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기리 미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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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기리 미사오 사건은 1965년 7월 29일, 18세의 가타기리 미사오가 경찰관을 살해하고 총기를 탈취한 후, 도쿄 시부야의 총포점에서 인질극을 벌인 사건이다. 가타기리는 총기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으며, 범행 동기는 폭력 소설과 같이 총을 마음껏 쏘고 싶다는 욕구였다. 사건 이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72년 25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소년 범죄와 총기 규제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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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기리 미사오 | |
---|---|
사건 개요 | |
명칭 | 자마 및 시부야 총격 사건 |
발생 위치 | 가나가와현자마시 및 도쿄도시부야구 |
발생 날짜 | 1965년 7월 29일 |
발생 시간 | 11:00–19:18 |
시간대 | UTC+09:00 |
유형 | 연쇄 살인, 인질극, 총격전 |
사망자 | 1명 |
부상자 | 17명 |
범인 | 가타기리 미사오 |
사용 무기 | 소총, 권총 |
범인 정보 | |
이름 | 가타기리 미사오 (片桐操) |
출생일 | 1947년 4월 15일 |
출생지 | 도쿄도세타가야구 |
사망일 | 1972년 7월 21일 |
사망 장소 | 미야기 교도소, 일본 |
사망 원인 | 교수형 |
형벌 | 사형 |
범행 날짜 | 1965년 7월 29일 |
범행 시간 | 11:00–19:18 (UTC+09:00) |
범행 장소 | 가나가와현자마시 & 도쿄도시부야구, 일본 |
사용 무기 | 소총 |
범죄 상태 | 사형 집행 |
유죄 판결 | 살인 |
사건 상세 | |
사건명 (일본어) | 少年ライフル魔事件 (소년 라이플 마 사건) |
사건 발생 장소 | 일본 가나가와현자마시, 도쿄도시부야구 |
발생일 | 1965년 (쇼와 40년) 7월 29일 |
사건 개요 | 살인, 인질, 총기 난사 사건 |
사용 무기 | 라이플총, 피스톨 |
표적 | 일반 시민, 경찰 |
사망자 | 1명 |
부상자 | 약 18명 |
범인 | 소년 A (사건 당시 18세) |
처벌 | 사형 (집행 완료) |
참고 자료 | |
참고 링크 | Ano Shikeishū no Saigo no Shunkan |
참고 링크 | 가타기리 미사오 |
참고 링크 | 【소년 라이플 마 사건】당시 미성년의 가타기리 미사오가 일으킨 총격 사건이란? |
2. 사건 개요
1965년 7월 29일, 당시 18세였던 가타기리 미사오는 가나가와현 자마시의 한 산림에서 권총을 빼앗을 목적으로 경찰관 1명을 라이플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다른 경찰관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9][2] 가타기리는 숨진 경찰관으로부터 권총과 제복 등 장비를 탈취한 후,[9] 경찰관 행세를 하거나 권총으로 위협하는 방식으로 승용차 4대를 연달아 강탈하며 도쿄도 시부야구로 도주했다.[9][2] 같은 날 오후 6시경, 시부야 기타야정(현재의 진난)에 위치한 "로열 총포 화약점"에 침입하여 종업원 등 4명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시작했으며, 가게 안의 총기를 이용하여 출동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9][10][11] 이 과정에서 인근 야마노테선 운행이 중단되고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드는 등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가타기리는 총격전 끝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10][11]
2. 1. 범행 동기
가타기리 미사오는 평소 애독하던 폭력 소설인 『야수 죽다』와 같은 일을 실제로 해보고 싶었다는 것과, "총을 마음껏 쏘고 싶었다"는 것을 범행 동기로 밝혔다.[4] 그는 범행 후 "(총포점에 있던) 여러 총을 쏠 수 있어서 쌓였던 것을 전부 쏟아낸 듯한 기분으로 후련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어차피 감옥에 갈 바에는 베트남(당시는 전쟁 중)에 가고 싶다. 좋아하는 총을 마음껏 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2. 2. 사건 발생
1965년 7월 29일, 당시 18세였던 가타기리 미사오는 가나가와현 고자군 자마정(현재의 자마시)의 산림에서 라이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가타기리 자신이 거짓 110번 신고를 하여 경찰관을 유인, 권총을 빼앗으려 했다는 설도 있다.[9] 현장을 지나던 경찰관이 가타기리를 심문하자, 그는 라이플총으로 경찰관의 가슴을 쏘아 살해하고 머리를 반복적으로 구타했다.[9][2] 가타기리는 사망한 경찰관으로부터 권총, 경찰 수첩, 수갑, 헬멧, 제복 등의 장비를 빼앗아 착용했다. 이후 지원을 위해 현장에 도착한 다른 경찰관 1명에게도 총격을 가해 중상을 입혔다.[9]산림에서 도주한 가타기리는 경찰관 행세를 하며 민가에 접근해 협력을 요청하여 차를 얻어 타는 데 성공했다. 이후 지나가던 차에 탑승하거나, 운전수를 속이거나, 빼앗은 권총으로 위협하는 방식으로 승용차 4대를 연달아 갈아타며 도주했다.[9][2]
2. 3. 시부야 총포점 인질극 및 총격전
1965년 7월 29일, 가나가와현에서 경찰관을 살해하고 권총을 빼앗은 가타기리 미사오는 4대의 차를 강탈하며 도주하여[9][2] 오후 6시가 넘어 도쿄도 시부야구 기타야정(현재의 진난) 1초메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로열 총포 화약점"에 침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강탈하고, 종업원 남녀 3명과 종업원의 여동생 1명 등 총 4명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시작했다.가게를 점거한 가타기리는 도착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9] 이로 인해 인근을 지나던 일본국유철도 야마노테선의 운행이 전면 중단되었으며, 현장 주변에는 나가야마 노리오를 포함하여 3000명[9](혹은 약 5,000명[10][11][2])에 달하는 구경꾼이 몰려들어 큰 혼란이 빚어졌다. 가타기리는 인질에게 총알을 장전하게 시키면서 경찰과 통행인을 향해 총 110발(130발이라는 설도 있음)의 라이플탄을 발사했다. 이 총격으로 경찰관 5명, 구경꾼, 보도 관계자 등 총 15명[9](또는 16명[2])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대응했다.
