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 대평원 천연두 유행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837년 대평원 천연두 유행은 1837년 미국 모피 회사의 증기선 SS '세인트 피터' 호가 미주리 강을 따라 운항하면서 대평원 지역에 천연두가 급속도로 퍼진 사건이다. 이 유행으로 인해 미주리 계곡 주변에서 17,000명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하고, 일부 부족은 생존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인구가 급감했다. '세인트 피터' 호의 격리 실패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며, 백신 접종의 부족과 미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 또한 피해를 키웠다. 이 유행은 원주민 사회의 권력 구조를 변화시켰으며, 고의적인 전염 의혹과 관련된 논란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1837년 대평원 천연두 유행 | |
---|---|
개요 | |
질병 | 천연두 |
발생 시기 | 1837년 |
발병 원인 | 미주리 강의 증기선 |
사망자 수 | 17,000명 이상 |
2. 천연두의 전파와 아메리카 원주민
천연두는 감염된 사람과의 직접 접촉이나 오염된 물건을 통해 전파되는 전염성이 매우 높은 질병이었다.[4]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이전에 천연두에 노출된 경험이 없어 면역력이 부재했고, 이로 인해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천연두는 원주민 사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28][6] 특히 유럽인과의 접촉이 늦었던 대평원 지역 공동체는 더욱 취약했다.[6]
1796년 에드워드 제너에 의해 백신이 개발되었지만,[8] 아메리카 원주민, 특히 대평원 지역 부족들에게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세기 초부터 산발적인 접종 노력이 있었고 1832년 미국 의회에서 1832년 인도 백신법이 통과되었으나,[11][29] 정부의 실제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당시 전쟁 장관 루이스 카스는 미주리강 상류 부족들에 대한 백신 접종 확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는데,[11] 이는 원주민 보호보다 모피 무역 등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인디언 담당 위원 엘버트 헤링이 천연두 확산의 책임을 원주민에게 돌리는 듯한 보고서를 제출한 것도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11]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많은 원주민이 백신 접종을 받지 못한 채 천연두의 위협에 노출되었고, 이는 1837년 대규모 유행병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8][29]
2. 1. 초기 전파
아메리카 대륙의 천연두에 대한 최초 기록은 1515년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에게 전염시킨 것이다.[29][5]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전에 천연두에 노출된 경험이 없어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28][6] 특히 북아메리카 내륙 대평원 지역은 유럽 정착민과의 접촉이 늦어 유럽 병원균에 대한 자연 면역력이 거의 없었기에 천연두는 더욱 치명적이었다.[6]1730년대에 천연두는 캐나다와 미국 북부를 거쳐 서쪽으로 확산되었다.[28][7] 이 병으로 인해 아시니보인족은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통제하던 지역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7] 미주리강 유역에서는 아리카라족의 인구가 1730년대 말까지 절반으로 줄었다.[28][7] 같은 시기 천연두로 큰 피해를 입거나 소멸된 다른 공동체로는 로우어 루프(닙묵), 네브래스카의 포니족, 체로키, 칸사족 등이 있다.[28][7]
이후에도 천연두는 계속 확산되어, 1780년부터 1781년 사이에는 만단족이 큰 피해를 입어 인구가 수천 명 이하로 급감하기도 했다.[30][9] 미주리강 유역의 다른 많은 부족들도 1801년-1802년과 1831년에 천연두 유행병으로 고통받았다.[10]
2. 2. 1837년 대평원 유행
1837년, 아메리카 모피 회사(American Fur Company) 소속 증기선 SS ''세인트 피터''가 천연두에 감염된 사람들을 싣고 미주리강을 따라 운항하면서 대평원 지역에 치명적인 천연두 유행이 시작되었다.[27][13] 이 유행은 1840년까지 캘리포니아, 태평양 북서부, 알래스카 중부까지 확산되었으며,[12] 미주리강 유역에서만 최소 17,000명 이상의 인디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8][7]유행의 시작과 확산1837년 4월 29일경, SS ''세인트 피터''는 캔자스주 리븐워스에 도착했다. 이때 배의 갑판원 한 명이 천연두 증상을 보였다.[14] 얼마 후, 만단족 공동체로 돌아가던 아리카라족 여성 세 명이 배에 탑승했는데, 이들도 감염 증상을 보였지만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면서 만단족에게 병을 옮기게 되었다.[14] 이때 퍼진 천연두는 특히 치명적인 악성 출혈성 형태였다.[3]
1837년 7월, 약 2,000명이었던 만단족 인구는 10월에는 생존자가 23명에서 138명 사이로 급감하여, 사망률이 최소 93%에 달했다.[15] 포트 클라크의 모피 상인 프랜시스 샤르돈(Francis Chardon)은 8월 11일 일지에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어나가 죽은 이들의 수를 기록할 수조차 없다"고 적었으며, 그달 말에는 "만단족은 스물세 명의 젊은이와 노인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고 기록했다.[16] 그는 또한 "문명 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불쌍한 만단족과 다른 인디언들만 걸려서 죽었을 뿐이었다"고 덧붙였다.[27]
