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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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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 행위로 변절한 인물이다. 1904년 일본 유학 중 동맹휴교를 주도하여 퇴학당하고, 3·1 운동을 기획했다. 이후 천도교 자치론을 주장하며 친일 행위를 시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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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물 정보
원어명崔麟
정당무소속
출생일1878년 1월 25일
출생지조선 함경도 함흥군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선천군
사망일1958년 12월 4일
학력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학사
국가총독부
직책중추원 참의
종교천도교
총독 정보
역대 조선 주재 일본 총독우가키 총독
미나미 총독
임기1934년 4월 1일 ~ 1940년 4월 30일
군주히로히토
일본 총리 정보
역대 일본 총리사이토 일본 총리
오카다 일본 총리
히로타 일본 총리
하야시 일본 총리
고노에 일본 총리
히라누마 일본 총리
노부유키 일본 총리
미쓰마사 일본 총리
고노에 일본 총리
도조 일본 총리
기타

2. 생애

1878년 1월 25일에 태어나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한성부로 상경하여 개화파 청년들과 교류하였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쳤는데, 당시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일심회 조직 사건으로 일본으로 잠시 피신했다.[5] 이때 개화파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당시 일심회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다.

1904년 10월에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부립 제1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중학교 교장이 조선인에게는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파업을 일으켜 퇴교당한다.[2] 1905년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6년 메이지 대학에 입학한 최린은 대한제국 황실을 모독한 공연장을 습격하고 영업방해로 검거되었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다. 1907년에는 광무학회 총대와 태극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년에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 같은 황실유학생이었던 최남선,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쓰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교류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귀국 후 1910년 10월 천도교에 입교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8년부터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 방안을 논의하다가 1919년 3·1 운동을 기획했다. 최린은 불교계의 한용운, 기독교계의 이승훈을 통해 두 종교 대표를 참가시키고 기미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3·1 운동의 3원칙으로 대중화, 단일화, 비폭력을 제시하였다.[2]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 이후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하였다.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 교육과 주임으로 선출되어 교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손병희가 죽고 난 이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는데, 이때부터 최린은 '민족개량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 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다.[2]

1928년에는 나혜석과의 불륜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6]

1930년대 중반부터는 친일 경향을 더욱 강화하여 1934년에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내선일체와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는 한일 연합 친일 조직인 시중회를 설립하였다.[9]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 중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등 각종 친일단체에 주요간부를 맡으며 강연 활동과 학병권유 유세, 내선일체 적극지지, 전쟁을 지원하는 등등 수없이 많은 친일행적을 남겼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하여 1956년 7월 북조선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하였으나[3]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2. 1. 생애 초기

1878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우다가 한성부로 상경하여 개화파 청년들과 교류하였다. 1902년 길주감리서 주사를 거쳤는데, 당시 일본 육사 출신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일심회 조직 사건으로 일본으로 잠시 피신했다.[5] 이때 개화파 역관인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당시 일심회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다.

1904년 10월에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부립 제1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중학교 교장이 조선인에게는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말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파업을 일으켜 퇴교당한다.[2] 1905년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거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6년 메이지 대학에 입학한 최린은 대한제국 황실을 모독한 공연장을 습격하고 영업방해로 검거되었다. 1906년 9월부터 1907년 2월까지 대한유학생회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다. 1907년에는 광무학회 총대와 태극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09년에는 대한흥학회 평의원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1909년에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 같은 황실유학생이었던 최남선,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쓰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교류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귀국 후 1910년 10월 천도교에 입교했다.

2. 2. 3.1 운동

1918년부터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독립 운동 방안을 논의하다가 1919년 3·1 운동을 기획했다. 최린은 불교계의 한용운, 기독교계의 이승훈을 통해 두 종교 대표를 참가시키고 기미독립선언서 기초자로 최남선을 추천하는 등 기획 과정을 주도했으며, 또한 3·1 운동의 3원칙으로 대중화, 단일화, 비폭력을 제시하였다.[2]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 이후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하였다.

2. 3. 사회활동과 자치론

1922년 1월부터 3월까지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 교육과 주임으로 선출되어 교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5월 동지였던 손병희가 사망했고, 그해 9월부터 1924년까지 종리사를 거쳐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종법사를 지냈다. 그 외에 1923년에는 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점차 활동 영역을 사회문화 전반으로 넓혀갔다. 같은 해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발기인,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 1925년 조선체육회 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유럽과 미국 등 21개 국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1929년에 교단 최고직인 도령에 올랐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 위원에 임명되었다.[2]

이러한 폭넓은 사회활동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손병희가 죽고 난 이후 천도교는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이때부터 최린은 '민족개량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론'을 내세우며 신파를 주도했다. 이 자치론은 "독립의 전 단계로서의 자치와 실력 양성"을 뜻하였고, 이는 곧 독립을 위한다는 명분과 실력 양성이라는 실리를 만족하므로 최린을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의 유산 계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자치론은 친일 세력으로 전향시키려는 일제의 정치 모략이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자치 운동 조직 연정회의 부활을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신간회의 구파와는 대립했다. 총독부와 밀착한 이러한 행보는 변절의 단초가 된다.[2]

