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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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일 전역은 1814년 2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동맹군을 상대로 6일 동안 연이어 승리를 거둔 일련의 전투를 일컫는다. 당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본토를 침공할 준비를 마쳤고, 나폴레옹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자국 영토 내에서의 이점을 활용하고자 했다. 샹포베르, 몽미라일, 샤토티에리, 보샹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블뤼허가 이끄는 실레지아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전략적으로 동맹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6일 전역 이후, 나폴레옹은 슈바르첸베르크에 맞서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으나, 연합군의 파리 진격을 막지 못하고 결국 퇴위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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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4년 2월 - 보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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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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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명칭 | 6일 전역 |
프랑스어 명칭 | Campagne des Six-Jours (캉파뉴 데 식스 주르) |
관련 전쟁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
시기 | 1814년 2월 10일 - 2월 15일 |
장소 | 프랑스 북동부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제1제국 |
교전국 2 |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프랑스 제1제국 | 나폴레옹 1세 |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 연합군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
병력 규모 | |
프랑스 제1제국 | 30,000명 |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 연합군 | 50,000 - 56,000명 |
피해 규모 | |
프랑스 제1제국 | 3,400명 |
프로이센 왕국/러시아 제국 연합군 | 전투 중: 17,750명 전체: 28,500명 대포 36문 |
주요 전투 | |
전투 목록 | 샹포베르 전투 몽미라이유 전투 보샹 전투 |
2. 전략적 상황
1814년 초, 제6차 동맹은 독일과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프랑스 본토를 침공할 준비를 갖추었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이끄는 보헤미아군과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실레지아군이 주력 부대로 침공을 개시했다. 남서쪽에서는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를 압박했다.
나폴레옹은 병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자국 영토 내에서의 전투라는 이점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술트와 쉬셰 원수에게 남서 프랑스 방어를 맡기고, 자신은 북동부 전선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당시 나폴레옹의 총 병력은 약 20만 명이었으나, 이 중 상당수가 웰링턴과의 전투와 알프스 방어에 묶여 있어 실제 가용 병력은 8만 명 미만이었다.[2] 하지만 프랑스 내에서는 식량과 보급품 조달이 용이하고, 통신선 확보가 쉬웠다는 이점이 있었다.[2]
2. 1. 동맹군의 배치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이끄는 ''보헤미아군''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병력 200,000명에서 210,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스위스 영토를 통과하여(스위스 칸톤의 중립성 위반) 1813년 12월 20일 바젤과 샤프하우젠 사이의 라인강을 건넜다. 블뤼허 공작 휘하의 ''실레지아군''은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 50,000명에서 56,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814년 1월 1일 라슈타트와 코블렌츠 사이의 라인강을 건넜다.3. 전역의 전개
1월 말, 나폴레옹은 브리엔 전투와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고전했다. 브리엔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블뤼허를 기습하여 거의 포로로 잡을 뻔했으나, 블뤼허는 바르쉬르오브 협곡의 방어 진지로 후퇴했다. 라 로티에르 전투에서는 악천후와 지형 조건으로 인해 프랑스군의 주력인 포병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코사크 부대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레몽을 거쳐 트루아로 후퇴했고, 마르몽 원수에게 적 감시를 맡겼다.[3]
2월 초, 블뤼허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마른 강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허가를 받아 작전선을 마른 강 계곡으로 옮겼고, 팔렌의 코사크 부대가 그의 좌익을 방어하며 오스트리아군과의 통신을 유지했다.[3] 블뤼허는 자신의 군대가 안전하다고 믿고 비트리에서 마른 강변을 따라 진군하면서, 보급과 숙영의 편의를 위해 병력을 넓게 분산시켰다. 블뤼허 자신은 2월 7일/8일 밤에 정찰 부대와 가까운 세잔에 있었고, 나머지 병력은 에페르네, 몽미라이유, 에토주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다.[3]
