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유틀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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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S 유틀란디아는 1934년 덴마크 동아시아 회사에 의해 건조된 선박으로, 코펜하겐과 방콕을 오가는 노선에 투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점령으로 인해 슬로퇴 섬에 정박되었으나, 연합군의 공습에서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 한국 전쟁 발발 이후 덴마크 정부에 의해 병원선으로 개조되어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국에 파견되어 유엔군과 민간인을 치료했다. 전쟁 이후에는 덴마크 왕실 선박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64년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해체되었다. 유틀란디아는 덴마크의 한국 전쟁 지원을 상징하며, 덴마크와 한국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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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유틀란디아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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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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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국적 | 덴마크 |
선박 이름 | MS 유틀란디아 |
진수 | 1934년 8월 11일 |
건조 | 덴마크 나크스코프 조선소, 동아시아 회사 |
퇴역 | 1965년 |
선박 제원 | |
총 톤수 | 8,457 GRT |
순 톤수 | 5,204 NRT |
전체 길이 | 140.5 미터 (461 피트) |
길이 | 129.5 미터 (425 피트) |
선폭 | 18.6 미터 (61 피트) |
흘수 | 11 미터 (36 피트) |
추진 동력 | 부르마이스터 & 바인 5기통 디젤 모터 (545-WF-120) 2기, 트윈 스크류, 7,850 ihp (6,500 bhp) |
속도 | 15 노트 (순항), 17.1 노트 (시험) |
수용량 | 1등석 선실 34개, 69명 |
화물 적재량 | 15,274.4 입방미터 (539,570 입방피트) |
승무원 | 의사 1명 포함 70명 |
기타 정보 | |
제작 주문 | 1934년 |
건조 번호 | 60 |
선대 번호 | 알 수 없음 |
선박 용도 | 여객선 겸 화물선 |
선체 재질 | 강철 |
폐선 | 1965년 스크랩 처리 |
2. 역사
유틀란디아 호는 1934년 덴마크 동아시아 회사(EAC)에 의해 발주되었으며, 코펜하겐과 방콕 간 정기 항로에 투입되어 노후 선박을 대체하였다. 1934년 11월부터 1940년 1월까지, 그리고 1954년부터 1964년 말까지 이 항로를 운항하였다.
2. 1. 건조 및 초기 운항
''유틀란디아''는 1934년 EAC에 의해 계약되었으며, 당시 코펜하겐과 방콕 간의 정기 운항 노선에서 노후 선박을 대체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1934년 11월부터 1940년 1월까지, 그리고 1954년부터 1964년 말까지 이 노선에서 운항했다. ''유틀란디아''는 마이어폼 선수를 갖춘 EAC 선단의 유일한 선박이었다. 이 배는 지금까지 같은 이름을 가진 세 척의 배 중 두 번째이다.승객은 9개의 1인실과 29개의 2인실에 수용되었으며, 모든 2인실에는 개인 욕실이 제공되었다. 70석 규모의 식당, 흡연실, 여성 라운지, 바, 전방 갑판 수영장도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식당과 놀이방도 있었다. 승객 공간은 냉각 또는 가열된 공기로 환기되었다. 화물창 용량은 약 15278920.92L3였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유틀란디아 호는 코펜하겐으로 향하던 중 로테르담에 도착하였다. 당시 덴마크는 중립국이었으므로, 방콕으로 두 번 더 항해한 후 1940년 1월 코펜하겐에 도착하였다. 코펜하겐 도착 후 덴마크 정부에 징발되어 곡물 수송을 위해 아르헨티나로 항해하였고, 1940년 3월 31일 코펜하겐에 도착하였다. 1940년 4월 1일, 정기 점검을 위해 나크스코프 조선소로 보내졌다.1940년 4월 9일, 독일의 덴마크 점령 당시 유틀란디아 호는 드라이 도크에 정박 중이었다. 디젤 부족으로 독일은 유틀란디아 호를 압류하지 않고, 다른 동력선 2척(MS 자와, MS 팔스트리아)과 함께 슬로퇴 섬에 정박시켰으며, 최소 인원만 배치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세 척의 배는 이 곳에 머물렀다. 1945년 5월 3일, 연합군의 공습으로 자와 호는 침몰하였고, 팔스트리아 호는 침수 및 화재 피해를 입었다. 유틀란디아 호는 총탄 자국과 화물칸에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경미한 피해만 입었다.

