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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브라질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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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4년 브라질 쿠데타는 주앙 굴라르 대통령을 축출하고 극우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사건이다. 이는 미국과 내통한 극우 군인들이 주도했으며,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쿠데타는 굴라르의 비동맹주의와 의회주의 정책, 그리고 제국주의와 반공주의 신념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쿠데타 이후,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가 이끄는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고,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 부도가 발생했다. 이 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 등을 지원하며 국제적 비판을 받았으며, 라틴아메리카 극우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쿠데타는 브라질 정치의 장기적인 독재 시대를 열었으며, 사회 운동에 대한 탄압과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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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브라질 쿠데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M41 워커 불도그 전차와 브라질 육군 지프
Ministries Esplanade, National Congress Palace 근처에서 M41 워커 불도그 전차와 브라질 육군 지프 2대 (배경: 브라질리아), 1964년
분쟁 명칭1964년 브라질 쿠데타
시기1964년 3월 31일 – 4월 1일
장소브라질
관련 사건냉전
결과쿠데타 성공
주앙 굴라르 정부 전복
브라질 군사 독재 시작
교전 세력
교전국 1브라질 연방 정부
브라질군 (정부군)
교전국 1 지원 세력브라질 주지사 목록:
페르남부쿠 주
세르지피 주
브라질 전국 학생 연합
브라질 농민 연맹
교전국 2브라질군 (반군)
교전국 2 지원 세력브라질 주지사 목록:
알라고아스 주
이스피리투산투 주
구아나바라 주
미나스제라이스 주
파라나 주
히우그란지두술 주
상파울루 주
의회 야당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 지휘관주앙 굴라르
레오넬 브리졸라
아르만두 지 모라에스 앙코라
라다리우 페레이라 텔레스
교전국 2 지휘관올림피우 모라웅 필류
카스텔루 브랑쿠
코스타 이 실바
아마우리 크루엘
아우구스투 하데마케르
프란시스쿠 지 아시스 코헤이아 지 멜루
아우루 지 모우라 안드라지
마갈량이스 핑투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정부군 지지 민간인 7명 사망
관련 템플릿

2. 배경



1964년 브라질 쿠데타는 주앙 굴라르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이다. 이 쿠데타는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군부 내 극우 세력이 주도했으며, 당시 냉전 상황 속에서 미국의 깊은 관여와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10]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은 주앙 굴라르 정부의 비동맹주의 외교 노선과 기반 개혁 추진 등 의회주의 정책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제국주의반공주의를 신봉했으며, 일부는 과거 파시스트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의 회원이거나 지지자였다.[11] 쿠데타는 단순히 군부의 행동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보수적인 민간 부문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가 있었기에 "시민-군사 쿠데타"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는 민간인들이 쿠데타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실행 과정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쿠데타 직후 집권한 카스텔루 브랑쿠는 이 사건을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 국가를 혼란에서 구한 "혁명"으로 규정하며 정당화하려 했다. 이러한 "혁명" 개념은 군부 내에서 독재 기간 동안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군사력을 동원해 합법 정부를 전복하고 기존 헌법 질서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쿠데타"로 평가한다. AI-1(제도법 제1호) 서문에서 "헌법적 절차는 정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승리한 혁명은 그 승리에 앞선 규범성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법적 규범을 정의한다"고 명시한 것 자체가 쿠데타의 성격을 보여준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려는 시도는 역사 수정주의 또는 역사 부정주의로 비판받는다.

2. 1. 정치적 배경

1960년 선거에서 유세하는 자니우 콰드로스


게툴리우 바르가스가 1945년 축출된 후 1946년에 시작된 브라질의 민주주의 시대는 국수주의 세력과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 간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들의 주요 갈등 지점은 외국 자본 투자, 미국과의 관계 설정, 경제 및 노동 문제에 대한 국가 개입 수준 등이었다. 1954년 바르가스의 자살, 1955년 로치 원수의 반(反)쿠데타, 그리고 1961년 자니우 콰드로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임 등 세 차례의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자유-보수 진영의 일부 군인과 정치인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사회 전반과 군 내부에서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다. 이 시기들은 브라질을 내전 직전까지 몰고 갔던 심각한 위기였다. 1964년의 쿠데타 역시 동일한 세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을 확보했다. 따라서 1964년 쿠데타는 단순히 당시의 즉각적인 상황만으로 발생한 사건은 아니었다.

당시 브라질 정치를 주도했던 세 개의 주요 정당은 브라질 노동당(PTB), 국민민주연합(UDN), 그리고 사회민주당(PSD)이었다. PTB는 바르가스의 노동 정책 유산을 계승했고, PSD는 바르가스 시대의 정치 구조에서 파생되었으며, UDN은 바르가스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PTB의 지지 기반은 점차 확대되었고, PTB와 PSD는 이 기간 동안 대부분 정치적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대체로 UDN은 우파, PTB는 좌파, PSD는 중도 성향을 대표했다.

1960년 선거에서 UDN의 지지를 받았지만 특정 정당에 얽매이지 않는 이미지를 내세운 자니우 콰드로스가 대통령으로, PTB 소속의 주앙 굴라르가 부통령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당시 브라질 선거 제도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별도로 선출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선거 연합의 후보였다. 집권 후 콰드로스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고, 취임 7개월 만인 1961년 8월 갑작스럽게 사임했다. 이는 자신의 사임이 거부되고 오히려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상태로 복귀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책략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이던 굴라르 부통령에 대한 군부 내의 강한 반감을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콰드로스는 군부 내에서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던 반면, 굴라르는 오랫동안 군부의 경계 대상이었다. 굴라르는 1954년 바르가스 정부의 노동부 장관 시절 이미 급진적인 좌파 성향으로 간주되어 군 장교들의 반발("대령들의 성명서")로 인해 해임된 전력이 있었다.

왼쪽


콰드로스의 정치적 책략은 실패했고 그의 사임은 수리되었다. 그러나 굴라르의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군부의 거부감은 현실화되었다. 세 명의 군 장관, 특히 육군 장관 오질리우 데니스는 굴라르의 귀국과 대통령직 취임을 거부했다. 이에 리오그란데두술 주 주지사이자 굴라르의 처남인 레오넬 브리졸라는 헌법적 계승 절차를 지키기 위한 "합법성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으며, 제3군 사령관 조제 마샤두 로페스 장군도 합류했다. 좌파와 보수 세력 일부까지 군 장관들의 결정에 반대하며 연합했다. 결국 보수 세력이 주도하여 굴라르의 취임은 허용하되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의원 내각제를 도입하는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1965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력한 후보로는 PSD의 주셀리누 쿠비체크 전 대통령, UDN 소속이자 강력한 반(反)굴라르 인사인 카를루스 라세르다 과나바라 주지사 등이 거론되었다. PTB에서는 브리졸라나 굴라르 본인이 유력했으나, 당시 법률은 현직 대통령의 재선 및 대통령 친인척(브리졸라는 굴라르의 처남)의 출마를 금지하고 있었다.

콰드로스와 굴라르는 주셀리누 쿠비체크(JK) 정부로부터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불균형이 심화된 경제를 물려받았다. 1960년대 초 브라질 경제는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특히 가중되는 인플레이션과 국제수지 적자를 해결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율은 1960년 30.5%에서 1963년 79.9%, 1964년에는 92.1%까지 치솟았다. 브라질의 GDP 성장률은 1961년 8.6%를 기록했지만 1963년에는 0.6% 성장에 그쳤다. 실질 임금 하락은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 모두에게 큰 불안 요소였다. 경제 위기 극복의 실패는 국내의 노동계 및 기업, 그리고 해외 이익 집단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생활비 상승은 노동조합 운동의 조직화와 활동 증가로 이어졌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180건이었던 파업 건수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430건으로 급증했다. 노동법 테두리 밖에서 노동자 총사령부(CGT)가 결성되어 "브라질 역사상 명백한 정치적 성격을 띤 첫 파업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브라질은 식량 부족을 겪고 있었으며, 이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기고 농촌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브라질은 현재보다 농업 중심적인 국가였다. 196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시 거주 인구 비율은 44.67%에 불과했다. 이 비율은 남동부 지역에서는 57%였지만, 북동부 지역에서는 33.89%에 그쳤다. 토지는 극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농업 기술은 낙후된 상태였다. 사회적 동요는 농촌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토지 점거와 폭력적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민 연맹은 활동의 정점에 달했으며, 브라질 공산당(PCB)이 제시한 온건 노선 대신 "법 또는 힘에 의한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급진화되었다. 그러나 농민 연맹은 1963년 이후 정부의 농촌 노동조합 합법화 조치와 가톨릭 교회 및 PCB의 자체적인 노조 조직화 노력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왼쪽)와 브라질 대통령 주앙 굴라르(오른쪽)가 언론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시기는 격렬한 대중 동원의 시대였다. 노동조합원과 농민 연맹 회원들은 다른 좌파 세력들과 연대했다. 이들은 이질적인 집단이었지만, 문맹자와 사병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포함하여 은행 개혁, 재정 개혁, 행정 개혁, 도시 개혁, 토지 개혁, 대학 개혁 등 소위 "기반 개혁"을 공동 목표로 내걸었다. 또한 공산당 합법화, 독자적인 외교 노선 유지, 외국 자본 통제 및 전략 산업 국유화 등을 요구하며 단결했다. 좌파 세력과 굴라르 정부는 각자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개혁 목표 달성을 위해 서로 협력 관계를 모색했다. 좌파 진영은 굴라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가 우파 정치 세력과 타협하려는 시도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군 내부에서도 하사관이나 수병과 같은 하급 장병들이 선거 출마권이나 결혼 허가 등 내부적인 권리 문제를 놓고 장교들과 충돌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사회 개혁을 지지하기도 했다. 조직된 지식인 그룹이 활동했고,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민중행동(Ação Popular)을 결성했다. 학생들은 전국학생연합(UNE)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PCB는 PTB와 협력하며 노동조합 내에서 상당한 조직력과 영향력을 확보했다. 레오넬 브리졸라는 미국 기업 자산 몰수 조치 등으로 명성을 얻으며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고,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는 기반 개혁을 지지하는 여러 단체를 민중 동원 전선(Frente de Mobilização Popular)으로 통합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11인 그룹"(Grupo dos Onze)을 동원했다.

한편, 반대 진영에서는 중앙정보국(CIA)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브라질 민주 행동 연구소(IBAD)와 "브라질 재계의 핵심" 인사들이 모인 사회 연구 및 조사 연구소(IPES)의 부상이 두드러졌다. 이들 조직은 이념 선전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쿠데타 음모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냉전 시대에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지만, 195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미국의 주요 관심 지역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한 봉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국내 정치적으로도 강경한 외교 정책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굴라르와 같이 개혁적이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지도자들조차 미국의 압박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이는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하거나 쿠데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공은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핵심 관심 지역으로 부상시켰다. 미국의 주요 목표는 쿠바 혁명이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미국에게 유리하게 만들었고,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진보를 위한 동맹이라는 새로운 경제 원조 프로그램은

2. 2. 사회경제적 배경



자니우 쿠아드루스주앙 굴라르는 모두 주셀리누 쿠비체크(JK)로부터 현대화되었지만 불균형한 경제를 물려받았다. 1960년대 초 브라질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증가하는 인플레이션국제수지 적자를 극복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은 1960년 30.5%에서 1963년 79.9%, 1964년 92.1%로 치솟았다. 브라질의 GDP 성장률은 1961년 8.6%였으나 1963년에는 0.6%에 그쳤다. 실질 임금 하락은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 모두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이러한 경제 위기는 국내의 노동자 및 기업가 집단과 외부 이익 단체의 압력에도 영향을 받았다.

생활비 상승은 노동조합 운동의 조직화와 활동 증가로 이어졌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180건의 파업이 있었던 반면, 1961년부터 1963년까지는 430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노동자총사령부(CGT)는 공식 노조법 테두리 밖에서 등장하여 "브라질 역사상 명백한 정치적 성격의 첫 번째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식량 부족 현상이 발생하여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고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당시 브라질은 현재보다 농업 중심 국가였다. 196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도시 거주 인구는 전체의 44.67%에 불과했으며, 남동부 지역은 57%, 북동부 지역은 33.89%였다. 토지는 소수에게 고도로 집중되어 있었고, 구식 기술로 경작되었다. 사회적 동요는 농촌으로 확산되어 토지 점거와 폭력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북동부를 중심으로 활동한 농민 연맹은 브라질 공산당(PCB)이 제안한 온건 노선 대신 "법 또는 무력에 의한 토지 개혁"을 요구하며 급진화되었다. 그러나 농민 연맹은 1963년 이후 정부의 농촌 노동조합 규제와 가톨릭 교회 및 PCB의 자체 노조 조직화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 시기는 격렬한 대중 동원이 특징이었다. 노조원과 농민 연맹 회원들은 다른 좌파 세력과 연대했다. 이들은 이질적인 집단이었지만, 문맹자와 군인의 투표권 확대, 은행, 재정, 행정, 도시, 토지, 대학 개혁 등 소위 "기본 개혁"을 공동으로 요구했다. 또한 공산당 합법화, 독립적인 외교 정책 유지, 외국 자본 통제 및 경제 전략 부문의 국가 독점 등을 목표로 단결했다. 좌파 세력과 굴라르 대통령은 서로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인식하면서도 개혁 달성을 위해 동맹을 모색했다. 하지만 좌파는 굴라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우파 정치 세력과의 타협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군대 내부에서도 하사관, 수병 등 하위 계급 군인들이 선거 출마권, 결혼권 등 내부적인 권리 문제로 장교들과 충돌했으며, 일부는 개혁을 지지하기도 했다. 조직된 지식인 그룹이 있었고,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민중 행동'(Ação Popular)을 결성했다. 학생들은 전국학생연합(UNE)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PCB는 PTB와 협력하여 노조 내에서 상당한 조직력과 영향력을 확보했다. 레오넬 브리졸라는 미국 기업 자산 몰수 조치 등으로 명성을 얻으며 정치적으로 부상했고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는 기본 개혁을 지지하는 단체들을 '민중 동원 전선'(Frente de Mobilização Popular)으로 통합하고, 자신의 정치 기반인 "온제 그룹"(Grupo dos Onze, 11인 그룹)을 동원했다.

쿠데타에 대한 특별호 발행을 기다리는 ''Correio da Manhã'' 신문사 앞에서 모인 군중들


한편, 야당 세력 내에서는 중앙정보국(CIA)과 연계된[10] 브라질 민주 행동 연구소(IBAD)와 "브라질 재계의 핵심"을 모은 사회 연구 연구소(IPES)의 부상이 중요한 변화였다. 이들 조직은 이념 선전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음모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들은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여론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군부의 시각에서는 가족 행진, 중산층, 여성, 언론이 군사 개입을 요구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기억되었다. 상파울루에서 시작되어 여러 도시로 확산된 이 행진은 동원된 반대 세력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사회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았다.

반대 전선에는 은행가, 사업가, 산업가, 지주, 상인, 정치인, 판사, 중산층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자유 전문직, 소상공인, 주부 등으로 구성된 도시 중산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IPES는 중산층을 동원하기 위해 행진 조직에 관여했지만, 중산층 역시 급진적인 사회 재분배로 인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등 자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행진은 "선동, 무질서, 부패"에 반대하는 반포퓰리즘과 무신론 및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반공주의 이념을 표출하며, 개인의 자유와 기독교 가치에 대한 위협에 맞서 결집했다. 고용주 단체, 시민 단체, 여성 민주주의 운동과 같은 여성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의 참여는 행사 조직과 가족 및 종교적 가치를 강조하는 데 중요했다. 반공주의는 주로 가톨릭적 성격을 띠었지만, 개신교, 유대교, 심령술 신봉자, 심지어 움반다 신자들에게도 나타나는 초교파적 양상을 보였다. 사제(패트릭 페이튼 포함), 목사, 랍비 등이 행진에 참여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내부는 분열되어 있었으며, 보수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브라질 개신교계에서는 장로교의 참여가 두드러졌지만, 침례교, 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등 다른 교파에서도 쿠데타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주요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굴라르 대통령 축출을 요구하며 쿠데타의 길을 열었고, 쿠데타 발생을 환영했다. ''Jornal do Brasil'', ''Correio da Manhã'', ''O Globo'', ''Folha de S. Paulo'', ''O Estado de S. Paulo'' 등은 공개적으로 굴라르 축출을 지지했으며, 특히 ''Correio''의 "나가라!"(Fora!pt)와 "이제 그만!"(Basta!pt) 사설이 유명했다. ''Estado de S. Paulo'', ''O Globo'', ''Tribuna da Imprensa''는 쿠데타 음모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주요 신문 중에서는 ''Última Hora''만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았다.

