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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연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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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07년 연합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사망 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며 동군 연합을 이루었으나, 두 나라는 별개의 독립국으로 유지되었다. 1707년 연합법은 25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제 통합을 위한 관세 및 통화 동맹을 포함했다. 스코틀랜드는 하원 45석, 상원 16석을 배정받았으며,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와 법률 체계를 유지하도록 보장받았다. 연합은 잉글랜드의 하노버 왕가 왕위 계승을 보장하고, 스코틀랜드 경제에 대한 지원을 제공했으나, 뇌물 수수 의혹과 스코틀랜드 엘리트 계층의 이익 추구로 인해 대중의 반대 여론이 있었다. 이 법은 잉글랜드에는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흡수되는 형태로 정체성을 잃어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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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연합법
개요
명칭연합법 (1707년)
종류법률
관련 문서합동 조약
법률 정보
제정 국가잉글랜드 왕국 (1706년 연합법)
스코틀랜드 왕국 (1707년 연합법)
의회잉글랜드 의회 (1706년 연합법)
스코틀랜드 의회 (1707년 연합법)
정식 명칭잉글랜드: (두 왕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 법률)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왕국의 연합 조약을 비준하고 승인하는 법률)
제정 년도잉글랜드: 1706년
스코틀랜드: 1707년
법전 장잉글랜드: 1706 c. 11
스코틀랜드: 1707 c. 7
법률 시행일1707년 5월 1일
영토 범위제정 당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국
이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까지 확대
법률 인가일잉글랜드: 1707년 3월 6일
스코틀랜드: 1707년 1월 16일
현재 상태유효
관련 법률
관련 법률스코틀랜드 재무 법원법 1707
법률 개정
개정 법률1867년 법률 개정법
1871년 약속 선서법
1878년 도량형법
1948년 법률 개정법
1963년 귀족법
1973년 법률 (폐지)법
1998년 스코틀랜드 법
1906년 스코틀랜드 법률 개정법
1964년 스코틀랜드 법률 개정법
1948년 형사 사법법
기타
짧은 제목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관련 인물사이먼 샤마
관련 방송(진행자) |network= BBC One |airdate= 2001년 5월 22일 |number=10 |minutes=3}}

2. 역사

1603년 잉글랜드 왕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국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왕국 연합이 이루어졌다.[78] 이로써 스튜어트 왕가가 두 왕국의 군주를 겸하게 되었으나, 두 왕국은 별개의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79] 이후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1698년부터 합병론이 확산되었고, 1706년 두 왕국의 합병이 결정되었다.[79]

2. 1. 17세기 이전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는데, 이를 왕국 연합이라고 한다.[78] 이후 스튜어트 왕가가 두 왕국의 군주를 겸하였으나, 두 왕국은 별개의 독립국으로 남아있었다.[79]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두 왕국은 분리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558년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었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 가능성이 높아졌다. 엘리자베스 1세의 상속인은 가톨릭 신자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였고, 메리는 두 왕국의 평화적 통합을 약속했다.[36]

1567년, 메리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어린 아들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프로테스탄트로 교육받았고,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동군연합이 되었고, 이후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이 대대로 동군연합을 이어받았지만, 왕국으로서는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다.

160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 법령에 따라 연합 조건을 합의하기 위한 합동 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잉글랜드 의회는 이것이 스코틀랜드와 유사한 절대주의적 구조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제임스 1세는 왕실 특권을 이용하여 "대영국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2]

1610년 연합을 재개하려는 시도는 잉글랜드 측의 반대에 부딪혔다. 에드윈 샌디스 경과 같은 잉글랜드의 반대자들은 잉글랜드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덴마크인이나 노르만인이 할 수 없었던 것 이상으로 우리 이름을 정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했다.[3]

제임스 1세는 중앙 집권화된 연합 국가를 향한 첫 번째 단계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 교회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두 교회는 모두 감독 정치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교리가 매우 달랐다. 스코틀랜드 교회칼뱅주의적 교리였고, 잉글랜드 교회의 관행을 가톨릭과 거의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이러한 종교적 차이로 인해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종교 정책을 시행하려는 시도는 1639년~1651년 삼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1639년~1640년 주교 전쟁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우위를 확인하고 국교도 정부를 수립하였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스코틀랜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왕당파의 승리가 스코틀랜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아가일과 같은 장로교 지도자들은 연합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자유 무역을 보장하고 장로교 교회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1643년 엄숙한 동맹과 계약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통합된 장로교 교회를 대가로 의회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지만, 정치적 연합에는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내전이 진행되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장로교도들은 레벨러와 같은 급진적 집단을 왕당파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다. 1646년 찰스 1세가 항복했을 때, 협력자로 알려진 친왕당파는 그를 잉글랜드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이전의 적들과 동맹을 맺었다.

1647년~1648년 잉글랜드 제2차 내전에서 패배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군에 점령되었고, 크롬웰이 책임이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커크당으로 대체되었다. 1648년 12월 프라이드의 정변은 이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제외함으로써 잉글랜드에서 찰스 1세 재판을 위한 길을 열었다. 1649년 1월 찰스 1세 처형과 잉글랜드 연방의 수립 이후, 커크당은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으로 선포했고, 1650년 합의하여 그를 잉글랜드 왕좌에 복위시키기로 하였다.

''던바 전투에서의 크롬웰'' by ''앤드류 캐릭 고우''. 1650년~1652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전쟁에서 패배한 후 스코틀랜드는 연방에 편입되었다.


1650년~1652년 영국-스코틀랜드 전쟁에서 패배한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에 의해 잉글랜드 연방에 강제 편입되었다. 1652년 연합 제안은 1654년 4월 12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을 위한 보호자의 법령"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방이 만들어짐으로써 뒤따랐다.[4] 이것은 1657년 6월 26일 제2 보호령 의회에 의해 비준되었고, 웨스트민스터에 단일 의회를 만들었다.[5]

2. 2. 17세기: 동군연합과 갈등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국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두 왕국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78] 제임스 1세는 두 왕국의 통합을 원했지만,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와 같은 절대 군주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2] 제임스 1세는 왕실 특권을 사용하여 "대영국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2] 중앙 집권화를 위한 첫 단계로 잉글랜드 국교회와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통합을 추진했다.[37]

그러나 두 교회는 교리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칼뱅주의 교리를 따랐고, 잉글랜드 교회의 관행을 가톨릭과 유사하다고 여겼다.[39] 이러한 종교적 갈등은 결국 1639년~1651년 삼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1639년~1640년 주교 전쟁스코틀랜드 교회의 우위를 확인시켜 주었고, 1642년 잉글랜드 내전 발발 당시 스코틀랜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왕당파의 승리가 스코틀랜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했다.[40]

1643년 엄숙한 동맹과 계약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통합된 장로교 교회를 대가로 잉글랜드 의회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지만, 정치적 연합에는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41]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장로교도들은 독립파를 왕당파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겼고, 1646년 찰스 1세가 항복했을 때 스코틀랜드는 그를 잉글랜드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이전의 적들과 동맹을 맺었다.[42]

1647년~1648년 잉글랜드 제2차 내전에서 패배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군에 점령되었고, 1649년 1월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 연방이 수립되자,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잉글랜드 왕좌에 복위시키기로 하였다.