1945년 8월 11일, 유틀란디아 호는 다시 항해할 수 있는 상태로 정비되어 유럽과 미국 동부 해안을 항해하기 시작하였다.
3. 한국 전쟁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덴마크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초강대국 간의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덴마크는 비군사적인 지원 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덴마크는 의료 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하고, 협상을 통해 병원선을 파견하기로 합의하였다. 1950년 가을, 동아시아 회사는 뉴욕으로 항해 중이던 유틀란디아 호를 덴마크 정부에 제공하였다.
3. 1. 병원선 개조
덴마크 정부는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유틀란디아 호를 병원선으로 개조했다. 수술실 4곳, 병동 4곳(최대 356개 병상), X선실, 치과, 연구소, 약국 및 특별 부서가 설치되었다.[1] 간호사 42명이 필요했는데, 3000~4000명이 지원하여 이 중 200명이 면접을 보았다.[1] 의사와 간호사는 한 방에 4명씩 배정되었다.[1] 의료진의 평균 연령은 40대였으며, 전쟁으로 부상당한 환자들을 고려하여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들이 선발되었다.[1]3. 2. 병원선의 지위
MS Jutlandia영어는 민간 선박임을 강조하였다. 다른 병원선처럼 흰색으로 칠해졌고 양면에 빨간 십자가가 있었지만, 군용 병원선의 1.5m 높이 녹색 줄무늬와 달리 빨간 줄무늬가 칠해졌다.[1] 병원은 덴마크 적십자에서 관리 및 운영하였고, 동아시아 회사에서 승무원을 제공하였으며, 국가는 항해 요금을 지불하였다.[1]카이 해머리치 선장이 덴마크 적십자사 의장직을 사임하고 MS Jutlandia영어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유엔군사령부 군사 지도자들과의 협상을 위해 해군 계급을 유지했으며,[1] 덴마크 국가와 적십자 간의 연락도 담당하였다.[1]
모겐스 빈게는 병원장 겸 부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1] 크리스텐 콘드루프 함장은 MS Jutlandia영어에 오랫동안 근무하였기 때문에 배에 탑승하였으며, 해상 위기 발생 시 콘드루프에게 지휘권이 이양될 예정이었다.[1]
의료진은 군인을 치료해야 했기 때문에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대 계급이 부여되었다.[1] 대한민국에 머무르는 동안 연합군 장교들은 민간 선박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1]
3. 3. 1차 파견 (1951.03 ~ 1951.08)
1951년 1월 23일, 유틀란디아 호는 단네브로(덴마크 국기), 적십자기, 유엔기를 게양하고 대한민국으로 출항하였다. 프레데릭 9세와 잉그리드 여왕이 출항 전날 방문하였고, 외무부 장관, 악단, 1만여 명의 시민들이 환송하였다. 카이 하메리히 함장은 '밤손님처럼 몰래' 출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대중의 지지를 요청하였다. 유틀란디아 호에는 승무원 97명, 의료진 91명이 승선하였다.[1]비스케이 만을 통과하는 동안, 선박 재봉사가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았고, 고참 의사는 아킬레스건 파열로 붕대를 감는 등 경미한 사고가 발생하였다. 항해 중 승무원들은 기본적인 군사 훈련(줄 서기, 경례)을 받았다.[1]
1951년 3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유틀란디아 호는 3월 10일부터 진료를 시작하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덴마크 언론 보도와 달리 격렬한 전쟁 상황임을 강조하며, 인내, 결단력, 극기, 솔선수범을 당부하였다.[1]