IBOPE의 당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주앙 굴라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개혁을 열망했으며, 공산주의를 개혁이나 굴라르와 직접 연결하지 않으면서도 반공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1964년 3월 상파울루 시민 대상 조사에서 굴라르 정부는 42%로부터 '훌륭하다' 또는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30%는 '보통'이라고 답했다. 79%는 기초 개혁이 시급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토지 개혁에 대한 지지율은 수도에서 평균 70%에 달했으며, 중산층과 상류층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군 입대자의 투표권은 받아들여졌지만, 문맹자의 투표권은 거부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1964년 3월 상파울루 시민의 68%가 공산주의를 위험으로 여겼고 80%는 공산당 합법화에 반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제안한 조치들을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16%에 불과했다.

쿠데타 이후 여론 조사에서는 굴라르에 대한 평가가 바뀌어, 5월 상파울루 시민의 54%가 그의 축출이 이익이 되었다고 답했다. 55%는 그가 의회를 폐쇄하거나 브라질을 공산주의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쿠데타 지지자들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상파울루와 구아나바라의 응답자들은 여전히 직접 선거와 민간 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원했고, 1965년에는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 특히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2. 3. 국제적 배경

냉전 시대에 라틴 아메리카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나, 1950년대까지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10] 미국 정부는 소련의 영향력 확장을 막기 위한 봉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국내 정치적으로 강경한 외교 정책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10] 이러한 상황에서 주앙 굴라르와 같이 개혁적이면서도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지도자들조차 미국의 압박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이는 경제적 인센티브 제공 거부나 쿠데타 지원 등의 방식으로 나타났다.[10]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공은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외교 정책 중심지로 만들었다. 미국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제2의 쿠바가 등장하는 것을 막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미국에게 유리하게 만들었고,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주었다. 이 시기 미국은 진보를 위한 동맹이라는 새로운 경제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특히 토지 개혁)을 지원하고 경제적 저개발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쿠바와 같은 혁명의 재발을 막으려는 의도였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10][11] 미국은 페루(1962년)와 에콰도르(1963년)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권위주의 정부들을 승인했는데,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정부의 등장을 막는다는 반공주의적 목표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11]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주의자들은 동구권의 변화, 특히 탈스탈린화와 중소 분쟁, 그리고 쿠바 혁명의 성공에 영향을 받았다. 소련의 노선을 따르던 브라질 공산당(PCB)과 같은 정당들은 쿠바가 제시한 무장 투쟁을 통한 혁명 방식이 자신들의 평화적 사회주의 이행 노선과 배치되었기 때문에 내부적인 혼란을 겪었다. 피델 카스트로 정부는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동맹 관계였지만, 혁명의 수단으로 무장 투쟁을 적극 지지했다.[11] 사회주의 진영은 브라질에게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잠재적 대안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10] 체코슬로바키아의 정보기관인 StB는 브라질을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보 활동을 벌였지만, 1964년 쿠데타는 예상하지 못했다.[11] 사회주의 운동가 플리니우 데 아루다 삼파이우에 따르면, 굴라르는 소련 대사로부터 쿠바 지원만으로도 소련에게 큰 부담이며 브라질까지 지원하기는 어렵다는 경고와 함께, 우익 세력과의 정면 대결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왼쪽


굴라르 대통령은 노동 운동과의 연계 경력 때문에 취임 초기부터 백악관의 의심을 받았다.[10] 양국 관계는 점진적으로 악화되었는데, 주요 요인으로는 외국 기업의 이윤 송금을 제한하는 법률 제정 시도, 쿠바 문제에 대한 이견, 1962년 굴라르가 미국과의 관계 단절 가능성을 내비치며 소련의 지원을 모색한 점, 링컨 고든 주 브라질 미국 대사가 굴라르의 정치적 행보를 쿠데타 시도로 해석한 것, 굴라르 정부의 경제 안정화 계획 실패, 레오넬 브리졸라 당시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의 미국 기업 자산 몰수 조치 등이 있었다.[10][11] 워싱턴에서는 브라질 내 농민 운동의 성장과 1962년에 발각된 소규모 게릴라 활동에 대한 쿠바의 지원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었다.[11] 링컨 고든 대사는 브라질이 "1960년대의 중국"처럼 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상황을 우려했다.[10]

여러 연구들은 굴라르 정부 시기 미국의 역할이 쿠데타 발생 가능성을 높이고 성공에 기여했지만, 위기의 근본적인 동력은 브라질 내부에 있었다고 평가한다.[10] 미국의 영향력이 굴라르 반대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11]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일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역할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강조하기도 했다.[10] 미국이 굴라르 축출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정확한 시점과 이유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대체로 1962년에서 1963년 말 사이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직접적인 전복보다는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10][11]

미국은 1962년 선거에서 반(反)굴라르 후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야당 성향의 주지사들에게 재정 지원을 집중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또한, 브라질 경제에 필수적이었던 미국의 차관 제공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굴라르 정부를 압박했다. 차관 제공의 조건으로 경제 안정화 조치 이행과 노동조합 내 급진 좌파와의 거리두기를 요구했다.[11] 1964년 3월 28일, 링컨 고든 대사는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친민주주의 거리 시위 지원 ... 그리고 의회, 군대, 학생 단체, 친미 노동자, 교회, 기업 내에서 민주적이고 반공산주의적인 정서를 고취"하기 위한 "비밀 작전"이 브라질에서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1962년 7월, 고든 대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브라질에서의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10] CIA는 쿠데타 발생 최소 2년 전부터 군부 내 쿠데타 음모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1963년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할 군부 내 파트너를 물색했다.[10][11] 1963년 12월에 수립된 미국의 비상 계획에는 브라질 내 쿠데타 음모 세력과의 비밀 접촉 유지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여러 시나리오를 상정했는데, 그중 하나는 실제로 발생한 상황(굴라르 축출 후 하원의장 라니에리 마칠리의 권력 승계)과 유사했으며, 다른 하나는 브라질 내 내전 발생 시나리오였다. 내전 발생 시에는 쿠데타 세력이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국제적으로 교전 단체로 인정받은 후에 물류 지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10]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 쿠데타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필요시 쿠데타 세력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승인했다.[10] 미국의 군사적 지원 작전, 암호명 '브라더 샘 작전'은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의 측근인 호세 피네이루 데 울로아 신트라 장군을 브라질 측 창구로 하여 진행되었다.[10] 이 작전은 카리브해에서 유조선에 연료를 채우고, 공군 기지에서 탄약을 준비하며, 항공모함 USS 포레스탈을 포함한 해군 기동 부대를 브라질 해안으로 파견하는 것을 포함했다. 이 함대는 4월 10일경 브라질 해안 도착 예정이었으나, 쿠데타가 예상보다 빨리 성공하면서 카스텔루 브랑쿠 측이 미국의 지원이 불필요하다고 통보함에 따라 작전은 취소되고 함대는 귀환했다.[10][11] 미군 병력의 직접적인 상륙은 계획되거나 실행되지 않았지만, 해군 기동 부대의 파견은 쿠데타 세력에 대한 잠재적 지원 약속이자 굴라르 정부에 대한 위협적인 무력시위의 효과를 가졌다.[11]

미국 정부는 쿠데타 발발 직후인 4월 2일 밤, 라니에리 마칠리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을 매우 신속하게 승인했다. 이는 국내외적으로 미국의 개입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논란이 되었다. 미국 국무부와 브라질 외무부는 새로운 군사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빠르게 새 정부를 승인했지만,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직접적인 문제 제기는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10]

미국 언론에서는 타임지와 뉴욕 타임스가 쿠데타를 "혁명"으로 칭하며 환영하는 논조를 보였으나, 동시에 사태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도 보도했다.[10][11] 반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이탈리아 언론에서는 굴라르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축출된 중도 좌파 개혁가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10] 프랑스에서는 르 몽드르 피가로 등 주요 신문들이 쿠데타를 "좌파가 제안한 사회적 진보에 대한 우파의 반동"으로 규정하고, 반대파에게 무분별하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여 브라질 외무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11]

3. 주앙 굴라르 정부 (1961-1964)



주앙 굴라르(Jango)는 자니우 쿠아드루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군부의 견제로 인해 초기에는 의원 내각제 하에서 제한된 권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8] 1963년 1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제로 복귀하면서 완전한 권한을 확보한 굴라르 정부는 토지 개혁을 포함한 광범위한 '기초 개혁'(Reformas de Base)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시도는 보수적인 의회와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핵심 개혁안들의 의회 통과가 어려워지면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갈등은 극심해졌다. 굴라르 정부는 좌파 세력 및 노동 운동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이는 우파와 군부의 경계심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적으로도 굴라르 정부는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외채 문제에 직면했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제안된 3개년 계획은 정치적 지지 부족과 사회적 합의 도출 실패로 인해 좌초되었고,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군부 내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다. 하사관들의 처우 개선 요구와 수병들의 반란 등 군 기강 관련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군 장교단의 반발을 샀고, 이는 굴라르 정부에 대한 군부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심화되는 사회 갈등과 정치적 위기, 군부와의 대립은 1964년 3월 31일 군사 쿠데타로 이어져 굴라르 정부는 전복되었다.

3. 1. 1961-1962년





냉전 시대에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나, 1950년대까지는 큰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1][2] 미국 정부는 소련의 영향력 확장을 막기 위한 봉쇄 정책을 펴고 있었고, 국내적으로 강경한 외교 정책을 요구하는 압박을 받았다.[1] 이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굴라르와 같이 개혁적이면서도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지도자들조차 미국의 경제적 압박이나 쿠데타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3][1]

1959년 쿠바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주요 관심 지역으로 부상시켰고, 다른 지역에서의 혁명 확산을 막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미국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정부에 대해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했다. 진보를 위한 동맹 프로그램은 민주주의와 개혁(토지 개혁 등)을 지원하여 저개발을 극복하고 제2의 쿠바를 막으려는 의도였으나,[4] 미국은 이러한 이상을 현실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 1962년 페루와 1963년 에콰도르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미국이 권위주의 정부를 인정하는 국제적 현상의 일부였으며,[5]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부의 등장을 막으려는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3]

주앙 굴라르(Jango)는 1961년 9월에 취임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 노선을 추구하며 사회주의 동구권과의 관계를 확대했고, 미국이 제안한 쿠바 제재에 반대했다.[6] 이 정책은 어떤 초강대국에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외채와 외국 자본 규제 문제로 미국과의 협상은 여전히 중요했다.[7]

국내 정치에서는 취임 초기부터 의원 내각제 시행으로 제한된 대통령 권한을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굴라르는 의회에 압력을 가해 의원 내각제 관련 법안을 폐지하거나, 개헌 의회를 소집하거나, 또는 1965년으로 예정된 국민투표를 앞당기려 했다.[8] 대통령제로의 복귀는 굴라르의 반대파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노동계, 군부, 정치권의 강력한 압력을 통해 1962년 9월, 국회는 국민투표를 1963년 1월로 앞당기기로 결정했다.[9]

1962년 10월에는 국회의원과 11개 주지사를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국회의 세력 균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분석과[7] "좌파, 개혁, 노동 후보들이 승리했다"는 분석이 공존한다.[10] 이 선거에서 다국적 기업의 지원을 받은 브라질민주행동연구소(IBAD)는 수많은 야당 후보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지원은 큰 논란을 일으켜 국회 조사 위원회의 조사를 받았고, 다음 해 굴라르 대통령은 IBAD를 폐쇄했다.[7] 1977년, 전 미국 대사 링컨 고든은 이 선거에서 미국이 야당에 자금을 지원했음을 인정했다.[11]

굴라르 대통령은 노동 운동과의 과거 관계로 인해 취임 초기부터 백악관의 의심을 받았다.[4] 양국 관계는 점진적으로 악화되었는데, 여기에는 외국 기업을 겨냥한 이윤 송금법 제정,[10] 쿠바 문제에 대한 이견,[1] 1962년 미국과의 관계 단절 위협 및 소련 지원 모색,[4] 링컨 고든 대사의 굴라르 쿠데타 가능성 해석,[12] 3개년 경제 계획의 실패, 레오넬 브리졸라 주지사의 미국 기업 자산 몰수, 그리고 여러 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1] 워싱턴에서는 농민 연맹[3]과 1962년에 발견된 게릴라 활동에 대한 쿠바의 지원 가능성도 우려 사항이었다.[10] 링컨 고든은 브라질이 "1960년대의 중국이 될 수 있는" "대재앙"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굴라르 정부 시기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2018년의 한 연구는 미국의 역할이 쿠데타 발생 및 성공 가능성을 높였지만, 위기의 근본적인 동력은 브라질 내부에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야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견해는 여러 역사가들이 공유한다.[10] 반면, 1960~70년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2] 미국이 굴라르 축출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시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체로 1962년부터 1963년 말 사이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1][4]

미국은 1962년 선거에서 야당 후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야당 성향 주지사들에게 자원을 배분하는 것 외에도,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브라질 경제에 필수적이었던 미국의 차관 협상은 굴라르 정부에게는 매우 어려웠는데, 이는 차관 제공 조건으로 경제 안정화 조치와 노동조합 내 급진 좌파와의 거리두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1962년 7월, 고든 대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브라질에서의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논의하기도 했다.[2] CIA는 쿠데타 발생 최소 2년 전부터 군부 내 쿠데타 음모를 감시하고 있었다.

3. 2. 1963-1964년



1963년 1월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제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면서,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완전한 권한을 회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그는 기초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핵심적인 토지 개혁 제안은 의회에서 부결되었고 다른 개혁안들의 통과 가능성도 낮았다.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갈등은 우파가 개혁에 반대하고 좌파가 즉각적인 시행을 요구하면서 심화되었다. PSD의 지지 역시 1963년 내내 약화되었다. 정부 제출 법안 통과율은 1959-1962년 평균 13~15%에서 1963년 7%로 급락했다. 그럼에도 굴라르 대통령은 재임 기간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통과시켰다.

한편, 1962년 선거에서 다국적 기업의 자금 지원을 받은 브라질민주행동연구소(IBAD)가 다수의 야당 후보 선거 운동에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고, 국회 조사 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굴라르 대통령은 이듬해 이 연구소를 폐쇄했다. 1977년, 전(前) 브라질 주재 미국 대사 링컨 고든은 당시 선거에서 미국이 야당에 자금을 지원했음을 인정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위기 극복을 위해 3개년 계획이 제안되었다. 이 계획은 임금, 신용, 물가 및 정부 지출을 제한하기 위해 노동자와 기업가 간의 사회적 합의를 요구했으나, 정치적 지지 부족으로 몇 달 만에 폐기되었고 경제 위기는 계속되었다.

1963년 9월, 전년도 선거에서 하사관 후보들의 자격을 인정한 최고 연방 법원(STF)의 결정이 재확인되자, 해군 및 공군 하사관들이 브라질리아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육군 수비대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좌익의 동정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언론은 대통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 되었다.

다음 달인 10월, 카를루스 라세르다 주지사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굴라르 대통령에 대한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에 격분한 군 장관들의 반응 속에서 굴라르 대통령은 의회에 비상사태 선포 승인을 요청했으나, 이는 좌우 양측 모두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철회되었고, 정부의 입지만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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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말, 중도 세력과의 연대 시도가 실패하자 굴라르 대통령은 좌파와의 관계를 다시 강화했다. 1964년 2월 말, 그는 좌파 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대결 노선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3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의 센트럴 도 브라질 기차역 앞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Comício da Central)와 15일 의회에 보낸 메시지는 더 이상 타협은 없다는 신호였다. 대통령은 노동절까지 이어지는 집회와 총파업을 통해 의회가 개혁안을 통과시키도록 압박할 계획이었다. 이에 대한 야당의 반응 역시 강경했다. 15일, 상파울루 주지사 아데마르 지 바호스는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시민들의 거리 시위를 촉구했다. 20일에는 야당 주도로 신과 자유를 위한 가족 행진이 조직되어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해군에서는 25일, 수병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제독들과 수병들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수병들은 투옥된 동료들의 석방과 요구 조건 수용을 주장하며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 좌파는 수병들을 지지했고, 정부는 이들에게 사면을 결정했으나 이는 군 장교들의 격렬한 분노와 언론의 비난을 샀다. 군 내부의 위기는 심각해져 장교들이 함선 승선을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30일 밤, 굴라르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고 하사관 및 사병들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의 아우토모베우 클루비(Automóvel Clube)에서의 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함으로써 군부와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는 공화국 시대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었다.

