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전국체육대회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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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3년 전국체육대회 축구는 1923년 11월 21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경기 중 발생한 부정 선수 논란과 결승전 당일의 소란으로 인해 파행을 겪었다. 대회는 소학부, 중학부, 청년부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경기가 열렸다. 중학부 경기에서 부정 선수 출전 문제로 여러 팀이 기권하고, 결승전이 연기되는 등 혼란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체육회 집행부가 교체되었다. 연기된 결승전은 12월 8일에 개최되었으며, 소학부에서는 광성보통학교가, 중학부에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가, 청년부에서는 조선불교청년회가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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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전국체육대회 축구 | |
---|---|
대회 정보 | |
연도 | 1923년 |
종류 | 하계 |
종목 | 축구 |
영어 종목 | Football |
픽토그램 | Football pictogram.svg |
개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개최 도시 | 경성 |
개최 기간 | 1923년 11월 21일 ~ 12월 8일 |
경기장 |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 |
참가 선수단 | 5 |
종목 수 | 3 |
남자 종목 | 3 |
일반부 | |
일반부 선수 | null |
일반부 남자 선수 | null |
일반부 여자 선수 | null |
일반부 종목 수 | 1 |
일반부 남자 종목 | 1 |
일반부 여자 종목 | null |
일반부 혼합 종목 | null |
18세 이하부 | |
18세 이하부 선수 | null |
18세 이하부 남자 선수 | null |
18세 이하부 여자 선수 | null |
18세 이하부 종목 수 | 1 |
18세 이하부 남자 종목 | 1 |
18세 이하부 여자 종목 | null |
18세 이하부 혼합 종목 | null |
12세 이하부 | |
12세 이하부 선수 | null |
12세 이하부 남자 선수 | null |
12세 이하부 여자 선수 | null |
12세 이하부 종목 수 | 1 |
12세 이하부 남자 종목 | 1 |
12세 이하부 여자 종목 | null |
12세 이하부 혼합 종목 | null |
대회 연혁 | |
이전 대회 | 1922 |
다음 대회 | 1924 |
2. 대회 준비
1922년 11월에 개최된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부터 개최 장소에서 약 80.47km 이상 떨어진 먼 곳에서 참가하는 선수단에게 50KRW 이내의 여비를 보조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대회에서 심판의 판정이 번복될 수 없다는 점을 경기 규정에 명문화했다.[5] 조선체육회는 제4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앞두고 청년부는 3개월 이상 해당 선수단에 소속되어 있어야 출전이 가능하다는 참가 규정을 신설하고, 소학부와 중학부의 경우 해당 학교에 1년 이상 재적해야 출전할 수 있다는 참가 규정을 신설했다.[1]
제4회 전조선축구대회는 1923년 11월 21일부터 11월 23일까지 개최될 예정이었다.[1] 소학부, 중학부, 청년부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각 부문별 참가 선수단은 다음과 같다.[6]
3. 대회 진행
소학부 중학부 청년부
1라운드부터 준결승까지 소학부는 40분, 중학부는 50분, 청년부는 60분 경기로 진행되었고, 결승 경기는 소학부 60분, 중학부 80분, 청년부 90분 경기로 진행되었다.[4]
중학부 예선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숭실중학이 각각 영생고등보통학교와 오산학교를 상대로 승리했으나, 주최 측은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숭실중학 선수 중 해당 학교에 재적한 지 1년 미만인 선수가 있다는 이유로 승리를 취소했다.[6] 이에 오산학교는 부정 선수가 있다며 기권했고, 영생고등보통학교는 상대 팀의 실격패가 반가울 일이 아니라며 남은 경기를 기권했다.[6] 숭실중학은 3년 동안 재적했던 선수가 잠시 타 학교로 갔다가 돌아온 지 1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격패를 당하자 이에 반발했다.[6]
3. 1. 부정 선수 논란과 대회 파행
숭실중학 측이 부정 선수 참가로 인한 실격패에 항의하며 결승전 당일 경기장을 강점하고 소란을 일으켜, 11월 23일에 예정된 결승 경기는 열리지 못하고 연기되었다.[6][7] 고원훈 조선체육회장은 부정 선수 논란과 결승전 당일의 소란으로 인해 11월 23일 결승전 당일에 사퇴했으며, 이사진과 간사진 모두 함께 사퇴했다.[2] 11월 28일 임시 총회를 통해 최린이 조선체육회장으로 선출되고 이사진을 선임하며 집행부를 새로 구성했으며, 연기된 결승전은 12월 8일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2]