천연두는 포트 유니온에 도달하여 아시니보인족에게 퍼져나갔다. 모피 상인들은 원주민들의 요새 출입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감염은 시작된 후였다.[7][17][18] 포트 유니온의 책임자였던 홀시(Halsey)는 원주민들의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고 기록했다.[19] 이후 마리아스 강을 통해 포트 맥켄지로 병이 옮겨가 그곳의 블랙풋 부족에게 확산되었다. 유행은 대평원 전역으로 퍼져나가 1840년까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피해 규모와 참상이 유행으로 블랙풋 인구의 3분의 2, 아시니보인족과 아리카라족의 절반, 크로우족의 3분의 1, 파니족의 4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6] 포트 유니온의 한 상인은 시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생긴 악취가 "요새에서 약 274.32m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시신을 구덩이에 묻거나 강에 던졌기 때문에, 시신 자체가 지속적인 감염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6] 1839년 인디언 관리국 국장은 피해 규모에 대해 "사망자에 대하여 집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설령 세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 부족들의 사망자 수를 정확하게 셀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32]
대응의 차이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거의 없어 매우 취약했다.[28] 1796년 백신이 개발되었지만,[31] 1837년 유행 당시까지도 대평원 지역 원주민 대부분은 접종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 미국 정부와 아메리카 모피 회사: 미국 정부는 1832년 인디언 예방 접종법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평원 지역 원주민들에 대한 신속한 예방 접종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인디언 관리국은 필요한 정보망이나 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며, 이를 구축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8] 아메리카 모피 회사는 상인들의 백신 요청을 거부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8]
- 허드슨 만 회사(HBC): 캐나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허드슨 만 회사는 훨씬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질병 확산 소식을 접한 즉시, 회사는 자체 정보망을 활용하여 각 지점에 백신을 공급하고 적극적으로 접종을 시행했다. 원주민 인구 감소가 모피 교역 이익 감소로 이어진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작용했다.[6] HBC 직원과 훈련된 원주민들이 수행한 예방 접종은 캐나다 지역에서 천연두 확산을 제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 유행 이후에도 HBC는 예방 접종 프로그램을 지속했지만, 접종을 위해 지역 사회에 들어간 사람들이 다른 질병을 함께 옮기는 부작용도 발생했다.[7]
결과 및 영향1837년 천연두 유행은 대평원 원주민 사회의 권력 구조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백신 접종을 받지 못한 아시니보인족과 니이치타피족(블랙풋)은 인구와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특히 인구 밀집 지역의 피해가 컸다. 이들은 유행 이후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7] 반면, 허드슨 만 회사의 예방 접종 혜택을 본 소토족이나 평원 크리족 등 일부 부족은 다른 부족들이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20][6]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공동체에 합류하면서 부족 간의 민족적 배경이 융합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20]
3. 백신 도입과 한계
1796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비교적 가벼운 질병인 우두를 이용하여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얻는 방법을 발견하여 세계 최초의 백신을 개발했다.[8] 유럽에서 백신 사용이 점차 확산되면서,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인물들은 북미 지역에서의 백신 보급을 생명 보호 수단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8]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백신이 효과적으로 보급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백신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유통하는 데 문제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1830년대에 이르러서도 원주민 인구 중 상당수는 여전히 백신 접종을 받지 못했다.[8][31] 특히 미국 남서부 지역의 원주민들에게는 백신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8][31]
