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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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 포크스는 1570년 요크에서 태어난 인물로, 1605년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는 화약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군사 경력을 쌓았으며, 1604년 로버트 캐츠비의 가톨릭 소모임에 초대되어 국왕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 1605년 11월 5일, 웨스트민스터 궁전 지하에서 체포되었고, 고문 후 다른 공모자들의 이름을 자백했다. 1606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화약 음모 사건의 상징으로 남아 '가이 포크스의 밤'으로 기념되고 있다. 그는 대중문화에서 반항과 저항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며, 특히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가면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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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포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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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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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Guido Fawkes (귀도 포크스) John Johnson (존 존슨) |
출생일 | 1570년 4월 13일 (추정) |
출생지 | 요크, 잉글랜드 |
사망일 | 1606년 1월 31일 (향년 35세) |
사망 장소 | 웨스트민스터, 런던, 잉글랜드 |
직업 | 군인, 알페레즈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부모 | 아버지: 에드워드 포크스 어머니: 이디스 (결혼 전 성: 블레이크 또는 잭슨) |
범죄 정보 | |
가담 시기 | 1604년 5월 20일 |
역할 | 폭발물 담당 |
체포일 | 1605년 11월 5일 |
범죄 동기 | 화약 음모 사건, 제임스 1세 국왕과 의회 의원 암살 음모 |
죄목 | 대역죄 |
유죄 판결 | 대역죄 |
형벌 | 교수척결분단형 |
2. 생애
가이 포크스는 1570년 요크의 스톤게이트에서 태어났다. 요크 교회 재판소의 사무 변호사[50]였던 에드워드 포크스의 네 자녀 가운데 둘째였으며, 어머니 에디스의 결혼 전 성은 블레이크[51] 또는 잭슨[59]으로 알려져 있다. 포크스는 4월 16일 벨프레이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보통 출생한 지 3일 뒤에 세례를 받았으므로, 출생일은 아마도 4월 13일일 것이다.[53]
1591년, 포크스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요크 주 클리프턴의 재산을 처분하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80년 전쟁에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편에 가담하여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윌리엄 스탠리 휘하에서 스페인 준사관 계급인 알페레즈(alférez)로 칼레 공방전에 참전했다.[59]
2. 1. 유년기
가이 포크스는 1570년 요크의 스톤게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요크 교회 재판소의 사무 변호사[50]였던 에드워드 포크스의 네 자녀 가운데 둘째였다. 어머니 에디스의 결혼 전 성은 블레이크[51] 또는 잭슨[59]으로 알려져 있다. 가이 포크스의 아버지는 평범한 잉글랜드 교회의 신자였고, 친할머니 엘런 헤링턴은 요크 시장경 관할 아래 있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52] 어머니의 가족은 성공회를 거부한 완고한 가톨릭 신자였고, 사촌 리처드 콜링은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53] '가이'는 잉글랜드에선 잘 쓰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15세기 요크셔 판사였던 스티턴의 가이 페어팩스처럼 요크 지방에서는 아주 드문 이름도 아니었다.[54]포크스의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4월 16일 벨프레이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에는 보통 출생한 지 3일 뒤에 세례를 받았으므로, 출생일은 아마도 4월 13일일 것이다.[53] 1568년 에디스는 딸 앤을 낳았지만 앤은 7주 만에 죽었다. 에디스는 그 뒤로도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는데, 1572년 무렵 다시 앤이라 이름 지은 아이를 낳았고 1575년 무렵에는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둘은 모두 장성하여 각각 1599년과 1594년에 결혼하였다.[54]
