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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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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YH 사건은 1979년 YH무역의 폐업으로 시작된 사건으로, 노동자들이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의 사망 원인이 경찰의 폭력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고,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유족과 노동자들에게 배상 판결을 내렸다. YH 사건은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인권 문제를 사회적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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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 사건
YH 사건
개요
한글YH 사건
한자YH事件
로마자 표기YH sageon
종류농성
전체대한민국의 노동 운동
원인YH무역 폐업에 대한 항의
목적불명
날짜1979년 8월 9일 ~ 11일
지역서울특별시 마포구 신민당 당사
결과경찰의 농성 장소 해산
관련 인물 및 단체
시위대YH무역 노동자
신민당
진압 측대한민국 제4공화국
대한민국 경찰
주요 인물김영삼
피해 규모
사망자1명 (김경숙)
부상자52명
체포자7명
참고 자료

2. 발단

1970년대 초 대한민국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였던 YH 무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 둔화, 경영주 장용호의 자금 유용, 무리한 기업 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1979년 3월 폐업을 공고했다. 장용호는 회사의 재산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1] 1975년 설립된 노동조합은 회사 정상화 방안을 채택하고 YH 무역을 회생시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회사 측과 정부 당국의 무성의한 태도에 4월 13일부터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1]

3. 신민당사 농성

1979년 8월 9일, YH무역 노동자 172명은 도시산업선교회의 알선으로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말하며 노동자들을 안심시키고 이들을 지지하며 보호를 약속했다.[2]

YH무역은 당시 한국에서 최대의 가발 수출 업체였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경영이 악화되어 1979년 3월 30일 도산 및 폐업을 선언했다. 1975년에 결성된 노동조합은 이에 반발하며 회사 정상화를 요구했고, 4월 15일부터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노조 측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신민당사 농성을 결정했다.[2]

3. 1. 경찰의 강제 진압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김영삼신민당 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로 차고 따귀를 치며 경고했다.[2] 8월 11일 새벽 경찰은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부했다.[2] 이순구 서울시경 경무국장이 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였다.[2]

경찰은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8월 11일 새벽 2시경 1천-2천여 명의 경찰력을 투입, 20여 분 만에 강제 해산시켰다. 신민당 의원 및 당직자들과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 연행되었다.[2]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0여 명, 신민당원 30여 명, 취재 기자 12명이 부상을 입었다.[2]

3. 1. 1. 김경숙의 사망

경찰은 1979년 8월 11일 새벽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건물 옥상에 있던 노동자 김경숙이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으나, 추락사로 조작하여 발표했다[2]. 신민당은 김경숙의 추락사가 강제 해산 도중에 발생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신민당 진입과 무관하다고 반박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건 발생 29년 후인 2008년에 김경숙이 경찰의 폭력을 피하려다 실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혔다[2]. 2012년 6월, 서울지방법원은 김경숙의 유족과 YH무역 조합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각 1천만~4천만 원의 손해 배상을 판결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노동 기본권 및 생명·신체의 자유 침해 사실도 인정했다[2].

4. 사건의 여파

8월 17일 경찰은 YH무역 노조 간부들과 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등 7명을 배후 조종 혐의로 구속했다.[2] 이 사건은 야당 및 여러 민주화운동 세력이 공동 전선을 형성하여 반유신 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2]

YH무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수출량 감소, 사장의 자금 유용, 사업 확장 실패 등으로 경영이 악화되어 1979년 3월 30일 도산 및 폐업을 선언했다. 1975년 결성된 노동조합은 회사 운영 정상화를 요구하며 4월 15일부터 장기 농성에 들어갔으나, 회사와 정부는 성의 없는 태도를 보였다. 8월 9일부터 노조는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8월 11일 경찰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2]

사건 발생 29년 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의 사망 원인이 경찰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다 실수로 추락한 것이라고 밝혔다. 2012년 6월, 서울지방법원은 YH무역 조합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의 노동 기본권 및 생명·신체의 자유 침해를 인정하고 손해 배상을 판결했다.[2]