1650년~1652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전쟁에서 패배한 스코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잉글랜드 연방에 강제 편입되었다.[43] 1654년 4월 12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을 위한 보호자의 법령"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방이 만들어졌고,[4] 1657년 6월 26일 제2 보호령 의회에 의해 비준되어 웨스트민스터에 단일 의회가 설치되었다.[5]

연합으로 자유 무역이 확립되었지만, 군사 점령 비용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은 감소했다.[6]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모두 연합을 무거운 세금과 군사 통치와 연관시켰고,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 이후 해체되었다.

1660년1663년 잉글랜드의 항해 조례 제정과 잉글랜드의 전쟁으로 스코틀랜드 경제는 큰 피해를 입었다. 1668년 1월 영국-스코틀랜드 무역 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스코틀랜드가 돌려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양보할 의향이 없었다. 1669년 찰스 2세는 정치적 연합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지만, 지속적인 반대로 인해 협상은 1669년 말에 중단되었다.[7]

1688년 명예혁명 이후, 1689년 4월 스코틀랜드 삼부회는 새로운 헌법적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에든버러에서 모였고, 윌리엄과 메리에게 연합을 제안했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 다수파와 잉글랜드 의회 모두 반대했다.[8] 1690년 스코틀랜드의 주교제가 폐지되면서 정치 계급의 상당 부분이 소외되었고, 이후 연합에 대한 반대의 기반이 되었다.

1690년대는 유럽 전체와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경제적 어려움의 시기였으며, 다리엔 계획의 실패로 15만 파운드 이상의 손실을 보면서 스코틀랜드 상업 시스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2. 3. 18세기: 연합으로 가는 길

앤 여왕이 1702년에 즉위한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앤 여왕은 첫 연설에서 연합이 "매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18]

당시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가의 프로테스탄트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1701년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협의 없이 독자적인 왕위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는 안전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잉글랜드는 외국인법을 제정하여 스코틀랜드와의 무역을 제한하고, 스코틀랜드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하며 압박했다.[18]

스코틀랜드는 다리엔 계획의 실패와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6]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로부터 재정 지원, 해상 무역 보호, 무역 제한 해제 등을 약속받았다.[18]

이러한 배경 속에서 1706년 런던 코크핏에서 양국 위원 간의 연합 협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가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보장받고, 스코틀랜드는 식민지 시장 접근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19]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퀸즈베리 공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궁정파(Court party)와 스쿼드론 볼란테가 연합을 지지했다.[18] 반면, 해밀턴 공작 제임스 해밀턴 등이 이끄는 향촌파(Country party)는 연합에 반대했다.[18] 잉글랜드는 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자금을 지원하고, 다리엔 계획 투자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으며, 뇌물도 제공했다.[9]

글래스고 백작 데이비드 보일은 20000GBP를 배포했는데, 그중 60%는 퀸즈베리 공작에게 돌아갔다.[9] 어가일 공작 존 캠벨은 영국 공작 작위를 받았다.[18] 로버트 번즈는 이를 "우리는 영국의 금에 팔리고 샀다네"라고 풍자했다.[9]

스코틀랜드에서는 연합에 대한 반대 여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카나스의 조지 록하트 경은 "전 국민이 (연합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11] 에든버러 등지에서는 시위가 발생했고,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의 카리용 연주자는 "결혼식 날 왜 이렇게 슬퍼해야 하는가?"라는 곡조로 종을 울렸다.[13] 의회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반대 여론을 억눌렀다.[13]

결국, 1707년 1월 16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110표 대 69표로 연합 조약을 비준했다.[21]