2. 4. 나혜석과의 불륜 사건

1928년 우연히 파리에서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가 된, 당시 파리에 외교관으로 주재하고 있던 중 발생한 나혜석과의 불륜은 1930년 나혜석의 이혼으로 이어진다.[6] 프랑스어를 몰랐던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식당, 극장, 뱃놀이, 시외 구경을 다녔다. 1928년 11월 20일 저녁, 두 사람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함께 나혜석의 숙소인 셀렉트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밤 최린은 자기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수십 회 이어졌고, 파리 유학생 사회에 나혜석은 최린의 작은댁이란 소문이 나돌았다.[7]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나혜석은 그와 사랑에 빠진다.[8] 그러나 나혜석이 여러 남성과 연애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우영은 비밀리에 파리로 돌아와 나혜석을 미행했고,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이 사실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나혜석이 이혼한 뒤, 그녀의 자유 연애관과 여성주의 사상을 피곤하게 여긴 그는 나혜석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최린과의 불륜이 이혼의 원인이 된 이상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를 '''정조 유린죄'''라는 명목으로 법원에 고소하게 된다.

나중에 나혜석은 그를 상대로 12000JPY의 위자료 소송을 청구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매수하고, 그는 2000JPY의 돈을 나혜석에게 전달하고 입막음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아내를 유혹하고 가정을 파탄냈다는 사회의 조롱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도 신뢰가 깎이게 된다.

2. 5. 친일 행적

1934년 4월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그 해 8월 내선일체와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는 한일 연합 친일 조직인 시중회를 조직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9] 1937년에는 총독부 기관지인《매일신보》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를 설파했다.

1937년 7월 중추원에서 주편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로 선발되어 전주,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이리 등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국민의 자각을 촉구하는' 강연활동 등을 수행했다.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단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회장 등등 각종 친일단체에 주요간부를 맡으며 강연 활동과 학병권유 유세, 내선일체 적극지지, 전쟁을 지원하는 등등 수없이 많은 친일행적을 남겨 극렬 친일 인사가 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최린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9]

1930년대 중반부터는 친일 경향을 더욱 강화하여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일선 융합과 대동아주의를 내세운 일한 연합의 친일 단체인 시중회를 설립하여 “진심과 적심을 가지고 조선인은 제국 신민임을 자각, 자인하고, 일본인은 조선인을 진정한 동포로 인정해야 한다. 내심에 폭탄과 칼을 품고 일본 국민인 체하며, 동일 동포라 하면서 우월감을 보인다면, 혼연일체의 일선 일가는 성립될 수 없다. 조선의 민족성을 존중하고 조선 문화를 숭배하면서도 우리는 일본 제국 신민이 될 수 있으며, 일본 제국의 세계에 대한 사명에 공헌하면서 대동아의 평화에 힘쓸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3. 광복 이후

광복 후 최린은 반민특위의 조사와 처벌을 받았으며,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사망했다.

3. 1. 반민특위 조사와 처벌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청이 발표한 '이동사령 제29호'에 따라 같은 날짜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서 파면되었다.[1] 천도교 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 교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1]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다.[1] 재판 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 행각을 시인하고 재판장과 방청객들 앞에서 솔직한 참회를 보였다.[1] 그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사면될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고 덤덤하게 반응하였다.[1] 그는 재판정에서 최후 변론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1]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한국어

3. 2. 납북과 사망

1949년 4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난 최린은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3] 조소앙, 김원봉, 엄항섭, 안재홍 등과 함께 북한의 대남 통일 선전기관 참여를 요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후 1958년 12월에 81세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 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3]

4. 평가

최린은 독립운동가 출신이나 이후 친일 행위로 인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측 모두에게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대한민국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대표적인 민족 반역자로 언급되는 등 낮게 평가받는다.[10]

4. 1. 부정적 평가

최린은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으므로 1962년 3월의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하여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 천도교의 두 부문에 들어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최린은 공개적으로 친일을 한 인물인데다 천도교 신자로서 김일성과 직접 교류한 박인진, 최동오, 김달현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게 평가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대표적인 민족 배반자로 언급되었다.[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역시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이광수의 묘도 조성되어 있을 정도지만,[11] 최린의 최후나 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4. 2. 북한의 평가

최린은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낮게 평가한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대표적인 민족 배반자로 언급되었다.[1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친일파로 알려진 이광수의 묘도 조성되어 있지만,[11] 최린의 최후나 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최린이 공개적으로 친일을 한 인물인데다 천도교 신자로서 김일성과 직접 교류한 박인진, 최동오, 김달현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참조

[1] 웹사이트 최린(崔麟) http://encykorea.aks[...] 2022-08-24
[2] 서적 皇室特派留学生 白帝社 2005-12
[3] 서적 現代朝鮮人名辞典 1962年版 世界ジャーナル社 1962-08-01
[4] 뉴스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5]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6] 서적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2003-08-15
[7] 웹사이트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② http://world.kbs.co.[...]
[8] 뉴스 수덕여관 손님, 나혜석과 김일엽 (2) http://www.ohmynews.[...] 2005-08-19
[9] 서적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 서적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1] 뉴스 "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 https://web.archive.[...] 민족21 200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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