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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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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봉 포위전은 1230년부터 1233년까지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한 사건이다. 징기스칸 사후 오고타이 칸이 금나라 정복을 목표로 삼아 시작되었으며, 몽골군은 황하를 경계로 두 방향에서 개봉을 포위했다. 금나라는 화약 무기를 활용하여 저항했지만, 몽골군의 공세에 밀려 수도가 함락되었고, 금 황족들은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개봉 포위전 이후 금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몽골은 남송을 공격하여 몽골-송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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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몽골-금 전쟁
전쟁의 부분몽골의 금나라 정복
시기1232년 4월 8일 – 1233년 5월 29일
위치개봉, 중국 북부
결과몽골 제국의 승리
금 애종, 채주로 도주
교전 세력
교전 1금나라
교전 2몽골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금나라금 애종
최립 (몽골에 투항한 한족 장수)
몽골 제국수부타이
툴루이
오고데이 칸
(한족 장군)
병력 규모
금나라300,000명
몽골 제국15,000명
피해 규모
금나라거의 전멸,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음
몽골 제국매우 심각, 많은 몽골군 사상
관련 전투
전투 목록

2. 배경

오고타이 칸, 칭기즈 칸의 후계자


1206년 칭기즈 칸카간으로 선포된 후, 몽골 제국은 그의 지도 아래 통합되어 스텝 지역의 경쟁 부족들을 제압했다.[1] 당시 중국 본토는 세 왕조로 분열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여진족의 금(金)만주회하(淮河) 이북을, 탕구트족의 서하(西夏)는 중국 서부 일부를, 송(宋)은 남부를 통치했다.[2][3]

1210년 몽골은 서하를 복속시키고[4] 금나라에 대한 종속국 지위를 포기하면서 양국 간 적대감이 고조되었다.[4] 몽골은 금나라의 번영을 탐냈고, 암바가이 칸 암살과 완안영기(完顏永濟)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복수심도 품고 있었다.[5]

금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칭기즈 칸


몽골은 금나라에 기근이 발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6] 1211년 징기스칸의 지휘 아래 금나라를 침공했다.[7][8] 금나라는 군대를 증강하고 도시를 강화했지만, 몽골군은 주요 도시 대신 작은 정착지를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7] 1212년 약탈 후 퇴각했던[8] 몽골군은 1213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를 포위, 중도 전투를 벌였으나 성벽을 뚫지는 못하고 금나라 황제를 압박하여 조공을 받아냈다.[8]

1214년 몽골군이 철수한 후, 금나라는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開封)으로 이전했다. 1215년 몽골군은 다시 중도를 포위하여 함락시켰고,[9] 1216년에는 금나라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10]

한편, 금나라는 내부 반란에 직면했다.[11] 만주에서는 야율유가가 이끄는 거란족이 독립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고, 1213년 몽골의 괴뢰 군주로 요(遼) 황제가 되었다.[12] 포선만노가 이끄는 여진족 군대가 이들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포선만노는 1215년 동하를 건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3] 남쪽에서는 1214년 양안국의 반란을 시작으로 홍오군의 반란이 일어났다.[14]

1215년 중도 함락 이후 몽골은 중앙아시아 침공에 집중하면서 금나라에 대한 군사 활동을 축소했다.[10] 1217년 금나라는 송(宋)을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15] 1218년부터 금나라 외교관의 남송 방문이 금지되었다.[15]

몽골의 금나라 침공은 무칼리 지휘 하에 계속되었으나,[16] 1223년 무칼리의 사망으로 주춤했다. 금나라는 남송과 평화 조약을 맺었지만, 남송은 홍건적의 반란을 계속 지원했다.[17]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하고,[18] 오고타이(Ögedei)가 후계자가 되어[19] 1230년 금나라 침공을 재개했다.[20]

금 애종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한족 출신 장수 사천택이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포성(蒲城)에서 완안승예가 이끄는 8만 금군을 격파했다. 사천택은 아버지 사병직(史秉直)이 무칼리에게 귀순한 이후 몽골군의 한인(漢人) 만호(萬戶)를 이끌고 있었다.

1229년 새로 즉위한 오고타이 칸칭기즈 칸 사후에도 몽골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금나라 완전 정복을 첫 번째 대사업으로 내걸었다. 약화된 금나라는 황하 남안에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여 몽골군을 맞이하려 했다.

1232년 (천흥 원년) 봄, 몽골군은 3군으로 나뉘어 진격했다.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중앙군은 황하 북안에서 금군 주력을 붙잡아두었고, 툴루이가 이끄는 우익군은 남송 영토를 경유하여 남쪽에서 개봉으로 접근했다. 금나라는 주력군을 남쪽으로 보냈으나, 삼봉산에서의 결전에서 완패했다. 이 패배로 금나라는 야전에서 몽골군에 대항할 능력을 상실했고, 수도 개봉은 포위되었다.

