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영국 유럽 경제 공동체 회원국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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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5년 영국 유럽 경제 공동체 회원국 국민투표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잔류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였다. 1970년 총선에서 EEC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는 1973년 영국을 EEC에 가입시켰지만, 노동당 내 분열로 인해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1975년 2월, 정부는 국민투표에 대한 백서를 발표하고, 3월에 국민투표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찬성 측은 해럴드 윌슨 총리, 마거릿 대처 등이, 반대 측은 토니 벤 등이 주도했다. 투표 결과, 총 투표율 64.62%로 찬성 67.23%, 반대 32.77%로 영국은 EEC 잔류를 결정했다. 이 결과는 영국 국내 정치 및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41년간 영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다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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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퍼드 4인과 매과이어 7인은 1970년대 영국에서 IRA 관련 폭탄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수사 문제로 유죄 판결이 파기된 사건들이며, 길퍼드 4인은 1974년 길퍼드 펍 폭탄 테러, 매과이어 7인은 니트로글리세린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5년 영국 유럽 경제 공동체 회원국 국민투표 | |
---|---|
국민투표 개요 | |
국가 | 영국 |
날짜 | 1975년 6월 5일 |
질문 | 정부는 유럽 공동체 회원국 자격 조건에 대한 영국의 재협상 결과를 발표했음. 영국이 유럽 공동체(공동 시장)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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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결과 | |
찬성 | 17,378,581표 |
반대 | 8,470,073표 |
총 투표수 | 25,903,194표 |
유권자수 | 40,086,677명 |
결과 | 영국이 유럽 공동체(공동 시장)에 남기로 결정 |
2. 배경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가 1952년에 설립되었을 때, 영국은 회원국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은 로마 조약이 1957년에 서명되어 유럽 경제 공동체(EEC, "공동 시장")를 창설했을 때도 불참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보수당의 해럴드 맥밀런 정부는 입장을 바꾸어 에드워드 히스를 임명하여 영국의 EEC 가입 신청과 협상을 이끌도록 했다. 1963년 1월 유럽 공동체(EC) 회의에서 가입 신청이 이루어졌지만,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은 영국의 요청을 거부하고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영국은 1967년에 EC 국가들과의 회담을 재개했다.
1970년 영국 총선 과정에서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는 EEC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어 승리했다.[28] 그 결과 영국은 1973년에 EEC에 가입했지만, 가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는 실시되지 않았다. 당시 노동당은 EEC 가입 문제를 놓고 내부적으로 분열했는데, 로이 젱킨스 당시 노동당 부대표 등은 가입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당내 상당수는 반대했다.[2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당은 EEC 가입 조건 재협상과 함께, 그 결과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가입 지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2. 1. 1970년 보수당 공약
1970년 영국 총선을 앞둔 1970년 4월,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에드워드 히스는 추가적인 유럽 통합은 "새로운 회원국의 의회와 국민들의 전폭적인 동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6]1970년 총선에서 모든 주요 정당들은 유럽 공동체 가입 또는 협상을 약속했다. 선거에 대한 보수당의 공약은 회원국 가입 협상을 약속했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입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7] 보수당 공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조건을 협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 영국 국민의 장기적인 이익에 부합하며, 우리나라의 번영과 안보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회는 엄청납니다. 더 큰 시장을 확보함으로써 경제 성장과 더 높은 생활 수준이 달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장애물을 인식해야 합니다.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 데에는 단기적인 불이익이 있을 것이며, 이는 장기적인 이점과 비교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지불할 의향이 없는 가격이 있습니다. 협상을 통해서만 균형이 공정한지, 그리고 영국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약속은 협상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협상이 진행됨에 따라 우리는 의회를 통해 국가에 정기적으로 보고할 것입니다.
보수당 정부는 불평등하거나 불공정한 합의를 의회에 추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국회의원도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을 내릴 때, 장관과 국회의원은 지역구민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대표하는 개별 시민의 생활 수준에 대한 가입의 영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입니다.
보수당은 1970년 영국 총선에서 전국 득표율 46.6%로 총 630석 중 330석을 차지하여 예상 밖의 약 30석 과반수를 확보했다. 에드워드 히스가 총리가 되었고, 선거 이후 시작된 가입 협상을 직접 이끌었다. 그는 새로운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으며, 퐁피두는 이전 샤를 드골 대통령과 달리 영국의 가입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 영국의 회원국 가입을 위한 길을 열었다.
