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릴라 데르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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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브릴라 데르자빈은 18세기 러시아의 시인으로, 1743년 카잔 지방에서 태어나 1816년 노브고로드 지방에서 사망했다. 그는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에게 헌정한 송시 <펠리사>(1782)로 명성을 얻었다. 데르자빈은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의 시를 주로 썼으며, 말년에는 아나크레온풍의 시에 집중했다. 그는 지방 장관, 상원 의원, 법무 장관을 역임했으며, 1803년 은퇴 후에는 즈반카 영지에서 만년을 보냈다. 그의 작품은 서정시에 애가, 유머, 풍자를 섞은 것이 특징이며,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마리나 츠베타예바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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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릴라 데르자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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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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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가브릴(가브릴라) 로마노비치 데르자빈 |
출생일 | 1743년 7월 14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카잔현 라이셰프스키 군 |
사망일 | 1816년 7월 20일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현 즈반카 영지 |
직업 | 시인, 정치가 |
장르 | 시 |
사조 | 신고전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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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데르자빈은 1743년 카잔 지방의 소지주 아들로 태어나 1816년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에서 사망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카잔의 김나지움을 마치고 1762년 사병으로 입대, 1772년 장교가 되었다. 1773년 푸가초프의 난 진압에 참여했고, 17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무부 관리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26년간 올로네츠와 탐보프 지방 장관, 상원 의원,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관리 생활 중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782년 예카테리나 2세에게 바치는 송시 <<펠리사>>를 발표하며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여제의 총애를 받아 계관시인이 되었고, 개인 비서로도 일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1803년 공직에서 물러나 즈반카 영지에서 만년을 보냈다. 1789년 수도로 돌아와 『신』(1784) 등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그의 시는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의 인생의 쾌락을 노래한 시로 나뉜다. 특히 말년에 쓴 아나크레온풍의 시들은 삶에 대한 예찬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데르자빈은 1743년 7월 14일 (구력 7월 3일) 카잔 지방에서 몰락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1][2] 그의 조상은 15세기 타타르 귀족인 "몰자" 바그림으로,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바실리 2세의 봉신이 되었다.[3] 바그림은 대공을 섬긴 공로로 토지를 하사받았고, 그의 후손들은 나르베코프, 아킨포프, 케글레프(또는 테글레프) 가문을 이루었다.[3]나르베코프 가문의 일원으로 "데르자바"(러시아어로 "권위" 또는 "권력"을 의미하는 구체로 장식된 지구본)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 데르자빈 가문의 시조였다. 데르자빈 가문은 한때 카잔에서 약 약 40.23km 떨어진 미오샤 강을 따라 수익성이 좋은 영지를 소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영지는 분할되거나 매각되거나 저당 잡혔다. 가브릴라 데르자빈의 아버지인 로만 니콜라예비치 데르자빈은 몇몇 소작농이 거주하는 몇몇 토지구획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로만은 군에 입대하여 36세의 나이에 미망인이자 먼 친척인 표클라 안드레예브나 고리나(née 코즐로바)와 결혼했다. 그녀 또한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산재한 몇몇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영지는 이웃과 끊임없는 소송, 싸움, 다툼의 원인이 되었고, 때로는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
데르자빈은 부모가 결혼한 지 거의 9개월 만에 태어났지만, 그의 출생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3] 데르자빈은 자신을 카잔 출신이라고 여겼지만, 그의 가족 영지인 소쿠리 또는 카르마치, 라이셰프스키 군 중 한 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4][5] 라이셰프스키 지구는 데르자빈과의 연관성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데르자빈스키 지구로 알려져 있다.[6] 그는 슬라브 정교회에서 7월 13일에 기념되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공현 10일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가브릴(러시아어로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3] 그는 병약한 아이였고, 그의 부모는 당시의 전통적인 관습을 따라 "아기를 구웠다"(러시아어: перепекание ребёнка)—병약하거나 조산된 아기를 빵 삽에 놓고 오븐에 세 번 넣었다 뺐다 하는 고대 의식이다.[7]
2. 2. 교육
데르자빈 가문은 귀족이었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러시아의 빈곤과 교육 기관 부족으로 인해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다.[3] 데르자빈은 3세 때 지역 교회 목사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8세 때 가족은 오렌부르크(Оренбург)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일인 요제프 로제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로제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범죄자였고, 독일어만 가르칠 수 있었다.[3]10세에 카잔으로 돌아온 데르자빈은 1753년 가을 모스크바(Москва)를 처음 방문했다. 아버지 로만 데르자빈은 모스크바에서 은퇴 신청을 하고 아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등록시키려 했으나, 돈이 부족하여 카잔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해 후반 아버지가 사망한 후, 데르자빈은 소쿠리 땅의 절반을 상속받았지만, 이웃들의 침범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데르자빈에게 기하학과 산술을 가르쳤다.[3]