1707년 1월 16일 연합 조약 비준 투표 기록
위원선거구/직책정당투표
James Graham, 1st Duke of Montrose스털링셔/스코틀랜드 국왕 평의회 의장궁정파찬성
John Campbell, 2nd Duke of Argyll궁정파찬성
John Hay, 2nd Marquess of Tweeddale스콰드론 볼란테찬성
William Kerr, 2nd Marquess of Lothian궁정파찬성
John Erskine, Earl of Mar궁정파찬성
John Gordon, 16th Earl of Sutherland궁정파찬성
John Hamilton-Leslie, 9th Earl of Rothes스콰드론 볼란테찬성
제임스 더글러스, 모튼 백작 11세찬성
윌리엄 커닝햄, 글렌케언 백작 12세찬성
James Hamilton, 6th Earl of Abercorn찬성
John Ker, 1st Duke of Roxburghe스콰드론 볼란테찬성
Thomas Hamilton, 6th Earl of Haddington찬성
John Maitland, 5th Earl of Lauderdale찬성
David Wemyss, 4th Earl of Wemyss찬성
윌리엄 램지, 달하우지 백작 5세찬성
James Ogilvy, 4th Earl of Findlater밴프셔찬성
David Leslie, 3rd Earl of Leven찬성
David Carnegie, 4th Earl of Northesk찬성
Colin Lindsay, 3rd Earl of Balcarres찬성
Archibald Douglas, 1st Earl of Forfar찬성
William Boyd, 3rd Earl of Kilmarnock찬성
John Keith, 1st Earl of Kintore찬성
Patrick Hume, 1st Earl of Marchmont스콰드론 볼란테찬성
George Mackenzie, 1st Earl of Cromartie찬성
Archibald Primrose, 1st Earl of Rosebery찬성
David Boyle, 1st Earl of Glasgow찬성
Charles Hope, 1st Earl of Hopetoun아마 린리스고셔찬성
Henry Scott, 1st Earl of Deloraine찬성
아치볼드 캠벨, 일레이 백작찬성
윌리엄 헤이, 덥플린 자작찬성
윌리엄 포브스, 포브스 경 12세찬성
존 엘핀스톤, 엘핀스톤 경 8세찬성
William Ross, 12th Lord Ross찬성
James Sandilands, 7th Lord Torphichen찬성
프레이저 경찬성
George Ogilvy, 3rd Lord Banff찬성
알렉산더 머레이, 엘리뱅크 경 4세찬성
케네스 서덜랜드, 더퍼스 경 3세찬성
Robert Rollo, 4th Lord Rollo스털링셔찬성
제임스 머레이, 필리파 경기록 보관소 관리/셀커크셔찬성
아담 콕번, 오르미스턴 경사법관찬성
인버애스크의 로버트 딕슨 경에든버러셔찬성
딜리투운의 윌리엄 니스벳해딩턴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존 콕번, 오르메스턴의 젊은이해딩턴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그 일크의 존 스윈투운 경버윅셔궁정파찬성
세스녹의 알렉산더 캠벨 경버윅셔찬성
그린헤드의 윌리엄 커 경록스버러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아치볼드 더글러스, 케이벌스 13세록스버러셔궁정파찬성
그럽벳의 윌리엄 베넷록스버러셔궁정파찬성
보힐의 존 머레이 씨셀커크셔궁정파찬성
헤이닝의 존 프링글 씨셀커크셔궁정파찬성
프레스톤그레인지의 윌리엄 모리슨피블러셔궁정파찬성
그 일크의 알렉산더 호스버그피블러셔찬성
저비스우드의 조지 베일리라나크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웨스터홀의 존 존스턴 경더프리스셔궁정파찬성
도르녹의 윌리엄 더글러스더프리스셔찬성
캐슬스튜어트의 윌리엄 스튜어트 씨위그타운셔찬성
소비의 존 스튜어트 씨위그타운셔궁정파찬성
기판의 프랜시스 몽고메리 씨에어셔궁정파찬성
글렌무어의 윌리엄 달림플 씨에어셔궁정파찬성
틸리컬트리의 로버트 스튜어트 씨부트셔찬성
그 일크의 로버트 폴록 경렌프루셔궁정파찬성
Wrae의 존 몽고메리 씨린리스고셔찬성
글레나지스의 존 할든퍼스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고르시의 몽고 그레이엄퍼스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레이스의 토마스 버넷 경킨카딘셔궁정파찬성
핏메든의 젊은 윌리엄 세톤애버딘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그 일크의 젊은 알렉산더 그랜트인버네스셔궁정파찬성
윌리엄 맥켄지 경찬성
캐드볼의 에네아스 맥리오드 씨크로머티셔찬성
맘모어의 존 캠벨 씨아가일셔궁정파찬성
오친브렉의 제임스 캠벨 경아가일셔궁정파찬성
아드킹글래스의 젊은 제임스 캠벨아가일셔궁정파찬성
그 일크의 윌리엄 앤스트러더 경파이프찬성
핏커의 제임스 핼리버튼포파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글라소크의 알렉산더 애버크롬비밴프셔궁정파찬성
험프리그스의 젊은 제임스 던바 씨케이네스찬성
이글셰이의 알렉산더 더글러스오크니 및 셰틀랜드궁정파찬성
존 브루스 경, 2대 남작킨로스셔스콰드론 볼란테찬성
존 스크림수어던디찬성
존 아레스킨 중령찬성
존 뮤어아마 에어찬성


3. 연합법의 주요 내용

1707년 연합법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수도를 런던으로, 연합 왕국의 의사당을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정했다.[80] 이 법은 1706년 잉글랜드 의회스코틀랜드 의회 대표 간에 합의된 연합 조약을 기반으로 하며,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702년 즉위한 앤 여왕의 주도하에 양국은 연합 협상을 시작했다. 1705년 연합 조약을 위한 새로운 협상에 합의한 후, 1706년 4월 16일부터 7월 22일까지 런던의 코크핏에서 양국 대표 간 협상이 진행되었다.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가의 왕위 계승을 보장받고, 스코틀랜드는 식민지 시장 접근을 통해 무역상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19]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궁정파와 비행대 등의 지지로 1707년 1월 16일 연합 조약 비준 법률이 통과되었다.[20] 이후 잉글랜드 의회에서도 비준되어 3월 6일 왕실 재가를 받았다.[21]

연합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장로교적 성격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69]

3. 1. 정치 통합

1707년 연합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수도는 런던이 되었고, 연합 왕국의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리게 되었다.[80]

1702년 즉위한 앤 여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 통합을 주요 정책 중 하나로 추진했다. 1705년, 앤 여왕과 양국 장관들의 지원 아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연합 조약을 위한 새로운 협상에 합의했다.

협상을 위해 양국은 각각 31명의 위원을 임명했다. 스코틀랜드 위원 대부분은 연합을 지지했으며, 그중 절반가량은 정부 장관과 관리들이었다. 퀸즈베리 공작과 핀들레이터 백작이 스코틀랜드 측 대표단을 이끌었다.[17] 잉글랜드 측 위원으로는 고돌핀 백작, 카우퍼 남작 등 연합을 지지하는 휘그당원이 다수 포함되었다. 토리당은 연합에 반대하여, 잉글랜드 위원 중 단 한 명만이 토리당원이었다.[17]

1706년 4월 16일부터 7월 22일까지 런던의 코크핏에서 양국 위원 간 협상이 진행되었다. 며칠 만에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가가 앤 여왕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하도록 보장받았고, 스코틀랜드는 식민지 시장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아 무역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다.[19]

협상 이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궁정파가 100여 명의 의원, 비행대의 약 25명, 그리고 몽트로즈 후작과 록스버러 공작의 지지를 받아 연합 법안을 통과시켰다. 향촌파는 해밀턴 공작 제임스 해밀턴, 벨헤이븐 남작, 앤드류 플레처 등 다양한 파벌과 개인으로 구성되어 연합에 반대했다. 궁정파는 잉글랜드와 재무부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다리엔 재난으로 빚을 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20]

1707년 1월 16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연합 조약 비준 법률을 110표 대 69표로 통과시켰다. 이후 웨스트민스터에서 법률이 양원을 통과하고 3월 6일 왕실 재가를 받았다.[21]

연합 조약은 2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5개 조항은 경제 관련 내용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각 조항을 개별 투표했고, 일부는 전문 하위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장로교적 성격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되어 교회는 공개적인 반대를 중단했지만, 하급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남아 있었다.

두 연합법에는 스코틀랜드가 대표 귀족을 선출하여 상원에 보내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남으며, 세션 법원은 "앞으로도 스코틀랜드 내에 존재"하고, 스코틀랜드 법은 "이전과 같은 효력을 유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1701년 왕위 계승 법을 재확인하고 로마 가톨릭 신자의 즉위를 금지했으며, 관세 동맹통화 동맹을 체결했다.

