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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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자황후는 베트남 쩐 왕조의 인물로, 쩐 예종의 황후이자 쩐 폐제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호꾸이리의 사촌으로 추정되며, 1371년 황태자비, 1372년 황비, 1373년 황후가 되었다. 1377년 남편 쩐 예종이 사망하자 비구니가 되었으며, 아들 쩐 폐제가 즉위했으나 섭정은 쩐 예종이 맡았다. 138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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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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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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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대뢰 마을, 빈녕 지구, 애주, 탄도 읍, 안남 |
사망지 | 탕롱, 안남 |
배우자 | 쩐 예종 |
자녀 | 진 폐제 |
시호 | 가자(嘉慈) |
작위 | 왕비 |
작위2 | 대월 제국의 황태자비 |
재위2 | '1371년 ~ 1372년' |
작위4 | 대월 제국의 황후 |
재위4 | '1373년 ~ 1377년' |
사망일 | '1381년 10월' |
사망지 | 롱담흐엉에 찌에우카인 사원 (Chùa Triệu Khánh, Hương Long Đàm) |
전임자4 | 의성황후 |
후임자4 | 광만황후 |
2. 출신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가자황후 여씨의 구체적인 출신 배경은 불분명하지만, 베트남 호 왕조의 초대 황제인 호꾸이리(胡季犛)의 사촌 여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탄호아(Thanh Hóa)성 아이쩌우(Ái Châu) 빈록현(Vĩnh Lộc) 대래(Đại Lại) 마을(현재 탄호아성 하중현(Hà Trung) 하동 코뮌(Hà Đông))에서 태어났다.
쩐 왕조의 황제 쩐 예종(睿宗)의 황후이자 쩐 폐제의 어머니이다. 호 꾸이 리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다.
3. 생애
남편 쩐 예종과의 사이에서 1359년 창무왕 진위(彰武王 陳煒)를, 1361년 영덕왕 진현(靈德王 陳晛)을 낳았다. 남편이 1371년 황태자로 책봉되자 황태자비가 되었고, 이듬해 남편이 즉위하자 황비(신비)를 거쳐 1373년 황후(현정 황후)가 되었다.
1377년, 남편 쩐 예종이 참파와의 비자야 전투에서 전사하자[1] 크게 슬퍼하며 트리에우까인 사원의 비구니가 되었다. 같은 해 아들 쩐 폐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태후(가자 태후)가 되었으나, 『남옹몽록』에 따르면 아들의 즉위가 가져올 위험을 예감하고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2]
1381년 10월, 트리에우까인 사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우려대로 아들 쩐 폐제는 1388년 폐위된 후 살해되었다.
3. 1. 황후 이전
가자황후 여씨는 대래 마을, 빈록 현, 아이쩌우, 탄호아 (현재 하동 코뮌, 하중 지방 정부, 탄호아 성) 출신이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그녀는 관료였던 호 꾸이 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여씨가 쩐 예종과 언제 혼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녀는 1359년에 창무왕 진위(彰武王 陳煒)를 낳았고, 1361년에는 훗날 황제가 되는 영덕왕 진현(靈德王 陳晛)을 낳았다.
1371년 4월, 당시 공선왕(恭宣王)이었던 남편 쩐 예종(陳曔)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여씨도 황태자비가 되었다. 당시 황제였던 쩐 예종(藝宗)은 그녀를 즉시 황태자비로 인정했다.
1372년, 쩐 예종은 동생인 쩐 예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여씨는 같은 해에 '''황비'''(皇妃)로 책봉되었으며 '''신비'''(宸妃)라고 불렸다. 일부 기록에는 그녀를 '''현정 신비'''(顯貞宸妃)라고 칭하며, 쩐 예종이 첫 부인이었던 그녀를 총애했다고 전한다.
1373년, 신비 여씨는 '''황후'''(皇后)로 책봉되어 '''현정황후'''(顯貞皇后)가 되었다.
3. 2. 황후 시절
1371년 4월, 남편인 공선왕 진경(恭宣王 陳曔)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여씨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당시 황제는 시숙인 쩐 응에 통이었다.