19세기 초부터 원주민들 사이에서 백신 접종을 장려하려는 노력이 일부 있었고,[11] 1832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1832년 인도 백신법이 통과되기도 했다.[11][29] 하지만 이는 실질적인 대규모 접종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미국 정부의 지원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캐나다 지역에서 활동하던 허드슨 만 회사 역시 초기에는 백신 접종 노력이 산발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했다.[8] 이러한 백신 보급의 한계는 결국 많은 원주민이 천연두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3. 1. 미국의 대응
19세기 초부터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천연두 백신 접종을 장려하려는 노력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11] 미국 의회는 1832년 인도 백신법을 통과시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백신 접종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11][29] 그러나 이 법의 통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실제 원주민들에 대한 백신 접종에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9]법안 통과 직후, 당시 전쟁 장관이었던 루이스 카스는 아리카라족을 포함한 미주리강 상류 지역 부족들의 백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아리카라족 너머 지역으로 의사를 파견하여 원주민에게 백신을 접종하려는 어떤 노력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정은 카스가 원주민의 생명과 건강 보호보다는 미주리강 유역의 모피 무역로 확보 및 유지에 더 큰 관심을 두었음을 보여준다.[11]
카스의 이러한 결정에는 인디언 담당 위원 엘버트 헤링의 보고서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헤링은 1832년 의회와 전쟁 장관에게 제출한 연례 보고서에서 대평원의 치페와족(아리카라족의 이웃 부족)이 프랑스 및 영국 상인과의 교류를 통해 천연두를 퍼뜨렸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원주민에게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11] 결국 미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와 무관심 속에서 수많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백신 접종의 기회를 얻지 못했고, 이는 이후 1837년 대평원 천연두 유행과 같은 비극을 막지 못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백인 미국인들의 서부 이주와 정착은 계속되었다.
3. 2. 허드슨 만 회사의 대응
허드슨 만 회사(HBC)는 1837년 천연두 유행 당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을 보여주었다.[6] 질병 확산에 대한 소문은 원주민 인구 감소가 모피 무역 이익 감소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상인들의 신속한 행동을 촉발했다.[6] HBC는 뛰어난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고, 각 지점에 백신을 비축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백신을 접종하려는 의지가 있었다.[6] 이러한 요소 덕분에 HBC의 노력은 미국 정부나 아메리카 모피 회사의 미미한 대응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8][6]HBC 직원들과 훈련받은 원주민이 직접 수행한 예방 접종은 캐나다 지역에서 천연두 확산을 제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 유행 이후 HBC는 자사 영토 전역에 걸쳐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천연두로 인한 사망자를 더욱 줄였다.[7]
그러나 이러한 백신 접종 과정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했다. 천연두 예방 접종을 위해 외부인이 원주민 공동체에 들어오면서, 천연두 외에 다른 질병들도 함께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천연두 사망자는 줄었지만 전체적인 사망률은 여전히 높게 유지되었다.[7]
HBC의 백신 접종 노력은 주로 모피를 생산하는 인구 집단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평원 크리족이나 소토족과 같이 HBC의 예방 접종 혜택을 받은 부족들은 유행으로 인해 다른 부족들이 쇠퇴하는 동안 오히려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20][6]
4. 고의 전염 의혹과 논란
1837년 대평원 천연두 유행 과정에서 미국 육군이 의도적으로 바이러스에 오염된 담요를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제공하여 질병을 퍼뜨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2][23] 일부 학자들은 당시 미국 정부의 소위 '인디언 문제' 처리 방식과 연관 지어 이러한 생물학적 공격 가능성을 제기하며, 특히 평원 부족을 대상으로 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2] 학자 워드 처칠 등은 특정 원주민 구전 기록 등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23] 당시 참상을 겪은 만단족 추장 포 베어스는 백인들이 질병을 가져왔다고 강하게 비난하며 복수를 촉구했지만, 이것이 담요 등을 이용한 '고의적인' 공격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24][25][15][26]
그러나 다수의 역사학자는 천연두 확산의 직접적인 원인을 미주리 강을 운항하던 증기선 ''세인트 피터''호의 부주의한 격리 실패로 보며, 고의 전파설에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다.[7][3] 또한 미국 모피 회사(AFC)와 같은 민간 기업 입장에서 주요 교역 대상인 원주민 인구의 급감은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므로, 의도적으로 질병을 퍼뜨릴 동기가 부족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7] 한편, '원주민이 감염된 담요를 훔쳐 병을 퍼뜨렸다'는 당시의 이야기는 백인 정착민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 꾸며낸 것으로 여겨진다.[25][21] 일부 연구자들은 고의성 입증은 어렵더라도, 감염 의심자에 대한 미흡한 관리와 격리 실패가 수많은 원주민의 죽음을 초래한 중대한 과실이라고 비판한다.[25]
