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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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흑기군은 1857년 류영복이 이끄는 객가 출신 용병 부대로, 검은색 바탕에 북두칠성을 디자인한 군기를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태평천국 세력과 연합하여 청나라에 저항했으며, 이후 베트남 궁정의 지원을 받아 홍강 일대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광산을 점령하는 등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1873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활약했으나, 청불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해산되었다. 이후 청일 전쟁에서 대만 민주국 군으로 활동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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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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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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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헤이치쥔 (중국어 간체: 黑旗军) 콴 꺼 덴 (베트남어: Quân cờ đen) 꿘 끼 덤 (한월어: 軍旗黰) |
존속 기간 | 1860년대 – 1885년 |
국가 | 청나라 응우옌 왕조 |
역할 | 용병 |
규모 | 알 수 없음 |
전투 | 가르니에 원정 통킹 원정 청불 전쟁 통킹 평정 |
해체 | 1885년 |
지휘관 | |
사령관 | 류융푸 |
상세 정보 | |
결성 | 1860년대 |
해체 | 1885년 |
활동 지역 | 북베트남 (통킹) |
주요 인물 | 류융푸 |
관련 사건 | 통킹 원정 청불 전쟁 통킹 평정 |
2. 명칭의 유래
류융푸는 어렸을 때 '검은 호랑이 장군'이 되는 꿈을 꿀 정도로 검은색을 선호했다. 흑기군이라는 명칭은 류융푸의 지휘 깃발 색깔에서 유래되었다.[14]
1857년, 류영복은 객가족 출신의 용병으로, 황사홍(중국어: 黃思宏)이 이끄는 광서성의 대규모 강도단 내에서 약 200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태평천국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 류영복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오원청(중국어: 吳元清)의 부대로 전향하여 흑기를 내걸고 천지회 의식을 연상시키는 의식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흑기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기군은 오원청 휘하의 독립 부대로 활동했으며, 오원청의 아들 오아충(중국어: 吳亞終)이 뒤를 이었다.[1] 오원청과 오아충은 태평천국 세력이 아니었지만, 모두 태평천국의 "왕자"를 자처했다.
프랑스 측 자료에 따르면 류융푸의 개인 지휘 깃발은 매우 크고 검은색의 직사각형이었다. 1873년 12월, 류융푸가 하노이 밖에서 프랑시스 가르니에와 대치했을 때 흑기군은 거대한 검은 깃발 아래 행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바오 전투(1883년 9월 1일)에서 류융푸의 사령부는 은색 테두리가 있는 7개의 동일한 검은 깃발로 표시되었다. 선떠이 전투(1883년 12월)에서 류융푸는 선떠이 성 정문 위에 흰색 한자가 새겨진 세 개의 큰 검은 깃발을 꽂도록 명령했다.
개별 흑기 부대는 다양한 깃발을 사용했는데, 일부는 직사각형, 다른 일부는 삼각형이었다. 1883년 8월 15일 오후, 푸호아이 전투에서 흑기군 부대 여러 개가 방어선을 나와 프랑스 좌익을 공격하기 위해 탁 트인 지면을 가로질러 진격했다. 프랑스 목격자에 따르면 진격하는 흑기군 부대는 빨간색 또는 흰색 한자로 장식된 수많은 검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15]
현재 남아있는 흑기 깃발 중에는 흰색으로 북두칠성을 나타낸 검은색 삼각 깃발이 있다. 복원된 깃발에는 "명령" 또는 "지휘"를 의미하는 령(令)자가 새겨져 있다. 흑기군은 초기에 검은 바탕에 북두칠성을 디자인한 군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3. 역사
흑기군의 주요 활동 시기와 군사 행동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시기 주요 군사 활동 및 사건 1857년 ~ 1865년 청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 류영복이 흑기군을 이끌고 태평천국 잔당과 연합하여 활동. 1865년 ~ 1885년 베트남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 베트남 조정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하고,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움. 청불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힘. 1885년 ~ 1895년 청나라로 귀환. 이후 청일 전쟁 발발 후 대만 민주국 군으로 재편되어 일본 제국에 대항하였으나 패배.