가이가 여덟 살이 되던 1579년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수 년 후 해러게이트 구 스코튼의 가톨릭 신자인 다이오니스(또는 데니스) 베인브리지와 재혼하였다. 포크스는 베인브리지 가족, 스코튼의 풀레인이나 퍼시 가문, 성 베드로 학교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학교 교장 가운데 한 명은 수장령을 거부하고 가톨릭을 고수하였다가 20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가이 포크스 시절 교장은 존 풀레인으로, 요크셔 블러버하우시스 출신의 완고한 가톨릭 가문 사람이었다.[55] 포크스는 존 라이트와 크리스토퍼 라이트 형제와 함께 공부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화약 음모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외에도 포크스의 동기로는 예수회 수사가 된 오즈월드 테시몬드, 에드워드 올드콘, 로버트 미들턴 등이 있었으며, 미들턴은 1601년 처형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가이 포크스는 앤서니 브라운 자작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자작은 포크스를 탐탁지 않게 여겨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하였다. 그 후 포크스는 앤서니 브라운의 손자이자 18세에 작위를 물려받은 앤서니-마리아 브라운 밑에서 간간이 일했다. 최소한 한 기록에는 포크스가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두었다고 하나, 확인할 방법은 없다.[56] [57]
2. 2. 군사 경력
1591년 10월 포크스는 아버지가 물려준 요크 주 클리프턴의 재산을 처분하였다.[58] 그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80년 전쟁에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편에 가담하여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595년부터 1598년 베르벵 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당시 잉글랜드는 육지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해상에서는 스페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패퇴한 1588년에서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가톨릭 민병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스탠리 휘하로 들어갔다. 윌리엄 스탠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충성하였지만 1587년 데벤터르에서 휘하 군대와 함께 스페인에 투항한 이후 스페인 편에서 싸웠다. 포크스는 스페인 준사관 계급인 알페레즈(alférez)에 임명되어 칼레 공방전에 참전하였으며 1603년 스페인령 식민지로 재배치 되었다.[59]그해 포크스는 스페인을 여행하며 잉글랜드의 가톨릭 반란을 도울 군사 원조를 요구하였다. 스페인에서 포크스는 자신의 이름을 가이의 이탈리아식 이름인 귀도라고 칭했다. 포크스는 그 해 즉위한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에서 모든 가톨릭 교도를 추방하려는 이단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제임스 1세의 총신 사이를 화해시키는 것에 대해 "이 두 나라가 항구적으로 화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스페인은 포크스를 정중하게 대접했지만 펠리페 3세는 군사 지원을 할 의사가 없었다.
3. 화약 음모 사건
1604년, 가이 포크스는 로버트 케이츠비가 이끄는 잉글랜드 가톨릭교도 그룹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개신교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그의 딸이자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엘리자베스 공주를 왕위에 앉힐 계획을 세웠다.[59]
1604년 5월 20일 일요일, 런던 스트랜드의 덕 앤 드레이크 여관에서 5명의 핵심 공모자들이 처음 만났다.[60] 케이츠비는 토머스 윈터와 존 라이트에게 국왕과 정부를 화약으로 국회의사당을 폭파하여 살해할 것을 제안했었다. 윈터는 케이츠비의 설득으로 대륙으로 건너가 도움을 구하려 했으나, 스페인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오웬은 윈터에게 포크스를 소개했고, 이들은 1604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61]