이 법은 "조항과 모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모든 "법률과 법령"은 "중지되고 무효가 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3. 2. 경제 통합

1706년 잉글랜드 의회스코틀랜드 의회 대표 간에 합의된 연합 조약은 2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5개 조항은 경제 관련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각 조항에 대해 별도로 투표를 실시했으며, 여러 조항의 일부는 전문 하위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 조약에는 관세 동맹통화 동맹 결성 내용이 포함되었다.

1707년 연합법은 스코틀랜드가 대표 귀족을 스코틀랜드 귀족에서 파견하여 상원에 참여하도록 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이는 스코틀랜드 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남을 것이며, 세션 법원은 "앞으로도 스코틀랜드 내에 존재할 것이며", 스코틀랜드 법은 "이전과 같은 효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을 보장했다. 다른 조항에는 1701년 왕위 계승 법 재확인과 로마 가톨릭 신자의 즉위 금지가 포함되었다.

이 법률은 이 법률의 "조항과 모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모든 "법률과 법령"은 "중지되고 무효가 될 것"이라고 규정했다.

3. 3. 기타 조항

1702년 앤 여왕이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정치 통합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앤 여왕과 장관들의 후원으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1705년 합동 조약 협상에 동의했다.[52]

1706년 잉글랜드 의회스코틀랜드 의회 대표 간 협상된 에는 25개 조항이 있으며, 그중 15개 조항은 경제 관련이었다.

  • 제2조: 1701년 왕위 계승법과 마찬가지로 소피아 폰 데어 팔츠의 후손이면서 프로테스탄트인 자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68]
  • 제10조~제18조: 세금, 관세, 통화의 통일을 규정했다.
  • 제19조: 과 스코틀랜드 법을 존속시켰다.[68]
  • 제20조: 세습적 사법권, 세습직 등을 유지했다.[68]
  • 제22조: 스코틀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하원에서 45석, 그레이트브리튼 상원에서 16석(스코틀랜드 귀족 대표 의원)을 배정받았다.
  • 제25조: 연합 조약에 규정된 조항에 위배되는 어떠한 법률이라도 폐지되고 무효가 된다는 것을 규정했다.[68]

4. 연합의 이유와 배경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를 동군연합 형태로 계승하여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 제임스 1세는 두 왕국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잉글랜드 의회는 절대 군주제 도입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제임스 1세는 영국 왕실 특권을 통해 "대영국 국왕" 칭호를 사용하며 통합 의지를 드러냈지만,[2] 1610년 통합 시도는 잉글랜드 측 반대로 무산되었다.[3] 에드윈 샌디스 경과 같은 잉글랜드 측 반대자들은 잉글랜드 국명 변경에 대해 "우리 이름을 정복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3]

제임스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위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 교회를 만들고자 했다.[2] 그러나 두 교회는 감독 정치라는 명목상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교회칼뱅주의 교리를 따랐고, 잉글랜드 교회의 관행을 가톨릭과 유사하다고 여겨 반발했다.[2] 종교 정책 강행은 결국 삼국 전쟁 (1639년~1651년)으로 이어졌다. 주교 전쟁 (1639년~1640년)은 스코틀랜드 국교도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잉글랜드 내전 (1642년) 발발 당시 스코틀랜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왕당파 승리가 스코틀랜드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2] 아가일과 같은 장로교 지도자들은 연합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 자유 무역을 보장하고 장로교 커크를 보존하려 했다.[2]

1643년 엄숙한 동맹과 계약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통합된 장로교 교회를 대가로 의회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지만, 정치적 연합에는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이후 레벨러와 같은 급진적 집단과 연관된 독립파를 왕당파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다. 왕당파와 장로교도 모두 군주제가 신에 의해 명령받았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교회에 대한 왕권의 본질과 범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1646년 찰스 1세가 항복했을 때 협력자로 알려진 친왕당파는 그를 잉글랜드 왕좌에 복위시키기 위해 이전의 적들과 동맹을 맺었다.[2]

잉글랜드 제2차 내전 (1647년~1648년)에서 패배한 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군에 점령되었다. 1648년 12월 프라이드의 정변은 찰스 1세 재판을 위한 길을 열었다. 1649년 1월 찰스 1세 처형과 잉글랜드 연방 수립 이후, 커크당은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으로 선포하고, 1650년 합의하여 그를 잉글랜드 왕좌에 복위시키기로 하였다.

영국-스코틀랜드 전쟁 (1650년~1652년)에서 패배한 스코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의 주도로 잉글랜드 연방에 편입되었다.[4] 1654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을 위한 보호자의 법령"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방이 만들어졌고, 1657년 제2 보호령 의회에서 비준되어 웨스트민스터에 단일 의회가 구성되었다.[5]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국가 중앙집권화 경향이 강화되었다.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등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과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분명했다.[56]

군주가 한쪽 의회를 이용해 다른 쪽에 대항하는 위험은 1647년과 1651년에 발생한 전쟁에서 처음 드러났고, 1679년부터 1681년까지의 왕위 계승법 위기에서 다시 나타났다.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요크 공 제임스가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잉글랜드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1681년 에든버러에 파견되었다. 그해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켜 신권 왕조설과 "종교에 관계없이" 혈연에 따른 상속인의 권리,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 의무를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의 독립성을 재확인했다. 이 법의 목적은 제임스를 잉글랜드 왕위에서 배제하면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상황을 만들어 그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57]

이 문제는 1688년 명예혁명으로 다시 발생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딸인 메리 2세를 즉위시키는 것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메리 2세의 남편이자 네덜란드 출신인 윌리엄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즉위시키는 것에는 반대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고, 메리 2세도 남편 없이는 통치하지 않겠다고 하자 결국 양보했다.[58]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성공회 간의 갈등이 있었고, 윌리엄 3세가 칼뱅주의자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보다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윌리엄 3세는 처음에는 감독제 유지와 스코틀랜드 의회의 조항 위원회(Committee of the Articles|스코틀랜드 의회의 조항 위원회영어) 유지를 주장하여 스코틀랜드에서의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1689년 자코바이트 반란으로 인해 이러한 요구를 철회했다.[59]

크리스토퍼 스마우트(Christopher Smout) 역사가는 왕관의 연합 이전 스코틀랜드 경제는 영국 경제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번영했으며, 두 국가 간 상호 작용은 거의 없었다고 주장한다. 영국과의 더욱 긴밀한 경제적 동반자 관계는 지속 불가능했고, 스코틀랜드의 주요 무역 파트너는 유럽 대륙, 특히 네덜란드였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일반적으로 서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전쟁을 벌였으며, 프랑스와의 동맹은 스코틀랜드에 특권을 부여하여 영국보다는 유럽 대륙과의 문화적, 경제적 유대 관계 발전을 더욱 장려했다. 1603년 연합은 제임스 국왕의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야망에만 부합했으며 스코틀랜드에는 경제적으로 해로웠다. 스코틀랜드 비밀 의회는 내부 경제 정책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외교 정책은 이제 영국의 손에 있었다. 이는 유럽 대륙과의 스코틀랜드의 그간 광범위한 무역을 제한하고 영국의 전쟁에 휘말리게 만들었다.[26]