각 시기별 흑기군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활동 초기 (1857년 ~ 1865년): 청나라에 대한 저항
1857년 태평천국의 난에 참가했던 객가 출신 류영복은 병사 200명을 이끌고 광서성의 황사굉이 이끄는 더 큰 삼합회에 합류했다.[1] 1864년 8월, 천경(현재의 난징)에서 태평천국이 붕괴되었다.[1] 1865년 청나라가 태평천국 잔당을 추격하자, 류영복의 흑기군은 통킹(현재의 하노이 주변)으로 피신했다.[1] 1867년에는 보승(현재의 베트남·라오까이성바오탕현)에서 청군을 격파했다.[1]
3. 2. 활동 중기 (1865년 ~ 1885년): 베트남에서의 활동과 프랑스와의 전쟁
1864년 남경에서 청나라 군대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후, 청나라 군대는 동남부 지역에 있던 여러 무장 세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절박해진 오아충은 류영복과 그의 흑기군과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전의 태평천국 군대를 장악하고, 1865년 상 톤킨으로 건너가면서 가는 길에 마을을 약탈했다.[1]
흑기군은 홍강과 흑강 사이의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토착 흐몽족 부족을 진압하는 것을 도와 베트남 궁정에 유용성을 입증했으며, 이로 인해 류영복은 공식적인 군사 직위를 받았다.
베트남 궁정의 지원을 확보한 류영복은 홍강을 따라 수익성 있는 갈취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선떠이와 라오까이 사이의 강물 상업에 대해 10%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와 흑기군은 또한 이 지역의 광산을 점령하고 보호비 시스템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골 마을을 약탈했다. 이 사업에서 얻은 수익은 매우 커서 1870년대에 류영복의 군대는 그 수가 급증하여 전 세계에서 온 모험가들을 끌어들였다. 흑기군 병사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하급 장교에는 태평천국 운동에서 활약한 적이 있는 미국과 유럽 출신의 용병들이 포함되었다. 류영복은 그들의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흑기군을 강력한 전투 부대로 만들었다. 톤킨에서 그의 지휘 하에 광동과 광서 출신의 7,000명의 군인이 있었다.[2]
유럽 선박이 홍강에서 무역을 하는 것을 괴롭히자 1882년 코망당 앙리 리비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군이 톤킨으로 파견되었다. 프랑스군과 흑기군 간의 충돌(후자는 베트남 정규군과 중국군의 지원을 받았다)이 격화되어 결국 청불 전쟁 (1884년 8월~1885년 4월)으로 이어졌다. 흑기군은 이 전쟁에서 중국군을 지원했는데, 이는 흑기군-중국 연합군이 요새를 방어하는 프랑스 외인부대 대대를 포위했던 치열한 투옌꽝 포위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흑기군은 청불 전쟁이 끝날 무렵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그 구성원 중 다수는 그 후 몇 년 동안 프리랜서 강도로서 프랑스군을 계속 괴롭혔다.
1873년, 베트남 정부는 외교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으나 지시 없이 통킹을 정복하려던 프랑스 해군 중위 프랑시스 가르니에에 맞서기 위해 흑기군의 도움을 받았다. 1873년 12월 21일, 류용복과 약 600명의 흑기군(pavillons noirs, drapeaux noirs|검은 깃발 부대프랑스어)은 거대한 검은 깃발 아래에서 행진하며 하노이 성 서쪽 문에 접근했다. 대규모의 베트남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가르니에는 문 위에 설치된 야포로 흑기군을 포격하라고 명령했고, 흑기군이 격퇴되자 18명의 프랑스 해병 보병을 이끌고 문 밖으로 나가 추격했다. 가르니에와 그의 부하 3명은 흑기군 무리를 향해 총검 공격을 하며 언덕을 올랐지만, 물길에 걸려 넘어지면서 창에 찔려 사망했다. 젊은 ''해군 소위'' 아드리앙 폴 발니 다르브리쿠르가 가르니에를 지원하기 위해 비슷한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지만, 또한 부하들 앞에서 사망했다. 다른 프랑스 병사 3명도 이 출격에서 사망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장교가 쓰러진 후 성으로 도망쳤다.[4]
가르니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노이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프랑스는 홍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계속 지배했다.[5]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승인을 받지 않은 정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중위 폴 필라스트르를 파견하여 가르니에의 부대를 그들이 점령한 도시에서 철수시키고 1874년 2월 사이공으로 송환했다.[6]