토머스 퍼시는 1604년 6월 신사 연금 수급자로 임명되어 존 위니야드가 소유한 런던의 집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포크스는 관리인으로 배치되어 퍼시의 하인인 존 존슨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63] 공모자들은 위니야드의 집 아래에서 의회까지 터널을 파려고 시도했지만, 이 이야기는 정부의 날조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까지 터널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63] 포크스 자신도 다섯 번째 심문 때까지 그러한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다.[59]
공모자들은 존 위니야드 소유의, 사용하지 않아 더러웠던 방을 임대했다. 이 방은 공모자들이 저장할 화약을 숨기기에 이상적인 장소로 여겨졌다.[64] 포크스에 따르면 처음에 20배럴의 화약이 반입되었고, 7월 20일에는 16배럴이 더 들어왔다.[64] 1605년 7월 28일, 의회 개회가 11월 5일로 연기되었다.[64]
1605년 5월, 포크스는 해외 지원을 얻기 위해 해외로 건너가 휴 오웬에게 공모자들의 계획을 알렸다.[65] 그의 이름은 로버트 세실 제1대 솔즈베리 백작의 파일에 들어갔지만, 포크스가 영국에서 사용한 가명인 존 존슨은 언급되지 않아 음모는 즉시 발각되지 않았다.[59]
포크스는 1605년 8월 말 런던으로 돌아왔고, 윈터와 함께 지하실에 저장된 화약이 부패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 많은 화약이 장작과 함께 방으로 옮겨졌다.[65] 포크스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다음 템스 강을 건너 탈출하고, 다른 공모자들은 엘리자베스 공주를 포획하는 계획이었다. 포크스는 대륙으로 건너가 가톨릭 열강에게 왕과 그 측근을 죽여야 하는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설명할 예정이었다.[65]
3. 1. 계획
1604년 가이 포크스는 로버트 케이츠비가 이끄는 잉글랜드 가톨릭 소모임에 초대되었다. 이들은 개신교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59]1604년 5월 20일 일요일, 런던 스트랜드 구에 있던 덕 앤 드레이크 여관에서 5명의 핵심 공모자들이 모였다.[60] 케이츠비는 토머스 윈터와 존 라이트에게 의회를 폭파하여 제임스 1세를 암살할 계획을 제안했고, 윈터는 동조자를 찾기 위해 대륙으로 갔다. 윈터는 카스티야의 무관 휴 오웬을 만났고, 오웬은 포크스를 소개했다.[59] 윈터는 포크스에게 "스페인이 우리를 도울 것이 없다면 잉글랜드 안에서 무언가를 해야지"라고 제안했고,[59] 둘은 1604년 4월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61]
1604년 6월, 토머스 퍼시는 존 위니어드가 소유한 런던의 집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포크스는 이 집의 관리인이 되어 존 존슨이란 가명으로 퍼시의 하인 행세를 하였다.[63] 토머스 윈터의 자백에 따르면, 이들은 위니어드의 집에서 의회까지 굴을 파려 했지만, 현재까지 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63] 포크스는 굴을 파는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다.[59]
음모자들은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지저분한 방을 빌려 화약을 보관하였다.[64] 포크스의 진술에 따르면 처음 사들인 화약은 20통이고 7월 20일 16통을 더 사들였다.[64] 1605년 7월 28일로 계획되었던 음모는 의회 개원이 11월 5일 목요일로 지연됨에 따라 연기되었다.[64]
1605년 5월, 포크스는 휴 오웬의 계획에 따라 원조를 구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65] 그의 출입국은 로버트 세실에게 포착되었지만, 화약 음모에 대한 내용은 알아차리지 못했다.[59]
포크스가 언제 잉글랜드로 돌아왔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605년 8월 말에는 런던에 있었다. 포크스와 윈터는 화약을 쌓았고, 장작더미를 쌓아 화약을 감추었다.[65] 포크스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뒤 템스 강을 건너 탈출하고, 다른 공모자들은 엘리자베스 공주를 사로잡기 위해 미들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동안, 포크스는 유럽 대륙으로 도망쳐 자신들의 행위가 가톨릭을 위한 성스러운 의무였다고 해명할 계획이었다.[65]
3. 2. 발각과 체포
