[4][5] 1529년경 잉글랜드로 돌아와 1534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석 교수가 되었다. 그 무렵 교황의 수위에 대한 상당한 논쟁이 있었는데, 리들리는 성서 해석학에 정통했고, 그의 논쟁을 통해 대학교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제시했다. "로마 주교는 잉글랜드 왕국에서 다른 외국 주교보다 더 많은 권위와 관할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지 않았다." 그는 1537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에 의해 그의 채플린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6] 1538년 4월, 크랜머는 그를 켄트주 의 목사로 임명했다.[6]

3. 종교 개혁 활동 (1540-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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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복 논쟁 (1550-1553)

존 후퍼와의 예복 논쟁은 영국 종교 개혁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종교 개혁의 방향과 권위에 대한 갈등을 보여준다.[10]

후퍼는 헨리 8세 치세 동안 망명했다가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아 우상 파괴적 개혁을 시행한 츠리히 교회에서 돌아왔다. 1548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퍼는 1550년 2월 왕 앞에서 사순절 설교를 요청받았는데, 이때 성직 임명식에서 코프와 흰색 예복 착용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요구가 기독교 초기에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라고 주장했다.[10]

추밀원대주교에게 소환된 후퍼는 왕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글로스터 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예복과 성인에 대한 서약 때문에 주교직을 거절했다. 추밀원은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후퍼는 예복이 위선과 미신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리들리는 예복이 무관한 것이라고 동의하면서도, 군주가 예외 없이 무관한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리들리와의 격렬한 논쟁 끝에 후퍼는 가택 연금 및 투옥되었다가 예복 착용에 동의하고 1551년 3월 8일 글로스터 주교로 서임되었다.[10]

4. 1. 존 후퍼의 주장

존 후퍼는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종교 개혁을 주장했다.[10] 그는 성직자 예복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유대교 및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라고 비판했다.[10]

하인리히 불링거, 존 후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후퍼는 1550년 2월 왕 앞에서 한 사순절 설교에서, 코프와 흰색 예복 착용을 요구하는 성직 임명식에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요구 사항들이 기독교 초기에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10]

후퍼는 라틴어 편지에서 예복이 무관심하지도 않고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도 않기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의 관행은 명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거나, 성경에 의해 암시되는 무관심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관심한 것은 사용하더라도 이익이나 손실을 초래하지 않으며, 개인의 재량에 맡겨져야 하고, 그 유용성이 입증되어야 하며, 폭력적인 폭정으로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0]

후퍼는 신약에서 초기 교회에서 사제 복장이 사용되었다는 언급이 없으며, 구약에서 사제 복장의 사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반형을 찾는 유형 또는 예시이며, 그리스도는 옛 질서를 폐지하고 모든 기독교인의 영적 평등, 즉 사제직을 인정한다고 주장했다.[10]

존 후퍼는 더 급진적인 개혁을 옹호하며 리들리와 충돌했다.

4. 2. 리들리의 반박

존 후퍼는 예복 논쟁에서 헨리 8세 치세 동안 망명했다가, 츠리히의 교회에서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에 의해 매우 우상 파괴적 방식으로 개혁된 후 1548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후퍼는 성직자들에게 코프와 흰색 예복을 착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요구 사항들이 기독교 초기에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기독교인에게 성경적 근거가 없는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잔재라고 보았다.[10]

추밀원대주교에게 소환된 후퍼는 왕의 수위권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충분히 확신을 주었고, 곧 글로스터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후퍼는 요구된 예복과 성인에 대한 서약 때문에 그 직을 거절했다. 1550년 5월 15일, 추밀원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예복은 아디아포라, 즉 "무관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후퍼는 재량에 따라 예복 없이 서품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예복을 착용하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1550년 7월 20일, 후퍼는 다시 왕과 추밀원 앞에서 새로운 직책에 대한 확인을 받았으며, 크랜머는 후퍼에게 "그의 양심에 부담스러운 서약"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다.[10]