2. 1. 몽골 제국의 발흥과 동아시아 정세

1206년, 징기스칸이 카간으로 선포되었다.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하고 스텝 지역의 경쟁 부족들을 정복했다.[1] 같은 시기 중국 본토는 세 개의 왕조로 나뉘어 있었다. 북쪽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金)만주회하(淮河) 이북을 다스렸다.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는 중국 서부 일부를, 송(宋)은 중국 남부를 차지했다.[2],[3] 1210년, 몽골은 서하를 복속시켰다.[4] 같은 해, 몽골은 금에 대한 복속을 포기했다.[4] 몽골과 금은 적대 관계가 되었다. 몽골은 금의 번영을 탐냈고, 징기스칸의 전임자 암바가이 칸 암살과 금 위소왕 완안영제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금에게 원한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5]

몽골은 금에 기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6] 1211년 금을 침공했다.[7] 징기스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8] 금은 군대를 갖추고 도시를 강화했지만, 몽골은 작은 거주지를 포위하고 대도시의 강화를 무시하는 전략을 폈다.[7] 1212년, 몽골은 약탈 후 후퇴했다.[8] 1213년, 다시 금의 수도 중도(中都)를 포위했다. 몽골은 중도 전투에서 성벽을 뚫지 못했지만, 금 황제를 협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8] 1214년, 몽골은 철군했다. 그해 금은 중도에서 개봉(開封)으로 수도를 옮겼다. 1215년, 금 조정이 개봉으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은 다시 중도를 포위, 함락시켰으며,[9] 1216년에는 금 영토 대부분을 지배했다.[10]

한편 금은 여러 반란에 시달렸다.[11] 만주에서는 야율유가가 이끄는 거란족이 독립,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 1213년 야율유가는 몽골에 복속된 요(遼) 황제가 되었다.[12] 포선만노가 지휘하는 여진 군대가 야율유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1215년, 포선만노는 반란을 일으켜 동하를 건국했다.[13] 산둥에서는 1214년 양안국의 반란을 시작으로 홍오군의 반란이 일어났다.[14] 1215년 중도 함락 이후 몽골은 금에 대한 공격을 줄이고 중앙아시아 침공에 집중했다.[10] 1217년, 금은 남송을 침공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남송과 화약을 맺으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1218년, 금의 사신은 남송 파견이 금지되었다.[15] 몽골의 금 침공은 무칼리가 지휘하였으나,[16] 1223년 무칼리가 병사하면서 중지되었다. 금은 남송과 화약을 맺었지만, 남송은 홍오군을 계속 지원했다.[17] 1227년, 징기스칸이 사망했다.[18] 오고타이가 후계자가 되었고,[19] 1230년 금 침공을 재개했다.[20]

2. 2. 몽골-금 전쟁의 전개



1206년, 징기스칸이 카간으로 선포되었다. 몽골은 그의 지도 아래 통일되었고, 스텝 지역의 경쟁 부족들을 물리쳤다.[1] 같은 시기에 중국 본토는 세 개의 왕조로 분열되어 있었다. 북쪽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金)만주회하(淮河) 이북의 중국 본토 전체를 지배했다.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는 중국 서부 지역을 다스렸고, 송(宋)은 남부를 다스렸다.[2][3] 몽골은 1210년에 서하를 복속시켰다.[4] 같은 해에 몽골은 금나라에 대한 종속국 지위를 포기했다.[4] 금나라와 몽골 간의 적대 행위는 고조되고 있었다. 몽골은 금나라 영토의 번영을 탐냈고, 암바가이 칸을 암살한 것과 금나라 황제 완안영기(完顏永濟)가 징기스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에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다.[5]

몽골은 금나라에 기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6] 1211년에 침략했다.[7] 몽골은 금나라 영토에 두 개의 군대를 파견했고, 그 중 하나는 징기스칸 자신이 지휘했다.[8] 금나라는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대를 증강하고 도시를 강화했다. 몽골의 전략은 주요 도시의 요새를 무시하고 작은 정착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7] 1212년에 그들은 토지를 약탈하고 물러났다.[8] 몽골은 이듬해에 돌아와 1213년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를 포위했다. 몽골은 중도 전투에서 도시의 성벽을 돌파하지 못했지만, 금나라 황제를 위협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8] 그들은 1214년에 철수했다. 그해 말, 또 다른 포위를 두려워한 금나라는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開封)으로 옮겼다. 몽골은 금나라 조정이 도시에서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된 후 1215년에 다시 중도를 포위했다. 1215년 5월 31일에 도시가 함락되었고,[9] 1216년까지 금나라 영토의 상당 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0]

