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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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월 개혁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독일 제국의 정치 체제를 의회주의적으로 개편하려는 일련의 헌법 개정 시도였다. 전쟁의 악화된 상황 속에서, 황제가 임명하는 수상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독일 제국의 정치 체제를 개혁하여, 제국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정부의 책임을 의회에 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개혁은 전쟁 선포와 평화 협정에 대한 제국 의회의 동의를 의무화하고, 수상의 해임 권한을 부여하는 등 의회 중심의 정부 형태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10월 개혁은 너무 늦게 이루어졌고, 독일 혁명의 급진화에 흡수되어, 결국 군주제의 폐지와 공화정 수립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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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개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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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개혁 | |
날짜 | 1918년 10월 |
장소 | 독일국 |
지지 정당 | 사회민주당 진보인민당 중앙당 |
주요 인물 | 막스 폰 바덴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배경 | |
주요 원인 |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색 국내의 정치적 불안정 빌헬름 2세의 권위 약화 |
영향 | 독일 제국의 의회 민주주의화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의 토대 마련 |
내용 | |
주요 내용 | 제국 의회에 대한 정부의 책임 강화 군부에 대한 문민 통제 강화 선거법 개정 (평등 선거 원칙 도입) |
법적 근거 | 헌법 개정 |
결과 및 영향 | |
정치적 변화 | 독일국의 입헌 군주제에서 의회 민주주의로의 전환 사회민주당의 영향력 확대 |
사회적 변화 | 정치 참여 확대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 사회 통합에 기여 |
비판적 평가 | 개혁의 속도와 범위에 대한 논쟁 사회 불안정 심화에 대한 우려 |
2. 배경
독일 제국은 헌법에 따라 1867년과 1871년에 연방 형태로 설립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은 독일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독일 제국 육군과 독일 제국 해군의 총사령관을 겸했다.[1] 헌법 기관으로는 연방상원과 국가의회가 있었고, 황제가 임명하는 제국 재상은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정부는 황제가 임명하는 수상과 국무장관으로 구성되어 내각제와는 달랐다.[2] 국가의회는 법률 발의와 예산 승인 권한을 가졌지만, 군비 지출 통제권은 제한적이었다.[3]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의원들은 전쟁 수행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 장기화로 제국 정책 지지는 약화되었다. 1917년 7월, 제국 의회 다수파는 평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좌익 진보인민당이 참여한 '정당 간 위원회'(Interfraktioneller Ausschuss, IFA)가 결성되었다.[4]
1918년 하반기, 독일의 군사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1918년 3월 말 동부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지만, 8월 서부 전선이 무너졌다. 9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불리한 조약의 책임을 정당들에 전가하고자 정당 간 위원회에 정부 참여를 요구했다.[5] 1918년 10월 3일, 막스 폰 바덴 공이 제국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이 각료로 참여했다.
2. 1. 독일 제국의 정치 체제
헌법에 따라 1867/1871년에 설립된 독일 제국은 연방 형태의 국가였다. 프로이센 국왕은 독일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독일 제국 육군(Deutsches Heer)과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의 총사령관을 맡았다.[1] 헌법 기관으로는 연방상원과 국가의회가 있었다. 제국 재상은 황제가 임명했으며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정부는 전형적인 내각제가 아니라 황제가 임명하는 수상과 국무장관으로 구성되었다.[2]국가의회는 법률을 발의하고 국가 재정에 대한 예산 승인 권한을 가졌으나, 군비 지출에 대한 통제권은 제한적이었다.[3]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비롯한 독일 제국 의회 의원들은 전쟁 수행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제국 정책에 대한 지지는 약화되었다. 1917년 7월, 제국 의회 다수파는 평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을 지지한 세력은 '정당 간 위원회'(Interfraktioneller Ausschuss, IFA)라는 협의체를 구성했는데, 여기에는 사회민주당 외에도 가톨릭 중앙당과 좌익 진보인민당이 참여했다.[4]1918년 하반기, 독일의 군사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1918년 3월 말 독일 제국은 동부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8월에 서부 전선이 붕괴되었다. 9월 말, 군사 지도자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미국이 새로운 제국 지도부와 협상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정당 간 위원회에 정부 참여를 요구했다. 최고 육군 지도부는 불리한 조약의 책임을 이들 정당에 전가하려 했다.[5]
1918년 10월 3일, 막스 폰 바덴 공이 제국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사회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각료에 포함되었다.