크랜머는 리들리에게 성직 임명을 수행하도록 배정했고, 리들리는 의회가 규정한 대로 서품서의 형식을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거부했다. 후퍼와 같은 헨리 시대의 망명자들은 대륙의 보다 급진적인 개혁 교회를 경험했고, 국교회를 받아들여 떠나지 않은 잉글랜드 성직자들과 대립했다. 1550년 7월 24일, 후퍼의 독특한 성직 임명에 대한 지시를 받은 다음 날, 런던의 오스틴 프라이어스 교회가 얀 라스키에게 외국인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가되었다. 이곳은 대륙 개혁교회 난민들을 위한 지정된 예배 장소가 될 예정이었으며, 리들리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개혁을 시행한 형태와 관습을 가진 교회였다. 이러한 발전은 후퍼가 관여한 것이었다.[11]

추밀원은 입장을 재확인했고, 리들리는 직접 답변하여 예복은 무관한 것이라고 동의했지만, 군주가 예외 없이 무관한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했다. 추밀원은 의견이 갈라졌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몇 달 동안 이어졌다. 후퍼는 이제 예복이 위선과 미신을 조장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가리기 때문에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워릭은 동의하지 않고, 무관한 일에 대해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초기 교회의 유대교 전통에 대한 성 바울의 양보를 지적했다. 리들리의 입장은 예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후퍼의 주된 관심사는 예복이었다.[10]

1550년 10월 3일자 라틴어 편지에서 후퍼는 ''contra usum vestium''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12] 리들리의 답변(영어)과 함께, 이는 영국 종교 개혁의 분열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이다. 후퍼는 예복이 무관심하지도 않고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도 않기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교회의 관행은 명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거나, 성경에 의해 암시되는 무관심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무관심한 것은 사용하더라도 이익이나 손실을 초래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리들리는 무관심한 것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효과가 있으며, 그것이 사용되는 유일한 이유라고 반박했다.

후퍼가 제시한 무관심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조건과 교회의 무관심한 것의 사용을 구별하지 못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무관심한 것은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있거나, 성경에 의해 암시되어야 하며, 성경에서 기원과 근거를 찾아야 한다.

후퍼는 로마서 14:23(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죄이다), 로마서 10:17(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 마태복음 15:13(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모두 "뽑힐 것")을 인용하며, 성경에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무관심한 것은 전통이 아닌 필요하고 충분한 권위인 성경에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퍼는 성직자를 평신도와 구별하는 사제 복장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신약에서 초기 교회에서 사용되었다는 언급이 없으며, 구약에서 사제 복장의 사용은 히브리 관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반형을 찾는 유형 또는 예시이며, 그리스도는 옛 질서를 폐지하고 모든 기독교인의 영적 평등, 즉 사제직을 인정한다. 이러한 주장의 역사성은 후퍼가 폴리도르 베르길의 ''De Inventoribus Rerum''을 언급함으로써 더욱 뒷받침된다.

이에 대해 리들리는 성경적 기원에 대한 후퍼의 주장을 거부하고, 그가 선택한 성경 구절에 대한 후퍼의 해석에 반박했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많은 관행이 성경에 언급되거나 암시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리들리는 초기 교회 관행이 현재 상황에 규범적이지 않다고 부인하며, 이러한 원시주의적 주장을 재세례파와 연결시킨다. 후퍼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벌거벗음에 대한 언급을 헤롯 왕이 그리스도에게 입힌 옷과 아담파에게 "즐거운 주장"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다고 농담하며, 리들리는 후퍼의 주요 유형론적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예복이 반드시 또는 배타적으로 이스라엘과 로마 교회와 동일시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모든 신자의 사제직에 대한 후퍼의 주장에 대해, 리들리는 이 교리에서 모든 기독교인이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2) 무관심한 것은 개인의 재량에 맡겨져야 하며, 요구되면 더 이상 무관심하지 않다.

리들리에게 있어, 무관심한 문제에 관해서는, 양심을 교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너는 무질서하고, 불순종하며, 정당한 권위를 멸시하고, 연약한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 논쟁은 결국 예복 자체의 장단점이 아닌, 정당한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강제적인 것이 무관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우연일 뿐이며, 관행이 무관심하지 않게 되는 악화는 그 관행을 없애지 않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무관심한 것의 유용성은 입증되어야 하며, 임의적으로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 대해 후퍼는 고린도전서 14장과 고린도후서 13장을 인용한다. 이는 앞선 첫 번째 요점과 모순되므로, 후퍼가 이제 교회 내 무관심한 것을 언급해야 하며, 이전에는 추상적으로 일반적인 무관심한 것을 의미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계없이, 명백한 모순은 리들리에 의해 악용되었고, 의회에서 후퍼의 주장에 확실히 타격을 입혔다.

