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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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관요는 전한 선제 시대의 인물로, 경서에 밝아 관직에 진출하여 간대부, 사례교위 등을 역임했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청렴함으로 칭송받았으나, 잦은 탄핵과 직언으로 인해 미움을 받아 결국 선제의 미움을 사 자결했다. 그의 행적은 《한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후손이 있다고 전해진다.
갑관요는 강직한 성품과 높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잦은 탄핵으로 대신과 귀인들의 원한을 샀다. 선제에게 올린 상소문도 선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경우가 많았다.[1] 그럼에도 선제는 갑관요를 유학자로서 존중하여 어느 정도 봐주었으나, 더 이상 승진시키지 않았고 도리어 후배가 갑관요보다 높은 관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갑관요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반고의 《한서》 권8 선제기·권77 갑제갈유정손무장하전[1]
2. 생애
당시 선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지금 성인(聖人)의 도는 스러졌고, 유학(儒學)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죄인을 주공·소공의 지위에 앉히고, 법률이 《시경》·《서경》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제 시대에는 현인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삼왕(하·상·주) 시대에는 자손에게 천하를 물려주었습니다. 공적은 한 번 이루면 사라지는 것이고, 사람이 얻지 못하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라며 선제의 통치를 비판했다.[1]
今聖人之道衰, 儒術不行, 罪人置於周公之位, 法令代於詩書, 五帝以傳賢爲天下, 三王以傳子孫爲天下. 夫功成則有去, 人不得則無其位|지금 성인의 도는 스러졌고, 유학(儒學)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죄인을 주공의 지위에 앉히고, 법률이 《시경》·《서경》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제 시대에는 현인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삼왕(三王, 하·상·주) 시대에는 자손에게 천하를 물려주었습니다. 공적은 한 번 이루면 사라지는 것이고, 사람이 얻지 못하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중국어
선제는 갑관요가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여겨 대신들에게 판결을 내리게 하였다. 집금오 현[1]은 갑관요가 선양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여 대역죄라고 주장하였다. 간대부 정창은 갑관요의 충절을 생각하여 변호하였으나, 선제는 결국 갑관요를 체포하게 하였다. 갑관요는 북궐(北闕) 아래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람들은 이를 가엾게 여겼다.[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경서에 밝아 군의 문학(文學)이 되었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다. 이후 방정(方正)으로 선발되어 공적을 쌓아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낭중호장(郞中戶將, 광록훈의 속관)을 대행하던 때에 위장군 장안세와 그의 아들 장팽조를 탄핵하였는데, 무고로 밝혀져 위사마(衛司馬, 위위의 속관)로 좌천되었다.
당시 관행으로 위위는 위사마를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었는데, 위사마에 취임한 갑관요는 위위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이를 바로 상서(尙書)에 일러바쳤다. 상서에서는 위위를 문책하였고, 이 일로 관행은 없어졌다.
갑관요는 짧은 옷을 입고, 큰 관과 긴 칼을 차고 몸소 병사들의 숙소를 살펴보고, 환자가 있으면 직접 치료하는 등 위위 휘하의 병사들을 마음을 다하여 보살폈다. 당시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수천 명의 병사들이 선제에게 1년을 더 근무하게 해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이에 선제는 갑관요를 태중대부에 임명하고, 각지의 풍속을 감찰하는 사자로 보냈다. 갑관요는 책무를 다하여 사례교위로 승진하였다.
사례교위가 된 갑관요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 안건이 매우 많아 정위가 받아들인 것은 절반 정도였다. 대신과 귀인, 장안에 출장을 온 지방 관리들은 모두 갑관요의 탄핵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 하였다.
갑관요는 강직하고 높은 뜻을 품어,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급여의 절반을 관리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자식으로 하여금 일부러 북쪽 변경으로 병역을 보낼 만큼 청렴하였다. 하지만 탄핵을 자주 하여 대신과 귀인들의 원한을 많이 샀고, 선제에게 올린 상주문도 선제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많았다. 선제는 그래도 갑관요를 봐주었으나, 갑관요는 더 이상 승진하지 않았고 도리어 후배가 갑관요보다 높은 관직에 올랐다. 불만을 품은 갑관요는 수많은 상소를 올렸다.
