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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지방대항축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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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지방대항축구전은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에서 개최된 축구 대회이다. 경성, 평양, 함흥 등 3개 도시를 중심으로, 지역 연고 클럽 간 리그 운영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경평대항축구전의 중단 이후, 전일본3지방축구전에 조선 대표팀을 파견하기 위해 조선축구협회가 주최했다. 대회는 주로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함흥 축구단이 3회,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각각 1회 우승했다. 이 대회는 한국 축구의 지역 연고 클럽 간 경쟁의 시초로 평가받으며, K리그의 기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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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지방대항축구전
대회 정보
이름3지방대항축구전
로마자 표기Samjiban Daehang Chukgujeon
영문 표기Inter-Regional Football Championship
설립 연도1938년
폐지 연도1942년
지역일제강점기 조선
참가 팀 수3~4 팀
최다 우승함흥축구단 (3회)

2. 명칭

당시 사용된 명칭은 '''"조선축구협회주최 조선3지방대항축구전"'''이었으나[1][2] 후대에 편의상 3도시대항축구전으로도[3][4] 표기하면서 현재 3도시대항축구전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3. 개최 배경

경평대항축구전이 1935년을 끝으로 중단되자, 축구계와 언론계에서는 경평전 재개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대회 때마다 마찰이 발생하는 등 운영 문제가 있었고, 개선 없이는 재개가 어려웠다. 이에 서울과 평양 외에 함흥을 포함시켜 대회를 운영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1]

1938년 가을, 일본축구협회는 일본을 관동, 관서, 조선으로 나누어 대표 도시 팀을 참가시키는 '''전일본3지방축구전(全日本3地方蹴球戰)'''을 계획하고 조선축구협회에 알렸다. 이에 조선축구협회는 조선 자체의 '''3지방대항축구전'''을 열어 그 우승팀을 전일본3지역축구전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축구협회는 당시 조선에서 축구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중앙경성(中央京城), 서선평양(西鮮平壤), 북선함흥(北鮮咸興)을 3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1938년 10월 제1회 대회를 개최하였다.[1]

4. 대회 운영

대회는 매년 가을(1941년은 6월)에 열렸다. 연도별로 대회 운영 방식은 조금씩 달랐으나, 주로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38년 원년 대회는 3개 팀이 리그 방식으로 팀당 2경기를 치른 뒤 결승전을 통해 우승팀을 결정했다. 함흥이 빠졌던 1939년에는 경성과 평양이 3판 2승제로 경기를 치렀다. 1941년에는 3개 도시 외에 전남 광주가 참여하여 4개 팀이 리그 방식으로 팀당 3경기, 총 6경기를 치렀다. 1941년까지는 경성운동장에서만 열렸지만, 1942년 제5회 대회는 한 달여에 걸쳐 서울, 평양, 함흥 3개 도시를 돌며 리그 방식으로 열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홈-원정 리그 방식이 적용되었다.

5. 의미와 영향

1938년 제1회 대회는 경성과 평양이 양분하고 있던 조선 축구계에 함흥이 신흥강호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대회였다. 함흥은 예상을 깨고 노쇠한 평양을 큰 점수 차이로 꺾고 경성과도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며, 결승에서도 다시 경성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함흥은 일본 메이지신궁 경기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1939년과 1940년에는 불참하였고, 이로 인해 1939년 대회는 경성, 평양 두 팀만 참가한 채 이루어졌으며, 1940년에는 대회 자체가 열리지 못하는 등 국내 대회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받았다.[1]

1942년 11월 마지막 대회에서 경성은 홈 구장인 경성운동장에서 함흥과 마지막 경기를 치렀으며, 이는 경성축구단의 공식경기로서는 마지막 경기가 된다.[1]

3지방대항축구전은 1942년 제5회 대회를 끝으로 폐지되었지만, 지역연고 클럽간 리그 운영의 원시적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축구사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2~3일간의 단기간에 경성이나 평양 등 어느 한 도시에 모여 토너먼트로 치러졌던 전조선축구대회 등과 차이를 보인다. 즉 현재 대한민국 FA컵 대회의 뿌리를 ‘전조선축구대회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FA컵’으로 볼 수 있다면, 대한민국 1부 리그인 K리그의 뿌리를 ‘경평축구대항전 - 3지방대항축구전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 프로축구 K리그’로 볼 수 있을 것이다.[1]

6. 결과 및 기록

3지방대항축구전은 일제강점기에 경성 축구단, 평양 축구단, 함흥 축구단이 참가한 축구 대회였다. 역대 대회 개요 및 우승팀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1. 역대 대회 개요

함흥공설운동장
경성운동장
(3도시 순회)경성, 평양, 함흥함흥


6. 2. 역대 우승팀

연도우승팀비고
1938함흥 축구단
1939경성 축구단
1941평양 축구단, 함흥 축구단공동 우승[1]
1942함흥 축구단


참조

[1] 뉴스 蹴球朝鮮(축구조선)"强化(강화)위해 三地方對抗戰計劃(삼지방대항전계획) https://newslibrary.[...] 1938-09-07
[2] 뉴스 三地方蹴球開幕(삼지방축구개막) 北朝三對零(북조삼대령)으로西朝(서조)를이겨 https://newslibrary.[...] 1938-10-29
[3] 뉴스 韓国蹴球(한국축구) 70年(연) (8) 3個都市對抗戰(개도시대항전) [上(상)] https://newslibrary.[...] 1965-03-01
[4] 뉴스 韓国蹴球(한국축구) 70年(연) (9) 3個都市對抗戰(개도시대항전) [下(하)] https://newslibrary.[...] 196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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