결승전 연기 사태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12월 8일에 열린 결승 경기는 입장료를 받지 않고 진행했다.[2] 11월 23일의 입장 수입 585.5엔은 고아원에 기부했다.[2]
4. 결승전 연기와 조선체육회 집행부 교체
숭실중학 측이 부정 선수 참가로 인한 실격패에 항의하며 결승전이 열리는 당일 경기장을 강점하고 소란을 일으켜, 1923년 11월 23일에 예정된 결승 경기는 추후 연기하여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6][7] 부정 선수 논란과 결승전 당일의 소란으로 인해 고원훈 조선체육회장은 11월 23일에 사퇴했으며, 이사진과 간사진 모두 함께 사퇴했다.[2] 이후 11월 28일에 임시 총회를 통해 최린이 조선체육회장으로 선출되고 이사진을 선임하며 집행부를 새로 구성했으며, 연기된 결승전은 1923년 12월 8일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2]
5. 경기 결과
1923년 전국체육대회 축구는 소학부, 중학부, 청년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소학부 결승전에서는 광성보통학교 축구단이 보인학교 축구단을 1:0으로 꺾고 우승했고,[14] 중학부 결승전에서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이 4:4로 비겼으나, 대회 규정에 따라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이 우승했다.[14] 청년부 결승전에서는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이 임술 축구단을 3:1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12]
이번 대회는 부정 선수 출전 논란으로 혼란을 겪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광성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의 경기에서 광성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측에 부정 선수가 있다는 항의가 제기되어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고,[13] 숭실학교 축구단, 오산학교 축구단,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 등에서도 부정 선수 출전 논란이 있었다.[13]
결승전은 입장료 없이 진행되었으며, 11월 23일 입장 수입은 고아원에 기부되었다.
5. 1. 소학부
소학부 남자 종목에는 광성보통학교 축구단, 보성초등학교 축구단, 보인학교 축구단, 수송공립보통학교 축구단, 승동소학교 축구단, 신명소학교 축구단, 흥인배재학교 축구단 등 7개 축구단이 참가했다.[4][8]1923년 11월 21일에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수송공립보통학교 축구단과 보성초등학교 축구단 간의 1라운드 첫 번째 경기가 진행되어 보성초등학교 축구단이 6:2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같은 날 이어서 진행된 광성보통학교 축구단과 승동소학교 축구단 간의 1라운드 두 번째 경기는 승동소학교 축구단이 6:0으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15] 뒤이어 진행된 흥인배재학교 축구단과 신명소학교 축구단 간의 1라운드 세 번째 경기는 흥인배재학교 축구단이 4:0으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15]
1923년 11월 22일 15시 30분부터 16시 5분까지 보성초등학교 축구단과 보인학교 축구단 간의 준결승 첫 번째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0:0 무승부로 경기 기록 점수가 높은 보인학교 축구단이 결승에 진출했다.[11] 같은 날 16시에 시작된 흥인배재학교 축구단과 광성보통학교 축구단 간의 준결승 두 번째 경기는 광성보통학교 축구단이 3:0으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11]
1923년 12월 8일 11시에 진행된 보인학교 축구단과 광성보통학교 축구단 간의 결승 경기는 광성보통학교 축구단이 1:0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14]

5. 2. 중학부

중학부 남자 종목은 광성고등보통학교 축구단, 군산영명학교 축구단,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숭실학교 축구단, 영생학교 축구단, 오산학교 축구단,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 등 8개 축구단이 참가했다.[4][8]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1923년 11월 21일 13시 30분에 시작된 오산학교 축구단과 숭실학교 축구단 간의 8강 첫 번째 경기는 숭실학교 축구단이 4:1로 승리했다. 같은 날 14시 40분에 시작된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영생학교 축구단 간의 8강 두 번째 경기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이 1:0으로 이기며 준결승에 진출했다.[9]