1605년 11월 5일 새벽, 제1대 니버트 남작 토머스 리버트가 이끄는 수색대가 의회 주변을 순찰하던 중 가이 포크스가 발각되었다. 포크스는 전날 밤부터 도화선을 지닌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공모자인 퍼시에게 말한 것처럼 "언제 때가 되었는 지를 알기 위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59] 그는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지하실을 나오다 체포되었고, 지하실 안에서는 장작더미와 석탄으로 가려진 화약이 발견되었다.[65]포크스는 체포되어 국왕의 밀실에서 조사받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명인 존 존슨이라고 밝혔으며,[66] 조사관이 왜 그리 많은 화약을 쌓았느냐는 질문에 "너희 스코틀랜드 거지들을 날려버려서 너희 고향 산악으로 보내기 위해"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요크셔로 온 36세의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였고 아버지의 이름은 토머스, 어머니는 에디스 잭슨이라고 진술하였다. 심문관은 체포 당시 입은 상처로 포크스가 흉막염 증세를 보인다고 기록하였다. 포크스는 상원 의회를 폭파할 계획이었음을 시인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제임스 1세는 포크스의 결의에 찬 태도를 "불굴의 로마인"이라고 부르며 감탄하였다.[67]
11월 6일, 제임스 1세는 "존 존슨"에 대한 고문을 시작하라고 명령하였다.[68] 처음에는 "온건한 고문"으로 수갑을 채우는 정도였으나 필요에 따라 더욱 심한 단계인 랙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69] 포크스는 런던탑으로 옮겨졌고, 제임스 1세는 "존슨"에게 심문할 질문 목록을 전했다. 그가 심문받았던 방은 오늘날 가이 포크스 룸이라고 불린다.[70]

런던탑의 부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웨이드는 포크스에 대한 고문과 심문을 감독하였다.[71] 그는 포크스의 몸을 뒤져 "귀도 포크스"의 서명이 적힌 편지를 발견하였지만 "존슨"이 침묵하였기 때문에 편지를 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밝힐 수 없었다. 11월 6일 밤 웨이드는 자신의 상관인 샐리스버리 백작에게 "존슨은 우리에게 말하길 자신이 벌인 일은 그가 가톨릭 신앙을 향상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고자 매일 신에게 기도한 응답으로서 착수한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웨이드는 그날 밤 포크스를 쉬도록 하면서 "그의 사상과 모든 공범자들에 대한 내밀한 비밀을 받드시 밝혀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다음날 포크스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감독관 에드워드 하비는 "존슨이 런던탑에 있는 동안 영어를 사용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 11월 7일 포크스는 계속되는 고문 속에 자신의 실제 이름을 밝히고 다섯 명의 공모자가 있음을 실토하였다. 8일에는 공모자들의 이름을 자백하였고 엘리자베스 공주를 새 국왕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고 진술하였다. 11월 9일 세 번째 심문에서는 프란시스 트레셤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자백하였다. 1571년 리돌피 음모 이후 죄수는 자신의 자백을 적은 심문서에 (아직 그럴 수 있는 상태라면) 서명을 해야 했다. 랙 고문 때문이었는 지 확실치는 않지만 포크스는 심한 고통을 받은 듯 흔들리는 필체로 심문관이 내민 사본에 서명하였다.[72]
3. 3. 재판과 처형
포크스는 체포되어 국왕의 밀실에서 조사받았다. 그는 체포되었어도 여전히 도발적이었으며 첫 조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명인 존 존슨이라고 밝혔다.[66] 조사관이 왜 그리 많은 화약을 쌓았느냐고 질문하자 포크스는 "너희 스코틀랜드 거지들을 날려버려서 너희 고향 산악으로 보내기 위해"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요크셔로 온 36세의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였고 아버지의 이름은 토머스, 어머니는 에디스 잭슨이라고 진술하였다. 포크스는 상원 의회를 폭파할 계획이었음을 시인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제임스 1세는 포크스의 결의에 찬 태도를 감탄하며 그를 "불굴의 로마인"이라고 불렀다.11월 6일, 제임스 1세의 감탄에도 불구하고, 공모자를 밝히기 위해 "존 존슨"에 대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온건한 고문"으로 수갑을 채우는 정도였으나 필요에 따라 더욱 심한 단계인 랙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67][66] 포크스는 런던탑으로 옮겨졌다. 제임스 1세는 "존슨"에게 "그는 어떤 인물인가? - 나는 그를 안다는 어떤 사람도 아직 듣지 못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 프랑스어를 배웠는가?", "만일 그가 가톨릭 신도라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와 같은 질문 목록을 전했다. 그가 심문받았던 방은 오늘날 가이 포크스 룸이라고 불린다.