2. 2. 협상과 가입
1970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 정부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협상을 시작했다. 히스는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여 프랑스의 거부권을 철회시키고 영국의 가입 길을 열었다.[6]EEC 가입 협상은 1970년 6월 30일에 시작되었다. 1971년 영국 정부는 "영국과 유럽 공동체"라는 백서를 발간했고[8], 같은 해 10월 21일부터 28일까지 영국 하원에서 EEC 가입 원칙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표결에서 보수당 의원들에게는 자유 투표가 허용되었으나, 노동당 의원들에게는 반대 당론이 내려졌고 자유당은 찬성 입장이었다. 당시 노동당 부대표였던 로이 젱킨스 등 일부 노동당 의원들은 EEC 가입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3][29], 당론은 반대였다. 표결 결과, 찬성 356표, 반대 244표로 가입 원칙이 승인되었다.
영국은 1972년 1월 22일 가입 조약에 서명했다. 가입을 위한 법적 절차인 1972년 유럽 공동체 법(European Communities Act 1972) 제정 과정에서 국민투표는 실시되지 않았다.[28] 해당 법안은 하원에서 근소한 표차로 통과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의회 절차를 마치고 국왕 재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영국은 1973년 1월 1일 덴마크, 아일랜드와 함께 정식으로 유럽 경제 공동체의 회원국이 되었다.
2. 3. 1974년 총선과 노동당 공약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 자격 조건을 재협상하고, 협상 결과가 받아들여질 경우 새로운 조건 하에서의 지속적인 회원 자격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노동당은 이 선거에서 최대 정당이 되었지만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하여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소수 정부를 이끌게 된 노동당은 집권 한 달 안에 2월 공약에 따라 EEC 회원 자격 조건에 대한 재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 진행 중인 어려운 협상의 결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브뤼셀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결정은 여기서 영국 국민에 의해 내려질 것이다."[1]
이는 1975년에 선거를 치를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되었다.[3]
노동당은 같은 해 10월에 열린 두 번째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노동당 정부는 추가적인 총선 없이 국민투표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9]
3. 국민투표 법안
정부는 1975년 2월 26일, 제안된 국민투표에 대한 백서를 발표했다. 이 백서는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 군인 및 귀족원 의원의 투표권 부여, 그리고 전국 투표 결과를 단일 중앙 집계소에서 집계하는 방안 등을 권고했다. 이 백서는 하원의 승인을 얻었다.
이후 1975년 3월 26일, 국민투표 실시를 위한 법안이 하원에 제출되었고, 4월 10일 열린 두 번째 심의에서 하원 의원들은 찬성 312표, 반대 248표로 법안을 가결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영국에는 전국 단위의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한 절차나 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 국민투표는 20세기 동안 영국에서 실시된 유일한 전국적인 국민투표였으며, 의회 주권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과거 국민투표가 반대에 부딪혔던 점을 고려할 때 헌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주요 국민투표(하나 이상의 지방 정부 구역을 포괄하는)는 1973년 북아일랜드의 주권 국민투표였다.[10]
투표 집계 방식은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주요 쟁점이었다. 정부는 단일 전국 집계를 제안했으나, 노동당 로데릭 맥파카 의원이 제출한 각 행정 구역별 집계 수정안이 초당적 지지를 받아 통과되었다.[3] 이 법은 찬성 투표의 전국적인 다수결 요건을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다.
1975년 국민투표법으로 명명된 이 법안은 투표가 실시되기 한 달 전인 1975년 5월 8일에 국왕 재가를 받아 최종 확정되었다.[11] 이 법은 영국 최초의 전국 단위 국민투표 실시에 필요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유권자에게 제시될 구체적인 질문도 포함했다.
