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이탈리아 총선은 2006년 4월 9일과 10일에 치러졌으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연합 자유의 집과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 올리브 나무 연합 간의 경쟁으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 올리브 나무 연합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여 로마노 프로디가 총리로 재선출되었다. 하원에서는 올리브 나무 연합이 347석, 자유의 집이 281석을 얻었고, 상원에서는 올리브 나무 연합이 158석, 자유의 집이 156석을 얻었다. 선거 이후 개표 결과에 대한 논란과 재검표가 있었으나, 대법원은 프로디의 승리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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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탈리아 총선
선거 정보
선거 이름
2006년 이탈리아 총선
국가
이탈리아
유형
의회
투표 유형
연립
진행 여부
아니요
이전 선거
2001년 이탈리아 총선
이전 선거 연도
2001년
선출 의원
이탈리아 제14대 의회
다음 선거
2008년 이탈리아 총선
다음 선거 연도
2008년
선출 의원
이탈리아 제15대 의회
선거 의석
모든 630석 (하원) 316석 필요 (과반수) 315석 (상원) 162석 필요 (과반수)
2006년 이탈리아 총선 선거 운동은 중도좌파 올리브 나무 연합의 로마노 프로디와 중도우파 자유의 집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프로디는 유럽 집행위원회 의장과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며,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현직 총리였다.
베를루스코니는 프로디에게 전국 방송 토론을 제안했으나, 프로디는 특정 규칙이 정해져야만 수락하겠다고 밝혔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를 형세 역전의 기회로 여겼으나, 2001년 선거에서 자신이 중도좌파 후보와의 만남을 거부했던 전력이 있었다.
RAI 검열 의회 위원회 주관으로 두 차례의 텔레비전 토론이 열렸다. 프로디는 베를루스코니에게 주어진 총리로서의 최종 연설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며, 최종 연설 취소 전까지 토론 불참을 선언했다. 이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최종 연설을 취소하면서 해결되었다.
각 토론은 90분 동안 광고 없이 진행되었으며, 답변과 반박 시간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후보자들은 메모만 지참할 수 있었고, 청중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이탈리아 정치 토크쇼와는 다른 이례적인 방식이었다.
3월 14일 첫 번째 토론은 Rai Uno에서 생방송되었으며, ''TG1'' 책임자 클레멘테 미문이 사회를 맡고, ''Il Messaggero''의 로베르토 나폴레타노와 ''La Stampa''의 마르첼로 소르지 기자가 질문했다. 1,600만 명 이상이 시청하여 정치 텔레비전 프로그램 최고 기록을 세웠다. 베를루스코니는 발언 시간을 초과하고 토론 규칙을 비판했으나, 프로디는 미국 토론 방식과 같다며 옹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란과 이라크를 혼동하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4월 3일 두 번째 토론은 브루노 베스파가 사회를 맡고, 첫 번째 토론과 같은 기자들이 질문했다. 경제 제안을 중심으로 더욱 치열하게 진행되었으며, 베를루스코니는 지방 자치단체 소유 부동산에 대한 지방세(ICI) 폐지를 제안하는 "깜짝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자유의 집 내부에서 완전히 합의된 것이 아니었고, 프로디는 중도우파 시장들의 반응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2006년 총선 투표함
2005년 7월, 카를로 아젤리오 차임피 대통령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조기 총선 가능성을 질의했으나, 베를루스코니는 임기 만료 시점까지 집권하겠다고 거절했다.[8][9]
하지만 10월 18일, 베를루스코니는 2006년 4월 9일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또한 지방 선거는 5월에 실시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중도좌파 시장들의 행정이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10][11] 비판론자들은 모든 선거를 같은 날 치르면 공공 지출을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1. 자유의 집 (중도우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끄는 자유의 집은 이전 총선과 거의 같은 정당들로 구성되어 현직 정부를 지지하는 연합이었다.