이 기간 동안 흑기군은 백기군과 황기군과 같은 다른 집단의 강도와 용병들과의 전투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0년 후, 프랑스가 다시 통킹으로 진출하면서, 1883년과 1884년 전반기에 청불 전쟁의 전조로 선전포고 없는 적대 행위가 발발했다. 흑기군은 통킹에서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첫 번째 주요 충돌은 종이 다리 전투(1883년 5월 19일)에서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 대위 앙리 리비에르가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는 흑기군에게 신속하고 인상적인 승리였다. 푸호아이 전투(1883년 8월 15일)에서 흑기군은 알렉상드르-외젠 부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8] 팔란 전투(1883년 9월 1일)에서 흑기군은 데이 강의 주요 지점에서 밀려나면서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9]
1883년 12월, 흑기군은 아메데 쿠르베 제독에게 선떠이 원정에서 큰 패배를 겪었다. 12월 14일 푸사 전투와 12월 16일 선떠이 전투에서 광적인 용기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흑기군은 프랑스군이 선떠이를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선떠이에는 많은 수의 중국 및 베트남 정규군이 있었지만, 흑기군이 전투의 주축을 담당했으며 매우 큰 사상자를 냈다. 중국군 고위 장교였던 영국 관찰자 윌리엄 메스니는 선떠이 전투가 흑기군의 힘을 꺾었다고 평가했지만, 15개월 후 호아목 전투에서 흑기군이 보여준 완강한 방어는 이러한 평가와 일치하지 않는다.[10]
흑기군은 박닌 원정 (1884년 3월)에 참여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박닌을 점령한 후, 흑기군은 흥화를 향해 후퇴했다. 1884년 4월, 프랑군은 통킹 원정군의 양개 여단과 함께 흥화로 진격했다. 흑기군은 도시 주변에 인상적인 일련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프랑스 사령관인 샤를-테오도르 미요 장군은 프랑스군의 사상자 없이 흥화를 점령했다.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이 동쪽에서 흑기군을 정면으로 압박하고 쭝사 고지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하는 동안, 루이 브리에르 드 릴 장군의 제1 여단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류씨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4월 11일 저녁, 브리에르 드 릴의 투르코와 해병대가 쑤안동에서 흑기군의 측면 뒤로 나타나자, 흑기군은 포위되기 전에 흥화를 버리고 철수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남은 건물에 불을 질렀고,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도시가 완전히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11]
흑기군은 홍강을 따라 라오까이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탄꽌으로 후퇴했다. 쿠르베와 밀로가 흑기군을 쉽게 격파한 것에 사기가 떨어진 흑기군 병사 수백 명이 1884년 여름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밀로의 마지막 업적 중 하나는 로 강을 따라 진격하여 6월 첫 주에 뚜옌꽝에서 흑기군을 몰아낸 것이며, 이 또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뚜옌꽝 점령 이후 류용복을 진지하게 추격했다면, 흑기군은 즉시 통킹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관심은 박레 매복 (1884년 6월 23일)으로 촉발된 중국과의 갑작스러운 위기로 인해 다른 곳으로 쏠렸고, 1884년의 격동적인 여름 동안 흑기군은 상처를 핥을 수밖에 없었다.
청불 전쟁이 1884년 8월 발발하면서 흑기군의 운명은 바뀌었다. 서태후는 푸저우 해전 (1884년 8월 23일)에서 중국의 푸젠 함대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대응하여, 장군들에게 톤킨을 침공하여 프랑스군을 하노이에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탕징송 운남군 사령관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류융푸의 활약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류융푸는 다가오는 작전에 흑기군과 함께 참여하기로 동의했다. 흑기군은 1884년 가을에 중국군이 흥화와 푸도안, 뚜옌꽝의 고립된 프랑스군 기지에 압력을 가하도록 도왔다.
1885년 겨울과 봄, 3,000명의 흑기군 병사들이 선꽌 포위전에 참전했다. 화목 전투(1885년 3월 2일)에서 흑기군은 선꽌을 구원하러 행군하던 프랑스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화목 전투에서의 프랑스군 사상자는 전사 76명, 부상 408명으로, 청불 전쟁 기간 중 프랑스군이 하루 만에 입은 최고 사상자 수이자 최대 손실이었다. 화목 전투에 있던 많은 프랑스 장교들은 그 참극이 15개월 전 썬떠이 전투보다 더 심했다고 말했다.[13]
다음은 흑기군의 주요 군사 활동을 정리한 표이다.