4. 쿠데타 음모

주앙 굴라르 정부에 반대하는 쿠데타 음모는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비롯한 일부 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10][11] 쿠데타 음모의 구체적인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미국의 개입 등에 대해서는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4. 1. 음모의 시작과 확산

리오 데 자네이루 금속 노동자 연합에서 격앙된 수병들과 대치하는 해병대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쿠데타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1961년 말, 이미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지만 일부 음모 단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음모는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미국과 내통한 극우 성향의 군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2009년 브라질 국무부 문서를 통해 쿠데타에 미국이 깊이 관여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0]

쿠데타 음모 세력은 굴라르 정부의 비동맹주의 정책과 의회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이들은 제국주의반공주의를 신봉했으며, 일부는 파시스트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의 회원이거나 지지자였다.[11]

그러나 쿠데타 직전까지 군부 내 음모는 분산되어 있었고 조직적인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민간 세력의 활동이 더 조직적이었으며, 이들의 사전 불안정화 작업은 군사 개입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부 내 음모자들은 경력을 망칠 것을 우려하는 다수 장교들의 "관성적 합법주의"에 부딪혔고, 쿠데타 전야까지 군대의 대다수는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1964년 3월, 급진 좌파 진영에서 쿠데타 임박설을 제기했지만, 실제 쿠데타는 많은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다가왔다. 굴라르 대통령과 측근들은 음모 활동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핵심 세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연방 정보 및 방첩국(SFICI)은 음모자들의 통신 내용을 감청했지만, 1963년부터 1964년까지 군사 내각 수장이었던 아르제미루 데 아시스 브라질에게 직접 보고되지 않아 별다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쿠데타 방지책은 소위 군사 기구로 불렸는데, 이는 핵심 지휘관 자리에 충성파 장교를 임명하고 사병들의 지지를 기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음모는 1963년 1월 대통령 중심제가 부활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963년 말 발생한 하사관 반란과 비상사태 선포 요구 이후, 많은 장교들이 대통령의 진의를 의심하며 "방어적" 차원에서 음모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10일, 주요 정당인 사회민주당(PSD)이 야당으로 돌아선 것은 민간 및 군사 음모 세력에게 중요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달 내내 고조된 급진주의적 분위기는 대통령이 자가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다는 의심을 증폭시켰고, 이는 국회의원들마저 음모론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군부 내에서는 3월의 일련의 사건들이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이들의 합류를 이끌어내며 쿠데타의 직접적인 방아쇠가 된 것으로 기억된다.

4. 2. 쿠데타 결행 결정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극우 성향 군인들은 미국과 내통하며 쿠데타를 계획했다. 2009년 브라질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쿠데타에 깊이 관여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10] 쿠데타 가담 군인들은 주셀리누 쿠비체크주앙 굴라르비동맹주의 및 의회주의 정책에 강한 반감을 가졌으며, 제국주의반공주의를 신봉했다. 이들 중 일부는 파시스트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의 회원이거나 지지자였다.[11]

굴라르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쿠데타 시도에 직면했으며, 1961년 말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으나, 일부 음모 단체만 존재했다. 쿠데타 직전까지 군사적 음모는 분산되어 있었고 조직화 수준도 낮았다. 반면,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민간 세력의 움직임은 더 조직적이었고, 이들의 사전 불안정화 작업은 군사 개입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 음모자들은 경력을 망칠 것을 우려하는 다수 장교들의 "관성적 합법주의"에 부딪혔으며, 쿠데타 전야에 군대 대부분은 입장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1964년 3월, 급진 좌파는 쿠데타가 임박했다고 경고했지만, 실제 쿠데타는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굴라르 대통령과 측근들은 음모 활동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핵심 세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연방 정보 및 방첩국(SFICI)은 음모자들의 통신을 감청했지만, 1963년부터 1964년까지 군사 내각 수장이었던 아르제미루 데 아시스 브라질에게 직접 보고되지 않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그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 정부의 쿠데타 방지책은 군사 기구로 알려졌는데, 이는 핵심 지휘관에 충성스러운 장교를 임명하고 사병들의 지지를 기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963년 대통령 지지 집회


쿠데타 음모는 1963년 1월 대통령 중심제가 부활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일부에서는 쿠데타 자체가 1963년부터 준비되었다고 본다.) 하사관 반란과 1963년 말 비상사태 선포 요구 이후, 많은 장교들이 대통령의 의도를 의심하며 "방어적" 차원에서 음모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10일, PSD가 야당으로 돌아선 것은 민간 및 군사 음모자들에게 중요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달 내내 급진주의 세력의 활동은 대통령이 자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심을 증폭시켰고, 국회의원들까지 음모자들에게 동조하게 만들었다. 군부 내에서는 3월의 일련의 사건들이 입장을 정하지 못했던 장교들의 가담을 이끌어내며 쿠데타의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학자들(플로레스탄 페르난데스, 카이우 나바루 지 톨레두, 루실리아 지 알메이다 네베스 델가두, 자코브 고렌데르 등)은 쿠데타를 "점증하고 자율적인 시민 사회 조직"에 대한 예방적 조치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렌데르는 1964년 초 브라질이 혁명 전 상황에 있었으며 쿠데타는 이에 대한 반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옥타비우 이아니와 프란시스코 베포르트 등은 바르가스 시대 이후의 포퓰리즘이 노동자들의 자율성 증대와 국제 자본과 연계된 기업가들의 이탈로 붕괴되었다고 분석했다.

끊임없는 파업은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긍정적 신호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정부를 약화시키고 서비스 중단으로 국민 불편을 초래하며 기업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파는 "신디칼리스트 공화국"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군부 증언에 따르면, 노동조합 활동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침투되어 정부에 대한 압박 능력이 커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사회 전체의 이익보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에 대한 반감과 군부의 영향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굴라르 대통령은 노조원들에게 관대했고, PTB와 PCB의 노조 내 영향력 확대를 용인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노조의 압력으로 경제 계획(삼년 계획)이 좌초되자 오히려 피해를 입었고, 통제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군대 내에서 사병들의 정치적 동원은 장교들의 정치 참여와는 별개로 군대 계층과 규율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강한 거부감을 샀다. 1963년 젤시 호드리게스 코레아 소위의 연설("우리는 우리의 작업 도구를 가져가 사람들과 함께 개혁을 할 것이며, 반동적인 신사들은 군인의 작업 도구가 소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은 장교들 사이에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했다. 좌파는 군 하위 계급이 자신들을 방어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그럴 만한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굴라르 대통령이 사병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고 Automóvel Clube do Brasil에서의 연설과 해군 반란에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은 군부 보수파에게 그가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군부 증언에서는 계층과 규율에 대한 공격이 쿠데타의 주요 동기 중 하나로 꾸준히 언급된다.

역사학계는 1960년대 군대 하위 계급에 규율 문제가 있었다는 데 동의하지만, 특히 육군(해군이나 공군이 아님)에서는 하사관들이 충성심을 유지했다는 증거도 제시된다. 많은 저자와 좌파의 상당 부분은 특히 해군 반란을 해군 또는 CIA의 사주자의 작품으로 간주한다. 더 최근의 연구들은 이러한 비난과 군대 하위 계급이 전복되고 있다는 보수적 견해 모두에 이의를 제기한다. 대신, 그들은 자율적인 행위자로 간주된다. (이러한 비난의 주요 대상은 카보 안셀모인 주제 안셀모 도스 산토스이다.)

4. 3. 쿠데타 임박 정보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쿠데타 시도를 겪었을 뿐만 아니라, 임기 초부터 또 다른 쿠데타 음모의 대상이 되었다. 1961년 말에는 이미 일부 음모 단체가 존재했지만,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다. 쿠데타 직전까지 군사적 음모는 분산되어 있었고 조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반면, 정부를 약화시키려는 민간 세력의 움직임은 비교적 조직적이었으며, 이들의 사전 불안정화 작업은 군사 개입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 음모자들은 경력을 망칠 것을 우려하는 다수 장교들의 소극적인 합법주의에 부딪혔고, 쿠데타 전야까지 군대의 대다수는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수병 반란 당시 기본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힌 포스터


1964년 3월, 급진 좌파 진영에서는 쿠데타가 임박했음을 경고했지만, 실제 쿠데타는 많은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다가왔다. 굴라르 대통령과 측근들은 음모 활동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핵심 세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연방 정보 및 방첩국(SFICI)은 음모자들의 메시지를 일부 가로챘지만, 당시 군사 내각 수장이었던 아르제미루 데 아시스 브라질 장군에게 직접 보고되지 않아 별다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시스 브라질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었다. 정부의 쿠데타 방지책은 이른바 주앙 굴라르 정부 시기의 군사 기구로 알려졌는데, 이는 핵심 지휘관 자리에 충성스러운 장교를 임명하는 것과 더불어 사병들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에 의존했다.

쿠데타 음모는 1963년 1월 대통령 중심제가 부활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963년 하사관 반란과 그해 말 비상사태 선포 요구 이후, 많은 장교들이 대통령의 의도를 의심하며 '방어적' 차원에서 음모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10일, 사회민주당(PSD)이 야당으로 돌아선 것은 민간 및 군사 음모자들에게 중요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달 내내 급진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대통령이 자가 쿠데타를 시도하려 한다는 의심이 퍼졌고, 이는 국회의원들까지 음모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군부 내에서는 3월의 여러 사건들이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했던 군인들의 가담을 이끌어내 쿠데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쿠데타의 주요 목표가 굴라르 대통령이 추진하던 개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굴라르 대통령 자신도 쿠데타 당시 탄크레두 네베스에게 목표는 자신이 아니라 개혁이며, 개혁을 포기하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개혁안들은 사회 특정 계층에게는 이익을, 다른 계층에게는 손해를 안겨주었으며, 급진 좌파와 연관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발전주의 프로젝트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대 세력에 의해 혁명적인 시도로 매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개혁 저지가 쿠데타의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동기였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굴라르 대통령이 임기 초 보수 세력의 지지를 받기도 했고, 야당 의원들 역시 개혁 자체에 전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토지 개혁과 같은 일부 제안은 특정 집단의 강력한 반발을 샀지만, 일부 반공주의 세력은 오히려 이를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수단으로 보기도 했다. 이는 당시 미국이 주도한 진보를 위한 동맹의 논리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개혁 추진 실패와 쿠데타 발발의 원인을 굴라르 대통령의 협상 능력 부족이나, 당시 정치 시스템의 "의사 결정 마비", 그리고 좌우 양측의 급진화와 상호 존중 부족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제도권 내에서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양측의 극단주의로 인해 무산되었으며, 따라서 쿠데타로 실각한 세력 역시 자신들의 패배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루이스 알베르토 모니즈 반데이라와 같은 학자는 굴라르 대통령이 오히려 화해를 시도했기 때문에 몰락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2009년 브라질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극우 성향 군인들이 주도한 이 쿠데타에는 미국이 깊숙이 관여하여 군사적 지원까지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10] 쿠데타 세력은 주셀리누 쿠비체크와 굴라르의 비동맹주의 및 의회주의 정책에 강한 반감을 가졌으며, 제국주의반공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었다. 상당수는 파시스트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의 회원이거나 지지자였다.[11] 쿠데타 이후 들어선 극우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미국의 정치, 경제적 간섭은 더욱 심화되었고,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심각한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다.[10]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을 비롯한 여러 공작과 전쟁을 지원하며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다수의 극우 쿠데타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12]

5. 쿠데타의 요인, 이유 및 해석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계획했다. 2009년에 공개된 브라질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쿠데타에 깊이 관여했으며 군사적 지원도 제공했다.[10] 쿠데타 세력은 주앙 굴라르 정부의 비동맹주의 정책과 의회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졌으며, 제국주의반공주의를 신봉했다. 이들 중 일부는 파시스트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의 회원이거나 지지자였다.[11]

쿠데타로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실각했고,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가 이끄는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이 시기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은 심화되었으며, 군사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심각한 경제 문제를 야기했다.[10]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 등을 지원하며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여러 극우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12]

1970년, 언론은 "혁명" 기념일을 기록한다. 다음은 [http://memoria.bn.br/pdf/089842/per089842_1970_23606.pdf ''Correio da Manhã'', 1970년 4월 1일]에 사용된 용어에 대한 설명이다.


카스텔루 브랑쿠는 집권 후 자신들이 일으킨 사건을 "쿠데타가 아닌 혁명"으로 정의했다. 이 "혁명"이라는 용어는 최초의 제도법 제1호(AI-1)에도 명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처럼 기존 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의미하기보다는, 정부를 전복하고 민중 주권을 재확인하려 했던 전통적인 군사 봉기 방식인 ''선언''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이 용어는 군부 독재 기간 내내 군 내부에서 사용되었지만, 후임 대통령인 에르네스토 가이젤은 1964년의 움직임이 단지 "굴라르에 반대하고, 부패에 반대하고, 전복에 반대하는" 것이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사회학자 질베르투 프레이르는 이를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증진하는 '백색 혁명'"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군사력을 동원해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기존의 법질서 위에 군림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명백한 "쿠데타"로 규정한다. 이는 AI-1 서문에서 "헌법적 절차는 정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승리한 혁명은 그 승리에 앞선 규범성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법적 규범을 정의한다"고 밝힌 점에서도 드러난다. 현대적 의미의 혁명이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동반하는 것과 달리, 브라질 쿠데타는 무질서에 대한 기존 질서의 방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일부에서는 "반혁명"이나 "반쿠데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오늘날 정치적 담론에서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쿠데타"라는 용어를 거부하는 것은 역사 수정주의 또는 역사 부정주의로 비판받는다.

쿠데타를 "시민-군사적" 쿠데타로 분류하는 시각도 널리 퍼져 있다. 이는 1981년 르네 아르망 드레이푸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단순히 많은 시민이 쿠데타를 지지했다는 의미를 넘어 특정 민간 세력(특히 기업가 집단)이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 직접 참여했음을 강조한다. 물론 쿠데타의 최종 단계와 실행 과정에서는 병력 동원 등 군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의 등장은 예상과 달리 장기 군사 독재의 시작을 알렸다. 1985년 재민주화와 신 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군부 출신 대통령들이 연이어 집권했다. 군부와 민간 협력 세력은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는 자체적인 법적 틀(제도적 조치), 개발 중심의 국가 목표, 강력한 감시 시스템, 검열, 정치적 탄압 등을 특징으로 했다. 독재 기간 중에도 정치 상황에 따라 새로운 규칙을 부과하는 "혁명의 재활성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독재 정권을 이끈 다섯 명의 대통령(카스텔루 브랑쿠(1964–1967), 코스타 이 실바(1967–1969), 메디시(1969–1974), 가이젤(1974–1979), 주앙 피게이레두(1979–1985))은 모두 쿠데타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5][3] 많은 장교들이 쿠데타 이후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는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쿠데타 지도자들 사이에는 ESG 훈련을 받은 그룹과 그들의 민간 동맹을 제외하면 명확하고 통일된 국가 운영 계획이 부족했다. 쿠데타 직후부터 연합 세력 내부에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새 정권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부터 더욱 강력한 숙청을 요구하는 강경파의 목소리까지 다양한 입장이 충돌했다.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들 중 일부는 권력에서 소외되기도 했다.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쿠데타 지도자들은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 출신들에게 밀려났고, 마갈량이스 핀투의 대통령 도전은 좌절되었으며, 모랑 필류는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자리로 밀려났다. 상파울루의 아데마르 드 바루스와 크루엘은 카스텔루 브랑쿠에 대항하는 반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었다 실패했고, 카를루스 라세르다는 과거의 적들과 손잡고 독재 정권에 맞서다 결국 정치적으로 탄압받았다.