이 국민투표는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가 2000년 정당, 선거 및 국민투표법을 통과시키기 25년 전에 치러졌다. 2000년 법은 향후 모든 영국 전역 국민투표의 일반 절차를 규정하고, 이를 감독할 선거 관리 위원회를 창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1. 투표 집계 방식 논쟁
정부는 이 투표가 총선과는 성격이 다르며, 영국 전체가 하나의 선거구라는 점을 고려하여 전국의 모든 투표용지를 런던의 얼스 코트 전시 센터로 모아 한 번에 집계하는 단일 전국 집계 방식을 제안했다. 이는 영국 역사상 전례 없는 방식이었다.[3] 하지만 이 방안은 노동당 내부에서도, 다른 야당들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자유당은 각 의회 선거구별로 집계하자는 수정안을 하원에 제출했으나, 찬성 131표, 반대 263표로 부결되었다. 이후 노동당 소속 로데릭 맥파카 의원이 각 행정 구역(1974년 개편된 카운티 의회 지역 기준)별로 나누어 집계하자는 수정안을 다시 제출했다. 이 수정안은 여러 정당의 지지를 받아 찬성 272표, 반대 155표로 통과되었다.[3] 결국, 국민투표는 각 행정 구역별로 결과를 집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포함한 국민투표법은 투표일 한 달 전인 1975년 5월 8일 국왕 재가를 받아 확정되었다.[11]3. 2. 국민투표 질문
1975년 국민투표법에 명시된 대로, 영국 유권자에게 제시될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11]: 정부는 유럽 공동체 가입 조건에 대한 영국의 재협상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
: '''영국이 유럽 공동체 (공동 시장)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간단한 '''예''' / '''아니요''' 답변(단일 'X'로 표시)이 허용되었다.
사용된 질문은 1975년 2월 정부 백서에 제시된 선택 사항 중 하나였지만, 국민투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동안 정부는 질문 끝에 괄호 안에 "공동 시장"이라는 단어를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이 국민투표는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가 2000년 정당, 선거 및 국민투표법을 통과시키기 25년 전에 치러졌는데, 이 법은 미래의 모든 영국 전역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한 일반적인 절차를 영국 법에 도입했으며, 이러한 투표를 감독하고 제안된 국민투표 질문을 테스트하고 연구할 선거 관리 위원회를 창설했다.
4. 찬반 운동
유럽 경제 공동체(EC) 가입 조건을 재협상한 뒤, 1975년 4월 국민투표가 공식적으로 소집되었다. 당시 해럴드 윌슨 총리가 이끌던 노동당 제4차 윌슨 내각은 EC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뉘었고, 각 진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견해를 강력하게 고수했기 때문에, 그는 연립 정부 외에서는 전례가 없는 헌법적 관례인 내각의 집단 책임 원칙 적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내각 구성원들은 서로 공개적으로 반대 캠페인을 벌일 수 있었다. 총 23명의 내각 구성원 중 7명이 EC 가입에 반대했다.[12]
윌슨의 해결책은 하원에서의 발언은 정부 정책(즉, EC 가입 지지)을 반영해야 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하여, 내각 구성원의 대량 해임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 헤퍼는 하원에서 EC 가입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후 사임해야 했다.
주요 캠페인 기간은 1975년 5월 8일 국민투표법 1975가 발효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투표는 6월 5일에 실시되었다. 이는 당시 치러지던 총선에 비해(특히 2016년 영국 유럽 연합 회원국 국민투표의 10주 캠페인 기간에 비해) 불과 27일의 짧은 캠페인 기간을 의미했다.
4. 1. 찬성 측 (Britain In Europe)

당시 노동당 정부는 각료들에게 국민투표에 대한 입장을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허용했다. 해럴드 윌슨 총리를 비롯해 제임스 캘러헌 외무장관,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 로이 젱킨스 내무장관 등 정부 내 주요 각료 대부분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잔류, 즉 찬성 입장을 선택했다. 오래전부터 EEC 가입을 지지해왔던 보수당과 자유당 역시 찬성 측에 섰다.
'찬성' 캠페인은 공식적으로 "Britain In Europe"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해럴드 윌슨 총리와 그의 내각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재무부 장관 데니스 힐리, 외무부 장관 제임스 캘러헌, 내무부 장관 로이 젱킨스를 포함한 영국 주요 국무 요직 인사들이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당시 신임 대표였던 마거릿 대처와 에드워드 히스 전 총리를 포함한 보수당 의원 대다수(히스는 특히 적극적으로 캠페인에 참여했다)가 지지했으며, 1975년 4월 양심 투표에서는 보수당 의원 275명 중 249명이 EC 잔류를 지지했다.[13] 자유당, 사회민주노동당, 북아일랜드 연합당, 선구적 연합주의 진보당 역시 찬성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공식 찬성[17] 및 반대[18] 캠페인 팜플렛과 더불어, 유럽 경제 공동체(EC) 잔류를 지지하는 정부 자체 제작 팜플렛을 영국 내 모든 가정에 배포했다.[19][20] 이 팜플렛은 "재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음식, 돈, 일자리"라고 강조했다.