전쟁 상황에 따라 100명에서 200명 이상의 부상자가 탑승하였으며, 때로는 미국 병원선과 환자 유치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틀란디아 호는 높은 의료 수준으로 중환자를 우선 수용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과 달리 백신 발달로 외과 환자 비율이 높았다.[1]
넓은 병실과 높은 의료 서비스, 치즈버거와 아이스크림 제공 등으로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많은 병사들이 군번줄에 유틀란디아 호 이송을 희망한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1]
유틀란디아 호는 한국인 민간인도 치료하였으며, 초기 병원선으로서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빈 병상이 발생했을 때, 승무원들은 민간인 피해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여성 간호사들은 상륙이 불가능했지만, 의사와 남성 간호사들은 응급 진료를 지원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비공식적인 의료 지원을 받았고, 일부 전쟁 고아들도 진료를 받았다. 사무원실에는 고아 담당 부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1]
미국 함장 매튜 맥컨이 부산 근교에 아동 병원을 설립할 때, 유틀란디아 호 의사들이 협력하였다. 약품 분실 후 아동 병원에서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의사들의 요청으로 하메리히는 UN에 민간인 치료 권한을 요청하였고, 1951년 7월 군인 부상 시 민간인 퇴원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1]
3. 4. 2차 파견 (1951.11 ~ 1952.03)
유틀란디아는 로테르담에서 재보급을 받은 후 1951년 11월 13일 부산에 다시 입항했다. 승무원과 의료진 대부분이 교대되었는데, 일부 의사들은 너무 촉박하게 통보를 받아 항공편으로 한국에 도착해야 했다.[13] 1차 파견에서는 신경외과 환자가 많았지만, 2차 파견에서는 폐와 턱 수술 환자가 더 많았다.[13] 병상은 100개는 한국 군인, 100개는 민간인을 위해 사용되었다.[13] 초기에는 유엔군이 민간인 치료에 대해 불쾌해했으나, 이후 분위기는 빠르게 바뀌었다.[13] 어린이들은 병사, 승무원, 의료진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고, 배 안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13]유틀란디아는 최대 35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었지만, 승무원의 과로를 막기 위해 최대 250명까지 수용했다.[14] 2차 파견 당시 평균 환자 수는 200명에서 250명 사이였다.[14] 한국인 의사들도 병원선에 탑승하여 의료 교육을 받았다.[14] 육상에서의 인도주의적 지원은 계속되었고, 아동 교육도 시작되었다.[14] 한국인과 덴마크인의 협력이 시작되었고, 덴마크-한국 우호 협회가 설립되었다.[14]
민간인 환자 치료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병원이 환자 치료를 담당하고, 환자 가족이 간호를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환자가 병원선에 탑승하면 가족 전원이 취사 도구를 들고 병상으로 오기도 했다. 의료진이 환자 접견을 제한하면 가족들이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일부 환자들은 남은 식량을 침대 밑에 숨겨 두어 침대 정리를 최대한 피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였다.
유틀란디아의 승무원들은 인도주의 지원에 깊이 관여하여 일본으로의 휴가를 거부하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추가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인 중환자의 요구가 우선시되었다.