런던탑의 부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웨이드는 포크스에 대한 고문과 심문을 감독하였다.[66] 11월 6일 밤, 웨이드는 자신의 상관인 샐리스버리 백작에게 "존슨은 우리에게 말하길 자신이 벌인 일은 그가 가톨릭 신앙을 향상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고자 매일 신에게 기도한 응답으로서 착수한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웨이드는 그날 밤 포크스를 쉬도록 하면서 "그의 사상과 모든 공범자들에 대한 내밀한 비밀을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다음날 포크스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감독관 에드워드 하비는 "존슨이 런던탑에 있는 동안 영어를 사용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 11월 7일 포크스는 계속되는 고문 속에 자신의 실제 이름을 밝히고 다섯 명의 공모자가 있음을 실토하였다. 8일에는 공모자들의 이름을 자백하였고 엘리자베스 공주를 새 국왕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고 진술하였다. 11월 9일 세 번째 심문에서는 프란시스 트레셤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자백하였다. 포크스는 심한 고통을 받은 듯 흔들리는 필체로 심문관이 내민 사본에 서명하였다.
8명의 음모자들에 대한 재판은 1606년 1월 27일 시작되었다. 포크스를 포함한 7명의 공모자들은 런던탑에서 바지선에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이송되었다. 재판은 제임스 1세를 비롯한 왕실과 상원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음모자들에 대한 죄목이 나열되었다. 포크스는 자신을 "귀도 포크스"로 밝히면서 "귀도 존슨"으로도 불린다고 진술하였다. 그는 실제 사건이 일어나기 전 체포되었으므로 시역 자체는 무죄라고 주장하였다.

판결은 유죄였다. 배심원단은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였고 대법관은 음모자들이 외환죄를 범했다고 선고하였다. 잉글랜드 웨일스 법무장관 에드워드 코크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이들을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한다고 공표하였다. 교수척장분지형은 먼저 교수대에 매달아 "하늘과 땅 그 어느 사이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도록 한 뒤 장기를 척출하고 눈과 심장을 뽑아낸 뒤 말에 매달아 땅바닥을 뒹굴게 하는 참혹한 형벌이었다. 그 뒤로도 시체를 토막내어 "닭 모이로 던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68] 포크스와 트레셤은 스페인 편에 가담하여 화약 음모를 꾸민 반역자로 공표되었다. 재판의 마지막 증거로 서로 이웃한 감방에 갇혀 있던 포크스와 윈터의 대화가 채택되었다. 그들은 남몰래 대화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정부가 심어 놓은 첩자가 이를 엿듣고 있었다. 포크스는 최후 진술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에 대해 부정하고 무죄를 주장하였다.
1606년 1월 31일, 포크스와 세 명의 공모자(토머스 윈터, 엄브로즈 룩우드, 로버트 키예즈)는 런던탑에서 끌려나와 버들가지 울타리에 넣어진 채 웨스트민스터의 옛 궁전 터로 보내졌다. 동료들이 차례로 처형된 뒤 포크스는 제일 나중에 교수대에 올랐다. 그는 국왕과 국가의 용서를 구한 뒤 가톨릭 신자로서 성호를 그었다. 고문으로 쇠잔해진 탓인지 아니면 교수형 집행자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다리를 오르던 포크스는 밧줄을 목에 건 채 추락하여 목이 부러져 그대로 숨져 교수척장분지형의 나머지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66]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숨이 멈춘 그의 육신은 장기가 척출되고 말에 묶여 굴러다녔다. 또한 관례에 따라 그의 시신을 잘라 나누어 "왕국의 네 구석"으로 보내져 배신자의 말로를 경고하기 위해 전시되었다.[69]
4. 영향
가이 포크스는 화약 음모 사건의 단순한 공모자를 넘어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1841년 윌리엄 해리슨 에인스워스의 소설 《가이 포크스; 화약 반역자》는 그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여 대중적 인식을 바꾸었고, 이후 어린이 책과 페니 드레드풀 시리즈에서 "액션 히어로"로 묘사되었다.