캠페인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주류 전국 영국 언론은 '찬성' 캠페인을 지지했다. 좌익 성향의 ''모닝스타''만이 '반대' 캠페인을 지지한 유일한 주요 전국 일간지였다. 텔레비전 방송은 총선 시 정당 정치 방송과 유사하게 양측 캠페인에 활용되었다. BBC 1, BBC 2, ITV 등 3개 지상파 채널에서 동시에 방송되었으며, 최대 2천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했다. '찬성' 측 광고는 연설자가 시민들의 우려를 직접 듣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효과적이었던 반면, '반대' 측 광고는 연설자가 자동 응답기처럼 준비된 내용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찬성' 캠페인은 다수 영국 기업과 영국 산업 연맹의 지원을 받아 자금 면에서 '반대' 측보다 훨씬 유리했다. 캠페인 재무 담당자였던 앨리스테어 맥알파인은 "은행과 대기업들이 상당한 자금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당시 기업들은 "압도적으로 친유럽적"이었고,[21] 해럴드 윌슨 총리 역시 여러 주요 기업인들을 만나 지지를 확보했다. 친유럽 성향 인사들이 기업인들과 당파나 이념을 초월해 교류하는 모습은 흔했다.[21] 반면 '반대' 캠페인의 전국 대리인 존 밀스는 "우리는 상대방의 롤스로이스급 캠페인에 비해 매우 적은 예산으로 운영했다"고 술회했다.[22] 이 외에도 시민 사회 단체, 전국 농민 연맹, 일부 노조 등도 '찬성' 캠페인을 지지했다.
'찬성' 캠페인은 반대 측 인사들의 신뢰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앨리스테어 맥알파인에 따르면, 캠페인의 핵심은 "반시장주의자들을 신뢰할 수 없고 위험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었으며, "잔류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탈퇴를 주장하는 이들이 비정상적이거나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을 부각"하려 했다.[22] 대표적인 반대 측 인사인 토니 벤 산업부 장관은 "EC 가입으로 영국에서 5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지고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직위를 근거로 내세웠다.[21] 그러나 '찬성' 캠페인과 정부 각료들은 그의 주장을 일축했으며, ''데일리 미러''는 벤을 "공포 조장 장관(Minister of Fear)"이라고 비판하는 등 언론의 조롱도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반대' 캠페인에는 로이 젱킨스나 해럴드 윌슨처럼 대중적 지지를 받는 중도 성향의 지도자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4. 2. 반대 측 (National Referendum Campaign)


'반대' 캠페인(National Referendum Campaign)은 주로 노동당 내 좌파 인사들이 주도했다. 내각 장관이었던 마이클 푸트, 토니 벤, 피터 쇼어, 바바라 캐슬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캐슬은 캠페인 기간 동안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시장 기적이라는 신기루로 우리를 시장으로 유인했다"고 비판했다. 에릭 바클리나 더글러스 제이와 같이 노동당 내 우파 성향 인사 중 일부도 반대 캠페인에 참여했지만, 주류는 좌파였다. 노동당 내 분열은 상당해서, 정부가 제출한 EEC 잔류 관련 백서에 대한 하원 표결에서 노동당 의원 148명이 반대했고, 찬성은 138명, 기권은 32명에 불과했다.[3]
보수당 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있었다. 보수당 1922 위원회 위원장 에드워드 듀 칸은 "많은 보수당원들은 유럽 공동체가 영국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수당도 이에 대해 분열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마스트리흐트 조약 비준 등 이후 유럽 관련 논쟁과 비교하면, 1975년 당시 보수당 내 유럽회의주의자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가장 유명한 보수당 반대 인물은 전직 장관이었던 에녹 파월로, 그는 토니 벤과 함께 반대 캠페인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14]
이 외에도 대부분의 얼스터 연합당(UUP) 의원들, 민주연합당(DUP),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플라이드 컴리 등이 반대 캠페인을 지지했다. 원외 정당 중에서는 극우 성향의 국민전선과 영국 공산당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반대 캠페인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찬성' 캠페인이 영국 산업 연맹을 비롯한 다수 기업과 은행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은 것과 대조적이었다. 당시 기업들은 "압도적으로 친유럽적"이었으며,[21] '찬성' 캠페인 재무 담당자 앨리스테어 맥알파인에 따르면 "은행과 대규모 산업 기업들이 매우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 반면, 반대 캠페인의 전국 대리인 존 밀스는 "우리는 상대방의 롤스로이스 작전에 비해 푼돈으로 운영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22]