정책 면에서는 굴라르 정부가 추진하던 '기초 개혁' 대신 '보수적 현대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고 소득 집중이 심화되었으며,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경제 기적 시기를 거쳤으나 1980년대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았다. 농업 정책에서는 토지 집중 구조가 더욱 강화되었다. 경제 정책은 재무부와 기획부에서 IPES 관련 인사들의 영향력, 국가 안보 교리(DSN)의 이상, 쿠데타 이전의 경제 논쟁, 그리고 당면한 정치적 필요성 등을 반영했다. 이 기간 동안 공공 부문이 크게 확장되면서 일부 사업가들은 1964년 쿠데타의 이상이 배신당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새로운 정권은 군부의 민족주의, 특히 ESG와 DSN이 정의하는 민족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이는 제4공화국 시대 자칭 민족주의 군벌들의 사고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들 민족주의 군벌들은 ESG 파벌을 국가 자원을 국제 자본에 넘겨주는 'entreguistas|엔트레기스타스pt'라고 비난했다. 가이젤 정부 시기에는 민족주의와 '엔트레기스무(entreguismo)' 논쟁이 독재 정권 내부 권력 다툼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브라질의 미국과의 관계는 1950년대부터 군부 내 논쟁거리였다. 1962년에도 링컨 고든 미국 대사는 브라질 군부가 미국에 우호적이라고 평가했다. 카스텔루 브랑쿠는 브라질의 외교 노선을 미국과 일치시켰고 상당한 지원을 받았으며, 국제 자본에 대한 개방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후 독재 정권 기간 동안 양국 관계는 점차 냉각되어 가이젤 정부 때는 위기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카스텔루 브랑쿠의 친미 노선은 군부 내 강경파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이들 중에는 반미주의 성향도 존재했다. 사회주의권과의 관계에서는 쿠바와의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굴라르 정부 때 재개된 소련과의 관계는 유지되었고 경제 관계도 구축되었다.

급진 좌파 진영에서는 독재 정권의 수립이 PCB의 단계적 혁명 노선에 대한 비판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좌파의 무장 투쟁 시작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장 투쟁 구상은 쿠데타 이전에도 존재했으며(농민 연맹 관련 게릴라 계획 등), 독재 정권이 아니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5. 1. 사회 운동에 대한 반작용



주세리누 쿠비체크(JK) 정부로부터 현대화되었지만 불균형한 경제를 물려받은 자니우 콰드로스와 조앙 굴라르트(장고)는 1960년대 초 브라질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특히 인플레이션 증가와 국제수지 적자가 심각했다.[1] 인플레이션은 1960년 30.5%에서 1963년 79.9%, 1964년 92.1%로 치솟았고, GDP 성장률은 1961년 8.6%에서 1963년 0.6%로 급락했다.[2] 임금 삭감은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 모두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3] 이러한 경제 위기는 국내외 이익 단체의 압력 속에서 해결책을 찾기 어려웠다.[1]

생활비 상승은 노동조합 운동의 조직화와 활동 증가로 이어졌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180건이었던 파업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430건으로 늘어났다. 노동조합법 테두리 밖에서 등장한 노동자총사령부(Comando Geral dos Trabalhadores, CGT)는 "브라질 역사상 명백한 정치적 성격의 첫 번째 파업"을 조직하는 등 영향력을 키워나갔다.[4]

국제식량정책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식량 부족 현상은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고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5] 당시 브라질은 현재보다 농업 중심 국가였으며(1960년 도시 인구 비율 44.67%), 특히 브라질 북동부 지역은 도시화율이 33.89%에 불과했다.[6] 토지는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낡은 농업 기술이 사용되었다.[3] 사회적 동요는 농촌으로 확산되어 토지 점거와 폭력적 충돌이 발생했다.[4] 북동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민 연맹은 브라질 공산당(PCB)의 온건 노선 대신 "'법 또는 무력에 의한 토지 개혁'"을 주장하며 급진화되었다.[7][8] 그러나 정부의 농촌 노동조합 규제와 가톨릭교회, PCB의 노조 조직화 노력으로 1963년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9]

이 시기는 격렬한 대중 동원이 특징이었다.[10] 노동조합원과 농민 연맹 회원들은 다른 좌파 세력과 연대했다. 이들은 문맹자와 군인의 투표권 확대, 은행·재정·행정·도시·토지·대학 개혁(통칭 "기초 개혁"), 공산당 합법화, 독자적 외교 노선 유지, 외국 자본 통제 및 경제 전략 부문 국유화 등을 요구하며 단결했다.[11] 좌파 세력과 굴라르 대통령은 서로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인식하면서도 개혁 달성을 위해 협력을 모색했다. 하지만 좌파는 굴라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12] 그가 우파 정치 세력과 타협하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군대 내부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하사관과 수병 등 하급 군인들은 선거 출마권, 결혼권 등 내부적인 권리 요구와 함께 개혁을 지지하며 장교들과 갈등을 빚었다.[10] 조직된 지식인 그룹과 가톨릭교회 신자 일부가 결성한 민중 행동(Ação Popular)도 활동했다. 학생들은 전국학생연합(UNE)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브라질 공산당(PCB)은 PTB와 협력하며 노동조합 내에서 조직력을 키웠다. 레오넬 브리졸라는 미국 기업 자산 몰수 조치 등으로 명성을 얻으며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11] 그는 기초 개혁 지지 단체들을 '민중 동원 전선'(Frente de Mobilização Popular)으로 통합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온제 그룹"(Grupo dos Onze)을 조직했다.

1964년 4월 압수된 "파괴 활동 자료"


한편, 보수 야당 세력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중앙정보국(CIA)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브라질 민주 행동 연구소(Instituto Brasileiro de Ação Democrática, IBAD)와 브라질 재계 핵심 인사들이 모인 사회 연구 연구소(Instituto de Pesquisas e Estudos Sociais, IPES)가 부상했다. 이들 조직은 반공 이념 선전을 넘어 쿠데타 음모의 중심 역할을 했다.

반공주의는 쿠데타의 핵심 동력이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브라질에서는 반공 정서가 극도로 고조되었다. 이는 냉전이라는 국제적 배경과 맞물려 있었지만, 1935년 공산주의 봉기 경험 등 브라질 내부의 역사적 뿌리도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자들은 대부분 친미 성향이었고 공산주의를 소련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문제는 굴라르 대통령 개인보다는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장고는 PTB를 공산주의 방파제에서 PCB의 동맹으로 변화시킨 책임자로 여겨졌고, 1961년 그의 취임을 막으려던 시도 역시 반공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반공주의자들은 굴라르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라고 보았지만, 그의 좌파 동맹이 공산주의 세력 확장의 길을 열어줄 것을 두려워했다. 군부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정부에 침투했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있었으나, 장고를 직접 공산주의와 연관 짓는 데는 의견이 갈렸다. 쿠데타 주동자 중 한 명인 올림피오 모라웅 필류 장군은 굴라르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그와 브리졸라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제거되고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가 권력을 잡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은 21세기 일부 군사 저술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주 브라질 미국 대사였던 링컨 고든 역시 굴라르가 비공산주의적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지만, 그의 무능함 때문에 결국 공산주의 쿠데타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PCB는 노동조합, 지식인 사회, 정부 내에서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반대 세력은 이를 과장했다. 쿠데타 이후 드러난 공산주의자들의 취약함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일부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는 대통령 주도 쿠데타를 우려하면서도, 대중에게는 임박한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을 선전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급진 좌파 세력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군부 우파는 공산주의자의 정의를 매우 유연하게 적용했다. 실제 PCB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국민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통한 평화적이고 단계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혁명 전쟁 교리'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평화주의를 기만 전술이자 권력 장악을 위한 첫 단계로 간주했다.

혁명 전쟁 교리는 군 장교들에게 교육되었고, UDN 소속 하원의원 빌라크 핀투나 신문 ''O Estado de S. Paulo''의 줄리우 지 메스키타 필류 같은 민간인들에 의해서도 전파되었다. 이 교리는 공산주의 혁명을 5단계로 상정했는데, 1단계 심리전, 2단계 조직망 구축 및 국가기구 침투, 3단계 게릴라전 및 테러, 4단계 해방구 설치, 5단계 무력 권력 장악이었다. 당시 브라질의 사회 불안, 농민 연맹과 온제 그룹의 활동 등은 혁명 전쟁이 이미 진행 중이며 3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로 해석되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농민 연맹이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익 세력은 브라질 농민에게서 혁명적 잠재력을 보았고, 이는 쿠데타를 합법성 수호 행위로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좌파 일부도 비슷한 인식을 공유했으며, 연맹 일부는 쿠바의 지원을 받은 게릴라 조직 티라덴치스 혁명 운동(Movimento Revolucionário Tiradentes)을 결성하기도 했다. 1962년 이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된 사건은 실제 규모에 비해 과도한 파장을 일으켰다.[8] 그러나 정작 쿠데타 발생 시 지도자들이 예상했던 북동부에서의 강력한 농민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르남부쿠 주에서 일부 농민 저항이 있었으나 비무장 상태였다.

레오넬 브리졸라가 조직한 온제 그룹 역시 공산주의 및 혁명 전쟁과 연관되어 보수 세력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수천 명 규모로 추정되는 이 그룹은 미래의 쿠데타에 저항하기 위한 "혁명 정당의 씨앗"으로 구상되었다. 브리졸라는 이들의 활동이 합법적이며 준군사적 성격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하사관 지휘 아래 병영을 점거하고 장교를 체포할 계획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조직이 미비하여 쿠데타 당시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언론은 온제 그룹의 활동에 대해 많은 보도를 했지만, 대부분 과장되거나 상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쿠데타 음모자들은 여론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군부의 기억 속에서 신과 자유를 위한 가족 행진, 중산층, 여성, 언론은 군사 개입을 요구하고 정당화하는 요소였다. 상파울루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이 행진은 동원된 반정부 세력의 규모와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은행가, 사업가, 지주, 상인, 정치인, 법조인, 그리고 특히 자유 전문직, 소상공인, 주부 등 도시 중산층으로 구성되었다. 육체 노동자들도 일부 참여했다. IPES는 중산층을 동원하기 위해 행진 조직에 관여했지만, 중산층 역시 급진적 개혁으로 인한 손실을 우려하는 자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행진은 "선동, 무질서, 부패"에 반대하는 반포퓰리즘과 무신론 및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반공주의 이념을 표출하며 개인의 자유와 기독교적 가치 수호를 내세웠다. 고용주 단체, 시민 단체, 여성민주운동(Movimento Democrático Feminino)과 같은 여성 단체들이 적극 참여했다. 여성들의 참여는 행사의 조직과 '가족', '종교'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공주의는 주로 가톨릭적 색채를 띠었지만, 개신교, 유대교, 심령술 신봉자, 심지어 움반다 신자들까지 아우르는 초교파적 성격을 보이기도 했다. 패트릭 페이튼 신부를 비롯한 사제, 목사, 랍비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내부는 분열되어 있었고, 보수파가 다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신교 교단 중에서는 장로교의 참여가 두드러졌으며, 침례교, 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등 다른 교단에서도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주요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굴라르 대통령 축출을 요구하고 쿠데타 발생을 환영하며 길을 열었다. ''Jornal do Brasil'', ''Correio da Manhã'', ''O Globo'', ''Folha de S.Paulo'', ''O Estado de S. Paulo'' 등은 공개적으로 굴라르 축출을 지지했으며, 특히 ''Correio da Manhã''의 "''Fora!''"(나가라!)와 "''Basta!''"(이제 그만!) 사설은 유명하다. ''Estado de S. Paulo'', ''O Globo'', ''Tribuna da Imprensa''는 쿠데타 음모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주요 신문 중 유일하게 ''Última Hora''만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았다. 소규모 신문 ''O Semanário'' 역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5. 2. 기본 개혁의 교착 상태



주세리누 쿠비체크(JK) 대통령 시기 추진된 개발 정책은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증가와 국제수지 적자 심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남겼다. 장고 정부는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은 1960년 30.5%에서 1963년 79.9%, 1964년에는 92.1%까지 치솟았고, 브라질의 GDP 성장률은 1961년 8.6%에서 1963년 0.6%로 급락했다. 실질 임금 하락은 도시의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키웠다. 경제 위기 극복의 어려움은 국내(노동자 및 기업) 및 외부 이익 단체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생활비 상승에 따라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해졌다. 1958년에서 1960년 사이 180건이었던 파업은 1961년부터 1963년까지 430건으로 증가했다. 노동자총사령부(CGT)는 법외 조직으로 등장하여 "브라질 역사상 명백한 정치적 성격의 첫 번째 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국제식량정책연구소는 식량 부족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고 지적했다. 당시 브라질은 현재보다 농업 국가 성격이 강했으며(1960년 도시 인구 비율 44.67%), 토지는 소수에게 집중 소유되고 낙후된 영농 기술이 일반적이었다. 사회 변화 요구는 농촌으로 확산되어 토지 점거와 같은 직접적인 행동과 폭력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농민 연맹은 특히 북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법 또는 힘에 의한 토지 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점차 급진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는 브라질 공산당(PCB)의 온건 노선과 대비되었다. 농민 연맹은 정부의 농촌 노동조합 지원 정책과 가톨릭 교회 및 PCB의 경쟁적인 노조 조직화로 1963년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 시기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다양한 사회 세력의 요구가 분출하며 대중 동원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때였다. 이들 좌파 세력은 다양한 배경을 가졌지만, 은행, 재정, 행정, 도시, 토지, 대학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 개혁을 요구하는 데 한목소리를 냈는데, 이를 통칭하여 '기본 개혁' (Reformas de Base)이라 불렀다. 문맹자와 사병의 투표권 확대, 공산당 합법화, 독자적인 외교 노선 추구, 외국 자본 규제 및 주요 산업 국유화 등도 주요 요구 사항에 포함되었다. 좌파 세력과 굴라르 대통령은 각자의 입장에서 기본 개혁 추진을 위해 협력 관계를 모색했지만, 좌파는 굴라르의 타협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등 긴장 관계도 존재했다.

군대 내에서도 하사관과 수병 등 하위 계급 군인들이 선거 출마권, 결혼권 등 내부적인 권리 요구와 함께 기본 개혁을 지지하며 장교단과 갈등을 빚었다. 학생들은 전국학생연합(UNE)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PCB는 PTB와 협력하며 노동조합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레오넬 브리졸라는 미국 기업 자산 몰수 조치 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기본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온제 그룹"을 조직했다.

한편, 개혁에 반대하는 우파 진영에서는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브라질 민주 행동 연구소(IBAD)와 브라질 재계가 주축이 된 사회 연구 연구소(IPES) 등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며 반정부 선전과 쿠데타 음모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제가 복원되면서 굴라르 대통령은 완전한 행정 권한을 확보하고 개혁 추진의 동력을 얻었다. 그는 기본 개혁, 특히 토지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보수 세력이 장악한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고 다른 개혁안 처리도 난항을 겪었다. 개혁을 둘러싸고 즉각적인 실행을 요구하는 좌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우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행정부와 의회 간의 갈등은 깊어졌다. 중도 성향의 사회민주당(PSD)마저 점차 등을 돌리면서 의회 내 법안 통과율은 1959-1962년 평균 13-15%에서 1963년 7%로 급락했다. 그럼에도 굴라르 정부는 몇몇 중요한 조치들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3개년 계획은 임금, 신용, 물가, 정부 지출 통제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요구했으나, 노동자와 기업가 양측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정치적 지지 부족으로 몇 달 만에 폐기되어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63년 9월, 선거 출마 자격을 인정받은 해군 및 공군 하사관들이 브라질리아에서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무장 시위를 벌인 사건은 군 내부의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굴라르 정부에 정치적 부담을 안겼다. 이 사건은 좌파 진영의 동정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언론의 비판도 거세졌다. 10월에는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인 카를루스 라세르다 과나바라 주지사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공공연히 언급했다. 이에 군 장관들이 반발하자 굴라르 대통령은 의회에 비상사태 선포를 요청했으나, 좌우 양측의 거센 비판 속에 요청을 철회하면서 정치적 입지만 더욱 약화되었다.

