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영국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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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6년 영국 총선은 자유무역 문제, 보어 전쟁의 여파, 사회 개혁 요구, 교육법 논란 등 여러 요인으로 보수당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가운데 치러졌다. 선거 결과, 자유당이 48.9%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며 397석을 확보했고, 보수당과 자유연합당은 43.4%의 득표율에도 156석을 얻는 데 그쳤다. 노동당은 29석, 아일랜드 의회당은 82석을 차지했다. 이 선거는 노령 연금, 최저임금, 국민 예산, 노동거래소 도입, 국민보험법 등 다양한 사회 개혁 입법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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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영국 총선 | |
---|---|
지도 및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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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1906년 영국 총선 |
국가 | 영국 |
선거 유형 | 의회 |
선거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00년 영국 총선 |
이전 선거 연도 | 1900년 |
이전 선거 의원 목록 | 1900년 영국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 목록 |
다음 선거 | 1910년 1월 영국 총선 |
다음 선거 연도 | 1910년 1월 |
선출 의석 | 670석 (하원) |
과반 의석 | 336석 |
선출된 의원 목록 | 1906년 영국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 목록 |
선거일 | 1906년 1월 12일 - 2월 8일 |
투표율 | 83.2% ( 8.1%p) |
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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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 헨리 캠벨배너먼 |
당대표 취임일 | 1898년 12월 |
소속 정당 | 자유당 |
당대표 선거구 | 스털링 버그스 |
이전 선거 의석 | 183석, 45.1% |
의석수 | 397석 |
의석 변동 | 214 |
득표수 | 2,565,644 |
득표율 | 48.9% |
득표율 변동 | 3.8%p |
보수당 및 자유연합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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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 아서 밸푸어 |
당대표 취임일 | 1902년 6월 11일 |
소속 정당 | 보수당 및 자유연합당 |
당대표 선거구 | 맨체스터 이스트 (낙선) |
이전 선거 의석 | 402석, 50.2% |
의석수 | 156석 |
의석 변동 | 246 |
득표수 | 2,278,076 |
득표율 | 43.4% |
득표율 변동 | 6.8%p |
노동대표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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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 키어 하디 |
당대표 취임일 | 1900년 2월 28일 |
소속 정당 | 노동대표위원회 (1900년) |
당대표 선거구 | 머서 티드필 |
이전 선거 의석 | 2석, 1.3% |
의석수 | 29석 |
의석 변동 | 27 |
득표수 | 254,202 |
득표율 | 4.8% |
득표율 변동 | 3.5%p |
아일랜드 의회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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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표 | 존 레드먼드 |
당대표 취임일 | 1900년 2월 6일 |
소속 정당 | 아일랜드 의회당 |
당대표 선거구 | 워터포드 시티 |
이전 선거 의석 | 77석, 1.8% |
의석수 | 82석 |
의석 변동 | 5 |
득표수 | 33,231 |
득표율 | 0.6% |
득표율 변동 | 1.2%p |
총리 정보 | |
직책 | 총리 |
선거 전 총리 | 헨리 캠벨배너먼 |
선거 전 소속 정당 | 자유당 |
선거 후 총리 | 헨리 캠벨배너먼 |
선거 후 소속 정당 | 자유당 |
2. 선거 배경
1895년 영국 총선 이후 아서 발푸어가 이끄는 보수당과 자유연합당 연합정부가 영국을 통치해왔다. 발푸어는 1902년부터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1905년 12월 5일, 지지도가 계속 하락하자 사임했다.[4] 그는 총선을 치르는 대신 자유당 정부 하에서 당내 분열이 재현되어 다음 총선에서 보수당이 다시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4]
그러나 새로 들어선 헨리 캠벨-배너먼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 정부는 보수당 정부의 인기 하락을 이용하여 한 달 후인 1906년 1월 12일에 즉각 총선을 실시했고, 이는 보수당의 압도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2. 1. 보수당 정부의 위기
