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하라촌 (나가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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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미하라촌 (나가노현)은 1875년에 나가노현 이나군에 설치되어 1956년에 히라오카촌과 합병하여 덴류촌이 되면서 폐지된 일본의 촌이다. 야츠가타케 산과 덴류강이 위치해 있었다. 과거 덴류촌 지역에는 오지로쿠, 오바사 제도로 불리는 특수한 가족 제도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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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류촌 - 히라오카촌 (나가노현 시모이나군)
히라오카촌은 1875년 만도촌과 우구이스노스촌의 합병으로 나가노현 시모이나군에 생성되어 구마부시 산과 간논 산, 덴류강, 도야마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위치했으나, 1956년 칸바라촌과의 합병으로 덴류촌이 되면서 소멸한 촌이다. - 덴류촌 - 히라오카역
히라오카역은 1936년 미쓰시마역으로 개업하여 1952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1987년 국철 분할 민영화로 도카이 여객철도 소속이 되었고, 2012년 무인역이 되었다. - 시모이나군 - 네바촌
네바촌은 일본 나가노현 남서단에 위치하며, 야하기강 유역에 속하고, 덥고 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을 보이는 지역으로, 1875년 합병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츠키세의 관광 명소와 버스 교통을 특징으로 한다. - 시모이나군 - 미나미시나노촌
미나미시나노촌은 나가노현 최남단의 촌으로, 1960년 두 촌의 합병으로 탄생했으나 2005년 이다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으며, 덴류강을 따라 취락과 교통로가 형성된 산림 지역이었다. - 나가노현의 폐지된 시정촌 - 시노노이시
시노노이시는 1959년 나가노현에서 시노노이정과 시오자키촌의 합병으로 탄생했으나, 1966년 나가노시와의 대규모 합병으로 폐지되어 나가노시에 편입되었다. - 나가노현의 폐지된 시정촌 - 아메노미야가타촌
아메노미야가타촌은 1889년에 성립하여 1955년에 폐지되었으며, 지쿠마강과 약사산이 위치하고 나가노 전철 아메미야역이 있던 나가노현 하니시나군에 존재했던 촌이다.
가미하라촌 (나가노현) - [옛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자치체 명칭 | 가미하라촌 |
한자 표기 | 神原村 |
가나 표기 | かみはらむら |
행정 구역 | 촌 |
폐지일 | 1956년 9월 30일 |
폐지 사유 | 신설 합병 |
폐지 상세 | 가미하라촌, 히라오카촌 → 덴류촌 |
현재 행정 구역 | 덴류촌 |
지리 | |
면적 | 58.71 |
인접 자치체 | 나가노현 시모이나군 히라오카촌, 오시타조촌, 와고촌, 단카이촌 시즈오카현 이와타군미사쿠보정 아이치현 기타시타라군도미야마촌, 도요네촌 |
인구 | |
인구 (1955년) | 1946명 |
인구 출처 | 국세조사 |
위치 정보 | |
소재지 | 시모이나군 가미하라촌 |
2. 지리
3. 역사
- 1875년 2월 18일 - 지쿠마현 이나군 가미하라촌이 성립하였다.
- 1876년 8월 21일 - 나가노현에 소속되었다.
- 1879년 1월 4일 - 군구정촌편제법 시행에 의해 시모이나군에 소속되었다.
- 1883년 11월 10일 - 일부가 분립하여 나가시마촌이 됨 (후에 히라오카촌의 일부가 됨).
- 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에 의해 가미하라촌이 단독으로 자치체를 형성하였다.
- 1956년 9월 30일 - 히라오카촌과 합병해 덴류촌이 성립하여, 동일 가미하라촌은 폐지되었다.
3. 1. 연혁
- 1875년 2월 18일 - 지쿠마현 이나군 가미하라촌이 성립하였다.
- 1876년 8월 21일 - 나가노현에 소속되었다.
- 1879년 1월 4일 - 군구정촌편제법 시행에 의해 시모이나군에 소속되었다.
- 1883년 11월 10일 - 일부가 분립하여 나가시마촌이 됨 (이후 히라오카촌의 일부가 됨).
- 1889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에 의해 가미하라촌이 단독으로 자치체를 형성하였다.
- 1956년 9월 30일 - 히라오카촌과 합병해 덴류촌이 성립하여, 동일 가미하라촌은 폐지되었다.
3. 2. 오지로쿠・오바사 제도
구 덴류촌 지역에만 있었던 "오지로쿠, 오바사 제도"는 특수한 가족 제도였다. 이 제도는 16~17세기 경에 이미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1]이 제도에 따르면, 장남만이 사회생활을 하고, 그 아래의 남동생과 여동생은 각각 오지로쿠(남)와 오바사(여)로 불리며 마을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이들은 가정 내에서 노동력으로만 평생을 보냈으며, 주로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 많이 나타났다.[1]
장남을 제외한 차남, 차녀 이하의 자녀들이 이 제도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적은 양의 식사와 잠자리만을 제공받으며, 가장인 장남과 그 가족을 위해 평생 동안 봉사했다. 이들을 부리는 집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장남 외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제로 끊고, 장남의 말만 듣는 무감정한 로봇처럼 되도록 만들었다. 20대가 될 때까지는 정상적인 인격을 유지했지만, 오지로쿠와 오바사로서 노예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다. 메이지 5년(1872년)에는 190명,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에도 3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
정신과 의사 곤도 렌지는 오지로쿠와 오바사의 성격이 분열병(현재의 조현병)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여 면접을 진행했다. 그는 "청춘기에 겪은 소외가 만들어낸 인격이며, 분열증이라고는 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2]
4. 참고문헌
-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 20 나가노현
- 곤도 렌지 『開放病棟―精神科医の苦闘―』 합동출판, 1975년
참조
[1]
서적
開放病棟 : 精神科医の苦闘
合同出版
1975-07-01
[2]
문서
開放病棟―精神科医の苦闘
合同出版
197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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