4. 1. 정치적 영향

YH무역 사건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으로, 야당인 신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의 결집을 강화시켰다. 사건 직후 야당과 여러 민주화운동 세력이 공동 전선을 형성하여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을 확산시켰다. 8월 17일 경찰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동자로서 이 회사 노조간부를 구속하였으며, 배후조종자로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인명진 목사 등 7명도 구속하였다.[2] 이는 곧이어 발생한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4. 2. 사회적 영향

YH무역 사건은 1970년대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인권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켰다.[2] 1975년에 결성된 노동조합은 회사 측과 정부 당국의 무성의한 태도에 맞서 장기 농성에 돌입했고, 8월 9일부터 야당인 신민당 본부 당사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8월 11일 새벽, 경찰이 투입되어 강제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

8월 17일, 정부는 사건의 배후로 도시산업선교회를 지목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이 연대하여 반유신투쟁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2]

사건 발생 29년 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의 사망 원인이 경찰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다 추락한 것이라고 밝혔다. 2012년 6월, 서울지방법원은 YH무역 조합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의 노동 기본권 및 생명·신체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손해 배상을 판결했다.[2]

5. 관련 인물

YH무역의 사장 장용호는 제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친구였으며, 이 사건 이후 미국으로 떠나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했다.[4]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뉴욕한인회장으로서 청와대를 방문하여 자신을 부정부패의 장본인이라고 한 점에 대해 항의했고, 김영삼이 사과했다고 주장했다. 장용호는 사건 이후에도 미국에서 대형 빌딩을 포함하여 최소 3개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가 미국으로 빼돌린 금액은 당시 돈으로 15억으로 추정된다.[5] 육영수와 친분이 있었고, 그의 자녀들은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YH무역은 일당 220원을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해당했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YH무역 노동자들의 농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보호하려 노력했다.[1] 8월 9일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위로하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켰다.[1] 8월 11일 새벽 경찰신민당에 최후통첩을 할때 김영삼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의 뺨을 올려붙였다.[1] 경찰의 강제 진압에 항의하고, 노동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김영삼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1]

5. 1. 장용호

YH무역의 사장 장용호는 제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친구였으며, 이 사건 이후 미국으로 떠나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했다.[4] YH무역은 일당 220원을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해당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뉴욕한인회장으로서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영삼에게 자신을 부정부패의 장본인이라고 한 점에 대해 항의했고, 김영삼이 사과했다고 주장했다. 장용호는 사건 이후에도 미국에서 대형 빌딩을 포함하여 최소 3개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가 미국으로 빼돌린 금액은 당시 돈으로 15억으로 추정된다.[5] 육영수와 친분이 있었고, 그의 자녀들은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5. 2. 김영삼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YH무역 노동자들의 농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보호하려 노력했다.[1] 김영삼8월 9일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위로하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켰다.[1]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로 차고 따귀를 치며 경고했다.[1] 8월 11일 새벽 경찰신민당에 최후통첩을 할 때, 이순구 서울시경 경무국장이 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1]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였다.[1]

경찰의 강제 진압에 항의하고, 노동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김영삼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1]

6. 진상 규명 노력

사건 발생 29년 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이 경찰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다 실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사건 초기에 자살로 알려졌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2012년 6월, 서울지방법원 민사법정은 김경숙의 유족 외 YH무역 조합원 24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각 1000만~4000만의 손해 배상을 인정하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또한, 국가에 의한 노동 기본권 및 생명·신체의 자유 침해 사실도 인정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마포 신민당사 역사의 변곡점…‘YH사건’ 있었던 그 곳 http://www.sisaon.co[...] 2018-08-14
[2] 뉴스 33년 만에 인정된 국가폭력(33年ぶりに認定された国家暴力) http://h21.hani.co.k[...] 2012-12-24
[3] 뉴스 (김경숙 열사 37주기)“사장이 어린 여공들을 버렸습니다” https://news.naver.c[...] 여성신문 2016-08-11
[4] 서적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근현대사 창비출판사
[5] 웹인용 YH사건 장용호 사장- 김영삼 대통령 만나 http://blog.chosun.c[...] 201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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