아서 발푸어가 이끌던 보수당과 자유연합당 연합정부는 1895년 총선 이후 영국을 통치해왔다. 그러나 아서 발푸어는 1902년부터 1905년 12월 5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점차 지지도가 하락하면서 사임을 결정했다.[4] 발푸어는 총선을 통해 자유당 정부 하에서 당내 분열이 재현되어, 다음 총선에서 보수당이 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4]1895년부터 1905년까지의 연합정부는 자유무역 문제로 인해 심각한 분열을 겪었고, 이는 곧 다가올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1903년 5월, 조지프 체임벌린은 영국 산업을 외국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세 개혁을 주장하며 정부에서 사퇴하는 사건으로 이러한 분열은 정점에 달했다. 이러한 분열은 자유무역이 생활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자유당의 자유무역 신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4]
자유당은 자유무역 문제를 선거 운동의 핵심 쟁점으로 삼았고, 자유당 정부 하에서는 '큰 빵', 보수당 정부 하에서는 '작은 빵'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또한 식량 가격 상승에 대한 유권자들의 우려를 자극하는 다양한 포스터를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는 "밸푸어와 체임벌린은 자유무역에 반대하여 연합했습니다... 보수당의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라는 문구를 담고 있었다.[5]
보어 전쟁 또한 보수·연합 정부의 인기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긴 2년 반 이상 지속되었고, 2만 명이 넘는 남녀노소가 열악한 위생 상태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강제 수용소의 존재에 대한 세부 사항이 밝혀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전쟁은 1900년대 초 영국의 열악한 사회 현실을 드러냈다. 보어 전쟁 참전을 위한 군 복무 지원자의 40% 이상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맨체스터에서는 징집된 1만 1천 명 중 8천 명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탈락했다. 1902년 라운트리의 요크 빈곤 연구에서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보수·연합 정부가 소홀히 했던 사회 개혁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6]
보수·연합 총리였던 아서 밸푸어는 남아프리카에서 중국계 노예 노동을 사용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국인 참조)한 '중국 노예' 문제로 비난을 받았다.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 보수당 중산층 지지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노동 계급 또한 이러한 관행에 반대했는데, 이는 백인의 남아프리카 이민이 영국의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
비국교도들은 보수당이 1902년 교육법을 통과시킨 것에 분노했다. 이 법은 자발적 학교를 국가 시스템에 통합하고 지방세로 지원하도록 했으며, 지방 학교위원회는 폐지되고 주 또는 군 시의회를 기반으로 한 지방 교육 당국으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파산 직전에 있던 성공회 학교는 모든 사람이 납부해야 하는 지방세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8] 이에 대한 저항으로 지방세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9] 학교 제도는 1906년 자유당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비국교도 보수당원들이 기존 정당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자유당에 투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당은 승리 이후 공정한 대우에 대한 요구를 인식하고도 1902년 법을 폐지하거나 수정하지 않았다.[10]
보수당이 비국교도의 표를 잃게 만든 또 다른 문제는 1904년 주류 규제법이었다. 이 법은 여관 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양조업자들이 스스로 납부해야 하는 기금을 통해 면허 취소에 대한 보상을 제안했다.[8] 이는 절주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양조업자 법안"으로 규탄하게 만들었고, 양조업자들 또한 대체로 불만을 품었다.[11]
2. 2. 자유당의 부상
아서 발푸어가 이끌던 보수당과 자유연합당 연합정부는 1895년 총선 이후 영국을 통치해왔다. 그러나 아서 발푸어는 1902년부터 1905년 12월 5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했지만, 점차 인기가 하락하여 사임했다.[4] 발푸어는 총선을 통해 자유당 정부 하에서 당내 분열이 재현되어 다음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4]새로 들어선 자유당 정부는 보수당 정부의 인기 하락을 이용하여 1906년 1월 12일에 즉각 총선을 실시했고, 이는 보수당의 압도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1895년부터 1905년까지의 연합정부는 자유무역 문제로 심각하게 분열되었는데, 이는 곧 선거에서 불리한 요소가 되었다. 1903년 5월 조지프 체임벌린이 영국 산업을 외국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세 개혁을 주장하며 정부를 사퇴하면서 이러한 분열은 절정에 달했다.[4] 자유당은 자유무역이 생활비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유무역 문제를 선거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4] 자유당은 '큰 빵(자유당 정부)', '작은 빵(보수당 정부)'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식량 가격 상승에 대한 유권자들의 우려를 경고하는 다양한 포스터를 제작했다.[5]
보어 전쟁 또한 보수·연합 정부의 인기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예상보다 긴 2년 반 이상 지속되었고,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열악한 위생 상태로 사망한 강제 수용소의 존재가 밝혀졌다.