1963년 말 중도 세력과의 연대 시도가 실패한 후, 굴라르 대통령은 좌파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1964년 2월 말부터 그는 좌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결적인 노선을 분명히 했다. 3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 센트럴 역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군중 집회 연설과 15일 의회에 보낸 메시지를 통해 굴라르 대통령은 기본 개혁의 즉각적인 추진 의지를 천명하며 타협 노선을 접었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5월 1일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집회와 총파업을 통해 의회를 압박하여 개혁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이에 야당과 보수 세력은 상파울루 주지사 아데마르 지 바호스의 대통령 탄핵 요구(3월 15일)와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신과 자유를 위한 가족 행진(3월 20일 시작) 등으로 맞섰다. 3월 25일에는 해군 수병들이 처우 개선과 노동조합 활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가 이들에게 사면 조치를 내리자, 군 장교단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보수 언론의 비난도 거세졌다.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굴라르 대통령은 3월 30일 저녁, 하사관 및 수병들과 함께 자동차 클럽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여 개혁 지지 연설을 함으로써 군 수뇌부와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쿠데타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5. 3. 반공주의

연구자들과 군부 모두 반공주의를 쿠데타의 핵심적인 배경으로 본다.[11] 1961년부터 1964년 사이 브라질에서는 반공주의 정서가 크게 확산되었다. 이는 국제적인 냉전 분위기와 관련이 깊었으며, 브라질의 반공주의자들은 대체로 친미 성향을 보이며 공산주의를 소련 제국주의의 연장선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공 정서는 1935년 공산주의 봉기 시도 이후 브라질 내부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었다.

반공주의자들이 문제 삼은 것은 굴라르트 개인이라기보다는,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굴라르트는 브라질 노동당(PTB)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에서 브라질 공산당(PCB)의 동맹 관계로 변화시킨 인물로 평가받았고, 1961년 그의 부통령 취임을 저지하려던 시도에도 이미 반공주의적 동기가 작용했다. 반공주의자들 역시 굴라르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가 공산주의 세력 확장의 길을 열어줄 것을 우려했다. 육군 내부 기록을 보면, 정부 내 공산주의자 침투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했지만, 굴라르트와 공산주의를 직접 연결 짓는 데는 의견이 갈렸다. 쿠데타를 주도한 올림피오 모라웅 필류 장군은 굴라르트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고 보았으나, 그와 브리졸라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제거되고 결국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시각은 21세기 일부 군사 관련 저술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군 외부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있었는데, 당시 주 브라질 미국 대사였던 링컨 고든은 굴라르트가 스스로 비공산주의적 쿠데타를 시도할 수도 있지만, 그의 정치적 역량 부족으로 인해 결국 공산주의 쿠데타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브라질 공산당(PCB)은 노동조합, 지식인 사회, 정부 일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반대 세력은 이를 과장하여 선전했다. 쿠데타 이후 드러난 공산주의 세력의 예상외의 취약함은 이러한 과장을 방증한다. 내부 사정을 아는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지원을 받는 대통령 쿠데타를 생각했지만, 대중에게는 임박한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또한 전체 급진 좌파에 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붙였으며—군부 우파는 누가 공산주의자인지에 대한 유연한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브라질 공산당(PCB)이 아닌 좌파 내의 소규모 단체들이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했다. 브라질 공산당(PCB)은 여러 단계의 혁명을 믿었으며, 그 중 첫 번째 단계는 평화적이고 부르주아-민주적이며 "국민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군부는 이를 혁명 전쟁 교리의 렌즈를 통해 보았고, 평화주의를 기만으로, 심리적 조작의 전술로 간주했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쪽도 스스로를 반민주적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의 개념은 달랐다. 좌파에게는 개혁과 동의어였고, 우파에게는 법적 형식주의와 동의어였다. 좌파의 반민주적 성격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우파는 민주주의를 위험한 이념과 싸우기 위한 자유의 제한 또는 자유 기업을 의미하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반공 단체의 이름에서 흔하게 사용되었으며, 단순한 공허한 라벨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뒤따른 권위주의적 미래는 실망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은 공격을 수행하면서 방어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합법성의 기치를 스스로 내걸었다. 법과 헌법의 방어는 명시적으로 정부를 겨냥하지 않고 1964년 3월 PSD 전당대회 연설에서 나타났다. 브라질 변호사 협회는 대통령이 법 질서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군대에서는 1963년부터 무력 사용에 대한 법적 근거가 1964년 3월 20일 카스텔루 브랑쿠가 발표한 비밀 서한과 같은 문서에 유포되었다. 카스텔루는 충실한 사람의 이미지를 키웠고, 이는 변절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헌법과 입헌주의 혁명은 상파울루에서 열린 가족의 행진에서 강력한 주제였다. 쿠데타 당시 신문 사설은 정부를 법적 문제를 위반한 것으로 제시했다. 국회의원들은 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을 제거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이 합법성은 "도덕적, 전통적, 기독교적 법" 또는 심지어 "국민의 뜻과 관련된 혁명적 합법성"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 관점에서 불법성은 CGT의 행동, 군대의 계층 구조의 붕괴, 일반화된 혼란과 무질서, 위헌적 수단에 의한 기본 개혁의 승인 및 대통령의 통치 연장 의도와 자가 쿠데타 시도였다.

5. 4. 합법성과 민주주의



쿠데타 이후 집권한 카스텔루 브랑쿠는 자신을 권좌에 앉힌 과정을 "쿠데타가 아닌 혁명"이라고 규정했다.[1] 이러한 '혁명'이라는 용어는 쿠데타 직후 제정된 제도법 제1호(AI-1)에도 등장한다. 여기서 '혁명'은 1917년 러시아 혁명처럼 기존 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보다는, 정부를 전복하고 민중 주권을 재확인하려는 전통적인 군사 봉기 방식인 ''선언''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2] 이 용어는 군부 독재 기간 동안 군 내부에서 계속 사용되었다.[3][4] 그러나 에르네스토 가이젤 대통령은 1964년의 사건이 이상을 추구하는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 단지 "굴라르에 반대하고, 부패에 반대하고, 전복에 반대하는" 움직임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5] 한편, 사회학자 질베르투 프레이르는 이를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증진하는 '백색 혁명'"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6]

하지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명백한 "쿠데타"로 규정한다.[7] 군사력을 동원하여 국가 기구를 장악했고, 새로운 권력 집단이 이전의 법질서 위에 군림했기 때문이다. 이는 AI-1 서문에서도 드러나는데, "헌법적 절차는 정부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고", "승리한 혁명은 그 승리에 앞선 규범성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법적 규범을 정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8] 권력 장악은 혁명에서도 일어나지만, 현대적 의미의 혁명은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의 심오한 변화"를 동반하는 반면, 브라질에서 일어난 일은 무질서에 대한 기존 질서의 방어로 정의되었다.[9] 일부 군 장교나 학자들은 이를 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를 담아 "반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며,[10] "반쿠데타"라는 용어도 사용된다. 오늘날 정치 담론에서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쿠데타"라는 용어를 거부하는 것은 역사 수정주의 또는 역사 부정주의로 간주된다.[11]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과 반대 세력 모두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다. 좌파 진영에게 민주주의는 사회 개혁과 동의어였던 반면, 우파 진영에게는 법적 형식주의를 지키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위험 사상(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자유를 제한하거나 자유 기업 체제를 수호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 좌파의 반민주적 성격에 대한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반공 단체의 이름에 흔히 사용되었지만, 이것이 단순한 구호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듯, 쿠데타 이후 들어선 권위주의 정권은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 행동을 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를 '합법성' 수호로 포장하는 방어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법과 헌법의 수호라는 명분은 1964년 3월 사회민주당(PSD) 전당대회 연설에서 명시적으로 정부를 겨냥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브라질 변호사 협회(OAB)는 굴라르 대통령이 법 질서를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군 내부에서도 쿠데타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1964년 3월 20일 카스텔루 브랑쿠가 발표한 비밀 서한이 있다. 카스텔루는 헌법 수호자의 이미지를 내세워 다른 군 지휘관들의 동조를 얻어냈다. 상파울루에서 열린 신과 자유를 위한 가족 행진에서도 헌법 수호는 주요 구호였다. 당시 언론 사설들도 정부가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국회의원들 역시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대통령 축출이 불가피하다고 정당화했다.

이들이 내세운 '합법성'은 때로는 "도덕적, 전통적, 기독교적 법" 또는 "국민의 뜻과 관련된 혁명적 합법성"과 연결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총사령부(CGT)의 활동, 군대 내 하극상(수병 반란 등), 사회 혼란과 무질서, 위헌적인 방식의 기본 개혁 추진 시도, 그리고 굴라르 대통령의 집권 연장 및 자가 쿠데타 시도 의혹 등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반공주의와는 별개로, 굴라르 대통령에 대한 카우디요주의(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권위주의적 통치) 비난도 제기되었다. 카를루스 라세르다를 비롯한 반대파와 일부 언론은 굴라르가 기회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이며 독재적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법학자 아폰수 아리노스는 굴라르가 제툴리우 바르가스로부터 물려받은 카우디요주의와 제도를 무시하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보나파르티즘을 실천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 대사였던 링컨 고든 역시 굴라르가 바르가스나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과 같은 민족주의적 독재를 추구할 것이라고 보았다. 일부 군 장교들은 군대가 대통령의 사병 집단처럼 변질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굴라르 대통령이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의혹, 즉 '자가 쿠데타' 의혹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1962년, 제3군 사령관이 의회가 의원내각제 국민투표 실시를 미루면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발언한 사건이나, 1963년 굴라르가 비상사태 선포를 요청했을 때 헤시피에 군대가 투입되고 라세르다 주지사를 겨냥한 군사 작전 계획이 폭로된 일 등이 이러한 의혹을 부추겼다. 당시에는 좌파 진영 일부에서도 굴라르의 쿠데타 가능성을 경계했다. 1964년 3월, 굴라르가 제안한 문맹자 투표권 부여, 개혁 관철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 행정부에 대한 입법권 위임, 재선 허용 및 처남인 레오넬 브리졸라의 출마를 가능하게 하는 선거법 개정 등은 반대파에게 자가 쿠데타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몇몇 저자들은 굴라르의 행동에서 쿠데타 의도를 읽기도 하지만, 1962년, 1963년, 1964년 모두 굴라르가 실제로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1962년에 브리졸라와 당시 군사 내각 수장이었던 아마우리 크루엘 장군의 의회 폐쇄 제안을 굴라르가 거절했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굴라르의 측근이었던 모니스 반데이라는 굴라르 본인으로부터 브리졸라가 여러 차례 쿠데타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링컨 고든 미국 대사는 1966년에는 굴라르의 독재 의도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2005년에는 언론 보도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결국 굴라르의 자가 쿠데타 의혹은 반대 세력의 정치적 공세 측면이 강하며,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5. 5. 여론



쿠데타를 계획한 음모자들은 여론을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 군부 인사들은 가족의 행진, 중산층, 여성, 언론 등이 군사 개입을 요구하고 이를 정당화했다고 기억한다. 상파울루에서 시작되어 브라질 여러 도시로 퍼져나간 이 행진은 동원된 반대 세력의 존재를 보여주었으며, 사회적으로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이 반대 전선에는 은행가, 사업가, 산업가, 지주, 상인, 정치인, 판사 및 중산층이 포함되었다. 특히 자유 직업 종사자, 소규모 사업가, 주부 등으로 구성된 도시 중산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비록 중산층이 주를 이루었지만, 육체 노동자들도 일부 참여했다. 사회 연구 연구소(IPES)는 중산층을 동원하기 위해 행진 조직에 관여했지만, 참여자들은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이 잃을 것이 있다고 우려하는 등 자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 반정부 활동은 지역 그룹의 개별적인 요구에 따라 분산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행진 참가자들은 "선동, 무질서, 부패"에 반대하는 반포퓰리즘과 무신론 및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반공주의 이념을 표방하며, 개인의 자유와 기독교적 가치가 위협받는다는 인식 아래 결집했다. 고용주 노조, 시민 단체, 여성 민주주의 운동과 같은 여성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들의 참여는 행사의 조직과 가족 및 종교적 가치를 내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공주의는 주로 가톨릭적 성격을 띠었지만, 개신교, 유대교, 영매술 신봉자, 심지어 움반다 신자들까지 참여하는 범종교적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패트릭 페이튼 신부와 같은 사제, 목사, 랍비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 내부는 분열되어 있었으며, 보수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브라질 개신교 중에서는 장로교의 참여가 두드러졌고, 침례교, 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등 다른 교파의 출판물에서도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주요 언론은 사설을 통해 주앙 굴라르 대통령의 축출을 요구하고 쿠데타 발생을 축하하며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Jornal do Brasil'', ''Correio da Manhã'', ''O Globo'', ''Folha de S. Paulo'', ''O Estado de S. Paulo'' 등은 공개적으로 굴라르 축출을 지지했으며, 특히 ''Correio da Manhã''의 Fora!|포라!pt("나가라!")와 Basta!|바스타!pt("이제 그만!")라는 제목의 사설은 유명했다. ''Estado de S. Paulo'', ''O Globo'' 및 ''Tribuna da Imprensa''는 쿠데타 음모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주요 신문 중에서는 ''Última Hora''만이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았다. 1954년 게툴리우 바르가스 자살 당시 ''O Globo''와 ''Tribuna da Imprensa''가 공격받았던 것과 달리, 쿠데타 기간 중에는 ''Última Hora'' 신문사가 파손되었다. 소규모 신문인 ''O Semanário'' 역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브라질 여론 및 통계 연구소(IBOPE)의 당시 여론 조사 결과는 이러한 언론과 반대 세력의 주장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주앙 굴라르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개혁을 열망했으며, 반공주의 성향을 보이면서도 공산주의를 개혁이나 굴라르와 직접 연결 짓지는 않았다.

  • 쿠데타 이전 (1964년 3월, 상파울루 시):
  • 굴라르 정부 평가: 42%가 '훌륭하다' 또는 '좋다'고 평가, 30%는 '보통'이라고 평가.
  • 기초 개혁 필요성: 79%가 '시급하다' 또는 '적절하게 필요하다'고 응답.
  • 토지 개혁 지지율: 평균 70% (중산층과 상류층 포함).
  • 기타: 군 입대자의 투표권은 지지했지만, 문맹자의 투표권은 반대.
  • 1965년 대선 선호도: 좌파 후보(미겔 아라에스, 레오넬 브리졸라) 19%, 중도 후보(마갈량이스 핀토, 주세리누 쿠비체크) 45%, 우파 후보(카를루스 라세르다, 아데마르 지 바루스) 23%. 만약 굴라르가 재선에 출마할 수 있었다면 48.9%가 그에게 투표할 의향을 보였다. 후보 수를 줄였을 경우, JK에 대한 지지율은 37%, 라세르다에 대한 지지율은 25%였다.
  • 공산주의 인식: 44%가 공산주의를 증가하는 위협으로, 68%가 위험으로 간주했으며, 80%는 공산당 합법화에 반대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제안한 조치를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 응답자는 16%에 불과했고, 10%는 선동이라고 생각했다.

  • 쿠데타 이후 (1964년 5월, 상파울루 시):
  • 굴라르 축출 평가: 54%가 '이익이 되었다'고 응답.
  • 쿠데타 명분 동의: 55%가 굴라르가 의회를 폐쇄하거나 브라질을 공산주의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쿠데타 지지자들의 주장에 동의.
  • 구아나바라에서는 숙청에 대한 지지와 사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다.
  • 그러나 상파울루와 구아나바라 응답자들은 여전히 직접 선거와 민간 정부로의 권력 이양을 원했으며, 1965년에는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 특히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게 나타났다.

5. 6. 미국의 영향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미국과 내통한 극우 성향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계획했다. 2009년 브라질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쿠데타에는 미국이 깊이 관여했으며 군사적 지원도 제공했다.[10] 쿠데타 이후 들어선 극우 군사독재정권 시대에는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이 극심해졌고, 이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심각한 경제 부도를 초래했다.[10]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 등을 지원하며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여러 극우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되었다.[12]

라틴 아메리카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세력권이었으나, 1950년대까지는 큰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했다. 냉전 시대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한 봉쇄 정책을 폈고, 국내적으로 강경한 외교 정책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주앙 굴라르와 같이 개혁적이면서도 비마르크스주의적인 지도자들조차 미국의 경제적 압박이나 쿠데타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1959년 쿠바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다른 지역에서의 혁명 재발 방지를 목표로 삼게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지역 내 세력 균형을 미국에 유리하게 만들었고, 이는 라틴 아메리카 정부에 대한 미국의 더욱 강경한 태도를 가능하게 했다. 진보를 위한 동맹은 민주주의와 개혁(토지 개혁 등)을 지원하여 저개발을 극복하고 제2의 쿠바를 막으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으나, 미국은 이러한 이상을 현실화하지 못했다. 1962년 페루와 1963년 에콰도르 쿠데타로 들어선 권위주의 정부들은 미국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부의 등장을 막는다는 목표 달성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굴라르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노동 운동과의 과거 연관성 때문에 백악관의 의심을 받았다. 양국 관계는 점진적으로 악화되었는데, 주요 요인으로는 외국 기업을 겨냥한 이윤 송금법, 쿠바 문제에 대한 이견, 1962년 미국의 관계 단절 위협 및 소련 지원 모색 시도, 링컨 고든 주 브라질 미국 대사의 굴라르 쿠데타 가능성 해석, 3개년 경제 계획의 실패, 레오넬 브리졸라의 미국 기업 몰수, 그리고 경제적 이유 등이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농민 연맹과 1962년에 발견된 게릴라에 대한 쿠바의 지원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링컨 고든 대사는 "브라질을 1960년대의 중국으로 만들 수 있는" "대재앙"을 두려워했다.