이어서 진행된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광성고등보통학교 축구단 간의 8강 세 번째 경기 도중, 광성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측에 재적 기간이 1년이 경과해야 출전할 수 있다는 대회 규정을 위반한 선수가 있다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측의 항의로 경기가 중단되었다.[13] 해당 경기는 1923년 11월 22일 10시에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측 부정 선수 1명을 제외하고 진행되었고,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이 1:0으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9][13]
1923년 11월 21일 16시 30분에 시작된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군산영명학교 축구단 간의 8강 네 번째 경기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이 1:0으로 이기며 준결승에 진출했다.[9]
한편,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광성고등보통학교 축구단 간의 경기에서 대회 규정에 어긋난 부정 선수와 관련된 논란을 시작으로, 숭실학교 축구단 측은 오산학교 축구단의 부정 선수 여부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고, 오산학교 축구단 측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 측의 부정 선수 여부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등 부정 선수 출전 여부에 대한 이의가 다수 제기되는 혼선이 일어났다.[13] 이에 조선체육회 측은 간부 회의를 열어 각 선수의 학적과 관계자의 증명을 검토하여, 대회 규정에 맞지 않는 재적 기간 1년 미만인 선수가 출전한 것으로 확인된 숭실학교 축구단과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에 대해 실격패로 결정했다.[13][9] 준결승에 진출한 오산학교 축구단은 대회 규정에 맞지 않는 선수가 있었음을 자인하며 기권하였고, 8강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에 패배했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의 실격패로 준결승에 진출한 영생학교 축구단은 이미 패배한 상태에서 상대 팀에게 부정 선수가 있었다고 해서 이긴 것으로 해주어도 반가운 일이 되지 못한다며 기권했다.[9][11][13][6]
1923년 12월 8일에 진행된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과 중앙고등보통학교 축구단 간의 결승 경기는 4:4로 비겨 대회 규정에 따라 경기 기록 점수가 더 높은 배재고등보통학교 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했다.[14]
5. 3. 청년부
청년부 남자 종목에는 대화교삼성사 축구단, 대화교청년회 축구단, 수양구락부 축구단, 숭강운동부 축구단, 임술 축구단,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 한양체육부 축구단 등 7개 축구단이 참가했다.[4][8]1923년 11월 22일 11시 40분,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수양구락부 축구단과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 간의 1라운드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1:1로 비기고 있던 중, 수양구락부 축구단 측이 심판에게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 측 선수의 반칙을 항의하다 실점하자 논란이 발생하여 수양구락부 축구단이 기권했다.[9][10] 이어서 진행된 임술 축구단과 대화교삼성사 축구단 간의 1라운드 두 번째 경기는 임술 축구단이 5:0으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9] 같은 날 15시에 시작된 대화교청년회 축구단과 숭강운동부 축구단 간의 1라운드 세 번째 경기는 1:1 무승부였고, 대회 규정에 따른 성적 기록 점수에 따라 대화교청년회 축구단이 준결승에 진출했다.[11]
1923년 11월 23일 10시에 시작된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과 한양체육부 축구단 간의 준결승 첫 번째 경기는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이 2:1로 승리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같은 날 11시 30분에 시작된 임술 축구단과 대화교청년회 축구단 간의 준결승 두 번째 경기는 0:0 무승부였고, 대회 규정에 따라 경기 기록 점수가 높은 임술 축구단이 결승에 진출했다.[11]
1923년 12월 8일에 진행된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과 임술 축구단 간의 결승전에서는 조선불교청년회 축구단이 3:1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12]

6. 경기장
1923년 전국체육대회 축구 경기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과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었다.[1]
7. 참가 선수단
남자
남자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