전쟁은 1900년대 초 영국의 열악한 사회 상태를 드러냈다. 보어 전쟁 군 복무 지원자의 40% 이상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맨체스터에서는 징집된 1만 1천 명 중 8천 명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거부당했다. 1902년 시봄 라운트리의 요크 빈곤 연구에서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보수·연합 정부가 소홀히 했던 사회 개혁 요구가 증가했다.[6]
아서 밸푸어는 남아프리카에서 중국계 노예 노동을 사용하는 '중국 노예' 문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국인 참조)로 비난받았다.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 보수당 중산층 지지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노동 계급 또한 백인의 남아프리카 이민이 영국의 실업자를 위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에 반대했다.[7]
비국교도들은 보수당이 1902년 교육법을 통과시킨 것에 분노했다. 이 법은 자발적 학교를 국가 시스템에 통합하고 지방세로 지원하도록 했으며, 지방 학교위원회를 폐지하고 주 또는 군 시의회를 기반으로 한 지방 교육 당국으로 대체했다. 파산 직전에 있던 성공회 학교는 모든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지방세로부터 자금을 받게 되었다.[8] 비국교도들은 지방세 납부를 거부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9] 학교 제도는 1906년 자유당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비국교도 보수당원들이 기존 정당을 처벌하고 자유당에 투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당은 승리 후 1902년 법을 폐지하거나 수정하지 않았다.[10] 보수당이 비국교도의 표를 잃게 만든 또 다른 문제는 1904년 주류 규제법이었다. 이 법은 여관 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양조업자들이 스스로 납부해야 하는 기금을 통해 면허 취소에 대한 보상을 제안했다.[8] 절주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양조업자 법안"으로 규탄했고, 양조업자들도 불만족스러워했다.[11]
1903년, 자유당의 허버트 글래드스톤과 노동당 대표 위원회의 램지 맥도널드는 보수당 반대표가 두 정당 사이에 분열되지 않도록 비공식적인 협약(Gladstone–MacDonald pact영어)을 맺었다. 이 협약으로 노동당 대표 위원회 후보가 출마한 50개 선거구 중 31개 선거구에서 자유당이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 이는 두 정당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노동당 대표 위원회가 선출한 29명의 국회의원 중 24명이 자유당이 출마하지 않기로 한 선거구에서 나왔고, 자유당은 보수당/자유당 경합 지역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선거 결과
1906년 영국 총선은 헨리 캠벨-배너먼이 이끄는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고, 아서 밸푸어가 이끄는 보수당과 자유연합당 연합이 참패한 선거였다. 노동당은 의석을 크게 늘렸으며, 아일랜드 의회당은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의석을 늘렸다.
자유무역 문제에 대한 당내 갈등과 조셉 체임벌린의 관세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은 보수당 연합의 패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당은 125석 차이의 압승을 통해 자유당의 복지 개혁으로 알려진 사회적 규정들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 선거는 하원에서 자유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1911년 의회법 제정 이전에 5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치러진 마지막 선거였다.
3. 1. 정당별 의석 및 득표율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
자유당 | 2,565,644 | 48.9 |
보수당+자유연합당 | 2,278,076 | 43.4 |
노동당 | 254,202 | 4.8 |
아일랜드 의회당 | 33,231 | 0.6 |
사회민주연방 | 18,446 | 0.4 |
스코티쉬 노동자당 | 14,877 | 0.3 |
자유무역 | 8,974 | 0.2 |
무소속 | 73,222 | 1.4 |
총합 | 5,246,672 | 100.0 |
3. 2. 주요 결과 분석
1906년 총선에서 헨리 캠벨-배너먼이 이끄는 자유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아서 밸푸어가 이끄는 보수당과 자유연합당 연합은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특히, 전직 총리였던 아서 밸푸어는 자신의 지역구인 맨체스터 이스트 선거구에서 낙선하는 이변을 겪었다.[15]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노동당은 1900년 영국 총선 이후 의석을 크게 늘렸으며, 선거 후 29명의 의원과 함께 "노동당"으로 재편되었고, 키어 하디를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존 레드먼드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은 73명의 후보가 무투표 당선되는 등 비교적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의석을 늘렸다.
정당 | 의석수 | 득표수 | 득표율(%) |
---|---|---|---|
자유당 | 397 | 2,565,644 | 48.9 |
보수당 + 자유연합당 | 156 | 2,278,076 | 43.4 |
노동당 | 29 | 254,202 | 4.8 |
아일랜드 의회당 | 82 | 33,231 | 0.6 |
기타 정당 및 무소속 | 6 | 98,489 | 2.3 |
총합 | 670 | 5,246,672 | 100 |
자유당의 압승 요인으로는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여론과 보수당의 실책이 꼽힌다. 특히, 조셉 체임벌린이 주도한 관세 개혁 정책은 식료품 가격 상승을 우려한 노동 계급의 반발을 샀다.[14]
이번 총선 결과로 자유당은 자유당의 복지 개혁으로 알려진 사회 개혁 입법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개혁 내용으로는 노령 연금 도입, 최저임금제 실시, 1911년 국민보험법 제정, 1911년 의회법 제정 등이 있다.[14]
1906년 총선은 자유당이 하원에서 단독 과반수를 차지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1911년 의회법 제정 이전에 5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치러진 마지막 선거였다.
4. 선거의 영향
1906년 영국 총선은 헨리 캠벨-배너먼이 이끄는 자유당이 아서 밸푸어의 보수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둔 선거이다. 자유당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했고, 노동당은 케어 하디를 지도자로 선출하며 약진했다. 존 레드먼드의 아일랜드 의회당은 낮은 득표율에도 의석을 늘렸다.