4. 1. 의혹 제기
일부 학자들은 1836년부터 1840년 사이의 천연두 유행 확산이 의도적이었다고 주장한다.[22][23] 인류학자 앤 F. 라메노프스키(Ann F. Ramenofsky)에 따르면, 천연두 바이러스는 의류나 담요와 같은 오염된 물건을 통해 전염될 수 있으며, 19세기 미국 육군은 소위 '인디언 문제'를 통제하기 위해 이러한 오염된 담요를 아메리카 원주민, 특히 평원 부족에게 의도적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22] 학자 워드 처칠(Ward Churchill) 역시 비슷한 주장을 제기했다. 처칠의 연구에 대한 대학 조사에서는 "미국 육군이 의도적으로 천연두를 퍼뜨렸다는 그의 일반적인 주장을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그 상황에 관련된 인디언들이 남긴 초기 기록과 특정 원주민 구전 전통이 그러한 해석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덧붙였다.[23]당시 정착민에 대한 원주민들의 불신은 깊었다. 이전에는 백인들을 형제처럼 대했던 만단족 추장 포 베어스(Four Bears)는 자신의 부족에게 질병을 가져온 백인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아내와 자녀들을 천연두로 잃고 자신마저 병에 걸리자, 1837년 7월 30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연설을 통해 아리카라족과 살아남은 만단족 사람들에게 "모두 일어나 그들 중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호소했다.[24][25][15] 그러나 포 베어스가 담요나 군대의 개입, 혹은 천연두 전파의 '고의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기록은 없다.[26]
4. 2. 반론과 한계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1837년 봄의 천연두 확산이 미주리 강을 오가던 증기선 ''세인트 피터''호의 격리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서부 캐나다 원주민 관계 연구가인 제임스 대시크(James Daschuk)는 당시 정착민과 기업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1836년에서 1840년 사이의 천연두 확산이 의도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발병의 시작이 ''세인트 피터''호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7] 또한, 미국 모피 회사(AFC)가 발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의도적으로 병을 퍼뜨리는 것은 회사에 재정적으로도 이득이 되지 않았다. AFC는 1830년대 초 원주민과의 교역 증가로 이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 인구 감소는 모피 거래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었다.[7] 49번째 위도 북쪽 지역에서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대응이 발병 이후 전염병 확산을 제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14]1836-40년 천연두 유행의 구체적인 책임 소재는 여전히 논쟁거리이지만, 학자들은 ''세인트 피터''호에서 질병이 발견된 후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이 유행 확산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3] R. G. 로버트슨은 그의 저서 ''썩어가는 얼굴: 천연두와 아메리카 원주민''에서, 감염 의심자들을 격리하려 하지 않은 프랫을 유행 확산의 책임자로 지목했다. 로버트슨은 "계획적인 집단 학살에 대한 유죄는 아니지만... 그는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에 기여한 죄가 있다. 법은 그의 범죄를 과실로 부른다. 그러나 모든 죽음, 만단족의 거의 완전한 소멸, 그리고 이 지역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고통을 감안할 때, 과실이라는 꼬리표는 너무 가벼우며,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행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25]
당시 퍼졌던 이야기 중 하나는 한 아메리카 원주민이 ''세인트 피터''호에 몰래 들어가 감염된 승객의 담요를 훔쳐 나와 병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러 변형이 존재하며, 역사학자들과 동시대 사람들 모두 이것이 백인 정착민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 즉 날조라고 비판한다.[25] B. A. 만(Mann) 역시 "담요 사건은 나중에 만들어졌으며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21]
일부 학자들은 1836-40년 유행의 확산이 의도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앤 F. 라메노프스키는 "''바리올라 메이저''(천연두 바이러스)는 의류나 담요 같은 오염된 물건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 19세기 미국 육군은 '인디언 문제'를 통제하기 위해 오염된 담요를 특히 평원 부족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보냈다"고 주장했다.[22] 워드 처칠 역시 비슷한 주장을 제기했다. 하지만 처칠의 연구에 대한 대학 조사에서는 "미국 육군이 의도적으로 천연두를 퍼뜨렸다는 그의 일반적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그 상황에 관련된 인디언들이 한 말에 대한 초기 기록과 특정 원주민 구전 전통이 그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23] 즉, 의도적인 전파설은 명확한 물증보다는 정황적 증거나 구전 기록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