시기 | 주요 군사 행동 및 사건 |
---|---|
1873년 | 응우옌 왕조 베트남이 통킹에 침공한 프랑시스 가르니에를 격퇴하기 위해 흑기군의 참전을 요청. |
1883년-1884년 | 청불 전쟁에 앞서 프랑스군이 통킹에 침공, 흑기군이 응전하여 앙리 리비에르를 살해. |
까우자이 전투, 푸호아이 전투, 팔란 전투, 선떠이 원정, 박닌 원정, 흥화 함락, 투옌꽝 함락 | |
1884년-1885년 | 청불 전쟁에서 베트남에 진출한 프랑스군을 격파, 지휘관 류영복은 베트남 국왕으로부터 삼선 부제독 직을 받음. |
투옌꽝 포위전, 유옥 전투, 화목 전투, 푸람타오 전투 | |
1887년 | 흑기군이 루앙프라방 왕국에 침공(호 전쟁). |
3. 3. 활동 후기 (1885년 ~ 1895년): 청나라로의 귀환과 대만에서의 항전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진 청일 전쟁에서 흑기군은 다시 편성되어 류영복의 지휘 아래 대만 민주국군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에 흑기군은 많은 전사자를 내고 붕괴되었다.[3]; 을미전쟁
1895년 일본의 대만 침공에 대응하여 류영복은 흑기군을 다시 일으켰다. 류영복은 섬의 전 총독이자 단명한 대만 민주국의 대통령이었던 오랜 친구 탕징송의 요청으로 대만에 갔다. 류영복은 일본군에 맞서 포르모사 저항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류영복은 흑기군 베테랑들을 다시 데려와 일본과의 싸움에 참여시켰지만, 재건된 흑기군은 일본 제국 근위사단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다. 류영복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늙은 여자로 변장해야 했다.[3]
4. 주요 전투 및 사건
1857년, 류영복은 객가족 출신 용병으로, 황사굉이 이끄는 광서성의 강도단에 합류하여 약 2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1864년 태평천국 운동이 진압된 후, 1865년 류영복과 그의 흑기군은 상 톤킨으로 이동했다.
흑기군은 홍강과 흑강 사이의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토착 흐몽족 부족을 진압하여 베트남 궁정에 유용성을 입증받았고, 류영복은 공식적인 군사 직위를 받았다. 이후 흑기군은 선떠이와 라오까이 사이의 강물 상업에 "세금"을 부과하고 광산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873년 흑기군은 하노이에서 프랑시스 가르니에를 전사시켰으나, 프랑스는 홍강 삼각주를 계속 지배했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흑기군은 청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종이 다리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 대위 앙리 리비에르를 매복 공격으로 살해하고, 푸호아이 전투, 팔란 전투, 선떠이 원정 등에서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였다.
1884년 청불 전쟁 발발 후, 흑기군은 중국군과 협력하여 투옌꽝 포위전, 화목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화목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청불 전쟁 이후 류영복은 흑기군을 이끌고 중국으로 돌아갔으나, 1895년 일본 제국이 대만을 침공하자 다시 흑기군을 부활시켜 대만 민주국의 탕징송을 도와 일본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재건된 흑기군은 일본 제국 근위사단에 의해 제압되었고, 류영복은 변장하여 체포를 피했다.