:4) 무관심한 것은 사도적이고 복음적인 관대함으로 교회에 도입되어야 하며, 폭력적인 폭정으로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선동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후퍼는 영국이 폭정적이라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그랬고—영국이 로마처럼 될 수 있다고 제안했을 수도 있다. 리들리는 영국 교회 및 시민 권위에 대한 공격과 급진적인 개인의 자유의 결과에 대해 후퍼에게 경고하는 한편, "공동 기도문을 잉글랜드 교회에 제정한 것은 의회"임을 상기시켰다.

마무리하면서, 후퍼는 논쟁이 시민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교회 당국에 의해 해결되기를 요청했다. 비록 군주가 교회와 국가의 수장이었지만,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이러한 암시는 나중에 토마스 카트라이트에 의해 자세히 설명될 것이지만, 후퍼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였지만, 국가는 성경적 근거가 있을 때 사람들의 양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게다가, 후퍼 자신은 예복을 지지하는 성직자들이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암시하면서, 시민 치안 판사들에게 연설했고, 자신의 대의를 위해 순교할 의향이 있음을 선언했다. 반대로, 리들리는 유머로 응답하며, 이를 "강한 문체로 제시된 훌륭한 약속"이라고 불렀다. 그는 후퍼에게 예복을 죄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것으로 동의하도록 초대하고, 그러면 그가 의식에 평상복을 입고 있더라도 그를 서임할 것이라고 말했다.[10]

4. 3. 논쟁의 결과

존 후퍼는 가택 연금 및 투옥되었다가 결국 예복 착용에 동의하고 1551년 3월 8일 글로스터 주교로 서임되었다.[10] 이 논쟁은 종교 개혁의 방향과 권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후퍼는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아 우상 파괴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리들리는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0] 결국 후퍼는 타협했지만, 이 사건은 종교 개혁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신학적 입장과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5. 몰락과 순교 (1553-1555)

웨일스 공으로서 에드워드 6세의 죽음은 리들리의 몰락을 가져왔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결핵으로 위독해지자,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메리 1세 대신 에드워드의 사촌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리들리는 이에 동조하여 제인 그레이에게 영국 왕위를 넘겨주는 특허장에 서명했다.[15] 1553년 7월 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메리와 엘리자베스 1세 공주가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설교를 했다.[16]

그러나 7월 중순, 메리를 지지하는 지방 반란이 거세지면서 제인에 대한 의회의 지지가 약화되었다. 메리가 여왕으로 선포되자 리들리는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16] 1554년 3월 8일, 추밀원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 지도자인 리들리, 토마스 크랜머, 휴 라티머를 이단 혐의로 재판하기 위해 옥스퍼드의 보카르도 감옥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리들리와 라티머의 재판은 크랜머의 재판 직후에 시작되었으며, 존 주얼이 리들리의 공증인 역할을 했다. 재판 결과는 신속하게 나왔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질 예정이었다.[17]

리들리가 휴 라티머와 함께 화형당하는 모습.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서 발췌


1555년 10월 16일, 리들리는 옥스퍼드에서 휴 라티머와 함께 화형당했다. 토마스 크랜머는 이 처형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18] 리들리는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그의 매형이 불길을 더 강하게 하려고 장작을 더 넣었지만, 오히려 그의 하반신만 타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라티머는 리들리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리들리 선생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 그런 촛불을 켤 것입니다. 그것이 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18]

브로드 스트리트, 옥스퍼드의 자갈길에 있는 금속 십자가는 리들리와 라티머가 처형된 장소를 나타낸다.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된 잉글랜드 성공회를 지지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순교자로 여겨진다. 토마스 크랜머와 함께 이들을 옥스퍼드 순교자라고 부른다.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를 묘사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옥스퍼드 순교자


빅토리아 시대에는 리들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처형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 기념관은 영국 종교 개혁과 개신교 교리를 기념하는 동시에,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에 반대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존 키블, 존 헨리 뉴먼 등이 주도한 옥스퍼드 운동은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었고, 이에 우려한 개신교 성직자들이 기념관 건립 기금을 모금하여 300년 전의 종교 개혁을 기리는 반(反)로마 가톨릭적인 비문을 새겼다.[19]