정착민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당시 상황에서, 만단족의 추장 포 베어스는 자신의 부족에게 질병을 가져온 백인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아내와 자녀를 천연두로 잃고 자신도 병에 걸린 그는, 죽기 직전인 1837년 7월 30일, 아리카라족과 만단족 전사들에게 백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촉구하는 마지막 연설을 남겼다.[24][25][15] 그러나 포 베어스의 연설에는 백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드러나 있지만, 담요나 군대에 의한 의도적인 전파 등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26] 이는 당시 원주민들이 겪었던 참상과 백인에 대한 깊은 불신을 보여주지만, 천연두 전파가 명백히 '의도적'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5. 유행의 결과와 영향
1837년 대평원 천연두 유행은 해당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미주리강 유역에서만 최소 17,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7] 일부 부족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28] 당시 포트 클라크의 상인 프랜시스 샤르돈은 "너무 빨리 죽어서 죽은 사람들을 기록할 수 없다"고 기록했으며,[16] "문명 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불쌍한 만단족과 다른 인디언들만 걸려서 죽었을 뿐이었다"고 덧붙였다.[27] 1839년 인디언 사무국장은 피해가 너무 커 "사망자에 대하여 집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보고할 정도였다.[32]
이 유행으로 인한 주요 부족별 피해 규모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15][16]
부족 | 추정 사망률 또는 피해 규모 |
---|---|
만단족 | 최소 93% 사망 (인구 약 2,000명 → 23~138명 생존) |
블랙풋 연맹 | 인구의 약 2/3 사망 |
아시니보인족 | 인구의 약 1/2 사망 |
아리카라족 | 인구의 약 1/2 사망 |
크로우족 | 인구의 약 1/3 사망 |
파니족 | 인구의 약 1/4 사망 |
시신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포트 유니온 근처에서는 "요새에서 약 274.32m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의 악취"가 났다는 보고도 있었는데, 이는 제대로 매장되지 못하고 구덩이나 강에 버려진 시신들이 지속적인 감염원이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6]
이러한 인구 급감은 원주민 사회 구조 자체를 뒤흔들었다. 많은 공동체가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부족이나 공동체에 흡수되면서 민족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다.[20]
유행병에 대한 대응은 각 주체별로 달랐다. 미국 정부는 1832년 인도 백신법을 제정했음에도 실질적인 예방 접종 노력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11] 당시 전쟁 장관 루이스 카스는 아리카라족 너머 미주리강 상류 부족들의 백신 요청을 명백히 거부했으며,[8] 이는 원주민 보호보다는 모피 무역로 확보에 더 관심이 있었던 당시 미국 정부의 태도를 보여준다. 인디언 사무국 역시 평원 지역 원주민들에게 신속하게 백신을 접종할 네트워크나 정보가 부족했고, 이를 구축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8] 아메리카 모피 회사 역시 상인들의 백신 요청을 외면했다.[8]
반면, 허드슨 만 회사(HBC)는 상대적으로 효과적인 대응을 보였다. 원주민 인구 감소가 모피 교역 이익 감소로 이어진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HBC는 자사의 정보망과 지점을 활용하여 백신을 공급하고 접종을 시행했다.[6][8] 이러한 노력은 캐나다 지역에서 천연두 확산을 제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 HBC는 유행 이후에도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지속했지만, 백신 접종을 위해 외부인이 원주민 공동체에 들어오면서 다른 질병이 함께 퍼지는 부작용도 있었다.[7]
결과적으로 천연두 유행과 이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은 대평원 지역 부족들의 세력 판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신 접종 기회를 얻지 못한 아시니보인족과 블랙풋 연맹 등은 인구와 영토가 크게 줄어들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거주하여 피해가 더 컸다.[7] 반면, 허드슨 만 회사의 백신 접종 정책을 활용할 수 있었던 평원 크리족과 소토족 같은 일부 부족은 다른 부족들이 후퇴하는 동안 오히려 세력을 확장하고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20][6]
이 유행은 1840년경 잦아들었지만, 그 영향은 미주리강 유역을 넘어 캘리포니아, 태평양 북서부, 알래스카 중부까지 광범위하게 미쳤다.[12]
6. 증상
대평원의 여러 부족들은 천연두를 "썩어가는 얼굴"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사람의 몸과 얼굴 전체를 뒤덮는 광범위한 피부 발진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발진은 처음에는 희미하고 평평한 반점으로 나타나다가, 점차 솟아오른 덩어리로 발전하고 결국 액체로 채워진 딱지가 되는 과정을 거쳤다. 피부 증상 외에도 두통, 요통, 극심한 복통, 설사, 구토와 같은 여러 전신 증상이 동반되었다.