한편, 금나라는 여러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11] 만주에서는 야율유가를 중심으로 한 거란족이 금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 야율유가는 1213년에 몽골에 종속된 괴뢰 군주로 즉위하여 요(遼)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12] 그를 상대로 파견된 여진족 원정대는 포선만노가 지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포선만노는 금나라가 붕괴 직전에 있음을 깨닫고 반란을 일으켜 1215년에 동하의 왕을 자칭했다.[13] 더 남쪽에서는 1214년 양안국의 반란을 시작으로 산둥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1215년부터 입었던 제복의 색깔 때문에 홍오군(紅袄軍)으로 알려졌다.[14] 1215년 중도의 함락 이후, 몽골은 금나라에 대한 전쟁 노력을 축소하고 중앙아시아 침략을 위한 자원 배분에 나섰다.[10] 금나라는 1217년 송(宋)나라를 침략하여 몽골에 대한 영토 손실을 만회하려 했다.[15] 침략은 결실을 맺지 못했고, 금나라는 평화를 위한 협상을 원했지만, 송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1218년까지 여진족 외교관은 송나라로의 여행이 금지되었다.[15] 몽골의 금나라 전쟁은 잦아들었지만 중단되지 않았고, 장군 무칼리의 지휘 아래 122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16] 무칼리는 1223년 질병으로 사망했고,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잦아들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평화를 정착했지만, 송나라는 금나라에 대항하는 홍건적의 반란을 계속 지원했다.[17] 칭기즈 칸은 1227년에 병에 걸려 사망했다.[18] 오고타이(Ögedei)가 그의 후계자였고,[19] 1230년에 금나라에 대한 전쟁을 재개했다.[20]

금 애종이 후퇴하면서 한족 장수 사천택은 군대를 이끌고 쫓았고, 포성(蒲城)에서 완안승예가 이끄는 8만 금군을 무찔렀다. 사천택은 그의 아버지 사병직(史秉直)이 무칼리의 몽골군에게 귀순한 이래, 몽골군의 한인(漢人) 만호(萬戶)를 이끌고 있었다.

1229년에 새로 즉위한 오고타이 칸은 카리스마 넘치는 칭기즈 칸의 사후에도 몽골 제국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즉위 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금나라의 완전 정복을 내걸었다. 한편, 금나라는 약화되었지만, 영토가 감소하면서 오히려 견고한 방어망을 황하 남안에 구축하고 이를 맞이하려 했다.

1232년 (천흥 원년) 봄, 전군을 3군으로 나눈 몽골군은 오고타이 칸이 직접 이끄는 중앙군이 황하 북안에서 금군 주력을 붙잡아두는 동안, 우익군을 이끄는 툴루이가 남송 영토를 경유하여 남쪽에서 개봉에 접근했다. 당황한 금나라는 주력군을 남쪽으로 보냈지만, 삼봉산에서의 결전에서 완패를 당했다. 삼봉산에서의 패배로 인해 금나라는 더 이상 야전에서 몽골군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도인 개봉은 몽골군의 포위를 받게 되었다.

3. 개봉 포위전의 전개

1211년 금과 몽골 전투, 자미 알타와리크


1230년, 몽골의 두 부대가 금나라의 수도 변경(개봉)을 포위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에서 공격해왔다. 오고타이 칸산시성 방면 부대를 지휘했고, 툴루이는 섬서성 방면 부대를 이끌었다.[41] 그러나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병에 걸려 지휘권을 내려놓았다. 오고타이는 회복했지만 툴루이는 1231년에 사망했다.[42] 1231년 말에서 1232년 초, 두 부대가 합쳐지면서 수부타이가 지휘를 맡았다. 몽골군은 1232년 1월 28일 황하에 도착했고, 2월 6일 개봉 주변에 집결하여 4월 8일 도시를 포위했다.[43]

여진족은 화의를 맺어 포위를 풀려고 했다. 1232년 여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지만 금나라가 몽골 사신 당경(唐慶)을 암살하면서 실패했다. 금나라는 자포자기 상태로 개봉을 지키거나 전선에서 몽골군과 싸울 사람들을 모집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염병이 개봉을 휩쓸었고, 기근도 심각했다. 보급품과 강제 몰수한 물자도 바닥났다. 개봉의 정치적 분열은 근거 없는 내란의 공포를 야기했고, 일부 주민은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43]

금나라의 방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아 함락되기 전까지 수개월을 버텼다. 그러나 1232년 말, 금나라 황제는 탈출 기회를 얻어 조정 관료와 함께 개봉을 떠났다. 황제는 최립에게 개봉 통치권을 주었고, 1233년 8월 3일 허난성 귀덕부(歸德府)에 도착했다.[44] 황제의 도주는 방어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45] 황제가 탈출한 사실이 알려지자 최립은 개봉에 남은 황제의 충신들을 처형했다. 최립은 농성을 계속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판단, 몽골에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5월 29일, 최립은 개봉 성문을 열고 몽골군을 성 안으로 들였다.[44] 최립은 이후 전투가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모욕한 일로 싸움이 벌어져 살해당했다.