언론 환경 역시 불리했다. 좌파 성향의 ''모닝스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이 '찬성' 캠페인을 지지했다. 텔레비전을 통한 캠페인 방송도 진행되었으나, 반대 측 방송은 연설자들이 자동 응답기에서 원고를 읽는 듯한 인상을 주어 '찬성' 측보다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찬성' 캠페인은 반대 진영 인사들의 신뢰도를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앨리스테어 맥알파인은 "우리 캠페인의 핵심은 반시장주의자들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위험한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잔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탈퇴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나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술회했다.[22] 토니 벤은 산업부 장관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근거로 EEC 가입으로 인해 "영국에서 5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식량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다"고 주장했으나,[21] 이는 '찬성' 캠페인과 다른 장관들로부터 반박당했으며 ''데일리 미러'' 등 일부 언론으로부터 "공포의 장관"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반대 캠페인에는 '찬성' 캠페인의 로이 젠킨스나 해럴드 윌슨과 같이 대중적 지지를 받는 중도 성향의 구심점이 부족했다.
4. 3. 정당별 공식 입장
수년 동안 보수당과 자유당은 유럽 공동체(EC) 회원 자격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따라서 이들 정당은 공식적으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노동당의 경우 상황이 복잡했다. 당시 보수당 1922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에드워드 듀 칸은 "노동당은 이 문제에 대해 희망 없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워한다"고 평할 정도로 당내 의견 차이가 심했다. 당 지도부 대다수는 회원 자격 유지를 강력히 지지했지만, 당내 좌파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반대' 캠페인에는 마이클 푸트, 토니 벤, 피터 쇼어, 바바라 캐슬 등 노동당 내 좌파 성향의 주요 장관들이 참여했으며, 에릭 바클리나 더글러스 제이와 같은 우파 성향 인사들도 일부 포함되었다. 바바라 캐슬은 캠페인 기간 동안 "그들은 시장 기적이라는 신기루로 우리를 시장으로 유인했다"고 비판했다. 많은 노동당 후선 의원 역시 반대 입장을 보였는데, 재협상에 대한 정부의 백서 표결에서 148명의 노동당 하원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고, 찬성은 138명, 기권은 32명이었다.[3]
1975년 4월 26일 노동당 전당대회에서는 유럽 공동체 잔류 안건이 거의 2:1의 표차로 부결되었다. 토니 벤은 "우리는 전당대회를 치렀고 결정은 명확하다... 이제 노동당이 선거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고 말하며 당 차원의 반대 운동을 주장했다.[15] 전당대회에 참석한 46개 노조 중 7개만이 잔류를 지지했을 정도로 반대 여론이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전당대회에서 특정 안건에 대해 2:1 이상의 표차로 찬성하지 않으면 국민투표 운동에서 해당 입장을 지지하지 않고 '당 기구'는 중립을 유지하기로 사전에 결정했었다. 따라서 노동당 자체는 공식적으로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다.
보수당 내에서도 일부 반대 의견이 존재했다. 에드워드 듀 칸은 "많은 보수당원들은 유럽 공동체가 영국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수당도 이에 대해 분열되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당 내 유럽회의주의는 이후 마스트리흐트 조약 비준 논쟁 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얼스터 연합당(UUP)은 '반대' 입장이었으며, 전 보수당 장관이었던 에녹 파월은 토니 벤 다음으로 가장 두드러진 반대 운동가였다.[14]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다른 정당들로는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플라이드 컴리, 민주연합당(DUP), 국민전선, 영국 공산당, 오피셜 신페인, 임시 신페인 등이 있었다.
다음은 주요 정당 및 단체의 공식 입장을 정리한 표이다.
찬성 (Yes) | 공식적인 당 입장이 없음 | 반대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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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투표 과정
국민투표는 국민투표법에 근거하여 영국 전역에서 단일 다수결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투표 집계는 총 68개 지역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당시 잉글랜드의 47개 행정 구역, 웨일스의 8개 행정 구역, 새롭게 구성된 스코틀랜드의 12개 행정 구역이 집계 지역으로 활용되었으며, 북아일랜드는 전체가 하나의 단일 집계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다음 표는 영국 내 구성 국가별 집계 지역 수를 보여준다.