참조
[1]
서적
"Rationalizing Epidemics: Meanings and Uses of American Indian Mortality Since 1600"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2]
웹사이트
"Mandan ! History, Traditions, & Facts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4-26
[3]
서적
"The Effect of Smallpox on the Destiny of the Amerindian"
University of Minnesota
1945
[4]
논문
"The High Plains Smallpox Epidemic of 1837-38"
https://www.jstor.or[...]
1977
[5]
서적
"The Effect of Smallpox on the Destiny of the Amerindian"
University of Minnesota
1945
[6]
서적
"Clearing the Plains disease, politics of starvation, and the loss of Aboriginal life"
University of Regina Press
2013
[7]
서적
"Clearing the Plains disease, politics of starvation, and the loss of Aboriginal life"
University of Regina Press
2013
[8]
논문
"Averting Disaster: The Hudson's Bay Company and Smallpox in Western Canada during the Late Eighteenth and Early Nineteenth Centuries"
2004-09-08
[9]
서적
"Encyclopedia of plague & pestilence"
Facts On File
2007
[10]
서적
"The Effect of Smallpox on the Destiny of the Amerindian"
University of Minnesota
1945
[11]
서적
"Princes and peasants : smallpox in history"
Minn.
1983
[12]
서적
"The Effect of Smallpox on the Destiny of the Amerindian"
University of Minnesota
1945
[13]
서적
"The Plains Sioux and U.S. colonialism from Lewis and Clark to Wounded Kne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14]
논문
"The High Plains Smallpox Epidemic of 1837–38"
https://academic.oup[...]
1977-01-01
[15]
서적
"Encyclopedia of Plague and Pestilence: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16]
서적
"First Peoples: A Documentary History of American History"
Bedford/St. Martin's
[17]
서적
"The Canadian fur trade in the industrial age"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0
[18]
논문
"The High Plains Smallpox Epidemic of 1837–38"
https://academic.oup[...]
1977-01-01
[19]
서적
"Chardon's Journal at Fort Clark, 1834-1839"
Books for Libraries Press
1932
[20]
서적
"Aboriginal Resource-Use in Canada: Historical and Legal Aspects"
University of Manitoba Press
[21]
서적
"The Tainted Gift: The Disease Method of Frontier Expansion"
ABC-CLIO
2009
[22]
서적
"Vectors of Death: The Archaeology of European Contact"
University of New Mexico Press
[23]
웹사이트
"Report of the Investigative Committee of the Standing Committee on Research Misconduct"
http://www.colorado.[...]
University of Colorado at Boulder
2006-05-09
[24]
서적
"Great Speeches by Native Americans"
[25]
서적
"Rotting Face: Smallpox and the American Indian"
https://archive.org/[...]
Caxton Press
2001
[26]
문서
"Did the U.S. Army Distribute Smallpox Blankets to Indians? Fabrication and Falsification in Ward Churchill's Genocide Rhetoric"
https://quod.lib.umi[...]
[27]
서적
"Rationalizing Epidemics: Meanings and Uses of American Indian Mortality Since 1600;"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28]
서적
"Clearing the Plains : disease, politics of starvation, and the loss of Aboriginal life"
https://www.worldcat[...]
University of Regina Press
2013
[29]
서적
"The Effect of Smallpox on the Destiny of the Amerindian"
University of Minnesota
1945
[30]
서적
"Encyclopedia of plague and pestilence :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https://www.worldcat[...]
Facts on File
2008
[31]
간행물
"Averting disaster: the Hudson's Bay Company and smallpox in western Canada during the late eighteenth and early nineteenth centuries"
https://www.ncbi.nlm[...]
2004
[32]
서적
"The Effect of Smallpox on the Destiny of the Amerindian"
University of Minnesota
194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