몽골군은 개봉이 함락되자 도시를 약탈했지만, 당시 일반적인 포위와는 달리 교역을 허용했다. 개봉의 부자들은 사치품을 몽골군에게 팔아 식량을 구매했다. 개봉에 거주하던 황족 남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43] 인성황후 등 비빈 전부는 생포되어 북쪽으로 끌려갔다.[41]

툴루이 군과 오고타이 군은 금나라 주력을 격파한 후 정주 부근에서 합류했지만, 대세가 결정되었기에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잔류 부대를 남겨두고 몽골 고원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6][7] 이때 개봉 포위를 위해 수부타이, 구유크, 테무데이, 타가차르 등 4명의 장군이 선발되었다.[8] 이들은 각각 무칼리와 보로쿠르를 염두에 둔 임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몽골 측은 무력 정복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1233년 3월 오고데이는 정주에서 사자를 파견해 항복을 권유하며, 투항 조건으로 공자의 후손 등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이나 황족의 인질 인도를 요구했다.[10] 금나라는 며칠 후 일부 조건을 받아들여 조왕 악가(애종의 형인 형왕 반도의 아들)를 인질로 보냈고, 양국은 일시적으로 정전 상태에 들어갔다.[11][12] 그러나 몽골이 요구한 황제 호칭 폐지 조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같은 해 7월 오고데이는 다시 사자 당경을 파견했다.[12] 그런데 당경은 금나라 황제에게 제호 폐지를 강하게 압박하다 그날 밤 금나라 조정 신하에게 살해당했다. 그해 8월, 애종의 원군 요청을 받은 완안사열·환산공 무선 등이 2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개봉으로 접근했지만 정주 서쪽 전투에서 패배했다.[13][14]

1233년 정월 22일, 개봉 서부 수비 지휘관이었던 최립은 혼란스러운 성 안을 보고 쿠데타를 일으켜 완안노신, 습열아불을 살해하고 태후, 황족을 감금하여 국도 전권을 장악했다.[15] 하지만, 개봉이 몽골에게 쫓기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고, 같은 해 4월 18일 최립은 금나라 황족 500여 명을 붙잡아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군에게 바쳤고,[16] 개봉은 함락되었다.[17]

개봉성 안에 머물면서 농성전을 체험한 문인 원호문은 포위전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특히 "임진 12월 거가 동수 후 즉사 오수"는 애종의 개봉 탈출(차가 동수)에서 개봉 함락에 이르기까지를 읊은 원호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19]

3. 1. 몽골군의 포위 전략



1230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수도이자 당시 변경으로 불리던 개봉을 함락시키기 위해 두 개의 군대를 파견했다. 한 군대는 북쪽에서, 다른 군대는 남쪽에서 도시를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오고타이 칸산시성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었고, 그의 형제인 툴루이는 산시성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했다.[41]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질병으로 인해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이 작전에서 물러났다. 오고타이는 후에 건강을 회복했지만, 툴루이는 다음 해에 사망했다.[42] 수부타이는 두 군대가 1231년 말과 1232년 초에 합류하자 몽골 연합군을 이끌었다. 몽골군은 1232년 1월 28일에 황하에 도달했고, 2월 6일에 개봉 주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4월 8일에 도시를 포위했다.[43]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군이 개봉을 포위하자, 그동안의 전투에서 다수의 피난민이 유입된 개봉성 안은 순식간에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400만에서 500만으로 추정되는 성민들이 인육을 먹는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7]

금나라 측의 잦은 배신에 분노한 수부타이는 다시 개봉을 포위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애종은 개봉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12월 12일에 황후조차 데려가지 않은 채 측근들과 함께 개봉에서 도망쳤다.[14]

3. 2. 금나라의 저항과 내부 상황

1230년, 몽골의 두 부대가 금나라의 수도 변경(개봉)을 포위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에서 공격해왔다. 오고타이 칸산시성 방면 부대를 지휘했고, 툴루이는 섬서성 방면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병에 걸려 지휘권을 내려놓았다. 오고타이는 회복했지만 툴루이는 1231년에 사망했다. 1231년 말에서 1232년 초, 두 부대가 합쳐지면서 수부타이가 지휘를 맡았다. 몽골군은 1232년 1월 28일 황하에 도착했고, 2월 6일 개봉 주변에 집결하여 4월 8일 도시를 포위했다.