2. 2. 위사마 시절의 일화
경서에 밝아 군의 문학(文學)이 되었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다. 이후 방정(方正)으로 선발되어 공적을 쌓아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낭중호장(郞中戶將, 광록훈의 속관)을 대행하던 때에 위장군 장안세와 그의 아들 장팽조를 탄핵하였는데, 무고로 밝혀져 위사마(衛司馬, 위위의 속관)로 좌천되었다.[1]
당시 위위는 관행적으로 위사마를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위위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이를 바로 상서(尙書)에 보고하였다. 상서에서는 위위를 문책하였고, 이 일로 관행은 없어졌다.[1]
갑관요는 짧은 옷을 입고, 큰 관과 긴 칼을 차고 몸소 병사들의 숙소를 살펴보고, 환자가 있으면 직접 치료하는 등 위위 휘하의 병사들을 마음을 다하여 보살폈다. 당시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수천 명의 병사들이 선제에게 1년을 더 근무하게 해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이에 선제는 갑관요를 태중대부에 임명하고, 각지의 풍속을 감찰하는 사자로 보냈다. 갑관요는 책무를 다하여 사례교위로 승진하였다.[1]
사례교위가 된 갑관요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 안건이 매우 많아 정위가 받아들인 것은 절반 정도였다. 대신과 귀인, 장안에 출장을 온 지방 관리들은 모두 갑관요의 탄핵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 하였다.[1]
외척 평은후 허광한(선제의 황후 허평군의 아버지)의 저택이 완공되어 입주할 때, 승상위상 이하 대신들은 모두 축하 모임에 참석했지만, 갑관요는 가지 않았다. 허광한이 특별히 부탁해서 가게 되었지만, 윗자리에 앉았다. 허광한이 술을 권하자 "저에게 너무 많이 마시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술에 취하면 이상해집니다"라고 말했다. 승상 위상은 "차공은 술에 취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습니까"라고 웃으며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눈짓하며 갑관요를 얕잡아보았다. 그 후, 장신소부 단장경이 원숭이와 개의 싸움을 춤으로 추었고, 모두 크게 웃었지만 갑관요는 기뻐하지 않고, 저택을 보며 "부귀는 곧 상대를 바꾼다. 조심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당신도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탄식하며 말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단장경을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원숭이 흉내를 낸 것은 불경하다며 탄핵했다. 선제는 단장경을 처벌하려 했지만, 허광한이 사죄했기 때문에 취소했다.[1]
갑관요는 강직하고 높은 뜻을 품어,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급여의 절반을 관리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자식으로 하여금 일부러 북쪽 변경으로 병역을 보낼 만큼 청렴하였다. 하지만 탄핵을 자주 하여 대신과 귀인들의 원한을 많이 샀고, 선제에게 올린 상주문도 선제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많았다. 선제는 그래도 갑관요를 봐주었으나, 갑관요는 더 이상 승진하지 않았고 도리어 후배가 갑관요보다 높은 관직에 올랐다. 불만을 품은 갑관요는 수많은 상소를 올렸다. 태자 서자 왕생은 그에게 자중을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1]
이때 선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이를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1]
선제는 갑관요가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여겨, 대신들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였다.[1]
집금오 현은 갑관요가 선양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여 대역죄라고 주장하였다. 간대부 정창은 갑관요의 충절을 생각하여 변호하였으나, 선제는 결국 갑관요를 체포하게 하였다. 갑관요는 북궐(北闕) 아래에서 칼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고, 사람들은 이를 가엾게 여겼다. 신작 2년(기원전 60년)의 일이다.[1]
2. 3. 사례교위 시절의 활동
경서에 밝아 군의 문학(文學)이 되었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다. 이후 방정(方正)으로 선발되어 공적을 쌓아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낭중호장(郞中戶將, 광록훈의 속관)을 대행하던 때에 위장군 장안세와 그의 아들 장팽조를 탄핵하였는데, 무고로 밝혀져서 위사마(衛司馬, 위위의 속관)로 좌천되었다.[1]