적십자의 희망과는 달리 부상당한 포로들은 탑승하지 못했다. 적십자는 분쟁의 한 쪽 환자만 지원할 수 있다는 정책에 크게 실망하였고, 적십자 활동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 군사 지도자들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 의사들은 비는 시간을 활용하여 전쟁 포로를 치료하는 병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2년 3월 29일, 유틀란디아는 일본으로 항해했다. 의료 지원을 위한 항해였고, 이후 덴마크로 귀항하였다. 4월 21일, 194명의 환자를 태우고 덴마크로 귀항하였다. 이번 항해에서는 정신 질환자들이 탑승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일부 환자들 간의 싸움이 있었다. 두 주동자를 격리 조치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3. 5. 3차 파견 (1952.11 ~ 1953.08)
1952년 8월과 9월, 유틀란디아 호는 헬리콥터 데크, 안과, 영국 앰뷸런스 모터보트를 장착했다. 공조 장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으며, 1차 설치는 일본에 도착한 후 완료되었다.[1] 1952년 9월 20일 코펜하겐을 출발하여 11월 2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헬리콥터 데크를 점검했다.[1]11월 20일, 유틀란디아 호는 인천항에 도착했다.[1] 전선과 가까워 부상자가 많이 도착했으며, 헬리콥터 데크 덕분에 20분 내로 치료가 가능했다.[1] 의료진은 전선에서 바로 도착하는 환자들 때문에 24시간 근무하기도 했다.[1]
1953년 3월에는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사흘 반 동안 169명의 부상자가 도착했고, 그중 81명은 위독했다. 3월 한 달 동안 301명의 환자가 도착했으며, 이 중 104명은 헬리콥터로, 나머지는 배로 이송되었다.[1] 덴마크에서 재보급을 고려했으나, 상황은 빠르게 진정되었다.[1]
부상병 증가로 민간인 구호 활동은 줄었지만, 승무원들은 육상 구호 활동을 계속했다.[1]
정전 협정이 임박해지면서 유틀란디아 호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중립 선박이었기에 정전 협정을 유틀란디아 호에서 맺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북측의 거부로 무산되었다.[1]
1953년 7월 정전 협정 이후, 군사적 목적의 정박이 불필요해져 인도주의적 활동도 중단되었다. 8월 16일, 마지막 환자들을 태우고 요코스카 항으로 출항한 후 귀국길에 올랐다.[1] 8월 29일, 도쿄를 출발하여 229명의 환자와 석방된 포로를 수송했다. 의료 지원이 필요한 환자는 30명뿐이었고, 포로들은 해방감에 선상 규칙을 잘 지켜 항해가 수월했다.[1]
3. 6. 귀환 및 평가
1953년 10월 16일, 유틀란디아 호는 999일간의 유엔 임무를 마치고 덴마크로 귀환하여 영웅 칭호를 받으며 환영받았다.[11] 유틀란디아 호는 한국 전쟁 동안 24개국 부상병 4,981명을 치료하였고, 6,000명 이상의 민간인(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으며, 더 많을 가능성이 있음)과 인원수 불명의 아동을 치료하였다. 이 과정에서 29명이 사망하였다.[12] 이승만 대통령은 유틀란디아 호에서 치과 진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유틀란디아 호는 나크스코프 조선소에서 개조를 거친 후 방콕-코펜하겐 항해를 재개하였다.유틀란디아 호는 대통령 표창을 2회(1952년 3월 27일,[14] 1954년 8월 27일) 수상하였다.[12][13] 유틀란디아 호의 일부 인원은 대한민국 훈장 및 포장을 받았다.[5]
1953년 4월 26일, 인천시 시장은 유틀란디아 호의 선장에게 표창을 수여했다.[7]
선원 및 의료진은 덴마크에서 "병원선 유틀란디아 호의 한국 파견 1951–1953 기념 메달"(479개 수여)을 받았다.
4. 왕실 선박
1960년 9월, 태국의 라마 9세 국왕과 시리낏 왕비는 스칸디나비아 방문 시 이 배를 왕실 선박으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을 방문하였고, 이후 배는 일반 선박으로 복귀하였다.[1]
3년 후, 마르그레테 2세(당시 왕세자)는 제노바, 이라클리온, 수에즈 운하, 아덴, 카라치, 스리랑카, 싱가포르, 방콕, 홍콩을 방문할 때 이 배를 사용하였다. 덴마크 귀항 후에는 상업 활동을 재개하였다.[1]
5. 해체
1964년 12월 19일, 유틀란디아 호는 마지막 코펜하겐-방콕 항해를 마쳤다. 1965년 1월 14일 빌바오로 보내져 해체되었다.[8]
해체 이후 유틀란디아 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나, 1986년 덴마크 록 음악가 킴 라르센이 한국 전쟁 당시 병원선으로서 유틀란디아 호의 기여를 기리는 헌정곡인 "유틀란디아"를 발표하면서 다시 기억되기 시작했다.