역사학자 루이스 컬은 가이 포크스가 "근대 정치 문화의 주요 아이콘"이며, 특히 만화 《브이 포 벤데타》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은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상징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영화의 영향으로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대한민국에서도 시위나 집회에 사용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2018년 대한항공 경영진의 갑질에 맞선 직원들의 시위에서도 이 가면이 사용되었다.[76]
4. 1. 가이 포크스의 밤
1605년 11월 5일 런던 사람들은 국왕 제임스 1세가 암살 위협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하며 "위험이나 혼란 없이 안전을 알리는 기쁨의 증거"라며 화톳불을 피웠다.[59] 의회는 1605년 11월 5일 기념법을 제정하여 매년 11월 5일을 "액운을 막은 기쁨의 날"로 기념하도록 했다. 이 법은 1859년 기념일법이 제정될 때까지 유지되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비롯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모든 교회에서 왕(또는 여왕)과 왕실의 건재함을 공표하고 신의 가호를 기원했다.[70] 비록 가이 포크스는 13명의 공모자 중 한 명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화약 음모 사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영국에서 11월 5일은 가이 포크스의 밤, 가이 포크스의 날, 음모의 밤, 화톳불의 밤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기념일이 되었다. 1650년대부터는 화톳불에 불꽃놀이를 곁들이기 시작했다. 1673년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가 가톨릭으로 비밀리에 개종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개 교황으로 꾸민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관습이 생겨났다.[59] 허수아비는 종종 대중이 증오하는 인물로 대체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보어 전쟁 무렵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파울 크뤼거 허수아비가, 근래에는 마거릿 대처 허수아비가 불타올랐다. 요즘에는 대부분 가이 포크스 허수아비를 태운다.[70] 아이들은 낡은 옷과 신문지로 몸을 만들고 가면을 씌워 "가이" 허수아비를 만든다.[70] 19세기 영어에서 "가이"는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을 뜻했지만, 미국 영어에서는 점차 뜻이 바뀌어 일반적으로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70][71]
요크 대학교 역사학 교수 제임스 샤프는 가이 포크스를 "정직한 의도를 가지고 의회로 들어간 마지막 인물"이라고 풍자했다.
1841년 낭만주의 역사 소설가 윌리엄 해리슨 에인스워스는 《가이 포크스; 화약 반역자》를 발표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는 소설에서 가이 포크스를 공감할 수 있는 밝은 인물로 묘사했고,[72] 이후 대중문화에서 가이 포크스는 "받아들일 수 있는 가공의 인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1905년 발간된 어린이용 싸구려 이야기 책 페니 드레드풀 시리즈 중 하나인 《가이 포크스의 어린 시절; 옛 런던의 음모자》에서는 가이 포크스를 "타고난 액션 히어로"로 묘사했다.[73] 역사학자 루이스 컬은 포크스가 이제 "근대 정치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으며, 만화 《브이 포 벤데타》 시리즈의 주인공 V가 쓰는 가면으로 등장한 이후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명확한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74] 만화 속에서 V는 영국 국가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75]
가이 포크스 가면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상영되면서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시위나 집회에 사용되는 사례가 생겨났다. 2018년 대한항공 경영진의 갑질에 맞선 직원들의 시위에서도 쓰였다.[76]
4. 2. 가이 포크스 가면

1841년 낭만주의 역사 소설가 윌리엄 해리슨 에인스워스는 《가이 포크스; 화약 반역자》를 발표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는 소설에서 가이 포크스를 공감할 수 있는 밝은 인물로 묘사하였고,[72] 이때부터 대중 문화에서 가이 포크스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공의 인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싸구려 이야기 책이었던 페니 드레드풀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1905년 발간된 《가이 포크스의 어린 시절; 옛 런던의 음모자》에서는 가이 포크스를 "타고난 액션 히어로"로 그렸다.[73] 역사학자 루이스 컬은 포크스가 이제 "근대 정치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만화 《브이 포 벤데타》 시리즈의 주인공 V가 쓰는 가면으로 등장한 이후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명확한 표상으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한다.[74] 만화 속에서 V는 영국 국가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75]