1620년대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영국의 전쟁으로 스코틀랜드 경제가 이미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의 내전은 스코틀랜드에 특히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상대적으로 빈곤하게 만들었다. 이후 경제는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영국과의 무역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는 대가를 치렀다. 1680년대 스코틀랜드와 영국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했는데, 런던은 이를 자체의 지배적이고 확고한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유럽 대륙 열강과의 영국의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약화시켰고, 영국의 항해법은 스코틀랜드의 해상 무역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론은 영국이 스코틀랜드의 경제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26]

1703년까지 스코틀랜드 정부는 연합에 대해 크게 환멸을 느꼈고, 많은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경제가 번영하려면 영국과 분리하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믿었다. 존 클럭 오브 엘딘(John Clerk of Eldin)과 데이비드 블랙(David Black)은 영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반영국 감정은 1699년 글렌코 학살을 기획한 윌리엄 국왕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고, 1703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영국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법안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스코틀랜드의 외교 정책이 영국과 독립적일 것임을 보장하기 위한 평화와 전쟁에 관한 법이었다.[28]

스코틀랜드는 1704년 안전법으로 영국으로부터 더 많은 자치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영국의 보복을 불러왔다. 스코틀랜드 장관들에게 뇌물이 제공되었고, 1705년 외국인법이 통과되었다. 외국인법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가 크리스마스까지 연합을 위해 협상할 위원을 임명하지 않으면, 영국에 있는 모든 스코틀랜드인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영국 재산이 몰수될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상품은 영국에서 금지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스마우트는 영국이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26] 이 법은 스코틀랜드에서 강력한 반영국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스코틀랜드 경제는 위기에 직면했고, 의회는 연합 찬성과 반대 세력으로 양분되었으며, 전자는 다니엘 디포(Daniel Defoe)가 이끌었다. 연합주의자들은 영국과의 무역이 스코틀랜드 경제에 중요하며, 외국인법으로 인한 제재는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반연합주의자들은 영국의 호의를 의심하고 스코틀랜드가 자체 산업을 다변화하여 경제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6]

결국 스코틀랜드 장관들은 대중의 지지 부족에도 불구하고 연합에 찬성표를 던졌다.[14]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엘리트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연합 법안은 영국의 뇌물 덕분에 통과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30] 연합 이후 처음 몇십 년 동안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주요 무역 파트너가 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인 무역 패턴을 유지했다.[31]

4. 1. 잉글랜드의 관점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국가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등 여러 국가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과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분명했다.[56]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을 모두 다스리는 군주가 한쪽 의회를 이용해 다른 쪽에 대항하는 위험은 1647년과 1651년에 발생한 전쟁에서 처음 드러났고, 1679년부터 1681년까지의 왕위 계승법 위기에서 다시 나타났다.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요크 공 제임스가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잉글랜드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1681년 에든버러에 파견되었다. 그해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켜 신권 왕조설과 "종교에 관계없이" 혈연에 따른 상속인의 권리,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 의무를 인정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의 독립성을 재확인했다. 이 법의 목적은 제임스를 잉글랜드 왕위에서 배제하면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상황을 만들어 그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57]

이 문제는 1688년 명예혁명으로 다시 발생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딸인 메리 2세를 즉위시키는 것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메리 2세의 남편이자 네덜란드 출신인 윌리엄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즉위시키는 것에는 반대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고, 메리 2세도 남편 없이는 통치하지 않겠다고 하자 결국 양보했다.[58]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와 감독파 간의 갈등이 있었고, 윌리엄 3세가 칼뱅주의자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보다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윌리엄 3세는 처음에는 감독제 유지와 스코틀랜드 의회의 조항 위원회(Committee of the Articles|스코틀랜드 의회의 조항 위원회영어) 유지를 주장하여 스코틀랜드에서의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1689년 자코바이트 반란으로 인해 이러한 요구를 철회했다.[59]

잉글랜드의 주요 목표는 스코틀랜드와의 동군연합이 해소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잉글랜드 국왕과 스코틀랜드 국왕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17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동군연합 상태였지만, 만약 스코틀랜드 국왕과 잉글랜드 국왕이 다른 사람이 된다면, 스코틀랜드 국왕이 프로테스탄트라고 해도 반(反)잉글랜드 동맹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1701년 왕위 계승법에 따라 하노버 왕가 출신의 프로테스탄트만이 잉글랜드 국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이 법에 얽매이는 것을 꺼려 안전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앤 여왕이 자녀 없이 사망할 경우, 스코틀랜드 의회가 계승자를 지명하고, 잉글랜드가 자유 무역과 자유 항해를 보장하지 않는 한 잉글랜드 국왕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지명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에 잉글랜드는 외국인법을 통과시켜 보복했다. 이 법은 스코틀랜드가 1705년 12월 25일까지 연합 협상에 응하고 하노버 왕조의 왕위 계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코틀랜드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고(이는 스코틀랜드인의 잉글랜드 재산 상속에 영향을 미침), 스코틀랜드산 주요 물품에 대한 금수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60] 결과적으로 성립된 그레이트브리튼 의회에서는 잉글랜드 출신 의원 수가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 수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가 반대하더라도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연합 조약"으로도 알려진 1707년 연합 조약


앤 여왕은 1702년 즉위하면서 더욱 심도있는 정치적 통합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했다. 여왕과 양국 장관들의 후원 하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는 1705년 연합 조약을 위한 새로운 협상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은 협상을 위해 각각 31명의 위원을 임명했다. 스코틀랜드 위원 대부분은 연합을 지지했으며, 약 절반은 정부 장관과 관리들이었다. 퀸스베리 공작과 스코틀랜드 대법관인 핀들레이터 백작이 명단을 이끌었다.[17] 잉글랜드 위원에는 고돌핀 백작, 카우퍼 남작 등 연합을 지지하는 휘그당원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토리당은 연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위원 중 한 명만이 토리당 출신이었다.[17]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위원 간의 협상은 1706년 4월 16일부터 7월 22일까지 런던의 코크핏에서 진행되었다. 각 측은 서로 다른 우려 사항을 가지고 있었다. 며칠 만에, 그리고 62명의 모든 위원들이 모인 단 한 번의 회의를 통해,[18]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가가 앤 여왕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한다는 보장을 얻었고, 스코틀랜드는 무역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 시장에 대한 접근을 보장받았다.[19]