해체된 이탈리아 사회당의 전 당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사회민주당인 새 이탈리아 사회당(NPSI)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장관을 지낸 지아니 드 미켈리스가 이끌었다. 베를루스코니 3기 내각에서는 무임소 장관으로 참여했으나, 2005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린 마지막 전당대회에서 분열을 겪었다. 고(故) 베티노 크락시의 아들인 보보 크락시가 이끄는 좌파 파벌이 자유의 집을 탈퇴하고 크락시 자신을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했다. NPSI는 자치를 위한 기독민주당과 연합 명단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연합을 이끌고 총선에 나선 베를루스코니는 기독교 및 중도 민주당 연합(UDC)의 지지 감소를 경험했다. UDC는 선거법을 비례 대표제로 환원하고, 연합의 총리 후보를 공식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경선을 요구했다. 당 명부 비례 대표제가 복원되고, 베를루스코니가 연합 전체에 부과한 여러 개혁을 비판한 마르코 폴리니가 UDC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하면서, 자유의 집 내부의 지도부 교체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 2005년 10월 27일, 로렌조 체사가 폴리니의 후임으로 새로운 UDC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연합은 피에르 페르디난도 카시니, 잔프랑코 피니, 베를루스코니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정당의 정치 지도자가 총리 후보가 되는 "3인 체제"를 발표했다. 베를루스코니의 정당이 압도적으로 가장 큰 정당이었기 때문에, 베를루스코니가 실질적인 후보임이 분명했다.
야당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은 사건 중 하나는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전 독재자의 손녀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의 사회 대안과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루카 로마뇰리 등 여러 파시즘 운동 및 정당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연합 내에 두 개의 공산당이 있으며, 그들의 후보 중에는 무정부주의 활동가인 프란체스코 카루소와 트랜스젠더인 블라디미르 룩수리아가 있다고 반박했다.
자유의 집의 플랫폼은 2월 25일에 발표되었다. 22페이지 분량으로[7], 중도우파 정부의 첫 5년을 계승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2001년 총선을 특징지었던 "이탈리아인들과의 계약"(단 5개의 기본 항목)과는 차별화되었다. 이는 "모호하다"는 비판과 "선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중도우파 플랫폼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역의 재정 자치권 강화 (federalismo fiscaleit, 재정 연방주의)
이른바 grandi opereit (대규모 공공사업), 특히 메시나 해협 다리 건설
중소기업 및 가족기업 지원, 그리고 "메이드 인 이탈리아" 수출 상품 사업 육성
감세
미국과의 관계 강화 및 유럽 연합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 재확인
결혼을 기반으로 하는 가족 가치 수호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 강화
특히 젊은 이탈리아인과 여성을 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현행 정책 유지
이민 제한
3. 2. 연합 (중도좌파)
선거 운동 중인 로마노 프로디
2006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중도좌파 연합은 "연합(The Union)"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로마노 프로디가 이끌었다. 프로디는 1996년 총선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꺾고 총리에 올랐으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프로디의 후보 지명은 2005년 10월 16일에 열린 전국 경선을 통해 확정되었다.[28] 이 경선에는 400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참여했으며, 이탈리아 거주 외국인도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프로디는 약 75%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
기존의 올리브 나무 연합은 이탈리아 중도좌파부터 좌파까지 모든 정당을 포괄하는 형태로 확대되었다. 주요 정당으로는 좌파민주당, 마르게리타, 이탈리아 민주사회당 등이 있었다.
주먹 속의 장미는 자유지상주의 성향의 이탈리아 급진당과 이탈리아 민주사회당이 연합하여 결성한 정당으로, 토니 블레어와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등 유럽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동성결합 합법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연합의 최종 강령에 서명하지 않았다.
신이탈리아 사회당에서 분리된 좌파인 이탈리아 사회당은 보보 크락시가 이끌었으며, 자유의 집에서 나왔지만 주먹 속의 장미에는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당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전국 투표에서 2%를 넘지 못했지만, 보보 크락시는 롬바르디아에서 올리브 나무 연합의 주요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에 진출했다.
연합은 여러 소규모 정당과 운동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중 유럽 의회 의원 1명을 배출한 이탈리아 연금 수령자당만이 의회에 대표를 두고 있었다.