6. 투표 결과
국민투표는 영국 표준시 기준 6월 5일 목요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국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개표는 다음 날인 6월 6일 금요일 오전 9시부터 시작되었으며, 최종 결과는 68개 모든 개표 지역의 결과가 집계된 후 런던의 얼스 코트 전시 센터에서 최고개표감독관(CCO)인 필립 앨런 경에 의해 오후 11시 직전에 발표되었다.[23]
투표 결과,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 회원국으로 남는 것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가 확인되었다. 총 유권자 40,086,677명 중 25,903,194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4.62%를 기록했다. 찬성표는 17,378,581표(67.23%)였고, 반대표는 8,470,073표(32.77%)로, 찬성표가 반대표보다 8,908,508표 더 많았다. 유효표는 25,848,654표(99.78%)였으며, 무효표는 54,540표(0.22%)였다.[23][30][31]
영국 내 대부분 지역에서 찬성표가 우세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셰틀랜드 제도와 아우터헤브리디스 두 지역만이 반대표가 더 많았다. 전반적으로 EEC 회원 자격에 대한 지지는 보수당 지지율 및 평균 소득 수준과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반면, 노동당 지지세가 강하고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았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찬성률이 60%를 넘었으며, 노동당 지지세가 강한 미드 글라모건 지역만이 예외였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영국 전체 평균보다 낮은 찬성률을 보였다.
=== 구성국별 결과 ===
국가 | 선거인 수 | 투표율 (%) | 득표수 | 득표율 (%) | 무효표 수 | |||
---|---|---|---|---|---|---|---|---|
찬성 | 반대 | 찬성 | 반대 | |||||
잉글랜드 | 33,356,208 | 64.6% | 14,918,009 | 6,182,052 | 68.65% | 31.35% | 42,161 | |
북아일랜드 | 1,030,534 | 47.4% | 259,251 | 237,911 | 52.19% | 47.81% | 1,589 | |
스코틀랜드 | 3,688,799 | 61.7% | 1,332,186 | 948,039 | 58.42% | 41.58% | 6,481 | |
웨일스 | 2,011,136 | 66.7% | 869,135 | 472,071 | 64.80% | 35.20% | 4,339 |
7. 결과의 영향
1975년 6월 5일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유럽 경제 공동체(EEC) 잔류를 지지하는 '찬성' 표가 17,378,581표(67.2%), 탈퇴를 지지하는 '반대' 표가 8,470,073표(32.8%)로 집계되어 영국의 EEC 잔류가 압도적인 표차로 결정되었다.[23] 이는 '찬성'이 '반대'보다 8,908,508표 더 많은 결과였으며, 전체 투표율은 64.6%를 기록했다.[23]
지역별로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대부분 지역에서 '찬성'이 60% 이상의 높은 지지를 얻었으나,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낮았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셰틀랜드 제도와 서부 제도는 영국 내에서 유일하게 '반대' 표가 더 많이 나온 지역이었다.
이 국민투표 결과는 14년간 이어진 영국의 유럽 공동체 회원 자격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영국의 EEC 잔류를 확정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결과는 이후 수십 년간 영국의 유럽 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7. 1. 영국 국내
1975년 6월 6일 금요일 18시 30분(BST)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결과가 명확해지자 해럴드 윌슨 총리는 다우닝가 10번지 밖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국민 투표는 어떤 총선에서 어떤 정부가 받은 것보다 더 큰 표차로 결정되었습니다. 영국이나 전 세계 누구도 그 의미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제약 없이 자유롭게 진행된 투표였으며, 건설적이고 격렬함 없이 진행된 자유 민주적 캠페인을 따른 것입니다. 그것은 14년간의 국가적 논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국의 헌신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 유럽의 파트너와 전 세계의 친구들과 함께 국가 전체가 직면한 도전에 전적으로 동참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에녹 파월은 국민 투표 며칠 후 신문에서 이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24]
:''다시는, 공리의 필연성으로, 영국인은 조국을 위해 살거나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고 죽는 나라는 구식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폐지했습니다. 아니,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국민 투표는 죄수가 즉시 교수형에 처해지는 "판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임시적일 뿐입니다... 국회가 그 또는 다른 국회가 한 일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있는 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의 국민 투표 팸플릿에 나오는 황금빛 말입니다: "우리의 지속적인 멤버십은 국회의 지속적인 동의에 달려 있습니다."''