1990년 6월 15일, 코펜하겐의 랑엘리니에에 기념비가 설립되었다. 이 기념비는 대한민국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80000HP급 컨테이너 선박 신형 유틀란디아 호에 실려 부산에서 코펜하겐으로 운반되었다. 기념비에는 덴마크어와 한국어로 "1951년 1월 23일 - 1953년 10월 16일. 한국 전쟁 중 유엔에 대한 덴마크의 기여. 이 한국산 돌은 한국 참전 용사들이 감사의 뜻으로 기증한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6. 대중문화
킴 라르센은 한국 전쟁 당시 병원선으로서 유틀란디아 호의 기여를 기리는 헌정곡을 작곡했다. "유틀란디아"라는 제목의 이 곡은 1986년 덴마크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1]
덴마크 TV 드라마 'Sygeplejeskolen'(새로운 간호사)에는 유틀란디아 호가 등장하는데, 이 드라마는 덴마크 병원 훈련 프로그램에 남성 간호사를 통합하는 혁신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드라마 속 한 선임 여성 간호사는 한국의 유틀란디아 호에서 근무하게 된다.[3]
7. 기념물
1990년 6월 15일, 코펜하겐 랑엘리니에에 ''유틀란디아''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이 석비는 한국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80000HP급 컨테이너선인 "새로운" 유틀란디아를 통해 부산에서 코펜하겐으로 운송되었다.
석비에는 덴마크어와 한국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8][9]
1951년 1월 23일 - 1953년 10월 16일.
한국 전쟁 중 유엔에 대한 덴마크의 기여.
이 한국산 돌은 한국 참전 용사들이 감사의 뜻으로 기증한 것입니다.
1976년 9월 20일, 부산 영도구에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의료 지원을 제공한 5개 국가를 위한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2016년 6월 6일, 주 덴마크 대한민국 대사관은 대사관 시설 내에 작은 기념 박물관을 개관했다.[10]
참조
[1]
문서
Not to be confused with Republic of Korea Presidential Unit Citation
[2]
웹사이트
Photo of award ceremony in 28 March 1952 - National Archives of Korea
http://theme.archive[...]
[3]
뉴스
유號(호)(丁抹病院船(정말병원선))떠나다 齒科課長(치과과장)에最高文化勳章(최고문화훈장)
https://newslibrary.[...]
1952-03-30
[4]
문서
Award ceremony was held in 28 March 1952.
[5]
웹사이트
Official Database of Awards - Republic of Korea Ministry of the Interior and Safety
https://www.sanghun.[...]
[6]
문서
Award ceremony was held in 28 March 1952.
[7]
뉴스
丁抹病院船長(정말병원선장)에 仁川市長感謝狀(인천시장감사상)
https://newslibrary.[...]
1953-04-30
[8]
웹사이트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
http://www.unpm.or.k[...]
[9]
블로그
인도 의료지원부대 한국전 참전용사회
https://m.blog.naver[...]
[10]
뉴스
한국과 덴마크의 특별한 인연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기념관 개관
https://n.news.naver[...]
[11]
뉴스
유號(호)(丁抹病院船(정말병원선))떠나다 齒科課長(치과과장)에最高文化勳章(최고문화훈장)
https://newslibrary.[...]
1952-03-30
[12]
웹사이트
대통령표창 수여식 (1953년 3월 28일) - 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
[13]
뉴스
유號(호)(丁抹病院船(정말병원선))떠나다 齒科課長(치과과장)에最高文化勳章(최고문화훈장)
https://newslibrary.[...]
1952-03-30
[14]
문서
수여식은 3월 2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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