오후 7시 20분경, 최루탄 연기를 견디지 못한 가타기리는 여성 인질 2명을 방패 삼아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이때 가타기리의 등 뒤에 있던 남성 인질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총으로 가타기리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도주했다. 가타기리는 도망치는 남성 인질을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맞히지 못했다. 총알이 떨어져 총격이 멈춘 틈을 타, 현장에 출동해 있던 하라주쿠 경찰서 소속 오가타 야스노리 형사가 가타기리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가타기리가 숨겨둔 권총으로 반격하여 오가타 형사는 얼굴과 등에 총 2발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가타기리는 다시 도주하려 했으나, 주변에 있던 다른 경찰관 10여 명에게 제압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10][11]
3. 범인과 재판
가타기리 미사오는 1965년 7월 29일, 가나가와현 자마시에서 소총으로 경찰관 1명을 사살하고 다른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는 권총을 훔쳐 4대의 차를 강탈한 뒤 도쿄도 시부야구로 이동했다. 시부야 소방서 근처의 총포상에 침입하여 4명의 인질을 잡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총격전은 나가야마 노리오를 포함한 약 5,000명의 시민이 목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타기리는 1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2] 인질 중 한 명이 그를 제압하려 시도했고, 결국 출동한 경찰관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가타기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72년 7월 21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3. 1. 범인의 배경
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난 가타기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이듬해 아버지와 재혼한 계모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린 시절 체격은 좋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이었다.어릴 적부터 총기 애호가였으며, 밀리터리 잡지 『마루』를 즐겨 읽었다. 우산 손잡이와 폭죽 화약을 이용해 구슬을 발사하는 수제총을 만들기도 했다. 구 육군 상등병 출신인 아버지는 이러한 취미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고가의 모델건을 사주거나 "당시 돈으로 10만엔 정도의 총이라면 언제든지 사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사람을 죽이지 마라. 사람을 죽일 바에는 먼저 네가 죽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7살 위의 친언니는 가타기리의 중학교 졸업 선물로 당시 고가였던 3.5만엔 상당의 실총과 4천엔 상당의 조준경을 사주었다. 그러나 가타기리는 총기 소지 가능 연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니가 자신의 명의로 총기를 구입하고 소지 등록을 대신해주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오야부 하루히코의 소설 『윈체스터 M70』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국의 총기 잡지 『건 다이제스트』와 『슈터스 바이블』을 구해 사전을 찾아가며 총기 지식을 깊이 파고들었다. 학업 성적은 중간 정도였으며,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총기를 다루고 싶다는 생각에 자위대 입대를 시도했으나 불합격했다. 이 계획은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실망한 가타기리는 자동차 정비공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남미에서는 총을 마음껏 쏠 수 있다는 생각에 남미행 선원이 되기로 결심하고, 직업안정소를 통해 국내 항로 견습 요리사로 일하게 되었다. 선원 생활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고, 항해 때마다 약 1개월에 한 번 귀가했다. 그는 미리 브라질에 대해 조사했으며, 범인 인도 조약이 없어 자유가 보장된다고 판단하여 범행 후 브라질로 도주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1965년 4월 15일, 18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가타기리는 생일 전에 직장에 장기 유급 휴가를 신청했으며, 일설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그는 직장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합법적으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18세 생일을 치밀하게 기다렸던 것으로 보이며, 생일이 되자마자 언니 명의였던 총기를 자신의 명의로 변경하는 절차를 밟아 명실상부한 "자신의 총"을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18세가 되기를 기다리며 꾸준히 저축한 돈으로, 당시 돈 4만엔짜리 2연발 산탄총과 2천엔짜리 총기 케이스를 나중에 사건 현장이 되는 총포점에서 새로 구입했다.