1758년 카잔에 문법학교가 새로 문을 열면서 데르자빈은 그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산술, 무용, 펜싱, 음악 등을 가르쳤다. 데르자빈은 기하학에 뛰어났으나, 관료적 실수로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Преображенский полк)의 이병이 되었다.[3]
2. 3. 경력
데르자빈은 1762년 사병으로 입대하여 1772년 장교로 임관되었다.[1] 1773년 푸가초프의 난 진압 작전에 참여하여 지휘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1][3] 1776년부터 1777년까지 푸가초프의 난 진압에 참가했다.[4]17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무부 관리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1] 정치적으로 능력이 있어 군 복무를 그만두고 행정부로 옮기면서 경력이 발전했다.[3] 26년 동안 올로네츠와 탐보프 지방 장관, 상원 의원, 법무장관을 지냈다.[1] 1784년 올로네츠, 1785년 탐보프 주지사가 되었다.[3][4] 그는 질서를 중시하고 부정부패와 싸웠으나, 이는 지방 엘리트들과의 갈등을 불러왔다.[4]
1789년 수도로 돌아와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4] 1791년 황후의 개인 비서, 1794년 상업부 장관, 1802년 사법부 장관에 올랐다.[3]
1782년 송시 《펠리차》를 발표하여 예카테리나 2세의 총애를 받고 계관시인이 되었다.[1] 한동안 여황제의 개인 비서로 일하기도 했으나,[1]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 때문에 1803년 공직에서 물러나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 영지로 돌아가 생활했다.[1] 1803년 은퇴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즈반카에서 생활했다.[4]
2. 4. 은퇴와 만년
1803년 공직에서 물러난 데르자빈은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 영지에서 시와 산문, 드라마와 회고록을 쓰면서 만년을 보냈다. 데르자빈은 1816년 7월 20일(구력 7월 8일) 즈반카에서 사망하여 후틴 수도원에 묻혔다.3. 작품
데르자빈은 18세기 러시아 시인으로서 독창적인 서정시와 송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바치는 송시 <펠리사>(1782)를 발표하면서부터다. <펠리사>는 전체가 260행으로 구성된 송시로서, 한편으로는 계몽 군주로서의 예카테리나 여제를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하들의 아첨과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8]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그 송시를 바쳐 여제의 총애를 받았고, 계관시인이 되는 명예를 얻기까지 하였다. 한동안 여제의 개인 비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데르자빈의 다양한 시들을 소재나 주제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의 인생의 쾌락을 노래한 시로 나눌 수 있다. 데르자빈의 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말년에 집중적으로 창작한 아나크레온풍의 시들이다. 그 시들은 즐겁고 감각적인 관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삶에 대한 예찬과 사랑으로 고취되어 있다.
데르자빈은 황후와 다른 궁정 신하들에게 바친 서정시(ode)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장르 체계를 거의 무시했으며, 서정시에 애가, 유머, 풍자적인 내용을 자주 섞어 넣었다. 예를 들어, 황후에게 바친 그의 대서정시에서는 아내의 머리카락에서 벼룩을 찾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자신의 시를 레모네이드에 비유하기도 했다.[8]
다른 고전주의 시인들과 달리, 데르자빈은 침실 벽지의 색깔이나 일상의 식사를 시적으로 나열하는 것과 같이 세심하게 선택된 세부 사항에 즐거움을 발견했다. 그는 프랑스어는 조화의 언어이지만 러시아어는 갈등의 언어라고 믿었다. 그는 아름다운 두운(alliteration)을 즐겼지만, 때로는 의도적으로 불협화음(cacophonous) 효과를 시에 사용하기도 했다.
데르자빈의 주요 서정시로는 "메셰르스키 공의 죽음에 부치는 노래"(1779), "펠리카에게 바치는 서정시"(1782),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된 "신"(1785), 포템킨 공의 죽음을 계기로 지은 "폭포"(1794), 그의 친구 수보로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잣새"(1800)가 있다. 그는 또한 러시아 최초의 국가 의례가인 ''승리의 천둥이여 울려 퍼져라!''의 가사를 제공했다.[8]
1782년 송가 『펠리차』를 쓴 이후 문학계와 일반 사회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 송가는 예카테리나 2세를 칭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풍자였다.[8] 1789년, 수도로 돌아와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신』(1784년) 등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4. 영향
D. S. 미르스키에 따르면, "데르자빈의 시는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우주이지만, 위대한 시인이 스승으로서도, 본보기로서도 쓸모없었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그는 문학적 취향의 수준을 높이거나 문학 언어를 개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의 시적 비상에 관해서는 그러한 현기증 나는 영역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넥라소프는 푸슈킨보다는 데르자빈을 따르는 것을 표명했으며, 데르자빈의 끊어진 리듬의 계보는 20세기에 마리나 츠베타예바에 의해 계승되었다. 1995년, 탐보프 주립대학교는 가브릴라 데르자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1]--
참조
[1]
웹사이트
Derzhavin's biography
http://www.tstu.ru/w[...]
[2]
서적
Russian Nationalism from an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 Imagining Russia
https://books.google[...]
E. Mellen Press
[3]
서적
Derzhavin: A Biograph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18-01-11
[4]
뉴스
Сокуры: красота на земле
http://kazved.ru/art[...]
2018-01-11
[5]
뉴스
Так где же родился Гавриил Державин? Республика Татарстан
http://rt-online.ru/[...]
2018-01-11
[6]
웹사이트
Родина Г.Р. Державина
http://visit-tatarst[...]
Visit-Tatarstan.com
2018-01-11
[7]
서적
Gender and Sexuality in Russian Civilisa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01-11
[8]
서적
Russia Gathers Her Jews: The Origins of the "Jewish Question" in Russia, 1772-1825
https://books.google[...]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9]
서적
Two Hundred Years Together: history of the Jews in Russia
[10]
서적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1]
웹사이트
History
https://web.archive.[...]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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