흑기군의 주요 전투 및 사건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전투 및 사건 |
---|---|
1857년 | 류영복, 흑기군을 이끌고 황사굉의 강도단에 합류 |
1864년 | 태평천국 운동 진압 |
1865년 | 흑기군, 상 톤킨으로 이동 |
1873년 | 프랑시스 가르니에 격퇴 (하노이) |
1883년 | 종이 다리 전투에서 앙리 리비에르 살해 |
1883년-1884년 | 푸호아이 전투, 팔란 전투, 선떠이 원정 등에서 프랑스군과 격전 |
1884년-1885년 | 청불 전쟁 발발, 투옌꽝 포위전, 화목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과 격전 |
1895년 | 일본 제국의 대만 침공에 맞서 흑기군 재건, 을미전쟁 발발 |
4. 1. 베트남
1873년, 베트남 정부는 외교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으나 지시 없이 통킹을 정복하려던 프랑스 해군 중위 프랑시스 가르니에에 맞서기 위해 흑기군의 도움을 받았다.[4] 1873년 12월 21일, 류영복과 약 600명의 흑기군은 거대한 검은 깃발 아래에서 행진하며 하노이 성 서쪽 문에 접근했고, 대규모의 베트남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가르니에는 문 위에 설치된 야포로 흑기군을 포격하라고 명령했고, 흑기군이 격퇴되자 18명의 프랑스 해병 보병을 이끌고 문 밖으로 나가 추격했다. 가르니에와 그의 부하 3명은 흑기군 무리를 향해 총검 공격을 하며 언덕을 올랐지만, 물길에 걸려 넘어지면서 창에 찔려 사망했다. 젊은 ''해군 소위'' 아드리앙 폴 발니 다르브리쿠르가 가르니에를 지원하기 위해 비슷한 소규모 부대를 이끌었지만, 그 역시 부하들 앞에서 사망했다. 다른 프랑스 병사 3명도 이 출격에서 사망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장교가 쓰러진 후 성으로 도망쳤다.[4]가르니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노이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프랑스는 홍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계속 지배했다.[5]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승인을 받지 않은 정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중위 폴 필라스트르를 파견하여 가르니에의 부대를 그들이 점령한 도시에서 철수시키고 1874년 2월 사이공으로 송환했다.[6]
이 기간 동안 흑기군은 백기군과 황기군과 같은 다른 집단의 강도와 용병들과의 전투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873년 응우옌 왕조 베트남은 통킹에 침공한 프랑시스 가르니에를 격퇴하기 위해 흑기군의 참전을 요청했다.
1883년 - 1884년 청불 전쟁에 앞서 선전포고도 없이 프랑스군이 다시 통킹에 침공해오자 흑기군이 응전하여, 앙리 리비에르를 살해했다.
1884년 - 1885년 청불 전쟁에서는 베트남에 진출한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지휘관 류영복은 베트남 국왕으로부터 '''삼선 부제독''' 직을 맡았다.
- 투옌꽝 포위전
- 유옥 전투
- 화목 전투
- 푸람타오 전투
1887년 흑기군은 루앙프라방 왕국에 침공했다.
4. 2. 청불 전쟁
1883년 프랑스군과 흑기군 간의 충돌이 격화되어 결국 청불 전쟁(1884년 8월~1885년 4월)으로 이어졌다. 흑기군은 이 전쟁에서 중국군을 지원했는데, 흑기군-중국 연합군이 요새를 방어하는 프랑스 외인부대 대대를 포위했던 치열한 투옌꽝 포위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1] 흑기군은 청불 전쟁이 끝날 무렵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그 구성원 중 다수는 그 후 몇 년 동안 프리랜서 강도로서 프랑스군을 계속 괴롭혔다.[1]1883년과 1884년 전반기에 청불 전쟁의 전조로 선전포고 없는 적대 행위가 발발했다. 흑기군은 통킹에서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첫 번째 주요 충돌은 종이 다리 전투(1883년 5월 19일)에서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 대위 앙리 리비에르가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는 흑기군에게 신속하고 인상적인 승리였다.[8] 푸호아이 전투(1883년 8월 15일)에서 흑기군은 알렉상드르-외젠 부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8] 팔란 전투(1883년 9월 1일)에서 흑기군은 데이 강의 주요 지점에서 밀려나면서 그다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9]
1883년 12월, 흑기군은 아메데 쿠르베 제독에게 선떠이 원정에서 큰 패배를 겪었다. 12월 14일 푸사 전투와 12월 16일 선떠이 전투에서 광적인 용기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흑기군은 프랑스군이 선떠이를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선떠이에는 많은 수의 중국 및 베트남 정규군이 있었지만, 흑기군이 전투의 주축을 담당했으며 매우 큰 사상자를 냈다. 중국군 고위 장교였던 영국 관찰자 윌리엄 메스니는 선떠이 전투가 흑기군의 힘을 꺾었다고 평가했지만, 15개월 후 화목 전투에서 흑기군이 보여준 완강한 방어는 이러한 평가와 일치하지 않는다.[10]