당시의 관행으로 위위는 위사마를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었는데, 위사마에 취임한 갑관요는 위위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이를 바로 상서(尙書)에 일러바쳤다. 상서에서는 위위를 문책하였고, 이 일로 관행은 없어졌다.[1]
갑관요는 짧은 옷을 입고, 큰 관과 긴 칼을 차고 몸소 병사들의 숙소를 살펴보고, 환자가 있으면 직접 치료하는 등 위위 휘하의 병사들을 마음을 다하여 보살폈다. 당시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수천 명의 병사들이 선제에게 1년을 더 근무하게 해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에 선제는 갑관요를 태중대부에 임명하고, 각지의 풍속을 감찰하는 사자로 보냈다. 갑관요는 책무를 다하여 사례교위로 승진하였다.[1]
사례교위가 된 갑관요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 안건이 매우 많아 정위가 받아들인 것은 절반 정도였다. 대신과 귀인, 장안에 출장을 온 지방 관리들은 모두 갑관요의 탄핵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 하였다.[1]
외척 평은후 허광한(선제의 황후 허평군의 아버지)의 저택이 완공되어 입주할 때, 승상위상 이하 대신들은 모두 축하 회에 참석했지만, 갑관요는 가지 않았다. 허광한이 특별히 부탁해서 가게 되었지만, 감히 윗자리에 앉았다. 허광한이 술을 권하자 "저에게 너무 많이 마시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술에 취하면 이상해집니다"라고 말했다. 승상 위상은 "차공은 술에 취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습니까"라고 웃으며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눈짓하며 갑관요를 얕잡아보았다. 그 후, 장신소부 단장경이 원숭이와 개의 싸움을 춤으로 추었고, 모두 크게 웃었지만 갑관요는 기뻐하지 않고, 저택을 보고 탄식하며 "부귀는 곧 상대를 바꾼다. 조심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 당신도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단장경을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원숭이 흉내를 낸 것은 불경하다며 탄핵했다. 선제는 단장경을 처벌하려 했지만, 허광한이 사죄했기 때문에 취소했다.
갑관요는 강직하고 높은 뜻을 품어,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급여의 절반을 관리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자식으로 하여금 일부러 북쪽 변경으로 병역을 보낼 만큼 청렴하였다. 하지만 탄핵을 자주 하여 대신과 귀인들의 원한을 많이 샀고, 선제에게 올린 상주문도 선제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많았다. 선제는 그래도 갑관요를 봐주었으나, 갑관요는 더 이상 승진하지 않았고 도리어 후배가 갑관요보다 높은 관직에 올랐다. 불만을 품은 갑관요는 수많은 상소를 올렸다. 태자 서자 왕생은 그에게 자중을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1]
이때 선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이를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1]
선제는 갑관요가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여겨, 대신들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였다.[1]
집금오 현[1]은 갑관요가 선양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여 대역죄라고 주장하였다. 간대부 정창은 갑관요의 충절을 생각하여 변호하였으나, 선제는 결국 갑관요를 체포하게 하였다. 갑관요는 북궐(北闕) 아래에서 칼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고, 사람들은 이를 가엾게 여겼다. 신작 2년(기원전 60년)의 일이다.[1]
2. 4. 강직한 성품과 청렴한 생활
경서에 밝았던 갑관요는 군의 문학(文學)이 되었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다. 이후 방정(方正)으로 선발되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 낭중호장(郞中戶將, 광록훈의 속관)을 대행하던 때에 위장군 장안세와 그의 아들 장팽조를 탄핵하였는데, 무고로 밝혀져 위사마(衛司馬, 위위의 속관)로 좌천되었다.[1]
당시 관행으로 위위는 위사마를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위위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자 이를 상서(尙書)에 보고하였다. 상서에서는 위위를 문책하였고, 이 일로 관행은 없어졌다.[1]