5. 1. 레이디 제인 그레이 지지



에드워드 6세결핵으로 심각하게 앓고 있었고, 1553년 6월 중순 국무원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에드워드의 사촌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메리 1세 대신 왕위에 올리도록 여러 판사들을 설득했다. 1553년 6월 17일, 국왕은 제인이 자신을 계승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는 세 번째 계승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5]

리들리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게 영국 왕위를 넘겨주는 특허장에 서명했다. 1553년 7월 9일,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설교를 통해 메리와 엘리자베스 1세 공주가 사생아라고 단언했다. 7월 중순까지 메리를 지지하는 심각한 지방 반란이 일어났고, 제인에 대한 의회의 지지는 떨어졌다. 메리가 여왕으로 선포되자 리들리, 제인의 아버지인 서퍽 공작 및 다른 사람들은 투옥되었다. 리들리는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16]

5. 2. 투옥과 재판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결핵으로 위독해지자,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메리 1세 대신 에드워드의 사촌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리들리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게 영국 왕위를 넘겨주는 특허장에 서명했다.[15] 1553년 7월 9일,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설교를 통해 메리와 엘리자베스 1세 공주가 사생아라고 주장했다.[16]

7월 중순, 메리를 지지하는 지방 반란이 거세지면서 제인에 대한 의회의 지지가 약화되었다. 메리가 여왕으로 선포되자 리들리는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16] 1554년 3월 8일, 추밀원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 지도자인 리들리, 토마스 크랜머, 휴 라티머를 이단 혐의로 재판하기 위해 옥스퍼드의 보카르도 감옥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리들리와 라티머의 재판은 크랜머의 재판 직후에 시작되었으며, 존 주얼이 리들리의 공증인 역할을 했다. 재판 결과는 거의 즉시 나왔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질 예정이었다.[17]

5. 3. 화형



1555년 10월 16일, 리들리는 옥스퍼드에서 화형당했다. 토마스 크랜머는 이 처형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18] 리들리는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그의 매형이 불길을 더 강하게 하려고 장작을 더 넣었지만, 오히려 그의 하반신만 타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휴 라티머는 리들리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리들리 선생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 그런 촛불을 켤 것입니다. 그것이 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18]

브로드 스트리트, 옥스퍼드의 자갈길에 있는 금속 십자가는 리들리와 라티머가 처형된 장소를 나타낸다.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된 잉글랜드 성공회를 지지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순교자로 여겨진다. 토마스 크랜머와 함께 이들을 옥스퍼드 순교자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리들리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처형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순교자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 기념관은 영국 종교 개혁과 개신교 교리를 기념하는 동시에,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에 반대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존 키블, 존 헨리 뉴먼 등이 주도한 옥스퍼드 운동은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었고, 이에 우려한 개신교 성직자들이 기념관 건립 기금을 모금하여 300년 전의 종교 개혁을 기리는 반(反)로마 가톨릭적인 비문을 새겼다.[19]

6. 유산

니컬러스 리들리는 휴 래티머와 함께 옥스퍼드에서 화형당했으며, 이 모습은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묘사되어 있다.[18] 1555년 10월 16일 처형 당시, 리들리는 매우 천천히 불에 타 고통스러워했다. 래티머는 리들리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리들리 선생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 그런 촛불을 켤 것입니다. 그것이 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8]

리들리와 래티머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된 잉글랜드 성공회를 지지한 순교자로 여겨지며, 토머스 크랜머와 함께 옥스퍼드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순교자 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죽음을 기렸는데, 이 기념관은 영국 종교 개혁과 개신교 및 개혁 교리의 기념비이자 19세기 랜드마크이다. 존 키블, 존 헨리 뉴먼옥스퍼드 운동 관련 인물들은 이 기념관 건립에 반대했다.[19]

케임브리지의 리들리 홀(1881년 설립), 캐나다 온타리오 주 세인트캐서린스의 리들리 칼리지 (온타리오)(1889년 설립), 호주의 리들리 칼리지 (멜버른)(1910년 설립) 등이 그의 이름을 따 설립되었다. 런던 남동부 웰링에는 그를 기념하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회가 있다.[20] 리들리는 휴 라티머와 함께 성공회 기념일인 10월 16일에 성도력에서 기념된다.[20]