1706년 7월 협상이 끝난 후, 법률은 양국 의회에서 비준되어야 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227명의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 중 약 100명이 궁정파를 지지했다. 궁정파는 비행대의 약 25명의 의원, 몽트로즈 후작 제임스 그레이엄과 록스버러 공작 존 커가 이끄는 의원들의 추가 투표에 의존할 수 있었다. 궁정파의 반대파는 향촌파로 알려졌으며, 해밀턴 공작 제임스 해밀턴, 벨헤이븐 남작 존 해밀턴, 앤드류 플레처 등 연합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다양한 파벌과 개인들을 포함했다. 1706년 10월 3일 스코틀랜드 의회가 법률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을 때 이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이미 거래는 끝난 상태였다.[18] 궁정파는 잉글랜드와 재무부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다리엔 재난 이후 부채를 쌓은 많은 사람들을 포함했다.[20]

연합 조약을 비준하는 법률은 1707년 1월 16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110표 대 69표로 통과되었으며, 몇 가지 주요 수정안이 포함되었다. 비준과 수정안에 대한 소식은 웨스트민스터에 전달되었고, 그곳에서 법률은 양원을 신속하게 통과하여 3월 6일 왕실의 재가를 받았다.[21] 잉글랜드 법률은 나중에 제정되었지만, 잉글랜드의 법률 연도가 3월 25일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법률은 '1706'년으로, 스코틀랜드 법률은 '1707'년으로 표기되었다.

4. 2. 스코틀랜드의 관점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와 합쳐지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다리엔 계획의 실패는 스코틀랜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62] 이 계획은 다리엔 만에 스코틀랜드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시도였으나, 잉글랜드의 방해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31]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재정 위기에 빠졌고, 스코틀랜드 은행은 심각한 자금 부족을 겪었다.[27]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시장에 대한 접근이 절실히 필요했다. 1690년대의 7년 기근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동안 영국 해군이 자국 선박 보호에 집중하면서 스코틀랜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61]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와의 무역 제한 해제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았다.[61]

스코틀랜드 의회 내에서는 연합을 찬성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퀸즈베리 공작 제임스 더글러스의 영향을 받은 조정 당(Court party)과 스쿼드론 볼란테였다.[18] 이들은 연합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다리엔 계획에 투자했던 스코틀랜드 의원들은 연합에 찬성함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62] 실제로 연합 조약 제15조에 따라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398,085파운드 10실링(398085.5GBP)을 지급했고, 이 중 상당 부분이 다리엔 계획 투자자들에게 돌아갔다.[62]

그러나 잉글랜드의 압력도 연합 추진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1705년 외국인법은 스코틀랜드가 연합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잉글랜드 내 스코틀랜드인들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스코틀랜드 상품 수입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6] 이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강력한 경제 제재 위협이었고, 결국 스코틀랜드는 연합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엘리트 계층은 연합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했다. 일부 협상가들은 잉글랜드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작위를 받았다.[18] 글래스고 백작 데이비드 보일은 2만 파운드(20000GBP)를 받았고, 어가일 공작 존 캠벨은 영국 공작 작위를 받았다.[18]

하지만 대다수의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연합에 반대했다. 카나스의 조지 록하트 경은 "전 국민이 (연합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고,[65] 페니쿠익의 존 클럭 경은 "왕국의 최소 4분의 3 이상의 의향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65] 에든버러에서는 시위대가 지역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교회의 독립성과 세금 인상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컸다.[64] 왕립 자치시 협의회는 "스코틀랜드 국민의 상태는 스코틀랜드 의회 없이는 개선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연합에 반대했다.[12] 스코틀랜드 의회는 연합에 찬성하는 청원을 단 하나도 받지 못했다. 조약이 체결된 날,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의 카리용 연주자는 "결혼식 날 왜 이렇게 슬퍼해야 하는가?"라는 곡조로 종을 울렸다.[13] 광범위한 시민 불안에 대한 우려로 의회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결국 스코틀랜드에서의 연합은 경제적 어려움, 잉글랜드의 압력, 그리고 일부 엘리트 계층의 이익 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대중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연합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스코틀랜드 엘리트 계층과 대중 간의 괴리를 보여준다.

4. 3. 기타 요인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유럽은 중앙집권화 경향이 강해지는 추세였다.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제국 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으며,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과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중앙집권화였다.[56]

1707년 연합법 제정에는 종교적 갈등도 영향을 미쳤다. 연합법 조항에 1701년 왕위 계승법과 가톨릭 왕위 계승 배제가 포함된 것은 당시 종교 문제가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모두 다스리는 군주가 한쪽 의회를 이용하여 다른 쪽에 불리한 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은 1647년 잉글랜드 제2차 내전과 1651년 잉글랜드 제3차 내전에서 이미 나타났고, 1679년부터 1681년까지의 왕위 계승법 위기에서 다시 문제가 되었다.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요크 공 제임스가 찰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잉글랜드가 반대하자, 제임스는 1681년 에든버러에 파견되었다. 그해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켜 신권 왕조설과 “종교에 관계없이” 혈연에 따른 상속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왕위에 오른 상속인에게 충성을 맹세할 의무를 부여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왕위의 독립성을 재확인했다. 이 법의 목적은 제임스를 잉글랜드 왕위에서 배제하면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상황을 만들어 제임스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57]

1688년 명예혁명 때 이 문제는 다시 발생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프로테스탄트였던 그의 딸 메리 2세를 즉위시키는 데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메리 2세의 남편이자 네덜란드 출신인 윌리엄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우는 데는 반대했다. 잉글랜드 의회는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고 메리 2세도 남편 없이 혼자 통치하는 것을 거부한 후에야 양보했다.[58]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성공회 간의 교회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고, 윌리엄 3세가 칼뱅주의자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보다 스코틀랜드에서 그의 입지가 더 강했다. 윌리엄 3세는 처음에는 감독제 유지와 스코틀랜드 의회의 조항 위원회(Committee of the Articles, 국왕이 임명하고 스코틀랜드 의회가 논의하는 법안을 결정하는 위원회) 유지를 주장하여 스코틀랜드에서의 왕권을 잉글랜드보다 강화하려 했지만, 1689년 자코바이트 반란으로 인해 이러한 요구를 철회했다.[59]

5. 연합의 영향과 평가

G.N. 클락은 연합으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식민지와의 무역 자유"와 "시장의 큰 확장"이라는 이익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이 합의는 스코틀랜드 장로회의 영구적 지위와 별도의 법률 및 법원 시스템을 보장했다. 클락은 잉글랜드가 제공한 재정적 이익과 뇌물의 대가로, 스코틀랜드가 하노버 왕조 계승을 수용하고, 잉글랜드의 군사 안보를 위협하며 상업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던 힘을 포기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8세기 전쟁의 압도적인 성공이 두 국가의 통합에 크게 기인한다고 보았다.[24]

새뮤얼 존슨제임스 보스웰은 1773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스코틀랜드 서부 제도 여행''을 저술했는데, 존슨은 스코틀랜드가 "상업이 시간마다 확장되고 부가 증가하는 국가"이며, 특히 글래스고가 영국 최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고 기록했다.[25]

고드프리 크넬러(Godfrey Kneller)가 1708년에 그린 ''존 스미스(John Smith)의 초상화''. 스미스는 연합 협상 위원 중 한 명이었으며, 새로 통합된 의회에서 하원 의장을 역임했다. 그림에서 그는 연합 조약 사본을 들고 있다.