갑관요는 짧은 옷을 입고, 큰 관과 긴 칼을 차고 몸소 병사들의 숙소를 살펴보고, 환자가 있으면 직접 치료하는 등 위위 휘하의 병사들을 마음을 다하여 보살폈다. 당시 병사들의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수천 명의 병사들이 선제에게 1년을 더 근무하게 해달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에 선제는 갑관요를 태중대부에 임명하고, 각지의 풍속을 감찰하는 사자로 보냈다. 갑관요는 책무를 다하여 사례교위로 승진하였다.[1]
사례교위가 된 갑관요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탄핵하였다. 안건이 매우 많아 정위가 받아들인 것은 절반 정도였다. 대신과 귀인, 장안에 출장을 온 지방 관리들은 모두 갑관요의 탄핵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 하였다.[1]
갑관요는 강직하고 높은 뜻을 품어,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급여의 절반을 관리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자식으로 하여금 일부러 북쪽 변경으로 병역을 보낼 만큼 청렴하였다. 하지만 탄핵을 자주 하여 대신과 귀인들의 원한을 많이 샀고, 선제에게 올린 상주문도 선제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많았다. 선제는 그래도 갑관요를 봐주었으나, 갑관요는 더 이상 승진하지 않았고 도리어 후배가 갑관요보다 높은 관직에 올랐다. 불만을 품은 갑관요는 수많은 상소를 올렸다.[1]
이때 선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이를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1]
今聖人之道衰, 儒術不行, 罪人置於周公之位, 法令代於詩書, 五帝以傳賢爲天下, 三王以傳子孫爲天下. 夫功成則有去, 人不得則無其位|지금 성인의 도는 스러졌고, 유학(儒學)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죄인을 주공의 지위에 앉히고, 법률이 《시경》·《서경》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제 시대에는 현인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삼왕(三王, 하·상·주) 시대에는 자손에게 천하를 물려주었습니다. 공적은 한 번 이루면 사라지는 것이고, 사람이 얻지 못하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중국어
선제는 갑관요가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여겨, 대신들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였다.[1]
집금오 현[1]은 갑관요가 선양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여 대역죄라고 주장하였다. 간대부 정창은 갑관요의 충절을 생각하여 변호하였으나, 선제는 결국 갑관요를 체포하게 하였다. 갑관요는 북궐(北闕) 아래에서 칼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고, 사람들은 이를 가엾게 여겼다.[1]
2. 5. 몰락과 자결
갑관요는 강직한 성품과 높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잦은 탄핵으로 대신과 귀인들의 원한을 샀다. 선제에게 올린 상소문도 선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경우가 많았다.[1] 그럼에도 선제는 갑관요를 유학자로서 존중하여 어느 정도 봐주었으나, 더 이상 승진시키지 않았고 도리어 후배가 갑관요보다 높은 관직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갑관요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당시 선제는 환관을 중용하고 있었는데, 갑관요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지금 성인(聖人)의 도는 스러졌고, 유학(儒學)이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죄인을 주공·소공의 지위에 앉히고, 법률이 《시경》·《서경》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오제 시대에는 현인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삼왕(하·상·주) 시대에는 자손에게 천하를 물려주었습니다. 공적은 한 번 이루면 사라지는 것이고, 사람이 얻지 못하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라며 선제의 통치를 비판했다.
선제는 갑관요가 자신을 비방하였다고 여겨 대신들에게 판결을 내리게 하였다. 집금오 현[1]은 갑관요가 선양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여 대역죄라고 주장하였다. 간대부 정창은 갑관요의 충절을 생각하여 변호하였으나, 선제는 결국 갑관요를 체포하게 하였다. 갑관요는 북궐(北闕) 아래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람들은 이를 가엾게 여겼다.
3.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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