흑기군은 박닌 원정(1884년 3월)에 참여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박닌을 점령한 후, 흑기군은 흥화를 향해 후퇴했다. 1884년 4월, 프랑군은 통킹 원정군의 양개 여단과 함께 흥화로 진격했다. 흑기군은 도시 주변에 인상적인 일련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프랑스 사령관인 샤를-테오도르 미요 장군은 프랑스군의 사상자 없이 흥화를 점령했다.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장군의 제2 여단이 동쪽에서 흑기군을 정면으로 압박하고 쭝사 고지에서 맹렬한 포격을 가하는 동안, 루이 브리에르 드 릴 장군의 제1 여단은 남쪽으로 우회하여 류영복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4월 11일 저녁, 브리에르 드 릴의 투르코와 해병대가 쑤안동에서 흑기군의 측면 뒤로 나타나자, 흑기군은 포위되기 전에 흥화를 버리고 철수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남은 건물에 불을 질렀고,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도시가 완전히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11]
흑기군은 홍강을 따라 라오까이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탄꽌으로 후퇴했다. 쿠르베와 밀로가 흑기군을 쉽게 격파한 것에 사기가 떨어진 흑기군 병사 수백 명이 1884년 여름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밀로의 마지막 업적 중 하나는 로 강을 따라 진격하여 6월 첫 주에 뚜옌꽝에서 흑기군을 몰아낸 것이며, 이 또한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뚜옌꽝 점령 이후 류영복을 진지하게 추격했다면, 흑기군은 즉시 통킹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관심은 박레 매복(1884년 6월 23일)으로 촉발된 중국과의 갑작스러운 위기로 인해 다른 곳으로 쏠렸고, 1884년의 격동적인 여름 동안 흑기군은 상처를 핥을 수밖에 없었다.
청불 전쟁이 1884년 8월 발발하면서 흑기군의 운명은 바뀌었다. 서태후는 푸저우 해전(1884년 8월 23일)에서 중국의 푸젠 함대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대응하여, 장군들에게 톤킨을 침공하여 프랑스군을 하노이에서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탕징송 운남군 사령관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류융푸의 활약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류융푸는 다가오는 작전에 흑기군과 함께 참여하기로 동의했다. 흑기군은 1884년 가을에 중국군이 흥화와 푸도안, 뚜옌꽝의 고립된 프랑스군 기지에 압력을 가하도록 도왔다.
thumb(1885년 3월 2일)에서 프랑스군에 노획되어 현재 파리 육군 박물관에 전시된 흑기군 깃발]]
1885년 겨울과 봄, 3,000명의 흑기군 병사들이 선꽌 포위전에 참전했다. 화목 전투(1885년 3월 2일)에서 흑기군은 선꽌을 구원하러 행군하던 프랑스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화목에서의 프랑스군 사상자는 전사 76명, 부상 408명으로, 청불 전쟁 기간 중 프랑스군이 하루 만에 입은 최고 사상자 수이자 최대 손실이었다. 화목에 있던 많은 프랑스 장교들은 그 참극이 15개월 전 썬떠이보다 더 심했다고 말했다.[13]
프랑스와 청나라 간의 청불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 조약의 조건 중 하나는 류영복이 통킹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류영복은 2,000명 정도의 병력만을 지휘하고 있었고, 흑기군을 해산하라는 탕징쏭과 윈난군 지휘관들의 압력에 저항할 입장이 아니었다. 류영복은 가장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지만, 1885년 여름 흑기군의 대부분은 통킹 땅에서 해산되었다. 몇 달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하고 여전히 소총을 소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흑기군 병사들은 프랑스에 대한 껀브엉 저항 운동을 틈타 즉시 산적이 되었다. 프랑스가 이들을 제압하는 데는 몇 달이 걸렸고, 흥화와 국경 마을 라오까이 사이의 경로는 1886년 2월에야 확보되었다. 1887년, 흑기군 산적들은 루앙프라방을 약탈하고 강탈할 정도로 여전히 강력했다.
흑기군의 주요 군사 행동(프랑스군에 대한 무장 투쟁)은 다음과 같다.
- 1883년-1884년 청불 전쟁에 앞서 선전포고도 없이 프랑스군이 다시 통킹에 침공해오자 흑기군이 응전하여, 앙리 리비에르를 살해했다.
- 까우자이 전투
- 푸호아이 전투
- 팔란 전투
- 선떠이 전투
- 박닌 전투
- 흥화 함락
- 투옌꽝 함락
- 1884년-1885년 청불 전쟁에서는 베트남에 진출한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지휘관 류영복은 베트남 국왕으로부터 '''삼선 부제독''' 직을 맡았다.