보수당의 패배는 자유무역을 둘러싼 당내 갈등과 조셉 체임벌린의 관세 개혁 정책에 대한 노동 계급의 반발, 즉 "큰 덩어리"와 "작은 덩어리" 논쟁 때문으로 분석된다.
1906년 총선은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이후 두 차례의 총선에서 자유당은 의석수가 감소하고 보수당은 지지세를 회복했다. 이 선거는 자유당이 하원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1911년 의회법 제정 이전 5년 이상의 간격을 두고 치러진 마지막 선거였다.
4. 1. 자유당 정부의 개혁
역사학자 로런스 골드먼(Lawrence Goldman)에 따르면, 1906년 총선은 여러 중요한 사회 개혁 입법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노령 연금, 1909년 '착취당하는 직종'에 최저임금을 적용한 직업위원회법(Trade Boards Act), 재분배적인 1909년 '국민 예산'(People's Budget), 노동거래소 도입, 1911년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 등이 포함된다. 또한, 같은 해 의회법(Parliament Act)을 통해 하원이 입법할 때 상원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였다.[14]1906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자유당은 이러한 개혁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1월과 12월에 치러진 두 번의 총선에서 자유당 의석수는 각각 275석과 272석으로 감소했고, 보수당은 자유연합주의자 동맹과 함께 273석과 272석을 차지하며 지지세를 회복했다.[14]
자유당 개혁은 사회적 규정들을 통과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4. 2. 정치 지형 변화
헨리 캠벨-배너먼이 이끄는 자유당은 1900년 영국 총선에 비해 의석을 크게 늘려 과반을 훨씬 넘는 압승을 거두며 제1당이 되었다. 반면 아서 밸푸어가 이끄는 보수당은 맨체스터 이스트 선거구의 밸푸어 자신의 의석을 포함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15] 노동당은 1900년 영국 총선 이후 의석을 크게 늘렸으며, 선거 후 29명의 의원과 함께 "노동당"으로 재편되었고, 키어 하디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존 레드먼드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은 73명의 후보가 무투표 당선되었고, 비교적 낮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의석을 늘렸다.자유당의 압승으로 아서 밸푸어를 포함한 유명 보수당 장관들이 이전까지 안전 의석으로 여겨졌던 지역에서 패배하였다. 1905년 12월(선거 한 달 전)까지 재직했던 보수당 내각 구성원 중 의석을 유지한 사람은 세 명에 불과했다.[15]
아서 밸푸어는 1885년부터 대표해 온 맨체스터 이스트 선거구에서 예상치 못하게 낙선했다. 맨체스터 이스트 선거구의 결과는 자유당 후보 토마스 가드너 호리지에게 22.4%라는 큰 표심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전국적인 자유당 지지율 증가(5.4%)를 훨씬 웃도는 수치였다. 맨체스터 이스트의 자유당 후보는 지역 노동당과의 협약으로 도움을 받았다. 호리지는 자신의 승리에 대해 "맨체스터 이스트는 본질적으로 노동당 선거구이며, 위대한 노동당이 저의 후보자 지명을 매우 철저하고 충실하게 지지해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5]
밸푸어의 낙선은 보수당의 압도적인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 결과는 이후 영국 정치사에서 가장 큰 이변 중 하나로 불리며, 전직 수상이나 야당 당수가 총선에서 의석을 잃는 희귀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15]
이 선거는 자유무역 문제에 대한 당내 갈등 이후 당의 약점으로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주요 이유와 함께 보수당과 자유연합당 연합에게 있어서 압도적인 패배였다. 많은 노동 계급은 이를 식료품 가격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고, 논쟁은 "큰 덩어리"나 "작은 덩어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125석 차이의 자유당의 압승은 자유당의 복지 개혁으로 알려진 사회적 규정들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역사학자 로런스 골드먼은 1906년 선거가 노령 연금, 최저임금, 재분배적인 '국민 예산', 노동거래소 도입, 국민보험법, 그리고 의회법을 통한 상원의 거부권 제거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당의 승리 규모가 이전 보수당의 실책 규모에 비례했지만, 국가 내 안정적인 자유당 지지의 정도를 과장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10년 1월과 12월에 있었던 후속 선거에서는 자유당 의원 수가 줄어든 반면, 보수당 지지는 회복되었다.[14]
이 선거는 하원에서 자유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마지막 선거였다. 또한, 평시 의회의 지속 기간을 5년으로 제한하는 1911년 의회법 제정 이전 개정 전의 선거 이후 5년 이상의 기간을 두고 치러진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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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DNB theme: The general election of 1906
http://www.oxfordd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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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op Ten...Shock election results | Total Politics
https://web.archive.[...]
20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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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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