1707년 연합법으로 탄생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통합은 두 국가 간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단일 의회와 정부를 가진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다. 이는 유럽 대륙의 다른 국가들에게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 사건이었다.[1]

5. 1. 스코틀랜드에 미친 영향

G.N. 클락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식민지와의 무역 자유"와 "시장의 큰 확장"이라는 이익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이 합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구적 지위와 별도의 법률 및 법원 시스템을 보장했다. 클락은 잉글랜드가 제공한 재정적 이익과 뇌물의 대가로 스코틀랜드가 하노버 왕조 계승을 수용하고, 잉글랜드의 군사 안보를 위협하며 상업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던 힘을 포기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8세기 전쟁의 압도적인 성공이 두 국가의 통합에 크게 기인한다고 보았다.[24]

새뮤얼 존슨제임스 보스웰은 1773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스코틀랜드 서부 제도 여행''을 저술했는데, 존슨은 스코틀랜드가 "상업이 시간마다 확장되고 부가 증가하는 국가"이며, 특히 글래스고가 영국 최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고 기록했다.[25]

스코틀랜드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스마우트(Christopher Smout)에 따르면, 왕관의 연합 이전 스코틀랜드 경제는 영국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번영했으며, 양국 간 상호 작용은 거의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주요 무역 파트너는 유럽 대륙, 특히 네덜란드였다. 스코틀랜드는 네덜란드에 양모와 생선을 수출하고, 철, 향신료, 와인 등을 수입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대체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와의 동맹은 스코틀랜드에 특권을 부여하여 영국보다는 유럽 대륙과의 문화적, 경제적 유대를 강화했다. 1603년 연합은 제임스 국왕의 정치적, 왕조적 야망에 부합했지만, 스코틀랜드에는 경제적으로 해로웠다. 스코틀랜드의 수출품은 영국 경제와 거의 관련이 없었고, 스코틀랜드 비밀 의회는 내부 경제 정책을 관리했지만, 외교 정책은 영국의 손에 있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유럽 대륙과의 무역을 제한하고, 영국 전쟁에 휘말리게 했다.[26]

1620년대 프랑스,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스코틀랜드 경제는 이미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국의 내전은 특히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경제는 서서히 회복되었지만, 영국과의 무역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1680년대 스코틀랜드와 영국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했는데, 런던은 이를 자국의 지배적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유럽 대륙 열강과의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약화시켰고, 항해법은 스코틀랜드의 해상 무역 능력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여론은 영국이 스코틀랜드의 경제 확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26]

1707년까지 스코틀랜드 경제는 전쟁, 만성적 디플레이션, 산업 발전 부족으로 뒤처졌다.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주로 농업 사회였고, 인력 부족은 농업 생산량을 저조하게 만들어 기근으로 이어졌다. 스코틀랜드 지주들의 해외 상품 의존은 재정 자본 적자를 초래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해외 투자를 유치하여 이 문제에 대처하려 했다. 선박 건조 자재 관세 철폐, 제조 주식 세금 삭감, 섬유 및 리넨 제품 관세 철폐 등이 이루어졌다.[27]

스코틀랜드는 리넨 산업에 점점 의존했는데, 이는 농업 다음으로 큰 고용 창출원이었다. 유럽 대륙의 리넨 산업은 스코틀랜드를 압도했고, 스코틀랜드의 보호 무역 관세는 관세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스코틀랜드 리넨의 가장 큰 해외 시장이었지만, 영국은 스코틀랜드에 보복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경제적 대안을 모색해야 했다.[27] 당시 식민지와의 무역은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고, 목축 경제를 가진 스코틀랜드에 매력적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염소, 양 가죽 등 농산물 수요가 높았고, 이는 스코틀랜드에 귀중한 수입원이었다. 식민지 무역 추구와 영국과의 경쟁으로 인한 좌절감은 다리엔 계획 (다리엔 만에 스코틀랜드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실패한 시도)으로 이어졌다.[31]

이 계획은 영국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방해받았다. 동인도 회사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영국은 네덜란드와 함부르크의 투자를 막고 지원을 거부했다.[28] "함부르크 사건"에서 영국의 윌리엄 3세는 유럽 열강을 설득해 주식 매입을 포기하게 했다. 윌리엄은 다리엔에 대해 "스코틀랜드에서 잘못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불편을 방지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29] 다리엔 계획에 대한 영국의 조치는 동인도 회사 주가 하락, 자메이카 식민지 노동력 부족 우려, 가톨릭 스페인의 영토 주장 등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27]

다리엔 계획 실패는 스코틀랜드에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 높은 비용은 디플레이션을 악화시켰다.[27] 스코틀랜드 은행은 준비금이 부족했고, 1700년대 초 대규모 인출이 발생해 사업이 일시 중단되었다. 스코틀랜드 은행은 지불 능력을 유지했지만, 디플레이션과 낮은 준비금은 경제 불안감을 키웠다. 경제학자 아이다 라모스는 영국이나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다면 다리엔 계획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영국의 개입이 식민지 지배와 스코틀랜드 합병을 위한 확장 목표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28]

1703년까지 스코틀랜드 정부는 연합에 환멸을 느꼈고, 많은 이들은 스코틀랜드 경제 번영을 위해 영국과 분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존 클럭 오브 엘딘(John Clerk of Eldin)은 "스코틀랜드인들은 동료 영국인으로서의 권리뿐만 아니라 국제법에 따른 권리도 부인당했기 때문에 영국의 노예가 되었다"고 선언했고, 데이비드 블랙은 "영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거의 제공하지 않지만, 어떤 국가보다 더 우리를 착취한다"고 썼다. 반영국 감정은 1699년 글렌코 학살을 기획한 윌리엄 국왕 비난으로 이어졌고, 1703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영국 공격에 대응하는 법안을 채택했다. 첫 번째는 스코틀랜드 외교 정책 독립을 위한 평화와 전쟁에 관한 법이었다.[28] 스코틀랜드는 1704년 안전법으로 자치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영국의 보복을 불렀다. 스코틀랜드 장관들에게 뇌물이 제공되었고, 1705년 외국인법이 통과되었다. 외국인법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가 크리스마스까지 연합 협상 위원을 임명하지 않으면, 영국 내 모든 스코틀랜드인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재산이 몰수되고, 스코틀랜드 상품은 영국에서 금지된다. 크리스토퍼 스마우트는 영국이 스코틀랜드를 병합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고 지적한다.