가이 포크스 가면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상영되면서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시위나 집회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사용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2018년 대한항공 경영진의 갑질에 맞선 직원들의 시위에서도 쓰였다.[76]
4. 3. 대중문화
1605년 11월 5일 런던 사람들은 국왕이 암살을 피한 것을 축하하면서 "이것은 어떠한 위험이나 혼란도 없는 안전을 알리는 기쁨의 증거"라며 화톳불을 피웠다.[59] 1605년 11월 5일 기념법에 따라 매해 11월 5일은 "액운을 막은 기쁨의 날"로 기념되었고, 이 법은 1859년 기념일법이 제정될 때까지 유지되었다.[70] 가이 포크스는 13명의 공모자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화약 음모 사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영국에서 11월 5일은 가이 포크스의 밤, 가이 포크스의 날, 음모의 밤, 화톳불의 밤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기념일이 되었다. 1650년대에 들어 홧톳불을 피우는 관습에 불꽃 놀이를 곁들이기 시작했다. 1673년 이후로는 대개는 교황으로 꾸민 허수아비를 불태웠는데,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가 남몰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59] 허수아비는 종종 대중이 증오하는 인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보어 전쟁 무렵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파울 크뤼거 허수아비가 불타올랐고, 근래에는 마거릿 대처 허수아비를 태우기도 하였다. 요즘엔 대부분 가이 포크스 허수아비를 태운다.[70] 허수아비 "가이"는 대개 아이들이 만드는데 낡은 옷과 신문지로 몸을 만들고 가면을 씌운다.[70] 이 때문에 19세기 영어에서 "가이"는 낡은 옷을 입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었으나, 미국 영어에서 점차 뜻이 바뀌어 일반적으로 남성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70][71]
요크 대학교 역사학 교수 제임스 샤프는 가이 포크스를 일컬어 "정직한 의도를 가지고 의회로 들어간 마지막 인물"이라고 풍자하기도 하였다.
1841년 낭만주의 역사 소설가 윌리엄 해리슨 에인스워스는 《가이 포크스; 화약 반역자》를 발표하여 많은 인기를 모았다. 그는 소설에서 가이 포크스를 공감할 수 있는 밝은 인물로 묘사하였고,[72] 이때부터 대중 문화에서 가이 포크스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공의 인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싸구려 이야기 책이었던 페니 드레드풀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1905년 발간된 《가이 포크스의 어린 시절; 옛 런던의 음모자》에서는 가이 포크스를 "타고난 액션 히어로"로 그렸다.[73] 역사학자 루이스 컬에 따르면 포크스는 이제 "근대 정치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다. 만화 《브이 포 벤데타》 시리즈의 주인공 V가 쓰는 가면으로 등장한 이후 포스트모던 아나키즘의 명확한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74] 만화 속에서 V는 영국 국가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75]
가이 포크스 가면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상영되면서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시위나 집회에 가이 포크스 가면을 사용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2018년 대한항공 경영진의 갑질에 맞선 직원들의 시위에서도 쓰였다.[76]
5. 평가
가톨릭 예수회 신부인 오스왈드 테시몬드는 옛 친구인 포크스를 "말과 행동이 즐겁고 싸움과 다툼을 피하며 친구에게 성실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군사에 정통하다"고 말하며 존경받는 성격과 높은 기술력은 음모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34]。 전기 작가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포크스의 외모에 대해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이며, 붉은 머리에 당시 유행하던 팔자 수염과 짙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적었으며, 내면에 대해 "행동적인 남자… 지적인 대화도 나누고, 육체적인 고문에도 저항하며, 적을 적잖이 놀라게 했다"고 적었다[28]。
포크스는 "국회의사당에 등원한 인물 중 성의 있는 행동을 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농담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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