실총을 손에 넣은 후 사격장에 다니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직접 소음기를 제작하여 실내나 당시 도쿄 근교에 있던 숲에서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다. 탄알 구입과 총기 손질을 위해 사건 현장이 된 총포점에 자주 드나들며 점원들과 안면을 텄다. 총기 손질은 매우 꼼꼼하게 하여 4~5시간을 들이는 일도 흔했으며, "지문이 묻는다"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총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훗날 밝혀진 가타기리의 범행 동기는 "애독하던 폭력 소설 『야수 죽다』와 같은 일을 실제로 해보고 싶었다", "총을 마음껏 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4]。 범행 후에는 "(총포점의 총기를 마음껏 사용하여 대량으로 쏘았기 때문에) 여러 총을 쏠 수 있어서 쌓였던 것을 모두 쏟아낸 기분으로 후련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어차피 감옥에 갈 테니, 대신 베트남(당시 전쟁 중)에 가고 싶다. 좋아하는 총을 마음껏 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3. 2. 재판 과정
1967년 4월 13일, 1심인 요코하마 지법은 가타기리의 범행이 매우 악질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생각이 미숙한 소년의 범죄이고 냉혹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점 등을 고려하여 사회 복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가타기리에게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그러나 1968년 항소심을 맡은 도쿄 고등법원은 가타기리가 교정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판결을 받은 가타기리는 상고했다. 1심과 2심 재판 과정에서 가타기리는 "총에 대한 매력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다시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사형해 달라"고 진술[5]했지만, 상고심에서는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경찰과 검찰청의 취조에서는 멋있다고 생각해서 시키는 대로 자백했지만, 사실은 죽일 의도가 없었다"며 사형을 피하려는 주장을 펼쳤다.
1969년 10월 2일, 최고 재판소는 2심 판결을 지지했다. 재판부는 "1심과 2심의 형이 너무 무겁다거나 사실 인정이 잘못되었다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은 상고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며 가타기리의 상고를 기각했고, 이로써 사형이 확정되었다[6].
1972년 7월 21일, 미야기 형무소에서 가타기리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25세였다.
4. 사건의 영향 및 여파
(내용 없음)
4. 1. 문화적 영향
사건 현장에 모인 많은 구경꾼 중에는 작가이자 후에 정치인(도쿄도지사)이 되는 이시하라 신타로도 있었다. 그는 사건 소식을 듣고 일부러 현장을 찾았으며, 다른 구경꾼이 총격으로 부상을 입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재판을 방청한 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혐오의 저격자』를 집필했다.4. 2. 목격자
본 사건으로부터 약 3년 후에 연속 사살 사건을 일으킨 나가야마 노리오는 당시 16세로, 시부야 총포상 근처의 청과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와 함께 이 사건의 소란을 목격했다. 나가야마가 사건을 보며 이상할 정도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는 "나가야마는 조금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3]또한, 사건 현장에는 많은 구경꾼이 몰렸는데, 그중에는 작가이자 훗날 도쿄도지사가 되는 이시하라 신타로도 있었다. 그는 사건 소식을 듣고 일부러 현장을 찾아왔으며, 다른 구경꾼이 총격으로 부상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사건 이후 청취 조사와 재판 방청을 거쳐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혐오의 저격자』를 집필했다.
참조
[1]
웹사이트
"''Ano Shikeishū no Saigo no Shunkan''"
http://bookweb.kinok[...]
Books Kinokuniya
2010-07-06
[2]
웹사이트
少年ライフル魔事件
http://www.alpha-net[...]
2008-03-19
[3]
서적
死刑囚 永山則夫
[4]
서적
明治・大正・昭和・平成 事件・犯罪大事典
東京法経学院出版
[5]
서적
死刑囚最後の瞬間
[6]
뉴스
"라이플 소년의 사형 확정 이유 없음 최고재판소가 상고 기각"
1974-10-02
[7]
웹인용
片桐操
http://x37.peps.jp/s[...]
2021-08-31
[8]
웹인용
【소년 라이플 마 사건】 당시 미성년의 片桐操가 일으킨 총격 사건이란?
https://www.kojitena[...]
2021-08-31
[9]
웹인용
少年ライフル魔事件
http://www.maroon.dt[...]
2021-08-31
[10]
웹인용
少年犯罪データベース 少年ライフル魔事件
http://kangaeru.s59.[...]
2021-08-31
[11]
웹인용
시부야 한복판에서 라이플 난사 「소년 라이플 마 사건」【충격의 미성년 사건부】 (2020년 9월 19일)
https://www.excite.c[...]
202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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㉝ 소년 라이플 마 片桐操|방황|note
https://note.com/sas[...]
202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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