1372년, 쩐 응에 통은 동생 쩐 예종(睿宗)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제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여씨는 같은 해 '''황비'''(皇妃)로 책봉되어 '''신비'''(宸妃)라 불렸다. 그러나 쩐 예종은 첫 부인이었던 여씨보다 '''현정 쩐비'''(顯貞宸妃)를 더 총애하였다.
1373년, 신비 여씨는 '''황후'''로 책봉되어 '''현정 황후'''(顯貞皇后)가 되었다.
1377년, 쩐 예종이 참파 왕국과의 비자야 전투에서 전사하자[1] 현정 황후는 크게 슬퍼하며 트리에우까인 사원에서 불교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이 죽은 후, 태상황제 쩐 응에 통은 1377년 5월, 쩐 예종의 아들이자 황후의 아들인 영덕왕 쩐 히엔(陳晛)을 제11대 황제로 즉위시켰다. 황제의 섭정은 쩐 응에 통이 맡았다. 아들이 황제가 되면서 현정 황후는 '''가자 태후'''(嘉慈皇太后)가 되었다. ''남옹몽록''에 따르면, 가자 태후는 아들의 즉위가 위험을 초래할 것을 예감하고 반대했다고 한다.[2]
1381년 10월, 가자 태후는 찌에우 칸 사원(Triều Khánh)의 서쪽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우려대로, 아들 쩐 히엔은 1388년 12월 6일에 폐위되었고 같은 달 말에 살해되었다.
3. 3. 사망
1377년, 남편 쩐 예종(睿宗)이 참파와의 비자야 전투에서 사망하자[1], 황후 여씨(현정 황후)는 매우 슬퍼하며 트리에우까인 사원의 비구니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태상황 쩐 예종(藝宗)은 그녀의 아들인 영덕왕(靈德王) 쩐 폐제(陳晛)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황후 여씨는 '''가자 태후'''(嘉慈皇太后)가 되었다.
그러나 『남옹몽록』에 따르면, 가자 태후는 아들의 즉위가 가져올 위험을 예감하고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2] 실제로 아들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태상황 쩐 예종(藝宗)이 계속 행사하였다.
1381년 10월, 가자 태후는 트리에우까인 사원의 서쪽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우려했던 대로, 아들 쩐 폐제는 결국 1388년 12월 6일에 폐위되었고, 같은 달 말에 살해되었다.
4. 가계
대래 마을, 빈록 현, 아이쩌우, 탄호아 (현재 하동 코뮌, 하중 지방 정부, 탄호아 성) 출신이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그녀는 관료이자 훗날 호 왕조를 세우게 되는 호 꾸이 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쩐 예종(恭宣王 陳曔)과 혼인하였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1359년에는 창무왕 진위(彰武王 陳煒)를, 1361년에는 령덕왕 진현(靈德王 陳晛)을 낳았다.
1371년 4월, 남편인 공선왕 진경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그녀 역시 황태자비가 되었다. 1372년, 시아주버니인 쩐 예종(藝宗)이 남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제로 물러나자, 그녀는 같은 해 황비(皇妃)로 책봉되어 신비(宸妃)라고 불렸다. 그러나 쩐 예종은 첫 번째 부인이었던 '''현정 쩐비'''(顯貞宸妃)를 더 총애했다는 기록도 있다. 1373년, 그녀는 황후(皇后)로 책봉되어 현정 황후(顯貞皇后)가 되었다.
1377년, 남편 쩐 예종이 참파 왕국과의 비자야 전투 중 전사하였다.[1] 이에 황후는 크게 상심하여 트리에우까인 사원으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태상황제 쩐 예종은 그녀의 아들 진현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그녀는 가자 태후(嘉慈皇太后)가 되었다. 당시 제국의 실권은 태상황제 쩐 예종이 쥐고 있었다. ''남옹몽록''에 따르면, 가자 태후는 아들의 즉위가 위험하다고 느껴 반대했다고 한다.[2]
1381년 10월, 찌에우 칸 사원의 서쪽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녀의 예견대로, 아들 진현은 1388년 12월 6일 폐위되었고 같은 달 살해되었다.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Vietnam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06-02-27
[2]
문서
Dream memoir of Southern Man, the 5th story
https://vi.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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