로이 젠킨스는 "이는 불확실성을 해소합니다. 이는 영국을 유럽에 헌신하게 하며, 유럽에서 적극적이고 건설적이며 열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헌신하게 합니다."라고 말했다. 토니 벤은 "영국 국민이 말하면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결정에 따라야 하며, 그것이 바로 제가 국민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는 정신입니다."라고 말했다.[25] 젠킨스는 영국이 유럽 공동체 회원으로 남도록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에 대한 보상으로, 2년 후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유럽 위원회 위원장 직을 맡았다. 이는 영국이 유럽 공동체 및 유럽 연합 회원국으로 있던 기간(1973년~2020년) 동안 유일하게 영국 정치인이 해당 직책을 맡은 사례이다.
이 결과는 해럴드 윌슨의 전술적 입지를 강화하여, 선거 이후 그의 정책에 대한 추가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Cook과 Francis(1979)에 따르면, "그의 당의 좌파는 국민 투표를 실시함으로써, 우파는 그 결과에 의해 달래졌다."[3] 이 결과에 따라, 노동당과 영국의 노동조합 자체도 유럽 공동체 회원에 대한 대중의 승인을 받기 전에는 참여를 꺼렸던 유럽 의회 사회주의 그룹과 같은 유럽 기구에 합류했다.
하원에서는 1977년에 유럽 의회 직접 선거에 대한 논쟁이 시작될 때까지 국민 투표 결과로 유럽 문제가 2년 동안 해결되었다.
이 결과는 그 후 41년 동안 영국 의회와 나중에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 새로 설립된 자치 기구의 정치인들에게, 특히 친 유럽적인 방향성을 제시했으며, 2016년 6월 23일 목요일에 2016년 EU 회원국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영국이 유럽 연합을 탈퇴하기로 51.9% 대 48.1%로 투표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 당시에는 회원국에 대한 열정의 상대적인 차이가 역전되어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탈퇴에 투표했고, 스코틀랜드, 런던, 북아일랜드는 잔류에 투표했다. 2020년 1월 31일 23시(GMT)에 영국은 47년간의 회원 자격 이후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 연합을 탈퇴했다.
7. 2. 국제적 영향
1975년 6월 6일, 개표 결과가 명확해지자 해럴드 윌슨 총리는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국민투표 결과가 압도적인 차이로 결정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14년간의 국가적 논쟁이 끝났다"며, 이제 영국 전체가 "유럽의 파트너와 전 세계의 친구들과 함께 국가 전체가 직면한 도전에 전적으로 동참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밝혔다.노동당 내 저명한 친유럽주의자였던 로이 젠킨스는 이 결과가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영국을 유럽에서 적극적이고 건설적이며 열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헌신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2년 뒤인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영국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유럽 위원회 위원장 직을 역임하게 된다. 반면, 보수당의 에녹 파월은 국민투표 며칠 후 신문을 통해 "국민 투표는 죄수가 즉시 교수형에 처해지는 '판결'이 아니"라며, 국회가 언제든 결정을 뒤집을 수 있기에 결과가 임시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24] 토니 벤은 "영국 국민이 말하면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그들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며 결과를 수용하는 입장을 보였다.[25]
국민투표 결과는 영국 내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동당과 영국의 노동조합들은 이전까지 참여를 주저했던 유럽 의회 사회주의 그룹과 같은 유럽 기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3] 영국 하원에서는 유럽 문제가 향후 2년간 안정되었으며, 1977년 유럽 의회 직접 선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때까지 큰 쟁점이 되지 않았다.
이 국민투표 결과는 이후 41년 동안 영국 의회 및 새로 설립된 자치 기구들에서 영국의 유럽 지향적인 노선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조는 2016년 6월 23일에 실시된 EU 회원국 국민투표에서 유럽 연합 탈퇴가 결정(찬성 51.9%, 반대 48.1%)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1975년과는 달리 2016년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스가 탈퇴를, 스코틀랜드, 런던, 북아일랜드는 잔류를 선택하는 지역적 차이를 보였다. 결국 영국은 47년간의 회원국 자격을 뒤로하고 2020년 1월 31일 유럽 연합을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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