여진족은 화의를 맺어 포위를 풀려고 했다. 1232년 여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지만 금나라가 몽골 사신 당경(唐慶)을 암살하면서 실패했다. 금나라는 자포자기 상태로 개봉을 지키거나 전선에서 몽골군과 싸울 사람들을 모집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염병이 개봉을 휩쓸었고, 기근도 심각했다. 보급품과 강제 몰수한 물자도 바닥났다. 개봉의 정치적 분열은 근거 없는 내란의 공포를 야기했고, 일부 주민은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을 포위하자, 전투로 인해 많은 피난민이 유입된 개봉성 안은 순식간에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400만에서 5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백성들이 인육을 먹는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7] 몽골 측은 무력 정복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같은 해 3월 오고데이는 정주에서 사자를 파견해 항복을 권유하며, 투항 조건으로 공자의 후손 등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이나 황족의 인질 인도를 요구했다.[10] 금나라는 며칠 후 일부 조건을 받아들여 조왕 악가(애종의 형인 형왕 반도의 아들)를 인질로 보냈고, 양국은 일시적으로 정전 상태에 들어갔다. 수부타이는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하남에 주둔했다.[11][12]

금나라 측의 잦은 배신에 분노한 수부타이는 다시 개봉을 포위하려 했지만, 애종은 먼저 개봉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12월 12일에 황후조차 데려가지 않은 채 측근들과 함께 개봉에서 도망쳤다.[14]

3. 3. 몽골군의 함락과 약탈

1230년, 몽골군은 금나라의 수도인 변경(개봉)을 함락시키기 위해 두 부대를 파견했다. 한 부대는 북쪽에서, 다른 부대는 남쪽에서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오고타이 칸산시성의 부대를 지휘했고, 툴루이는 산시성의 부대를 지휘했다.[6][7] 그러나 오고타이와 툴루이는 병에 걸려 지휘권을 내려놓았다. 오고타이는 회복했지만 툴루이는 1231년에 사망했다. 1231년 말에서 1232년 초, 두 부대가 합쳐지면서 수부타이가 지휘를 맡았다. 몽골군은 1232년 1월 28일 황하에 도착했고, 2월 6일 개봉 주변에 집결하여 4월 8일 도시를 포위했다.

여진족은 평화 조약을 맺어 포위를 풀려고 했다. 1232년 여름,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지만 금나라가 몽골 사신 당경(唐慶)을 암살하면서 실패했다. 금나라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개봉을 지키거나 전선에서 몽골군과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염병이 개봉을 휩쓸었고, 기근도 만연했다. 보급품은 떨어졌고, 사람들에게서 강제로 몰수한 물품도 바닥났다. 개봉의 정치적 분열은 근거 없는 내란의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일부 주민은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방어는 금방 무너지지 않았다. 금나라는 함락 전까지 수개월 동안 버텼다. 1232년 말, 금나라 황제는 탈출 기회를 얻어 조정 관료와 함께 개봉을 떠났다. 황제는 최립에게 개봉 통치권을 넘겨주고, 1233년 8월 3일 허난성 귀덕부(歸德府)에 도착했다. 황제의 도주는 방어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황제가 탈출한 사실이 알려지자, 최립은 개봉에 남은 황제의 충신들을 처형했다. 최립은 농성을 계속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판단하여 몽골에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5월 29일, 최립은 개봉 성문을 열고 몽골군을 성 안으로 들였다. 최립은 전투가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모욕한 일로 싸움이 벌어져 살해당했다.

몽골군은 개봉이 함락되자 도시를 약탈했지만, 당시 일반적인 포위와는 달리 교역을 허용했다. 개봉의 부자들은 사치품을 몽골군에게 팔아 식량을 구매했다.

개봉에 거주하던 황족 남성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41] 인성황후 등 비빈 전부는 생포되어 북쪽으로 끌려갔다.

4. 군사 기술

개봉 포위전은 군사 기술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데, 포위된 금나라 관리가 남긴 상세한 기록 덕분에 많은 정보가 전해지고 있다.[41]

몽골군은 쇠뇌에 큰 돌이나 화약 폭탄을 장전하여 금의 요새에 발사했다.[41] 이 포격은 개봉성 내 사상자 발생에 영향을 주었고, 투석기 발사 군인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

금나라의 한 관리는 몽골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쇠사슬에 매달아 내린 벼락 폭탄이 큰 피해를 입혔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 1. 화약 무기의 사용

금군은 투석기를 이용해 몽골군에게 폭발물을 쏘았다. 폭탄 발사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군인이 도화선에 점화한다. 투석기 줄이 당겨지고 폭탄이 공중에 던져진다. 폭탄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큰 폭발을 일으켜 갑옷을 뚫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힌다. 폭발은 전장 풀밭에 불을 붙이기도 했기에, 폭발에 살아남은 군인도 불에 타 죽기도 했다.[41] 폭탄은 현대 폭발물보다 원시적인 것이었으며 때로는 폭발하지 않거나 너무 일찍 폭발했다. 몽골군은 개봉성 방향으로 난 해자를 파서 폭탄 공격에 대항하였고, 소가죽으로 방패를 만들어 덮어서 머리 위 폭탄 공격을 막았다.[41]