2018년 문헌 검토에 따르면, 미국의 역할은 쿠데타 발생 및 성공 가능성을 높였지만, 위기의 근본적인 동력은 브라질 내부에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야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견해는 여러 역사가들이 공유한다.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요소를 더 강조했다. 미국이 굴라르 축출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정확한 시기와 이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1962년부터 1963년 말 사이로 추정되며, 초기에는 전복보다는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1962년 브라질 선거에서 야당 후보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고, 야당 성향 주지사들에게 자원을 배분했다. 1977년 전 대사 링컨 고든은 이를 인정했다. 또한, 브라질 경제에 중요했던 미국의 차관 협상은 굴라르 정부에게는 어려웠는데, 이는 경제 안정화와 노동조합 내 급진 좌파와의 거리두기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1964년 3월 28일자 전보에서 고든 대사는 "친민주주의 거리 시위 지원 ... 그리고 국회, 군대, 학생 단체, 친미 노동자, 교회, 기업에서 민주적이고 반공산주의적 정서 고취"와 같은 "비밀 작전"이 브라질에서 진행 중이라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1962년 7월, 고든 대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브라질에서의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논의했다. CIA는 쿠데타 발생 2년 이상 전부터 군사 음모를 감시해왔으며, 1963년에는 지원할 군부 내 세력을 물색했다. 1963년 12월에 수립된 미국의 비상 계획에는 브라질 음모 세력과의 비밀 접촉이 언급되었고, 굴라르 축출과 라니에리 마칠리 하원의장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 그리고 내전 발생 시 야당에 대한 물류 지원 계획(임시 정부 구성 및 국제적 교전 상태 인정 후)이 포함되어 있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1964년 쿠데타 진행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고, 필요시 야당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한을 승인했다. 미국의 군사 및 물류 지원 작전인 브라더 샘 작전은 카스텔루 브랑쿠가 신뢰하는 호세 피네이루 데 울로아 신트라 장군을 브라질 측 중개인으로 활용했다. 이 작전은 카리브해 유조선 연료 공급, 공군 기지 탄약 적재, 항공모함 USS ''포레스탈''을 포함한 해군 기동 부대 파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4월 10일부터 브라질 해안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쿠데타가 빠르게 성공하면서 카스텔루 브랑쿠가 지원이 필요 없다고 통보함에 따라 작전은 취소되었다. 미군 병력 상륙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해군 기동 부대 파견 계획 자체만으로도 굴라르 정부에 대한 위협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쿠데타 성공 후, 미국 정부는 4월 2일 밤 라니에리 마칠리 임시 정부를 신속하게 승인했는데, 이는 너무 이른 인정이라는 비판을 국내외적으로 받았다. 미국 국무부와 브라질 외무부는 새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빠르게 승인했지만,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입장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고 여겼다.

미국 언론에서는 ''타임''과 ''뉴욕 타임스'' 등이 쿠데타를 환영하는 논조를 보이면서도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적하기도 했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굴라르를 미국의 지원으로 전복된 중도 좌파 개혁가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고, 프랑스 언론 ''르 몽드''와 ''르 피가로'' 등은 쿠데타를 "좌파가 제안한 사회적 진보에 대한 우파의 반동

5. 7. IPES 프로젝트

브라질 민주 행동 연구소(IBAD)와 사회 연구 연구소(IPES)의 등장은 쿠데타 이전 중요한 정치적 발전이었다. IBAD는 중앙정보국(CIA)과 연결되어 있었고, IPES는 "브라질 비즈니스 커뮤니티의 핵심"을 모았다. 이들 조직은 단순한 연구소를 넘어 이념 선전을 수행하고 쿠데타 음모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3]

쿠데타에 대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분석 중 하나인 드레이푸스의 저서 ''1964: A Conquista do Estado'' (1981)는 IPES의 역할을 강조한다.[3] 이 분석에 따르면, 1950년대에 부상한 국제 자본과 연계된 기업가들은 굴라르 정부 하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장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노동 계급 조직을 제한하고,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는 종속적인 후기 자본주의 모델을 구축하려는 구체적인 국가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다.[3][3] 이를 위해 IPES와 IBAD는 굴라르 대통령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했다.[3] 이러한 활동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3]

쿠데타 이후, 안토니우 델핀 네토, 로베르투 캄포스, 오타비우 고베이아 드 불로에스 등 IPES 회원들은 새로운 정권 하에서 경제 부처 등 핵심 요직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경제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또한 IPES 회원이던 골베리 두 쿠토 에 실바는 악명 높은 국가 정보국(SNI)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3]

그러나 드레이푸스의 분석은 쿠데타에서 군대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축소하고, 군부 내에 존재했던 국가주의적 전통(이는 IPES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모순될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3] 이에 대해 IPES의 프로젝트 자체가 경제에서 국가의 특정 역할을 인정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3] 또한 IPES의 많은 노력이 실제로는 실패했다는 점도 지적되지만,[3] 드레이푸스 자신도 이를 인정하면서 이러한 실패가 오히려 쿠데타를 촉발한 요인이었을 수 있다고 보았다.[3] 군사 문헌에서는 쿠데타를 주로 경제 그룹의 지원을 받은 군사적 음모의 결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IPES와 같은 시민 그룹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정치-사회학 문헌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3] 카를루스 피쿠는 드레이푸스의 분석이 굴라르 정부에 대한 '불안정화' 작업과 실제 '음모'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IPES의 선전 활동과 같은 불안정화 노력은 반드시 쿠데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선거 국면 전환 등을 목표로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3]

"IPES/IBAD 복합체"와 육군 참모학교(ESG), 즉 "소르본"의 음모에는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 골베리 두 쿠토 에 실바, 안토니우 카를루스 무리시, 그리고 "현대화가"로 알려진 오스발두 코르데이루 드 파리아스가 포함되었다. 그들의 움직임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푸스는 또한 "우익 극단주의자"와 "전통주의자"를 확인했다. 전자는 강경파로도 알려져 있으며, 특히 상파울루의 사업가들과 관련이 있었고, 공군 준장 조앙 파울루 모레이라 버니에르를 포함했다. 후자는 아르투르 다 코스타 에 실바, 올림피우 모우랑 필류, 아모리 크루엘, 그리고 조아킴 주스티누 알베스 바스토스 등 ESG 훈련을 받지 않은 덜 역동적인 엘리트, 정당 그룹, 주지사 및 장교들을 대표했다. 그들은 "현대화가"의 국가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더 수동적인 이유로 정부에 반대했다. "전통주의자"는 더 많은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시작했지만, 더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현대화가"에게 권력이 넘어갔다.[3][3]

5. 8. 군부의 사고방식 변화

ESG는 "1964년부터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교리적, 이념적 내용"으로 평가받는 국가 안보 교리(DSN)를 개발했다. 이 교리는 안보와 개발을 핵심으로 삼아, "모든 국가 활동을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브라질을 자본주의 강대국으로 바꾸기 위한 안보 정책에 종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DSN은 미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히 수입된 것은 아니었으며, 강력한 국가와의 동맹, 국민 전체가 국방에 참여하는 전면전, 그리고 내부의 적과의 싸움을 강조했다. ESG는 이러한 전면전의 요구를 통해 사회를 이끌 유능한 문민 및 군사 엘리트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ESG가 중요한 싱크탱크이자 문민과 군부 간의 교류 지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반까지 DSN의 이론적 내용이 장교단 전체에 체계적으로 보급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시 더 널리 퍼진 것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혁명 전쟁 교리였다. 이 교리는 DSN과 구별되지만, DSN은 그 개념들을 흡수했다. 혁명 전쟁 교리는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해석하게 만들었으며, 자유 민주주의, 시민의 권리, 심지어 제네바 협약조차도 이러한 '혁명 전쟁' 상황을 극복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정치학자 알프레드 스테판은 그의 저서 ''정치에서의 군대: 브라질의 변화하는 패턴''(1971)에서 군부 사고방식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로 정치 시스템의 쇠퇴와 비효율성에 대한 인식을 지적했다. 장교들이 DSN을 통해 스스로에게 권한이 부여되었다고 느낀 점과 정치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결합되면서, 군부가 쿠데타 이후에도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는 과거 브라질 군부가 민간 정부를 전복시킨 뒤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물러났던 조정 권력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는 변화였다. 이러한 조정 권력 패턴에 대한 아이디어는 1964년 브라질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의 자문관이었던 로버트 W. 딘(Robert W. Dean)이 제시한 견해와 유사점을 보인다. 스테판의 이론, 특히 조정 권력 개념은 널리 알려졌지만,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6. 쿠데타 전개



주앙 굴라르(Jango) 대통령은 1961년 9월 취임 이후 기초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토지 개혁을 비롯한 주요 개혁안은 의회에서 보수 세력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1963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중심제로 복귀하며 완전한 권한을 회복했지만,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경제 위기도 지속되었다.

1963년 9월 브라질리아에서 발생한 해군 및 공군 하사관들의 무장 반란과 10월 카를로스 라세르다 주지사의 쿠데타 가능성 언급, 그리고 굴라르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포 시도 실패는 정치적 불안정을 증폭시켰다. 1963년 말부터 굴라르 대통령은 좌파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개혁 추진 의지를 다졌고, 1964년 3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 센트럴 역 광장 집회는 이러한 대결 노선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에 맞서 야당은 신과 자유를 위한 가족 행진과 같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며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3월 25일 발생한 수병 반란과 이에 대한 정부의 관대한 처분은 군 장교들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군부 내에서는 이미 1961년 말부터 쿠데타 음모가 존재했으며, 특히 1963년 이후 음모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CIA는 쿠데타 음모를 감시하고 지원 대상을 물색했으며, 미국 정부는 브라더 샘 작전이라는 암호명 아래 쿠데타 지원을 위한 군사 및 물류 계획을 준비했다.

1964년 3월 30일 밤, 굴라르 대통령이 하사관들과 함께 Automóvel Clube 회의에 참석한 것은 군부의 반발을 더욱 격화시켰다. 결국 3월 31일 새벽, 제4군관구 사령관 올림피오 모라웅 필류 장군이 미나스제라이스 주 주이스데포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리우데자네이루로 진격을 개시하며 예정보다 일찍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는 빠르게 확산되어 상파울루의 제2군과 헤시피의 제4군 등 주요 부대 사령관들이 잇따라 합류하면서 정부군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군사적 저항을 통해 유혈 사태를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아 충성파 군 지휘관들에게 적극적인 반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4월 1일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나 브라질리아로, 다음 날인 4월 2일에는 포르투알레그리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저항을 포기했다.

미국 정부는 쿠데타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으며,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쿠데타 세력 지원을 승인했다. 브라더 샘 작전에 따라 미 해군 기동 부대가 브라질 해안으로 이동했지만, 쿠데타가 빠르게 성공하면서 실제적인 군사 개입이나 물자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굴라르 대통령은 저항을 포기하고 4월 4일 우루과이로 망명했다. 쿠데타 세력은 라니에리 마칠리 하원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내세웠고, 미국 정부는 4월 2일 밤 신속하게 이를 승인했다. 이로써 1964년 쿠데타는 성공했으며, 브라질은 이후 21년간 이어지는 군사 독재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6. 1. 작전의 지리적 범위

쿠데타 당시 군 병력 배치


쿠데타 지도자들의 주요 목표는 당시 사실상의 정치적 수도 역할을 하던 리우데자네이루였다. 브라질리아가 새로운 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리우데자네이루는 여전히 국가적 주요 사건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쿠데타 음모의 핵심 인물인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과 코스타 이 실바 장군이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카스텔루 브랑쿠는 소위 "현대화" 파벌의 대표로서 큰 명성을 누렸고 음모의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코스타 이 실바는 군대 내 보수적인 장교 그룹을 이끌었다. 리우데자네이루는 제1군의 병력과 화력이 집중된 곳이었기에, 굴라르 정부는 이곳에 가장 충성스러운 지휘관들을 배치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 때문에 음모자들은 리우데자네이루 내에서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기 어려웠고, 인접한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이스에서의 공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북동부남부에서도 반란 계획이 세워졌다. 레시페에 주둔한 제4군 사령관 아마우리 크루엘 장군과 상파울루의 제2군 사령관 호아킴 주스티누 알베스 바스토스 장군이 음모에 가담했다. 반면, 남부의 제3군 사령관 벤자민 갈하르도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음모는 그의 사령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미나스 제라이스에서는 올림피우 모우랑 필류 장군, 카를루스 루이스 게데스 장군, 그리고 마갈량이스 핀투 주지사가 음모를 조율했다. 미나스 제라이스는 육군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미나스 제라이스 주 군사 경찰(PMMG)을 동원하여 전투에 대비시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 또한 핀투 주지사는 에스피리투 산투 주와 협상하여, 분쟁 발생 시 비토리아 항구를 통해 보급품(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지원 가능성을 염두에 둔)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PMMG가 이 보급로를 방어하도록 계획했다. 작전 계획상 모랑 필류는 주이스 데 포라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구아나바라(리우데자네이루)로 진입하려 했고, 게데스는 리우데자네이루와의 주 경계선까지 진격한 뒤 상황을 보고 진격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다.[3]

쿠데타 주요 관련 지역 및 군사 상황
지역주요 인물관련 군사력/조직역할 및 계획
리우데자네이루카스텔루 브랑쿠, 코스타 이 실바육군 참모부, 제1군쿠데타 핵심 목표 지역. 음모의 주요 연결 고리 역할. 정부는 충성파 지휘관 배치.
상파울루호아킴 주스티누 알베스 바스토스제2군음모 가담. 리우데자네이루 공격 계획 지원.
미나스 제라이스올림피우 모우랑 필류, 카를루스 루이스 게데스, 마갈량이스 핀투 주지사미나스 제라이스 주둔 육군 부대, 미나스 제라이스 주 군사 경찰음모 조율. PMMG 동원 계획. 모랑 필류는 구아나바라 기습 진입 계획, 게데스는 리우 국경까지 진격 계획.
북동부 (레시페)아마우리 크루엘제4군음모 가담.
남부벤자민 갈하르도제3군사령관은 미가담, 본부까지 음모 영향.
에스피리투 산투(미나스 제라이스 주지사와 협상)-비토리아 항구를 보급 거점으로 활용 계획 (미국 지원 가능성).


6. 2. 쿠데타 날짜 앞당기기

올림피우 모랑 필류 장군


쿠데타 개시일은 원래 카스텔루 브랑쿠 그룹에 의해 4월 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릴 예정이던 대규모 '가족 행진'과 날짜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총노동사령부(CGT)는 이날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또 다른 계획으로는 4월 10일 밤 상파울루에서 시작하는 방안도 거론되었다. 쿠데타 개시 신호는 카스텔루 브랑쿠의 체포가 될 수도 있었다. 그의 해임이 임박한 상황에서 그는 사임을 거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의 음모 주도자들은 군사적 약점을 인지하고 있었고, 미나스제라이스에 운동의 주도권을 넘길 의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스제라이스의 지도자들은 의도적으로 쿠데타 시작 날짜를 앞당겼다. 이는 음모가 여러 그룹으로 분산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각 주의 그룹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는 했다.

쿠데타 날짜를 앞당긴 미나스제라이스 지도부는 주지사 마갈량이스 핀투, 제4군관구 사령관 모랑 필류 장군, 제4보병사단 사령관 게데스 장군 등이었다. 이들에게는 쿠데타를 서두를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마갈량이스 핀투는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민주연합(UDN) 내 자신의 불안정한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쿠데타를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4월에는 게데스 장군이 교체될 예정이었고, 굴라르 대통령이 미나스제라이스 수도 벨루오리존치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었던 점도 서두른 배경이 되었다. 모랑 필류 장군 역시 임박한 강제 퇴역이 쿠데타를 서두르게 만든 요인이었다.