장시간 논의 끝에 중도좌파 연합은 2006년 2월 10일 공식 강령[5]을 발표하고 다음 날 대중에게 공개했다. 하지만 주먹 속의 장미는 시민 연합 및 LGBT 권리와 같은 몇몇 문제가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했다. 이 강령은 281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때문에 자유당(House of Freedoms)의 비판을 받았다. 중도우파 연합의 비판에 답하기 위해 연합은 공식 정치 강령의 축약되고 가독성이 향상된 버전[6]을 발표했다.
탈세자에 대한 강화된 단속 활동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노동세 5% 감세 (흔히 '세금 쐐기'로 불림)
4. 주요 쟁점
2006년 이탈리아 총선은 중도좌파 올리브 나무 연합(이하 연합)과 중도우파 자유의 집(House of Freedoms)(이하 자유의 집) 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다양한 쟁점들이 부각되었다. 1. 정치 구도 및 연합
연합 (올리브 나무 연합): 1996년 총선에서 승리했던 로마노 프로디가 이끌었으며, 중도좌파에서 좌파까지 다양한 정당을 포함했다. 특히, 주먹 속의 장미(Rose in the Fist)는 동성결합 합법화 등 사회 문제에 대한 언급 부족으로 연합의 최종 강령에 서명하지 않았다.
자유의 집: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끄는 연합으로, 이전 총선과 비슷한 정당들로 구성되었다. 신이탈리아 사회당(New Italian Socialist Party, NPSI)은 내부 분열을 겪었고, 기독교 및 중도 민주당 연합(Union of Christian and Centre Democrats, UDC)은 선거법(electoral law) 변경과 총리 후보 경선을 요구하며 베를루스코니와 갈등을 빚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알레산드라 무솔리니(Alessandra Mussolini), 루카 로마뇰리(Luca Romagnoli) 등 파시즘(Fascism) 관련 인물들의 지지를 얻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2. TV 토론RAI 검열 위원회의 주관 하에 두 차례의 텔레비전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탈리아 정치 토크쇼와는 달리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었으며, 후보들은 메모를 지참할 수 없었고 청중의 참여도 제한되었다.
1차 토론 (3월 14일): 1,600만 명 이상이 시청하며 정치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베를루스코니는 발언 시간을 초과하고 이란과 이라크를 혼동하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차 토론 (4월 3일): 경제 제안을 중심으로 더욱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지방 자치단체 소유 부동산에 대한 지방세(ICI) 폐지를 제안하는 "깜짝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자유의 집 내부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자유의 집: 베를루스코니는 프로디가 당선되면 세금을 인상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속세 재도입 및 국채, 주식 시장 거래에 대한 세금 강화를 언급했다.
4. 헌법 개정자유의 집은 1948년 제정된 헌법의 대대적인 개정을 제안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회의원 수 감축 (950명 → 750명)
총리 권한 강화
양원제 개편 및 지역 권한 강화
중도좌파 야당은 이를 "위험하고", "분리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이라고 비판했다. 2006년 6월 25일~26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61.32%의 반대로 헌법 개정안은 부결되었다. 5. 경제 문제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경제 성장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고, EU 전체에서 가장 높은 부채를 기록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마스트리흐트 조약(Treaty of Maastricht) 기준 완화를 요청했고, 그의 경제 정책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줄리오 트레몬티(Giulio Tremonti) 경제부 장관의 재정 적자 해소 노력은 세금 및 건축 규정 위반에 대한 사면에 기반을 둔다는 비판을 받았다. 6. 임시 고용임시 고용에 대한 규제는 1996년 중도좌파 정부 시절 처음 도입되었고, 2003년 로베르토 마로니(Roberto Maroni) 노동부 장관에 의해 변경되었다. 중도좌파는 현행법이 젊은 세대의 미래를 해쳤다고 비판하며, 임시직과 정규직의 비용을 동일하게 하고 임시 노동 형태의 수를 제한할 것을 제안했다. 7. 파르 콘디시오(Par condicio) 법'동등한 대우'를 뜻하는 이 법은 주요 정당들이 방송에서 동등한 취급을 받도록 보장하고, 특정 방송 외에는 TV와 라디오의 정치 광고를 금지하는 특별법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이 법의 폐지 또는 완화를 주장했는데, 비판자들은 그가 6개 채널을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8. 해외 거주 이탈리아 시민 투표해외 거주 이탈리아 시민들은 우편투표를 통해 이탈리아 의회를 대표할 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었다. 프로디의 연합은 상원 의석 6석 중 4석을 확보하여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베를루스코니는 해외 투표에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9. 기타
2005년 지방 선거에서 야당인 연합이 압승을 거두며 정치 지형이 변화했다.