금의 보병은 화창을 장착했다.[41] 화창은 화약 튜브가 장착된 창이었다.[41] 황, 숯, 초석이라는 화약 기본 재료 이외에도 갈은 도자기 가루와 쇳가루가 첨가되었다.[41] 화창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은 3미터까지 나왔다.[41] 전투 중에 화창을 점화하는 부싯깃(tinder)은 철상자에 저장되어 병사가 날랐다.[41] 화약이 한번 사용되면 화창은 일반 창처럼 사용될 수 있거나 화약을 채운 튜브로 재장착될 수 있었다.[41]

금의 폭탄과 화창은 몽골군이 맞서는데 두려워했던 유일한 무기였다. 금군이 화약을 활용한 것은 광범위하였지만, 이전에 몽골군이 금군에게 화약을 획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프랭크는 양측 무기고에 화약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41] 턴불은 금군만이 화약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몽골군은 쇠뇌에 큰 돌이나 화약 폭탄을 장전했으며, 이를 금의 요새에 발사했다.[41] 포격은 개봉성내 사상자에 영향을 주었고, 투석기 발사 군인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

4. 2. 몽골과 금의 전술



개봉 포위전에서 몽골군과 금군은 모두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사용했다.

금군은 투석기를 이용해 몽골군에게 폭발물을 쏘았다. 이 폭탄은 현대 폭발물보다 원시적이었지만, 땅에 떨어지면 큰 폭발을 일으켜 갑옷을 뚫을 정도였다. 폭발로 인해 전장에 불이 붙으면 폭발에서 살아남은 병사도 불에 타 죽을 수 있었다. 몽골군은 해자를 파고 소가죽 방패를 만들어 폭탄 공격에 대응했다. 금의 한 관리는 몽골군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쇠사슬에 매달아 내린 벼락 폭탄이 큰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했다.

금군은 화창(火槍)이라는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 화창은 창에 화약 튜브를 부착한 것으로, 황, 숯, 초석 외에도 갈은 도자기 가루와 쇠줄밥이 첨가되어 3미터까지 불꽃을 뿜었다. 병사들은 화창 점화용 부싯깃을 철 상자에 보관했고, 화약이 떨어지면 일반 창으로 사용하거나 화약을 다시 채웠다.

몽골군은 쇠뇌에 큰 돌이나 화약 폭탄을 장전하여 금의 요새에 발사했다. 이 공격은 개봉성 내 사상자를 냈고, 투석기 발사 군인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 금의 폭탄과 화창은 몽골군이 두려워했던 주요 무기였다.

5. 역사적 중요성

개봉 포위전은 금나라를 쇠약하게 만들었지만,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이후 몽골의 남송 원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4]애종은 포위전에서 탈출했지만, 이후 궁핍한 상황에 놓였다. 그는 남송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남송은 이를 거절하고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 이는 훗날 몽골의 남송 침공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5. 1. 금나라의 멸망

개봉 포위전은 금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금 애종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나, 이후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애종은 남송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사신은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남송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지원을 호소했다.[1] 그러나 남송은 이를 거절했다. 남송은 과거 수십 년 전 화북 지방을 침략했던 여진족에게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고,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상황이었다.[2] 남송은 금나라 대신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3][4] 남송은 몽골과 군사적으로 협력하여 금나라가 마지막으로 지배하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1233년 12월, 몽골군은 애종이 개봉에서 도망쳐 온 채주를 포위했다. 채주 함락전에서 애종은 포위된 채주를 탈출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1234년 2월 9일, 몽골군은 채주 방어선을 돌파했다. 애종이 후계자로 지목한 금 말제는 채주에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 중에 사망했다.[5] 말제의 재위 기간은 2월 9일부터 2월 10일까지 채 이틀이 되지 않았다.[6] 채주 함락과 함께 금나라는 멸망했다.[7]

금나라 멸망 1년 후, 애종이 예언한 대로 몽골의 남송 원정이 시작되었다.