- 투옌꽝 포위전
- 유옥 전투
- 화목 전투
- 푸람타오 전투
- 1887년 흑기군이 루앙프라방 왕국에 침공(호 전쟁).
- 청나라로 개선한 류영복은 흑기군의 해산을 명받았다.
4. 3. 대만
1894년-1895년 청일 전쟁에서 류영복은 다시 흑기군을 편성하여 대만 민주국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흑기군은 많은 전사자를 내고 붕괴했다.[1]- *을미전쟁
1895년 일본의 대만 침공에 대응하여 류영복은 다시 흑기군을 부활시켰다. 탕징송 (대만 민주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만에 건너간 류영복은 일본군에 맞서 포르모사 저항군을 지휘했다. 류영복은 흑기군 베테랑들을 다시 데려와 일본과의 싸움에 참여시켰지만, 재건된 흑기군은 일본 제국 근위사단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다. 류영복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늙은 여자의 모습으로 변장해야 했다.[1]
5. 흑기군의 깃발
류융푸는 어려서 자신이 언젠가 '검은 호랑이 장군'이 되는 꿈을 꿨을 정도로 검은색을 개인적으로 선호했다.[14] 흑기군은 류융푸의 지휘 깃발 색깔에서 유래되었다.[14]
프랑스 측 자료에서는 류융푸의 개인 지휘 깃발이 매우 크고, 검은색이며 직사각형이었다고 언급한다. 1873년 12월, 류융푸가 하노이 밖에서 프랑시스 가르니에와 대치했을 때 흑기군은 거대한 검은 깃발 아래 행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바오 전투(1883년 9월 1일)에서 류융푸의 사령부는 은색 테두리가 있는 일곱 개의 동일한 검은 깃발로 표시되었다. 선떠이 전투(1883년 12월)에서 류융푸는 선떠이 성의 정문 위에 흰색 한자가 새겨진 세 개의 큰 검은 깃발을 꽂도록 명령했다.
개별 흑기 부대는 다양한 깃발을 사용했는데, 일부는 직사각형이었고 다른 일부는 삼각형이었다. 1883년 8월 15일 오후, 푸호아이 전투에서 흑기군 부대 여러 개가 방어선을 나와 프랑스 좌익을 공격하기 위해 탁 트인 지면을 가로질러 진격했다. 프랑스 목격자에 따르면 진격하는 흑기군 부대는 빨간색 또는 흰색 한자로 장식된 수많은 검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15]
현재 남아있는 흑기 깃발 중에는 흰색으로 북두칠성을 나타낸 검은색 삼각 깃발이 있다. 이 깃발에는 "명령" 또는 "지휘"를 의미하는 령자(令)가 새겨져 있다. 흑기군이라는 이름은 초기에 검은 바탕에 북두칠성을 디자인한 군기를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다.
참조
[1]
문서
also known under other names, such as Wu Azhong (Wu Ah-chung, 吳阿忠) as in McAleavy, 1968.
[2]
서적
China: A collection of correspondence and papers relating to Chinese affairs
https://books.google[...]
2011-06-09
[3]
서적
Appletons' Annual Cyclopaedia and Register of Important Events
https://archive.org/[...]
D. Appleton
[4]
문서
Thomazi, Conquête, 126–8
[5]
서적
Les Français au Tonkin, 1787-1883
[6]
서적
Les colonies françaises. 1, Un siècle d'expansion coloniale
[7]
문서
Thomazi, Conquête,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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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zi, Conquête, 162–5
[9]
문서
Thomazi, Conquête, 166–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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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Charles-Lucien Huard|fr}}, 180–7 and 202–31; Thomazi, ''Conquête'', 171–7; ''Histoire militaire'', 68–7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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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Charles-Lucien Huard|fr}}, 280–90; Thomazi, ''Histoire militaire'', 84"
[12]
문서
Thomazi, Histoire militaire, 85–7
[13]
문서
Thomazi, Conquête, 247–8; Histoire militaire, 107–8
[14]
문서
McAleavy, 102 and 105
[15]
문서
"{{Ill|Émile Duboc|fr}}, 174"
[16]
웹사이트
http://www.amaterasu[...]
[17]
서적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上)》
대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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