6. 1. 옥스퍼드 순교자

휴 래티머와 함께 화형당하는 모습은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사형은 1555년 10월 16일 옥스퍼드에서 집행되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처형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탑으로 끌려갔다. 리들리는 매우 천천히 불에 타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매형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장작 더미에 더 많은 짚을 넣었지만, 이것은 그의 하반신만 태우는 결과를 낳았다. 래티머는 리들리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리들리 선생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잉글랜드에 그런 촛불을 켤 것입니다. 그것이 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인용되었다.[18]

브로드 스트리트, 옥스퍼드의 조약돌 길에 있는 금속 십자가가 그 장소를 표시하고 있다. 결국 리들리와 래티머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된 잉글랜드 성공회를 지지한 순교자로 여겨졌다. 토머스 크랜머와 함께 그들은 옥스퍼드 순교자로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그의 죽음은 그의 처형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순교자 기념관에 의해 기념되었다. 이 기념관은 영국 종교 개혁과 개신교 및 개혁 교리의 기념비일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랜드마크이며, 존 키블, 존 헨리 뉴먼 및 트랙터리안 운동과 옥스퍼드 운동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강히 반대받은 기념비이기도 하다. 로마 가톨릭으로의 회귀 시도와 운동이 잉글랜드 성공회에 가져오려고 시도한 재정비 노력에 깊이 우려하여 개신교 및 개혁파 성공회 성직자들은 이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기금을 마련했으며, 이 기념비에는 300년 이상의 역사와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매우 반로마 가톨릭적인 비문이 새겨져 있다. 그 결과, 기념비는 기념하는 사건이 발생한 지 300년 후에 세워졌다.[19]

1881년, 케임브리지, 잉글랜드에 있는 리들리 홀이 성공회 사제의 훈련을 위해 그의 기억을 기려 설립되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세인트 캐서린스에 위치한 사립 대학 예비 학교인 리들리 칼리지 (온타리오)는 1889년에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곳으로 1910년에 설립된 호주에 있는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 대학인 리들리 칼리지 (멜버른)이 있다. 런던 남동부 웰링에는 그를 기념하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회가 있다. 리들리가 처형될 때 래티머가 그에게 한 말이 사용되었다. 리들리와 래티머는 일부 성공회의 기념일에서 10월 16일에 성도력에서 기념된다.[20]

6. 2. 기념 사업

빅토리아 시대에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순교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관은 영국 종교 개혁과 개신교 및 개혁 교리의 기념비일 뿐만 아니라, 19세기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존 키블, 존 헨리 뉴먼옥스퍼드 운동 관련 인물들은 이 기념관 건립에 반대했다.[19]

케임브리지에는 성공회 사제 양성을 위한 리들리 홀(1881년 설립)이, 캐나다 온타리오 주 세인트캐서린스에는 리들리 칼리지 (온타리오)(1889년 설립)가, 호주에는 리들리 칼리지 (멜버른)(1910년 설립)이 그의 이름을 따 설립되었다. 런던 남동부 웰링에는 그를 기념하는 잉글랜드 성공회 교회가 있다.[20] 휴 라티머와 함께 성공회 기념일인 10월 16일에 성도력에서 기념된다.[20]

참조

[1] 간행물 Fasti Ecclesiae Anglicanae
[2]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4-09
[3] acad
[4] 웹사이트 National Gazetteer (1868) - Newcastle upon Tyne http://www.genuki.bp[...] GENUKI Charitable trust 2007-04-29
[5] 서적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Index Number 101023631 http://www.oxforddnb[...]
[6] 서적 Testamenta Vetusta
[7] 서적 Alumni Cantabrigienses: A Biographical List of all Known Students . .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문서 The letter exists but with some parts lost.
[13] Harvnb
[14] 웹사이트 History of King Edward's School, Witley http://www.history.a[...] 2008-08-05
[15] Harvnb
[16] Harvnb
[17] Harvnb
[18] Harvnb
[19] 웹사이트 The Martyrs' Memorial at Oxford http://www.accessmyl[...] The Journal of Ecclesiastical History 2008-08-21
[20] 웹사이트 Holy Days http://www.cofe.angl[...] Church House Publishing 200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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