5. 2. 몽골 제국의 팽창과 영향

개봉 포위전은 금나라를 쇠약하게 만들었지만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종은 포위에서 벗어나 도망쳤으나, 이후 궁핍한 상황에 놓였다. 애종은 남송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외교관을 보냈는데, 이들은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남송을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물자를 요청했다.[4] 그러나 남송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금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던 남송은 수십 년 전 여진족이 중국 북부를 정복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5] 남송은 금나라를 돕는 대신 몽골과 동맹을 맺었고,[6][4] 군사적으로 협력하여 금나라가 여전히 통제하고 있던 마지막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1233년 12월, 몽골은 애종이 개봉에서 도망쳐 온 채주를 포위했다. 애종은 포위된 도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1234년 2월 9일, 몽골은 채주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애종의 후계자인 모황제는 채주에 있다가 전투 중에 사망했다.[4] 그의 재위 기간은 2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다.[7] 금나라는 채주의 함락과 함께 멸망했다.[8]

금나라가 멸망한 지 1년 후, 애종이 예측했던 대로 몽골의 남송 정복이 시작되었다.

5. 3. 인물들의 운명과 일화

개봉 포위전에는 원호문 등 훗날 문인으로 이름을 떨치는 금나라 유신들이 많이 연루되어 있으며,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야율초재의 형인 야율선재는 금나라에서 오랫동안 섬겨 고관에 이르렀다.[20] 이 전쟁에서 오고타이 곁에서 모시던 야율초재는 개봉 포위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자를 보내 야율선재와 야율변재 형제가 이끄는 자신의 일족을 구출하려 했다.[21]

그러나 오랫동안 금나라에 봉사해 온 야율선재는 이를 외면하고 몽골에 항복할 수 없었고, 애종을 알현하고 이대로 개봉에 남아 죽고 싶다고 말했다.[22] 그러나 이를 받아들인 애종은 몽골과의 강화 교섭 사절에 야율선재를 포함시킬 생각임을 밝히며, 은연중에 야율선재가 무사히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23] 이러한 두터운 배려를 받은 야율선재는 그저 묵묵히 눈물을 흘렸고, 애종 또한 이를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24]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선재는 내성의 해자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25]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준 애종에게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한 것이며, 야율선재의 금나라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명하려 했던 야율초재에 대한 거부였다고 평가된다.[26]

1233년 정월,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 최립은 성내의 왕약허와 원호문 등 저명한 문인들에게 명하여 자신을 칭송하는 공덕비를 작성하도록 하였다.[27][28] 그러나 왕약허와 원호문 등은 찬탈자에게 아첨했다는 후세의 비판을 두려워하여 이를 기피했고, 최종적으로 태학생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유기와 마혁이 撰文을 맡게 되었다.[27] 이 撰文에는 원호문의 서문이 더해진 후, 북송 휘종 시대에 세워진 '감로의 비'를 깎아 새기기로 했으나, 이 직후 몽골군이 입성하면서 그 귀추는 불분명해졌다.[29]

개봉 개성 후, 각지를 전전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귀잠지』를 집필한 유기는 그 속에서 자신에게 최립의 공덕비 撰文을 떠맡겼다며 왕약허와 원호문을 통렬하게 비판한다.[30] 한편, 원호문도 본 사건에 관한 문서를 작성하여 자신이 공덕비 건립에 관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타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이었다고 변명했다.[31] 유기를 "撰文으로 은상을 받으면서 撰文의 죄를 나(원호문)에게 뒤집어씌웠다"라며 암암리에 비판하며, "어느 쪽이 옳은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라고 하였다.[32] 이 사건은 관련된 문인들이 후세의 규탄을 가장 두려워하여 자기 변호에 힘쓴 결과, 각자에게 씁쓸한 경험을 남기게 되었다.

몽골사 연구자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원호문의 제자인 호경의 "또한 홀로 죄를 묻지 말라, 원유산(유산은 원호문의 호)"이라는 시를 인용한 후, "금나라 멸망의 수렁 속에서는 누구든 부득이하게 고충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때로는 뜻밖의 운명을 짊어졌다"라고 평했다.[33]

1233년 4월 19일, 최립이 몽골에 개봉을 항복한 지 3일 후인 4월 22일, 원호문은 야율초재에게 서신을 보내 공원조(공자의 후손)를 비롯한 개봉 성 안에 남은 문인들의 구명을 간청했다.[18] 1232년 3월에 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금나라 조정에 사자를 파견하여 공원조 이하 27명의 문인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요구를 염두에 두고 구명 간청을 한 것으로 보인다.[34]

원호문의 간청을 받은 야율초재가 공원조 등 많은 문인을 구했다고 칭송받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실태가 다소 복잡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35] "야율초재에 의해 구원받았다"고 여겨지는 공원조는 스스로 세운 비석에서 "야율초재의 주청을 받았다"고 언급하면서도, 개봉 함락 후 원호문 등과 마찬가지로 박주로 연행되었으며, 이후 실제로 자신을 보호한 것은 산동 지방의 대군벌인 엄실이었다고 말한다.[36] 몽골 제국은 어떤 지역을 정복했을 때 먼저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그 조사 결과에 따라 원정에 공이 있는 여러 왕과 공신들에게 정복민을 분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투하 제도). 공원조·원호문 등 개봉에서의 항복민이 박주로 연행된 것도 인구 조사 및 분배를 위해서였으며, 공원조 등 사대부에게는 오히려 몽골 제후에게 분배되어 일반 호와 마찬가지로 과세 대상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37]