조지 W. 부시와 블라디미르 푸틴의 측근이었던 베를루스코니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으며, 서구 문명이 "이슬람보다 우월하다"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았다.[18]
5. 여론조사
주요 전국 신문, 잡지, TV 방송국에서 의뢰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인 연합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중도우파 자유의 집에 비해 총선에서 우세를 보였다.[4] 자유의 집에 유리한 결과를 보인 세 건의 여론조사는 모두 베를루스코니의 정당인 포르차 이탈리아가 의뢰한 것이었다.[4] 특히, 미국의 조사 업체인 펜, 쇼엔 & 버랜드(Penn, Schoen & Berland)의 조사는 베를루스코니가 전국 여론조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의뢰되었다.[4]
이탈리아의 par condiciola 법에 따라 선거 15일 전(이 경우 3월 25일)에는 여론조사 결과 발표가 금지되었다.[4]
최종 결과(연합 49.8% 대 자유의 집 49.7%)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출구조사 포함)와 약 3%의 차이를 보였으며, 연합 간 예상 격차 5%는 약 0.1% 차이로 줄었다.[4] 이탈리아 TV에서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자유의 집에 투표할 계획이었던 유권자들이 투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4] 다른 이들은 베를루스코니의 ICI 감세 제안과 언론에서 연합이 주장하는 새로운 세금에 대한 집중 보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자유의 집에 투표하도록 설득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
2005년 이탈리아 의회는 2006년 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이 선거법은 정당이 의석을 확보하려면 4% 이상의 득표율을 얻어야 하고, 승리한 연합에는 최소 340석의 보너스 의석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은 야당으로부터 "쿠데타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로마노 프로디는 이를 "완전히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31] 좌파 성향 신문들은 이 법안을 "Truffarellumit"이라고 부르며 비꼬았는데, "truffait"는 이탈리아어로 "사기"를 의미한다.[31]
새로운 선거법은 2005년 12월 16일에 최종 승인되었고, 12월 23일 대통령이 서명했다.[34] 이 선거 개혁의 주요 입안자인 로베르토 칼데롤리는 이 법을 "짓궂은 짓"(porcatait)이라고 평가했다.
하원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class="wikitable"
|-
! colspan="2" rowspan="2" style="width: 260px;" | 후보자 명부 연합/소속 정당
2001년 말, 이탈리아 의회는 헌법을 개정하여 해외 거주 이탈리아 시민이 우편투표를 통해 이탈리아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탈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거주 이탈리아 시민들은 우편투표를 통해 이탈리아 의회를 대표할 12명의 하원의원과 6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4] 이러한 변화는 해외로 이주했지만 이탈리아 정체성을 유지한 이탈리아인의 권리와 특수한 이익을 인정하기 위한 30년간의 투쟁 결과였다.
이 권리를 행사하려는 이탈리아인은 먼저 해당 영사관에 해외 거주지를 등록해야 한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지지와 미르코 트레마글리아의 추진으로 이루어진 이 시스템은 유럽, 북중미,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의 네 선거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보자들은 각 선거구에 거주해야 한다.
해외 거주 유권자의 42%가 선거에 참여했다. 로마노 프로디의 연합은 상원 의석 6석 중 4석을 확보했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와 무소속 후보가 각각 나머지 2석 중 1석씩을 차지하여 프로디가 상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하원에서는 연합이 7석, 베를루스코니 연합이 4석, 무소속 후보가 1석을 얻었다. 북미에서는 토론토와 시카고의 후보가 하원의원으로, 뉴욕시의 후보가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며 해외 투표에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선거 결과는 여러 우파 정당들이 해외 선거구에 후보를 내세운 반면 중도좌파 후보는 적어 중도우파 표가 분산된 사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2001년까지 이탈리아 공화국은 해외 거주 시민들에게 투표를 위해 이탈리아 고향까지 무료 왕복 열차 여행을 제공했지만, 무료 구간은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만 가능했다.