3월 25일, 해군 반란이 진행 중일 때 마갈량이스 핀투는 카스텔루 브랑쿠와 제2군 사령관 크루엘 장군에게 쿠데타 참여 의사를 타진했다. 28일에는 주이즈지포라 공항에서 마갈량이스 핀투, 게데스, 모랑 필류, 그리고 오딜리우 데니스 원수가 회동했다. 모랑 필류는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행동 개시를 주장했지만, 마갈량이스 핀투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모랑 필류는 마갈량이스 핀투가 발표할 선언문을 기다린 후 행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이해관계 충돌이 있었다. 게데스는 기업가 연구소(IPES)의 영향을 받아 모랑 필류를 견제하려 했고 마갈량이스 핀투와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모랑 필류와 마갈량이스 핀투 사이에서는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다. 게데스와 모랑 필류가 남긴 기록은 서로 모순되며, 각자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있다.

게데스와 루벤스 바이마 데니스 대령(오딜리우 데니스 원수의 아들)의 기록에 따르면, 모랑 필류는 3월 30일까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마갈량이스 핀투가 선언문을 발표하고 게데스가 벨루오리존치에서 군사 동원을 시작하여 기정사실을 만든 후에야 바이마 데니스가 모랑 필류에게 행동을 촉구했다는 것이다. IPES는 게데스가 쿠데타를 이끌기를 원했다. 일부에서는 게데스와 마갈량이스 핀투가 이미 30일에 반란을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게데스가 "30일은 보름달의 마지막 날이며, 나는 쇠퇴하는 것에 대해 어떤 주도권도 잡지 않는다. 보름달 아래서 떠나지 않으면 나는 새 달을 기다릴 것이고, 그러면 너무 늦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반면 모랑 필류는 마갈량이스 핀투의 선언문 발표와 게데스의 동원이 효과적이지 않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연방 정부가 이를 미리 감지하면 미나스제라이스를 진압할 수 있고, 자신이 게데스와 마갈량이스 핀투를 배신한다면 그들이 먼저 제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28일 회의에서 즉각 행동을 원했지만 주지사가 시간을 끌었으며, 행동 개시 전에 군대를 먼저 동원하고 민간 지도자인 주지사의 선언문 발표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30일, 마갈량이스 핀투가 자신의 요구(대통령 축출 명시)를 무시한 채 선언문을 발표하자 배신감을 느꼈고, 31일 새벽 선언문 사본을 받아 실망감을 재확인한 뒤 독자적으로 쿠데타를 시작했다. 모랑 필류는 혼자 행동할 의도는 없었으며, 크루엘 장군 등 다른 공모자들과 연락을 유지했다.

3월 말 며칠 동안 미나스제라이스 지도부는 해군 내 공모자들로부터 정보를 받았으며, Bayma Denys에 따르면 28일 회의 후 사절단이 미나스제라이스를 떠나 카스텔루 브랑쿠, 코스타 이 실바(회의적이었음), 그리고 주스티노에게 쿠데타의 임박함을 알렸다.

쿠데타 준비 과정에서 정부의 정보 수집 능력은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3월 28일 주이즈지포라 공항에서의 고위급 회동 정보는 공산당 군사 부서에 보고되었으나 무시되었다. 30일에는 언론인 다비드 나세르가 육군 경찰에 미나스제라이스의 군사 준비 상황을 알렸지만, 현지 연락책은 이를 부인했다. 같은 날 전쟁부 차장이 벨루오리존치와 주이즈지포라의 부대를 시찰했지만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미나스제라이스 주 경찰(PMMG)이 29일까지 주 전역에서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이동시켰음에도 정부는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 대사관과 CIA는 쿠데타가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3월 27일, 링컨 고든 대사는 카스텔루 브랑쿠 그룹이 대통령의 움직임이나 총파업을 기다리고 있으며, 상파울루 지지자들이 물류 지원을 제안했다고 보고했다. 30일 CIA는 "반(反) 굴라르 세력의 혁명"이 며칠 내 미나스제라이스와 상파울루에서 시작될 것이며, 막바지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같은 날, 주 브라질 미국 대사관의 무관 버논 A. 월터스는 카스텔루 브랑쿠 그룹과 접촉하며 그의 해임 가능성과 상파울루로 이동하여 쿠데타를 지휘할 계획 등을 보고했다.

6. 3. 내전 가능성

쿠데타 지도자들은 군사적 저항과 전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모자들은 어느 정도의 저항을 예상했다. 무리시 장군은 내전이 한 달간 지속될 것으로 예측했고, 다른 이들은 최대 6개월까지 예상하기도 했다. 반면, 골베리 장군만이 정부가 허술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골베리는 리우데자네이루와 히우그란지두술에서 가장 격렬한 충돌이 벌어질 것으로 보았다. 북동부 지역의 공모자들 역시 지역적인 저항을 예상했다. CIA에 전달된 정보에 따르면, 쿠데타는 피비린내 나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며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무랑 필리우 장군은 최소 4개월의 저항을 예상했다. 만약 미나스제라이스에서의 진격이 실패할 경우, 그는 바이아 남부로 후퇴하여 초토화 작전을 실행하고 충성파의 북동부 진격을 막을 계획까지 세워두었다.[4] 마갈량이스 핀투 주지사는 10일 정도를 예상했지만, 미나스제라이스 주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무기와 군복을 배포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조직하며, 식량을 비축하는 등 최대 3개월간의 전투에 대비했다. 상파울루에서도 자원봉사자 모집과 의약품 수집 등 유사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과나바라에서는 내전 발발을 우려한 주민들이 식량을 사재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쿠데타 가담자, M3 스튜어트 전차, 미나스제라이스 전선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실제 무력 충돌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채 위기가 해소되었다. 미나스제라이스 전선에서는 내전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양측 군대가 무기를 겨누고 대치했지만, 실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기록된 교전은 리우데자네이루의 해안 포병 본부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짧은 총격전으로, 양측에서 한 명씩 부상자가 나왔을 뿐이다.

쿠데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고, 정부 측의 방어는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초기에는 군사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허세'로 시작했지만, 정부에 충성하거나 중립적이었던 대부분의 장교들이 결국 쿠데타에 가담하거나 저항하지 않으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굴라르 대통령은 "연쇄적인 탈영, 중간 계급 장교들의 대규모 가담, 그리고 소수의 충성파 장교 및 사병들의 저항 포기" 속에 몰락했다. 쿠데타 세력은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에서의 공세에 대응하여 충성파 지휘관들을 리우데자네이루 내륙으로 이동시키는 전략을 사용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충성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탈주를 유도하는 효과를 낳았다. 많은 결정이 전화 통화로 이루어졌는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독립이나 공화국 선포처럼 큰 유혈 사태 없이 정권이 교체되는 브라질의 역사적 전통을 따라 "전화 전쟁"이 벌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물리적 충돌이 적었다고 해서 폭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쿠데타 직후부터 영장 없는 체포, 고문, 폭력적인 심문 등 수많은 자의적인 탄압 행위가 발생했으며, 특히 조직 노동계가 주요 탄압 대상이 되었다. 역사가 엘리오 가스파리에 따르면 1964년 쿠데타와 관련하여 총 20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7명은 쿠데타 기간(3월 31일~4월 2일)에 사망했으며 모두 민간인이었다(리우데자네이루 3명, 헤시피 2명, 고베르나도르발라다리스 2명). 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쿠데타에 비하면 낮은 수치지만, 브라질 역사 기준으로는 중간 수준의 폭력이었다. 4월 2일 페르남부쿠의 공산주의 지도자 그레고리오 베제라에 대한 고문은 악명이 높았으며, 이는 새로운 정권이 초기부터 고문을 자행했음을 보여준다. 쿠데타 이후 몇 주 동안 수천 명이 체포되었고, 상파울루에서는 즉각적인 체포 계획이 실행되었으며 미나스제라이스에서는 "케이지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검거가 이루어졌다. 과나바라에서는 군사 경찰, 민간 경찰 및 준군사 조직들이 폭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굴라르 대통령이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난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 아레알의 정부군 병사들




굴라르 대통령에게는 반란을 진압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미나스제라이스에서 반란이 시작된 직후 12시간 동안은 정부군이 반란군보다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이 도착하기 전에 충분히 진압할 수 있었다. 충성파 지휘관들과 노동 운동가, 하사관들은 대통령의 명령을 기다렸지만, 굴라르는 끝내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산타크루스 공군기지 사령관 후이 모레이라 리마 대령은 공격 준비를 마쳤으나 명령을 받지 못했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루이스 타바레스 다 쿠냐 멜루 장군 역시 진격 대신 방어 명령만 받았다.

결국 4월 2일, 포르투알레그리에서 굴라르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를 지키기 위해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고 도시를 떠났다. 그의 공격 명령 부재는 쿠데타 성공과 그의 몰락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엘리오 가스파리는 굴라르가 군사력 사용뿐 아니라 하사관과 노동조합 동원, 의회 및 주지사 공격 등 더 급진적인 대응을 했어야 했다고 분석하면서도, 패배의 원인을 전적으로 굴라르에게만 돌리는 것은 그의 동맹자들 역시 소극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승자와 패자 간의 역사적 합의"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측 군대는 여러 약점을 안고 있었다. 장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충성심보다 군 내부의 결속력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전쟁 장관 자이르 단타스 히베이루의 입원으로 지휘 체계에 공백이 생겼고, 잘못된 인사 정책으로 쿠데타 음모자들이 주요 지휘권을 장악했으며, 정보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고 음모 세력의 이념 공세는 방치되었다. 고등전쟁학교(ESG) 사상과 반공주의 정서가 군 내부에 널리 퍼져 있었고, 좌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은 오히려 군 장교들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하위 계급 군인들의 반란 움직임은 개혁 성향의 장교들마저 군 조직이 붕괴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굴라르 대통령이 유혈 사태를 피하기로 한 결정은 비겁함 또는 신중함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는 쿠데타 세력의 힘과 광범위한 국내외 연합(특히 미국의 적대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이전의 군사 개입 사례들처럼 이번 쿠데타도 단기적일 것이며 곧 민간 정부로 권력이 이양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툴리우 바르가스처럼 상보르자에서 정치적 재기를 기다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마지막 태도를 "피 없는 자살"로 평가하기도 한다.

쿠데타 과정에서 굴라르에게는 몇 가지 정치적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페리 콘스탄트 베빌라쿠아 군 참모총장은 대통령이 노동계 파업 금지, 노동조합 개입, 군 의존 등을 약속하면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주셀리누 쿠비체크는 보수적 내각 교체, 공산주의 비난 성명 발표, 해군 반란자 처벌 등을 제안했다. 아마우리 크루엘 장군은 CGT, UNE 등 대중 조직 해체, 노동조합 개입,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보좌관 해임 등을 조건으로 제2군 지원을 제안했다. 자이르 단타스 히베이루 역시 유사한 제안을 했다.6. 4. 군사 작전과 대통령 망명

쿠데타 세력의 주요 목표는 당시 브라질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리우데자네이루였다. 음모의 핵심 인물인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과 코스타 이 실바 장군도 리우데자네이루에 있었다. 정부는 가장 충성스러운 지휘관들을 배치한 제1군의 강력한 군사력을 리우데자네이루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은 인접한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에서의 공격을 통해 리우데자네이루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동시에 북동부와 남부에서도 반란 계획이 추진되었다. 헤시피의 제4군 사령관 아마우리 크루엘 장군과 상파울루의 제2군 사령관 주스티누 알베스 바스토스 장군이 음모에 가담했다. 제3군 사령관 벤자민 갈하르도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음모는 그의 사령부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나스제라이스에서는 모랑 필류 장군, 카를루스 루이스 게데스 장군, 그리고 마갈량이스 핀투 주지사 간에 음모가 조율되었다. 육군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나스제라이스 주 군사 경찰(PMMG)이 동원되었고, 에스피리투산투 주와 협력하여 비토리아 항구를 통해 보급품(특히 미국으로부터)을 받을 계획도 세웠다. 모랑 필류는 주이스데포라의 병력으로 기습적으로 리우데자네이루로 진격하려 했고, 게데스는 리우와의 경계까지 진격한 후 상황을 보며 진격 여부를 결정하려 했다.

쿠데타 개시일은 원래 4월 2일 또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3월 31일 새벽, 모랑 필류 장군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미나스제라이스 주이스데포라에서 리우데자네이루를 향해 군대를 진격시키며 예정보다 일찍 쿠데타를 시작했다. 모랑 필류가 서둘러 쿠데타를 개시한 배경에는 마갈량이스 핀투 주지사와의 주도권 다툼, 임박한 자신의 강제 은퇴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나스제라이스 내부에서는 모랑 필류, 게데스, 마갈량이스 핀투 사이에 쿠데타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과 계획의 차이가 존재했다.

쿠데타 초기, 굴라르 대통령 정부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의 군사적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정보 실패를 겪었다. 모랑 필류의 부대가 진격을 시작한 후에도 굴라르 대통령은 반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정부에 충성했던 군 지휘관들 역시 대통령의 명확한 지시가 내려오지 않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산타 크루스 공군 기지 사령관 루이 모레이라 리마 대령은 글로스터 미티어 제트 전투기를 출격 준비시켰으나 공격 명령을 받지 못했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루이스 타바레스 다 쿠냐 멜루 장군 역시 적극적인 진격 대신 방어 명령만 받았다.

정부의 대응이 지체되는 사이, 제4군의 아마우리 크루엘 장군과 제2군의 주스티누 알베스 바스토스 장군이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반란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정부의 핵심 군사력이었던 제1군마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저항과 유혈 충돌을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굴라르 대통령은 군사적 저항을 선택하지 않았다. 만약 미나스제라이스 반란군이 리우데자네이루 진격에 실패할 경우, 모랑 필류는 초토화 작전을 실행하고 바이아 남부로 후퇴하여 제6 군사 지역 장교들과 농촌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저항을 계속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4]

4월 1일, 굴라르 대통령은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나 브라질리아로 이동했고, 다음 날인 4월 2일에는 포르투알레그리로 향했다. 포르투알레그리에서 그는 여전히 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기를 지키기 위해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쿠데타 세력의 광범위한 연합과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상 티아고 단타스로부터 해외에서 반란군 측의 임시 정부가 승인될 것이라는 정보를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굴라르 대통령은 이전의 군사 개입 사례들처럼 이번 쿠데타 역시 단기적일 것이며, 정치적 재기의 기회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군부 실력자들과 주세리누 쿠비체크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 개혁 포기 및 좌파 탄압을 조건으로 하는 타협안을 제안받았으나, "개혁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며, 더 심각하게는 노동조합과 좌파 탄압의 공범이 될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굴라르 대통령은 저항을 포기하고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상보르자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이동했다가, 4월 4일 우루과이로 최종 망명했다. 이로써 쿠데타는 성공했고, 브라질은 이후 21년간의 군사 독재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7. 쿠데타 이후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실각했고,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가 이끄는 극우 군사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10]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미국과 내통한 극우 성향의 군인들이었으며, 이들은 굴라르 정부의 비동맹주의 및 의회주의 정책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주의반공주의를 신봉했던 이들 중 일부는 파시스트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의 회원이거나 지지자였다.[11] 2009년 브라질 국무부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은 쿠데타에 깊이 관여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10]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은 극심해졌으며,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초래했다.[10] 또한, 브라질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과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극우 쿠데타를 지원하면서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다.[12] 이 군사독재는 1985년 재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7. 1. 주지사들의 입장

주(州) 주지사들은 시민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군 경찰을 지휘하는 등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데타 발발 직후인 4월 1일 오전 2시, 상파울루 주지사 아데마르 지 바호스(PSP)는 상파울루, 과나바라(주지사 카를루스 라세르다, UDN), 미나스 제라이스(주지사 마갈량이스 핀투, UDN), 파라나(주지사 네이 브라가, PDC), 고이아스(주지사 마우루 보르지스, PSD), 마투 그로수(주지사 페르난두 코레이아 다 코스타, UDN) 등 6개 주가 연방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아데마르, 라세르다, 마갈량이스는 쿠데타 공모자였다. 아데마르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군사적 패배를 우려하여 자신의 주에서 쿠데타 시작을 주저했으나, 3월 31일 밤 쿠데타에 가담했다.