이에 공원조는 몽골의 화북 지배의 중심지인 연경으로 직접 찾아가 연경 대단사관 야율전산에게 공자·안씨·맹자의 일족을 면세 대상에 포함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38] 공원조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점은 야율초재를 여러 번 언급하면서도 초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최종적으로 공자 일족을 면세 대상에 포함하는 것을 인가한 야율전산(야율아해의 일족으로 추정)이 현실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39] 야율초재를 칭찬하는 전기에서도 이때 초재가 구원한 것은 "명유 수배"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개봉 성 안의 문인 보호에 초재가 수행한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40]

6. 몽골의 황족 대우 비교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는 몽골의 원나라금나라의 여진족 완안(完顏) 황족을 가혹하게 대하고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지만, 한족 남송 조(趙)씨 황족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송 시기 여진인들이 정강지변에서 휘종과 흠종을 생포하여 만주로 데려간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42]

몽골은 남송 공제와 그의 어머니를 살려주고, 임안성 주민들과 관리들을 그대로 두었으며, 남송 궁녀 대신 한족 궁정 예술가들을 궁녀들과 결혼시켰다.[42] 쿠빌라이 칸남송 공제에게 몽골 공주를 아내로 주었고, 둘 사이에는 아들 조완보가 태어났다.[43][44]

칭기즈 칸은 중도 포위전에서 완안영제의 딸 기국공주를 강제로 첩으로 삼았다.[45] 반면, 1233년 개봉 포위전에서는 몽골군과 몽골에 투항한 한족이 완안씨 남성 황족을 도륙하고, 여성 황족을 전리품으로 몽골로 데려갔다.[41]

6. 1. 금나라 황족에 대한 가혹한 대우

역사학자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는 몽골의 원나라가 여진의 완안(完顏) 황족을 가혹하게 대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42] 1233년 개봉 포위전에서 몽골군과 몽골에 투항한 한족은 완안씨 남성 황족을 도륙했고, 금 황제의 비빈과 공주를 포함한 여성 황족은 전리품으로서 몽골로 데려갔다.[41]

6. 2. 남송 황족에 대한 관대한 대우

역사학자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는 몽골의 원(元)이 여진족 완안(完顏) 황족을 가혹하게 대하고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몽골은 한족 남송 조(趙)씨 황족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는데, 이는 북송(北宋) 시기 여진인들이 정강지변(靖康之變)에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생포하여 만주로 데려간 것과는 달랐다.[42] 몽골군은 남송 공제(南宋恭帝)와 그의 어머니처럼 수도 임안(臨安) 내 황족들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임안성 주민들도 살려주었으며 임안성도 약탈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상에 복귀하게 하고 남송 관료도 그대로 재임용했다. 몽골군은 남송 궁녀를 약취하지 않았고, 상도(上都)에 복무하던 한족 궁정 예술가들을 궁녀들과 결혼시켰다.[42] 쿠빌라이 칸(Kublai Khan)은 보르지긴(Borjigin) 씨의 몽골 공주를 공제의 아내로 주기도 했고, 이들 사이에는 조완보(趙完普)라는 아들도 낳았다.[43][44]

참조

[1] 서적 金史
[2] 서적 State Power in China, 900-1325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22-03-15
[3] 서적 Buddhist Encounters and Identities Across East Asia BRILL 2018
[4] 서적 The Successors of Genghis Khan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5]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6] 문서 聖武親征録
[7] 서적 2021
[8] 서적 1987
[9] 서적 1996
[10] 서적 1998
[11] 문서 聖武親征録
[12] 서적 1998
[13] 문서 聖武親征録
[14] 서적 2021
[15] 인용 2021
[16] 서적 2021
[17] 문서 聖武親征録
[18] 서적 2021
[19] 서적 2021
[20] 서적 1996
[21] 서적 1996
[22] 서적 1996
[23] 서적 1996
[24] 서적 1996
[25] 문서 遺山先生文集
[26] 서적 1996
[27] 서적 1996
[28] 서적 2021
[29] 서적 2021
[30] 서적 2021
[31] 서적 2021
[32] 서적 2021
[33] 서적 1996
[34] 인용 2021
[35] 서적 2021
[36] 페이지
[37] 페이지
[38] 페이지
[39] 페이지
[40] 페이지
[41] 서적 金史
[42] 서적 State Power in China, 900-1325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22-03-15
[43] 서적 Buddhist Encounters and Identities Across East Asia BRILL 2018
[44] 서적 The Successors of Genghis Khan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1
[45]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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