정당
득표수
%
의석 수
이탈리아 연합
421,414
43.39
6
포르차 이탈리아
202,536
20.86
3
남미 이탈리아인 협회
99,817
10.28
1
세계를 향한 이탈리아
72,105
7.42
1
기독교 및 중도 민주당 연합
66,456
6.75
0
가치의 이탈리아
27,432
2.82
1
북부연맹–자치운동
20,205
2.08
0
남미 이탈리아 이민자 연합
14,205
1.46
0
세계 이탈리아인당
11,250
1.16
0
다른 시칠리아
10,867
1.12
0
유럽을 위한 민주당 연합
9,721
1.00
0
사회적 대안
7,030
0.72
0
이탈리아 사랑
3,732
0.38
0
해외 이탈리아인을 위한 독립적 대안
3,474
0.36
0
삼색 불꽃
1,197
0.12
0
합계
971,152
100.00
12
6. 1. 5. 의석 분포
6. 2. 상원 결과
2006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상원 선거 결과,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 연합 올리보네 (L'Unione)는 16,725,077표(48.96%)를 얻어 158석(국내 154석, 국외 4석)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중도우파 연합 자유의 집 (CdL)은 17,153,256표(50.21%)를 얻어 156석(국내 155석, 국외 1석)을 차지했다. 기타 정당에서는 남미 이탈리아인 협회가 국외 선거구에서 1석을 얻었다.
2005년 상원 선거 제도 개혁으로 정당 의석 확보를 위한 최소 득표율이 4%로 설정되고, 승리 연합에 보너스 의석이 주어지는 제도가 도입되었다.[29] 이는 로마노 프로디를 비롯한 야당의 "쿠데타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으며,[31]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과거 다수당 중심 선거법을 지지했으나,[32] 소규모 정당에 불리하다는 우려 속에 수정안이 통과되었다.[34] 개혁안 입안자 로베르토 칼데롤리는 이를 "짓궂은 짓"이라 평가했다.
선거구별 의석 총계. 이는 비례대표제 선거이므로, 의석 총계는 전국 득표율에 따라 결정되며, 각 지역에서 가장 큰 연합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7. 투표 결과 논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중도좌파 연합인 올리브 나무 연합을 이끌었던 로마노 프로디와 중도우파 자유의 집을 이끈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 다툼이 벌어졌다. 특히 2005년에는 선거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격화되었다.
2005년 9월, 상원에 제출된 비례대표제 선거 제도 개혁안은 정당이 의석을 확보하려면 4%의 득표율을 넘어야 하고, 승리한 연합에는 최소 340석의 보너스 의석을 주는 것을 제안했다. 이는 의회에서 승인되었으나,[29] 야당 연합은 "쿠데타 시도"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로마노 프로디는 이를 "완전히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했으며,[31] 좌파 성향 신문들은 이 제도를 "Truffarellum|트루파렐룸it"이라고 비꼬았다. "truffa|트루파it"는 이탈리아어로 "사기"를 뜻한다.[31]
이러한 논란 속에서 치러진 2006년 총선은 초기 출구조사에서 연합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개표가 진행되면서 자유의 집과의 격차가 좁혀졌다. 로마노 프로디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지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재검표를 요구하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해외 거주 이탈리아 시민들의 투표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로마 거리에서 투표함 5개가 발견되기도 했다.[35]
그러나 내무부는 재검표 대상 투표용지 수에 대한 보고서에 오류가 있었다고 발표했고, 재검표 결과 각 연합에 수백 표씩 추가되었다. 분석가들은 해외 투표가 연합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베를루스코니에게 유리하게 선거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36]
결국 대법원은 2006년 4월 19일 최종 판결에서 로마노 프로디가 24,755표 차이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8. 선거 이후
로마노 프로디는 중도좌파 연합을 이끌고 베를루스코니 정권의 중도우파 연합에 도전하여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고 총리에 다시 취임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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