그러나 그날 밤, 블뤼허의 본부는 다시 기습을 당했고,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가 블뤼허의 분산된 병력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팔렌의 코사크 부대가 철수하면서 블뤼허 군의 좌익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블뤼허는 에토주로 후퇴하여 병력을 집결시키려 했다.[3]
나폴레옹은 이러한 블뤼허 군의 분산된 배치를 틈타 각개격파를 시도하여 2월 10일 샹포베르 전투, 2월 11일 몽미라일 전투, 2월 12일 샤토티에리 전투, 2월 14일 보샹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3. 1. 주요 전투
날짜 | 전투 | 내용 | 결과 |
---|---|---|---|
1814년 2월 10일 | 샹포베르 전투 | 나폴레옹이 자하르 드미트리예비치 올수피예프가 이끄는 러시아 제9군단을 격파. 러시아군은 4,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올수피예프는 포로로 잡힘. 프랑스군 사상자는 약 200명.[3] | 프랑스군 승리 |
1814년 2월 11일 | 몽미라일 전투 | 프랑스군이 파비안 고틀리프 폰 오스텐-자켄과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가 이끄는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을 격파. 연합군은 4,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 사상자는 2,000명.[3] | 프랑스군 승리 |
1814년 2월 12일 | 샤토티에리 전투 | 프랑스군이 다시 한번 연합군을 격파. 프로이센군 1,250명, 러시아군 1,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대포 9문을 잃음. 프랑스군 사상자는 약 600명.[3] | 프랑스군 승리 |
1814년 2월 14일 | 보샹 전투 | 나폴레옹이 블뤼허의 본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힘. 프로이센군은 7,000명의 사상자와 대포 16문을 잃었고, 프랑스군 사상자는 약 600명.[3] | 프랑스군 승리 |
4. 전역의 결과 및 평가
6일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계속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략적으로는 동맹군의 진격을 막는 데 실패했다. 랄프 애쉬비(Ralph Ashby)는 나폴레옹이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병력을 상대하여 승리하고,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평가했다.[1] 연합군은 프랑스군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실레지아 군대는 병력의 약 3분의 1을 잃었다.[2]
데이비드 자베키(David Zabecki)는 후대 논평가들이 이 전역에서 나폴레옹이 약 2만 명의 적군을 제거하는 예상 밖의 뛰어난 결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고 언급했다.[3] 그러나 이 전역은 동맹군을 결집시키고 내부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마이클 레지에르(Michael Leggiere)는 요한 폰 노스티츠의 말을 인용하여, 이 전역이 나폴레옹의 뛰어난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지만, 블뤼허의 군대를 완전히 파괴하지 못함으로써 동맹군과의 평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5. 전역 이후
블뤼허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슈바르첸베르크에 맞서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나폴레옹보다 6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의 접근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 이후 몬테로 전투에서 뷔르템베르크 공 휘하의 후위 부대가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다.[1]
1814년 2월 22일, 연합국 지도자들은 트루아 근처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나폴레옹의 연이은 승리에 위협을 느낀 그들은 1791년 프랑스 국경을 회복하는 대가로 나폴레옹의 왕위를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휴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했다.[1]
2월 28일, 연합군은 다시 진격을 시작했고, 나폴레옹은 슈바르첸베르크와 블뤼허의 군대에 추가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6주 동안의 전투 후에도 연합군은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3월 20일 아르시 쉬르 오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8만 명, 프랑스군이 2만 8천 명으로 병력 차이가 컸기에, 나폴레옹은 전략을 변경해야 했다.[3] 그는 파리로 후퇴하거나, 생디지에로 이동하여 수비대를 소집하고 침략자들에 맞서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켜 통신선을 공격하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후자를 택했다.[3]
나폴레옹의 행동 계획이 담긴 편지가 연합군에게 탈취되었다. 3월 23일 푸지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연합군 지휘관들은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따라가기로 결정했지만, 다음 날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파리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연합군은 파리로 진격했고, 마르몽과 모르티에는 몽마르트르 고지에 자리를 잡고 저항했다. 그러나 파리 전투는 3월 31일 프랑스 지휘관들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로 달려가 합류하려 했으나, 결국 무조건 퇴위하고 퐁텐블로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1814년 5월 30일, 프랑스 군주국과 연합국 대표가 서명한 파리 조약으로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6. 한국의 관점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면 '한국의 관점' 섹션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Dictionary of the Napoleonic wars
Wordsworth e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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