3. 10월 개혁의 내용
10월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회의원이 제국 정부에 임명되어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연방참의원 의원이 될 수는 없었다.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아돌프 그뢰버, 카를 트림본 (이상 중앙당), 콘라트 하우스만 (진보인민당), 필리프 샤이데만 (SPD)은 국무장관 임명 후에도 의원직을 유지했다.[7]
- 담당 부처가 없는 국무장관은 총리의 "대리인"이 되어 국회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이를 "완전한 평등과 합의제"의 실현으로 보았다.[7]
- 국회는 불신임 투표로 수상의 사임을 강제할 수 있었고, 황제는 수상을 해임해야 했다. 단, 새 수상 임명은 여전히 황제의 권한이었다.[7]
- 황제가 헌법상 권한을 행사할 때, 수상은 그의 모든 정치적 행위(포고령, 성명, 연설 등)에 대해 책임을 졌다. 황제의 군 통수권(''Kommandogewalt'') 역시 수상 책임 하에 놓여 의회 통제를 받게 되었다.[7]
- 수상과 각료들은 연방참의원과 제국 의회 모두에 직무 수행 책임을 졌다. 제국 의회는 불신임 투표권을 통해 연방참의원보다 헌법적 우선권을 가졌다.[7]
- 독일 제국군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으로 구성되었고, 황제가 최고 지휘권을 가졌으나, 개혁 이후 군대 지휘에 대한 황제의 독립성은 사라졌다. 제국 의회는 국무총리를 통해 육군과 해군의 군사 지휘 인력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의 전쟁 장관은 연방참의원과 국회에 책임을 졌고, 해당 주 파견대의 육군 장교 및 관리 임명, 전출, 승진, 퇴직에 공동 서명해야 했다.[7] 해군의 경우 국무총리가 공동 서명했다.[7]
3. 1. 정부 법안
테오도어 레발트 내무부 차관은 1918년 10월 3일에 정치 시스템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국회의원이 의석을 잃지 않고 제국 또는 다른 국가의 직책을 맡을 수 있도록 헌법 제21조 2항을 삭제하는 것을 제안했다. 또한 부총리 법을 수정하여 총리 대리가 동시에 연방 평의회 의원이 될 수 없도록 했다. 연방 평의회는 법안을 승인했고, 총리는 10월 10일에 이 법안을 국회에 보냈다.[6]독일 평화 협상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 선포와 평화 협정에 국회의 발언권을 공식적으로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따라서 헌법 제11조에 연방 평의회뿐만 아니라 국회도 전쟁 선포(2항)를 승인해야 하며, 평화 협정도 양 기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3항) 새로운 단락을 추가하기로 했다. 10월 15일 연방 평의회는 법안을 채택했지만, 일부 개별 주 정부는 시간적 압박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여 회의록에 투표가 기록되지 않았다.
일부 연방 평의회 의원들은 막스 폰 바덴 총리가 다음 국회 회기에서 의회 책임에 대한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발표할 의도가 있음을 항의했다. 이는 연방 평의회가 국회에 밀려 두 번째 자리에 놓이게 됨을 의미했다. 개별 주들의 반대로 인해 바덴은 10월 22일까지 계획을 연기했다.[6]
3. 2. 바덴의 제국 의회 연설과 의회 그룹의 발의
1918년 10월 22일, 바덴은 국회에서 정부 수반이 의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그는 재상이나 국무차관이 국회 다수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직을 유지할 수 없지만, 독일이 전통에 맞지 않는 정부 형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을 위반한 정부 수반을 처벌하는 국가 법원의 법안을 발표했다. 다수당 연설자들은 의원 내각제로 전환하기 위한 공식적인 헌법 규칙을 요구했다.이후 다수 의회 정당들의 제안 초안이 채택되었고 정부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 결과는 10월 26일 의회 그룹의 발의로 제출되었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부의 동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참의원을 참여시킬 필요가 없었다. 반대파의 이의는 국회 다수에 의해 기각되었다. 보수당은 이 제안을 급진적인 민주화로 가는 길로 보았고, 독일 독립 사회 민주당(USPD)은 군국주의적인 옷에 덧댄 땜질 처방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1]
10월 24일, 국회는 새로운 시스템을 예상한 듯 공식적으로 찬성 193표, 반대 52표, 기권 23표로 재상에 대한 신임을 표명했다. 의회 다수당은 찬성표를 던졌고, 보수당과 USPD는 반대표를 던졌다. 기권표는 독일, 폴란드 및 알자스-로렌 정당에서 나왔다.[2] 10월 25일과 26일 국회 다수는 정부가 수정안을 포함하여 제출한 법안을 승인했다. 이 회의는 1912년에 선출된 국회의 마지막 두 세션이었다. 10월 28일 연방참의원은 법안을 승인했고, 같은 날 황제의 공표와 선포 이후 효력이 발생했다.[3]
3. 3. 개혁의 주요 내용
제국 의회 의원은 제국 정부에 임명되어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연방 평의회 의원이 될 수는 없었다.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아돌프 그뢰버, 카를 트림본 (모두 중앙당), 콘라트 하우스만 (진보인민당), 필리프 샤이데만 (SPD)은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의원직을 유지했다.[7]담당 부처가 없는 국무장관은 총리의 "대리인"이 되어 국회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다. 헌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이를 "완전한 평등과 합의제"의 실현으로 보았다.[7]
국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수상의 사임을 강제할 수 있었고, 황제는 수상을 해임해야 했다. 다만, 새로운 수상의 임명은 여전히 황제의 권한이었다.[7]
황제의 헌법상 권한 행사 시, 수상은 그의 모든 정치적 행위(포고령, 성명, 연설 포함)에 대해 책임을 졌다. 황제의 군 통수권(''Kommandogewalt'') 역시 수상의 책임 하에 놓여 의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7]
수상과 각료들은 연방참의원(Bundesrat)과 제국 의회(Reichstag) 모두에게 직무 수행에 대한 책임을 졌다. 제국 의회는 불신임 투표권을 통해 연방참의원보다 헌법적 우선권을 가졌다.[7]
독일 제국군은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으로 구성되었고, 황제가 최고 지휘권을 가졌으나, 개혁 이후 군대 지휘에 대한 황제의 독립성은 사라졌다. 제국 의회는 국무총리를 통해 육군과 해군의 군사 지휘 인력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프로이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의 전쟁 장관은 연방 평의회와 제국 의회에 책임을 졌고, 해당 주 파견대의 육군 장교 및 관리 임명, 전출, 승진, 퇴직에 공동 서명해야 했다.[7] 해군의 경우 국무총리가 공동 서명했다.[7]