이스피리투 산투 주지사 프란시스쿠 라세르다 데 아기아르(PSD)는 이미 3월에 미나스 제라이스와 쿠데타 참여를 계획했고, 31일 오전에 이를 공식 확인했다. 파라나의 네이 브라가, 히우 그란데 두 술의 일두 메네게티(PSD), 알라고아스의 루이스 데 소자 카발칸티(UDN) 역시 쿠데타에 가담했다.

반면, 히우 그란데 두 노르테의 알루이지오 알베스(PSD), 피아우이의 페트로니오 포르텔라, 바이아의 안토니우 로만투 주니오르(PL)는 처음에는 연방 정부 지지를 선언했으나 나중에 입장을 바꿨다. 로만투 주니오르와 세아라의 비르질리우 타보라(UDN) 주지사는 일부 군 장교들에 의해 전복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제4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파라이바 주지사 페드루 곤딤(PSD)은 군의 압력으로 쿠데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남부쿠의 미겔 아라에스와 세르지피의 세이샤스 도리아는 쿠데타 초기부터 군부의 표적이 되었다. 아마조나스 주지사 플리니우 코엘류(PTB)와 파라 주지사 아우렐리오 두 카르모(PSD)는 쿠데타 당시 주앙 굴라르 대통령을 지지했으나, 쿠데타 성공 후 입장을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권력에서 축출되었다. 히우 지 자네이루 주지사 바저 다 시우베이라(PTB)와 아크리 주지사 조제 아우구스투 데 아라우주(PTB) 역시 쿠데타 이후 실각했다. 한편, 쿠데타를 지지했던 고이아스 주지사 마우루 보르지스(PSD)도 1964년 11월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의 연방 개입 조치로 인해 축출되었다.[9]

7. 2. 파업과 시위

전국 학생 연합(UNE)은 총파업을 지지했고, 일부 학생들은 무기를 기다리며 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 사회 전반적으로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중산층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전국노동자총연맹(CGT) 역시 총파업을 촉구했으나, 3월 30일 노조 지도자들이 카를루스 라세르다의 정치사회질서부 (DOPS)에 의해 체포되면서 파업 동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구아나바라에서는 경찰의 탄압이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IAPTEC 건물에 있던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경찰의 급습은 제3공군과 해병대의 보호로 중단되기도 했다. 항구 노동자, 전차 운전사, 브라질 중앙 철도의 센트럴 역과 레오폴디나 역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레오폴디나 기차역 파업
이러한 운송 부문의 마비는 역설적으로 쿠데타 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정부 지지 성향의 노동자들이 도심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굴라르 대통령 자신은 총파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파업이 발생했다. 볼타 레돈다의 국립 철강 회사(Companhia Siderúrgica Nacional)에서는 경영진과 군대가 파업을 쉽게 진압했다. 바이사다 산티스타 지역에서는 산토스 항구, 산투스와 쿠바탕의 정유소, 상파울루 철강 회사(Companhia Siderúrgica Paulista)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했으나, 군대는 3월 31일 밤 정유소를 점거했다. 상파울루 인근의 ABC 지역에서는 파업 시도가 사전에 진압되었다. 포르투알레그레에서는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고, 산타마리아에서는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했으나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헤시피 항구에서 일찍 시작된 파업은 해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파라이바 주의 히우 틴투 산업 단지와 바이아 주의 마타리페 정유소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의 효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에드마르 모렐은 파업이 리우데자네이루의 친정부 운동을 방해하고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의 쿠데타 세력을 안정시키는 제5열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여러 연구자들은 파업이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그 효과가 제한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레오넬 브리졸라는 포르투알레그레에서 두 번째 '합법성 운동'을 시도하며 대중의 지지를 호소했고, 세레노 샤이세 시장이 주최한 집회에는 많은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첫 번째 운동 때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이나 제도적 지원을 얻지는 못했다. 4월 3일,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지도자들은 망명길에 올랐다. 브리졸라는 새로운 '합법성 라디오 체인'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쿠데타 세력 역시 미나스제라이스의 '자유 체인', 상파울루의 '베르데 이 아마렐라 체인' 등 라디오 방송을 적극 활용하며 맞섰다.

쿠데타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군대는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시네란지아 광장, 헤시피, 브라질리아의 W3 술 거리 등지에서 시위가 진압되었다. 브리졸라 지지자들은 포르투알레그레 시청, 바제, 우루과이아나의 시청을 점거하기도 했다. 반대로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위도 열렸다. 가족 행진은 쿠데타 이후 6월까지 계속되었으며,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승리의 행진'은 그해 가장 큰 규모의 행사였다.

7. 3. 정권 교체



1964년 4월 2일 이른 새벽, 상원 의장 아우루 드 모라 안드라데는 짧은 의회 회의에서 주앙 굴라르 대통령의 직위가 공석임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투표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되었으며[5], 헌법적 근거가 부족했다. 대통령 해임의 법적 요건인 탄핵, 사임, 또는 대통령의 국외 체류 중 어느 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당시 굴라르는 브라질리아에서 포르투알레그리로 이동 중이었고, 의회는 그가 여전히 브라질 영토 내에 있다는 사실을 서신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6][7] 그럼에도 불구하고 03시 45분, 대통령 승계 서열에 따라 하원 의장이었던 라니에리 마칠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8] 굴라르가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정부를 재구성할 경우 이중 정부 상태가 될 수도 있었으나,[9] 그는 4월 4일 우루과이로 망명했다.[10]

의회의 이러한 조치는 사실상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고,[11] 사법부 역시 대법원장이 마칠리의 취임식에 참석함으로써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12] 쿠데타에 우호적인 언론들은 공석 선언 과정의 문제점을 외면한 채, 대통령 승계의 헌법성을 강조하며 보도했다. 마칠리가 형식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실질적인 권력은 코스타 이 실바 장군, 아우구스투 라데메이커 제독,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코레이아 데 멜로 준장으로 구성된 '혁명 최고 사령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군부 내에서는 권력 배분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다툼 끝에, 코스타 이 실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스텔루 브랑쿠가 차기 대통령으로 부상했다. 4월 9일, 혁명 최고 사령부는 제도법 제1호(AI-1)를 공포하여 간접 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출을 예고했다. 이 법안은 "혁명" 세력이 의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폐지할 수도 있었지만, 예외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선에서 기존 헌법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음을 명시했다. 공무원, 주지사, 정당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은 카스텔루 브랑쿠는 4월 15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혁명 최고 사령부는 해체되었다.

쿠데타 직후 며칠 동안 광범위한 정치적 숙청이 단행되었다.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주요 대상은 노동자 총사령부(CGT), 농민 연맹, 민중 행동 등 주요 노동 및 사회 운동 지도자들이었다. 전국학생연합(UNE) 본부는 군경에 의해 점거된 후 불태워졌고, 여러 대학에도 군정이 개입했다. AI-1은 이러한 숙청의 법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전복과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부패 척결은 실질적인 목표와 거리가 멀었다. 숙청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1,000명 이상의 조합원을 가진 노동조합 중 70%가 정부의 개입을 받았고, 축출된 굴라르 대통령과 관련된 정치인들, 1,530명의 공무원, 그리고 91명의 장성급 장교 중 24명을 포함한 1,228명의 군인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강제 예편되었다. 군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는 명목하에 하위 계급 군인들에 대한 숙청도 이루어졌다.

7. 4. 국제적 반향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노동 운동과의 연관성 때문에 미국 백악관의 의심을 받았다.[10][12] 양국 관계는 점진적으로 악화되었는데, 여기에는 외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이윤 송금법 제정[10], 쿠바 문제에 대한 이견[12], 1962년 미국의 관계 단절 위협과 소련의 지원 모색 시도, 링컨 고든 주 브라질 미국 대사의 굴라르 정부 전복 가능성 언급, 레오넬 브리졸라의 미국 기업 자산 몰수 조치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워싱턴에서는 농민 연맹의 활동[11]과 쿠바의 게릴라 지원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존재했다. 링컨 고든 대사는 브라질이 "1960년대의 중국"처럼 될 수 있다는 "대재앙"을 우려하기도 했다.

미국은 냉전 시대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한 봉쇄 정책을 펴고 있었으며,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사한 혁명이 재발하는 것을 막는 데 주력했다. 굴라르와 같은 비마르크스주의적 개혁가조차 미국의 압박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이는 경제적 인센티브 제공 거부나 쿠데타 지원 형태로 나타났다. 1962년 페루와 1963년 에콰도르 쿠데타 이후 들어선 권위주의 정부를 미국이 승인한 사례는[12] 이러한 미국의 정책 방향을 보여준다.

미국은 굴라르 정부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1962년 브라질 총선에서 CIA과 연결된 브라질 민주 행동 연구소(IBAD) 등을 통해 야당 후보들에게 자금을 지원했으며, 야당 성향의 주지사들에게 자원을 배분했다. 또한 브라질 경제에 필수적이던 미국의 차관 제공을 경제 안정화 및 급진 좌파와의 거리두기를 조건으로 내걸며 압박 수단으로 활용했다. 링컨 고든 대사는 1964년 3월 28일자 전보에서 "친민주주의 거리 시위 ... 그리고 국회, 군대, 학생 단체, 친미 노동자, 교회, 기업에서 민주적이고 반공산주의적 정서 고취"와 같은 "비밀 작전"이 진행 중임을 보고했다.

CIA는 쿠데타 발생 2년 전부터 군부 내 쿠데타 음모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1963년부터는 지원할 군사 세력을 물색했다. 미국은 브라질 내 분쟁 발생 시 야당에 물류 지원을 제공하는 비상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는 임시 정부 구성 및 국제적 교전 상태 인정이라는 조건 하에 실행될 예정이었다.

쿠데타가 진행 중이던 1964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은 상황을 보고받고 필요시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암호명 '브라더 샘 작전'으로 명명된 군사 지원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은 카리브해 유조선 동원, 공군 기지 탄약 적재, USS 포레스탈 항공모함이 포함된 해군 기동 부대 파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4월 10일경 브라질 해안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쿠데타 주동자인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가 미국의 물류 지원이 불필요하다고 통보함에 따라 작전은 취소되었다.[10] 미 해군 기동 부대는 실제 병력 상륙은 계획되지 않았지만, 반란군에 대한 잠재적 지원 약속이자 굴라르 정부에 대한 위협적인 효과를 가졌다.

쿠데타 성공 직후인 4월 2일 밤, 미국 정부는 라니에리 마칠리가 이끄는 임시 정부를 신속하게 승인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다소 성급한 조치로 받아들여졌으나, 미국은 미국 국무부와 브라질 외무부를 통해 새 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의 뒤를 따라 빠르게 새 정부를 인정했지만,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타임뉴욕 타임스는 쿠데타를 "혁명"으로 묘사하며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동시에 사태의 권위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굴라르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에 의해 축출된 중도 좌파 개혁가라는 시각이 우세했으며, 프랑스의 르 몽드르 피가로 등 주요 언론들은 이번 사태를 "좌파가 제안한 사회적 진보에 대한 우파의 반동"으로 규정하며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다.

한편,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은 쿠데타 발발에 놀라움을 표했다. 소련은 이미 쿠바 지원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브라질까지 지원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굴라르 측에 전달한 바 있었다.

7. 5. 군사독재에 미친 영향

1964년 쿠데타로 주앙 굴라르 대통령이 실각하고, 움베르투 지 알렝카르 카스텔루 브랑쿠를 중심으로 한 극우 군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군사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10] 이는 1985년 재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21년간 지속된 군부 통치의 시작이었다.

쿠데타 직후인 4월 9일, 군부는 제도적 조치 제1호(AI-1)를 발표했다. 이는 헌법을 완전히 폐기하는 대신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예외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이었지만, 사실상 독재 체제의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AI-1은 "전복과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워 광범위한 정치적 숙청을 가능하게 했다. 이 조치에 따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거나 공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여기에는 주요 노동조합 지도자들, 농민 연맹 및 민중 행동 관련자들, 전국학생연합(UNE) 회원들이 포함되었다. UNE 본부는 점거 후 불태워졌고, 대학들도 정부의 개입을 받았다. 정치인, 공무원, 군인들도 숙청 대상이었으며, 군 장성 91명 중 24명이 포함될 정도였다. 이러한 숙청은 군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가졌다.[3]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를 시작으로 코스타 이 실바, 메디시, 에르네스토 가이젤, 주앙 피게이레두까지 총 다섯 명의 군 출신 대통령이 집권했다. 이들은 모두 1964년 쿠데타에 참여했으며, 스스로를 "1964년 혁명"의 계승자로 선언했다.[3] 이 시기 브라질은 권위주의 체제 아래 놓였으며, 자체적인 법적 틀(제도적 조치 등)을 통해 통치되었다. 국가는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국가 정보국(SNI)을 통한 사회 감시, 언론 검열,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연합 세력 내부에서는 초기부터 균열이 나타났다. 새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반대하는 온건파부터 더욱 강력한 숙청과 통제를 주장하는 강경파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했다. 쿠데타의 주요 인물 중 일부는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심지어 반독재 노선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쿠데타의 도화선이 되었던 미나스제라이스의 올림피우 모랑 필류 장군은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자리로 좌천되었고, 마갈량이스 핀투 주지사의 대권 도전은 좌절되었다. 한때 쿠데타를 지지했던 카를루스 라세르다는 독재 정권에 반대하며 과거의 정적이었던 JK, 굴라르와 손잡고 야권 연합인 '광역 전선'을 결성했으나, 결국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군사 정권 하에서 브라질의 정책 방향은 크게 변화했다. 굴라르 정부가 추진하던 기초 개혁은 폐기되고 "보수적 현대화"가 새로운 목표로 제시되었다. 경제 분야에서는 IPES 출신의 안토니우 델핀 네토, 로베르투 캄포스 등이 주도하여 급격한 변화가 추진되었다. 이 시기 브라질 경제는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기록하며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소득 불평등 심화와 외채 증가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1980년대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농업 분야에서는 토지 개혁 요구가 억눌리고 대규모 농장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이 유지되면서 토지 소유 집중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군사 정권의 경제 정책은 국가 안보 교리(DSN)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공공 부문이 크게 팽창하기도 했다. 이는 일부 기업가들에게 1964년 쿠데타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난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국제 관계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카스텔루 브랑쿠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0]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은 극심해졌고, 브라질은 미국의 대(對) 쿠바 정책에 동조하며 쿠바와 단교했다. 또한 브라질 군사 정권은 미국의 콘도르 작전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내 반공 군사 작전을 지원하며 국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12] 그러나 이후 에르네스토 가이젤 정부 시기에는 핵 개발 문제 등으로 미국과 갈등을 겪는 등 관계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소련과의 관계는 굴라르 정부 시기에 복원된 이후 단절되지 않고 외교 및 경제 관계가 유지되었다.

군사 독재 정권의 수립은 브라질 좌파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브라질 공산당(PCB) 등이 추구했던 평화적, 단계적 사회 변화 노선은 힘을 잃었고, 대신 무장 투쟁을 통해 독재 정권에 맞서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AV media "1964: Entrevistas {{!}} Plínio de Arruda Sampaio" https://www.youtube.[...] 2014-12-03
[2] 간행물 SEMANÁRIO, O http://www.fgv.br/cp[...]
[3] 간행물 Golpe de 1964 http://www.fgv.br/cp[...]
[4] 뉴스 Citado em Formação do Brasil e unidade nacional (1980), de Luiz Toledo Machado https://books.google[...] O Estado de S. Paulo 1965-03-28
[5] 간행물 "Na boca do lobo"
[6] 간행물 Tomo 15, p. 261-266, Tomo 5, p. 287-293, e Tomo 7, p. 213-217
[7] 간행물 Tomo 3, p. 223-225 e 350-354, Tomo 10, p. 320-326 e Tomo 14, p. 227-231
[8] 간행물 p. 181-182, Tomo 2, e p. 180-181, Tomo 6
[9] 간행물 BORGES, Mauro http://www.fgv.br/cp[...]
[10] 웹사이트 2 de setembro de 1961 - Instituído o Regime Parlamentarista no Brasil http://www.canoinhas[...] 2023-01-26
[11] 웹사이트 João Goulart (página 5). Historia do Brasil http://www.portalsao[...] 2023-01-26
[12] 웹사이트 História do Brasil com Vinícius Simões: As Reformas de Base do governo João Goulart (1963 a 1964) http://historiacom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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