이 법은 스코틀랜드에서 강력한 반영국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스코틀랜드 경제는 위기에 직면했고, 의회는 연합 찬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연합주의자들은 다니엘 디포(Daniel Defoe)가 이끌었고, 영국과의 무역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럽 대륙과의 무역은 이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경제가 영국과의 무역으로 생존할 수 있으며, 외국인법으로 인한 제재는 경제를 붕괴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디포에게 연합은 외국인법을 막고 추가 제한과 규정을 없애 스코틀랜드 번영을 가져올 것이었다. 반연합주의자들은 영국의 호의를 의심하고, 영국 협박에 굴복한 연합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가 네덜란드, 스페인, 노르웨이와의 무역으로 회복하고 산업을 다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연합이 스코틀랜드의 독립적 무역 정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경제 결함 제거 가능성을 없애고, 스코틀랜드를 "더 부유한 왕국의 단순한 위성"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26]

결국 스코틀랜드 장관들은 대중의 지지 부족에도 불구하고 연합에 찬성표를 던졌다.[14]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엘리트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연합 법안은 영국의 뇌물 덕분에 통과되었다고 생각했다.[30] 연합 이후 처음 몇십 년 동안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주요 무역 파트너가 아니었고, 다른 유럽 열강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연합 이후 최소 40년 동안 스코틀랜드는 전통적 무역 패턴을 유지했고, 경제 상황은 연합 직전처럼 심각하지 않았다.[31]

잉글랜드는 연합을 통해 정치적 정체성을 확장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흡수되는 형태로 정체성을 상실했다. 연합 초기 스코틀랜드 산업 발전이 기대되었지만, 경제 성장은 없었고 생산 수준은 여전히 낮았다. 경제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압박이 계속되었다. 연합 조약에서 보리맥아세(麦芽税) 인상을 금지했지만, 의회가 과세를 시도해 이 발생했다.[70] 이 폭동으로 증세는 보류되었지만, 아마세(亜麻税) 인상은 막을 수 없어 불만이 터져 나왔다. 스코틀랜드 귀족들도 연합에 환멸을 느꼈고, 과거 연합 지지 귀족이 귀족원에서 연합 폐지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 동의안은 대리 투표로 4표 차이로 부결되어 연합 왕국은 간신히 존속했다.

20세기 역사학자 조지 클라크는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그 식민지와의 자유 무역"을 얻고 장로교회와 법제 유지를 보장받았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뇌물 대가로 하노버 왕조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스코틀랜드의 군사적·무역적 위협 제거라는 이득을 보았다고 서술했다.[73] 영국의 18세기 성공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합병에서 비롯되었다고도 언급했다.[73]

샘유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은 1773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여 『스코틀랜드 서부 제도 여행』을 저술했는데, 존슨은 스코틀랜드 무역 번영을 기술했다.[74]

5. 2. 잉글랜드(그레이트브리튼)에 미친 영향

역사학자 G.N. 클락은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가 얻은 이점을 "측량할 수 없는 가치"라고 평가했다.[24] 잉글랜드는 하노버 왕조 계승을 보장받았고, 군사 안보 위협과 상업 관계의 복잡성을 야기했던 스코틀랜드의 힘을 포기시켰다.[24] 클락은 18세기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거둔 압도적인 성공이 두 국가의 통합에 크게 기인한다고 주장했다.[24]

새뮤얼 존슨은 1773년 제임스 보스웰과의 스코틀랜드 여행( ''스코틀랜드 서부 제도 여행''에 기록됨)에서 스코틀랜드가 "상업이 시간마다 확장되고 부가 증가하는 국가"이며, 특히 글래스고가 영국 최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고 기록했다.[25]

5. 3. 국제 사회에 미친 영향

1707년 연합법으로 탄생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통합은 두 국가 간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고, 단일 의회와 정부를 가진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다. 이는 유럽 대륙의 다른 국가들에게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 사건이었다.[1]

특히, 당시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등장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에서 보듯이,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 패권을 추구하고 있었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팽창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두 국가의 통합은 이러한 견제 능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1]

또한, 연합은 국제 무역과 식민지 경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잉글랜드는 이미 강력한 해군력과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와의 통합으로 더욱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네덜란드와 같은 다른 해양 강국들과의 경쟁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2]

그러나 연합이 모든 국제 관계에서 긍정적인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연합에 대한 반발이 여전히 존재했고, 이는 재커바이트 봉기(1715, 1745)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대외 정책에 제약을 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23]

6. 300주년 기념 행사

2007년 영국에서 발행된 2파운드 기념주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합병 300주년을 기념한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합병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 2파운드 주화가 발행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 의회 총선거 이틀 전인 2007년 5월 3일에 이루어졌다.[32]

스코틀랜드 정부는 연중 다수의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스코틀랜드 고대 및 역사 유적 왕립 위원회가 주도하는 교육 프로젝트를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에서 합병과 관련된 물건과 문서를 전시하고,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에서 합병과 관련된 인물들의 초상화를 전시했다.[33][76]

7. 아일랜드 문제

1707년 연합법에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수도는 런던으로 정해졌고, 연합 왕국 의회의 의사당은 잉글랜드 의회가 열렸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결정되었다.[80] 그러나 동군연합이었던 아일랜드 왕국은 이 연합에서 제외되었다.[81]

아일랜드는 같은 군주 아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일랜드는 의회에 대표되지 않는 별개의 왕국으로 남았고, 1783년 포기 법령까지 법적으로 대영제국에 종속되었다.

1707년 7월, 아일랜드 의회는 앤 여왕에게 축하 연설을 전달하며 "하나님께서 폐하의 왕위에 더 큰 힘과 영광을 더욱 포괄적인 연합으로 더하도록 폐하의 왕실 마음에 넣어주시기를" 기원했다.[15][16]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고, 대영제국과 아일랜드 간의 동등한 연합은 1790년대까지 고려되지 않았다. 아일랜드와의 연합은 마침내 1801년 1월 1일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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