4. 개혁 이후의 전개
10월 29일, 독일 공해 함대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며칠 만에 소수의 선원들이 일으킨 반란은 킬 군항 반란으로 발전했고, 결국 1918-1919년 독일 혁명으로 이어졌다. 점점 더 많은 독일 도시에서 반란군은 소비에트식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를 결성하여 지역 및 많은 경우 주 차원에서 권력을 잡았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독일의 휴전 요청에 대한 답변에서 암묵적으로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 지도부는 부르주아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황제 아래 의회 군주제를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 지지 세력인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독립 사회 민주당, 그리고 스파르타쿠스단은 군주제 폐지를 주장했다. 이러한 요구를 막기 위해 막스 폰 바덴은 빌헬름 2세를 설득하여 퇴위시키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베를린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리고 내전을 막기 위해, 총리는 자신의 권한으로 11월 9일 황제의 퇴위를 선포하고 정부의 통치권을 사회 민주당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이러한 행위는 10월 개혁 이후에도 제국의 헌법에 의해 보장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단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계획한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선포를 예상하여, 사회 민주당원 필리프 샤이데만은 같은 날 공화국을 선포했다. 11월 11일 독일은 콩피에뉴 휴전에 서명했다.
사회 민주당이 이끄는 정부는 독일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국민 의회 선거를 1919년 1월 19일에 실시했다. 1919년 8월 11일,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이 공포되었다.
5. 평가
10월 개혁은 독일 제국의 정치 체제를 의회주의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시도였다. 그러나 시간적 압박과 불분명한 규정으로 인해 잠재적 갈등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8] 아래로부터의 혁명 위협을 막기에는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8]
개혁 법안 통과 후 2주도 채 되지 않아 인민대표 평의회가 혁명적 과도 정부로서 권력을 잡았다. 따라서 개정된 헌법 하에서 독일이 어떻게 발전했을지는 알 수 없다. 역사가 군터 마이에 따르면, 개혁을 서두르는 시간적 압박은 "막스 폰 바덴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이미 구체화된 헌법적 관행의 변화를 단순히 성문화했을 뿐"이었다.[8]
마이는 불분명한 규정으로 인해 잠재적 갈등의 여지가 있었고, 그 결과 의회를 통한 민주화가 장기적으로 성공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보았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는 황제가 계속해서 총리를 제안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가 결정을 내릴 때 국회를 참여시켜야 하는지 여부가 포함되었다. 전반적으로 개혁은 광범위하고 성급했지만,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의 위협을 막기에는 너무나 미온적이었다. 구 제국의 권력의 인물과 상징은 그대로 남았다.[8]
헌법 개혁은 다수 의회 그룹의 참여로만 가능했다. 역사가 토마스 니퍼데이는 일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듯이 이것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당들은 혁명을 명령받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의 요구를 했으며, 변화를 강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다수 정당의 요구는 대체로 충족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졌고, 구 시스템의 잔재가 남아 있었으며, 황제와 군부가 영구적으로 의회화를 받아들였을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국내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10월 개혁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독일 혁명의 급진화에 흡수되었다."[9] 혁명은 우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과 세상에서, 권위주의적 국가"는 계층 구조와 군국주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몇 가지, 비록 근본적인 헌법의 변화로 제거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니퍼데이에 따르면, 개혁은 너무 늦게 이루어졌고, 권력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 않았다.
참조
[1]
웹사이트
Verfassungen Deutschlands. (1866/67 – 1918)
https://www.verfassu[...]
2024-04-11
[2]
웹사이트
Die Verfassung des deutschen Reichs
https://www.dhm.de/l[...]
2022-11-11
[3]
서적
Deutsche Geschichte 1866–1918. Zweiter Band. Machtstaat vor der Demokratie
C.H. Beck
[4]
서적
Der Interfraktionelle Ausschuß 1917/18
Droste
[5]
서적
Ludendorff: Diktator im Ersten Weltkrieg
Siedler Verlag
[6]
서적
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seit 1789
W. Kohlhammer
[7]
서적
Geschichte der Weimarer Verfassung
C. H. Beck
[8]
서적
Das Ende des Kaiserreichs. Politik und Kriegführung im Ersten Weltkrieg
dtv
[9]
서적
Deutsche Geschichte 1866–1918. Band 2: Machtstaat vor der Demokratie
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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