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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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하르트 키텔은 독일의 신약성경 및 복음주의 신학 교수로, 유대인을 독일, 기독교, 유럽 문화의 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독일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 추방 등을 주장했다.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 유대인 문제 연구 부서에서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점령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지만, 나치 협력 혐의로 비판을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신약성서 신학 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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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베테는 독일계 미국인 이론 물리학자로, 항성 내부 핵융합 반응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후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을 옹호하며 현대 물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 사전 편찬자 - 이쿠타 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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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키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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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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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게르하르트 키텔 |
출생 | 1888년 9월 23일 |
출생지 | 브로츠와프, 프로이센, 독일 제국 |
사망 | 1948년 7월 11일 (59세) |
사망지 | 튀빙겐, 독일 |
배우자 | 1914년, 하나 운터마이어와 결혼 |
부모 | 루돌프 키텔 |
학력 및 경력 | |
모교 | 킬 대학교 |
학위 논문 제목 | 솔로몬의 송가, 수정되었는가 아니면 통일되었는가 |
학위 논문 년도 | 1912년 |
학문 분야 | 성서 연구 신학 |
세부 학문 분야 | 신약성서 연구 |
직장 | 튀빙겐 대학교 |
영향을 준 인물 | |
주요 저서 | (신약성서 신학 사전)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나치당 |
형사 고발 | |
범죄 혐의 | 불명 |
형벌 | 불명 |
범죄 상태 | 불명 |
2. 생애
게르하르트 키텔은 1888년 9월 23일 브레슬라우에서 구약 학자인 루돌프 키텔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한나 운터마이어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933년 5월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이는 그의 삶과 학문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5월, 키텔은 프랑스 점령군에 의해 체포되어 발링겐에 구금되었고 교수직에서도 해임되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나치의 반유대주의 선전과는 다르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나치 협력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1946년 재판을 앞두고 석방되었지만, 1948년까지 튀빙겐으로 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보이론에서 목사( Seelsorger|제엘조르거deu )로 활동했다. 1948년 튀빙겐 복귀가 허용되었으나, 그에 대한 형사 절차가 재개되기 전인 그 해 7월 11일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키텔은 1888년 9월 23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약 학자인 루돌프 키텔의 아들이었다. 1914년 한나 운터마이어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2. 2. 나치당 입당과 활동
1933년 5월, 게르하르트 키텔은 나치당에 입당했다. 이전까지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었던 그는 나치당을 "기독교적이고 도덕적인 기반을 둔 민족주의적 갱신 운동"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튀빙겐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 및 신약성경 교수로서, 그는 유대인을 독일, 기독교, 그리고 유럽 문화 전반의 역사적 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특히 1933년 6월에 진행한 Die Judenfrage|디 유덴프라게de(''유대인 문제'')라는 제목의 강의는 곧 출판되었는데, 이 강의에서 그는 독일 내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의학, 법학, 교육, 언론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며, 비유대인과의 결혼이나 성관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 정부가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의 시민권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기 2년 전에 이미 제기된 주장이었다.
키텔은 발터 프랑크와 가까운 친구 관계였으며, 1935년 프랑크가 독일 신역사 연구소|라이히스인스티투트 퓌어 게쉬히테 데스 노이엔 도이칠란츠de를 설립하자 이에 합류했다. 그는 이 연구소 산하의 Forschungsabteilung Judenfrage|포어슝스압타일룽 유덴프라게de(유대인 문제 연구 부서)에서 활동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는 빈 대학교에서 복음주의 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튀빙겐 대학교 교수 자리는 오토 미셸(Otto Michel)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1943년 3월, 키텔은 빈 대학교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갑작스럽게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 교수 자리로 복귀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오토 미셸은 국방군에 말단 병사로 징집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 윌리엄 올브라이트는 키텔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1943년까지 이어진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그의 끔찍하고 악의적인 공격을 고려할 때, 게르하르트 키텔은 다른 어떤 기독교 신학자보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에 기여한 죄책감을 져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5월 3일,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 키텔은 프랑스 점령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후 직위에서 해임되어 발링겐에 구금되었다. 키텔은 자신의 변호에서 그의 연구가 "방법론적으로 과학적"이며 기독교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으며, 일부에게는 반유대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데어 슈튀르머''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같은 "나치 선전의 저속한 반유대주의"와 구별하려고 시도했다. 로젠베르크는 반기독교적 수사, ''민족주의'' 논쟁, 그리고 ''레벤스라움''에 대한 강조로 유명했다. 키텔은 자신의 연구를 "유대인과 유대인 문제에 맞서 씨름하려는 시도"라고 특징지었다.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 마르틴 디벨리우스는 키텔의 고대 유대교 관련 연구는 "순수한 과학적 성격을 띠고" "유대교에 대한 당의 해석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는 또한 키텔이 "유대교의 과학적 연구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1941~1942년 겨울, 빈에서 키텔의 유대인 문제에 관한 강의를 들었던 클라우스 셰들은 "악의에 찬 말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며 "키텔 교수는 정말 협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셰들은 키텔이 유대인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라고 말한다. 키텔 자신은 그의 목표가 나치당의 극단주의자들의 신화와 왜곡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네마리 투겐트하트는 기독교인 유대인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1938년 벨츠하임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키텔이 유대인에 대한 조치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키텔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연구는 나치즘의 인종 이론이 아닌 신학에 근거했다.
1946년, 키텔은 재판을 앞두고 석방되었지만, 1948년까지 튀빙겐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보이론에서 목사( Seelsorger|제엘조르거deu )로 활동했다. 1948년, 그는 튀빙겐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사 절차가 재개되기 전에 그 해 7월 11일에 사망했다.
3. 학문적 업적
게르하르트 키텔은 팔레스타인의 후기 유대교와 원시 기독교, 헬레니즘 사이의 관계를 주로 연구한 신학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는 방대한 규모의 『신약성서 신학 사전』(Theolog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테올로기셰스 뵈르터부흐 춤 노이엔 테스타멘트deu, 약칭 ThWNT)을 창립하고 공동 편집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사전은 1933년부터 1979년까지 총 10권으로 출간되었으며, 신약성서 연구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키텔의 다른 주요 저술 활동은 아래 '주요 저서'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주요 저서
- 오데 살로모스 개정판 또는 통일de, 1914
- 예수와 랍비de, 1914
- 팔레스타인 후기 유대교와 원시 기독교의 문제de, 1926
- 원시 기독교, 후기 유대교, 헬레니즘de, 1926
- 종교사 및 원시 기독교de, 1932
- 신약성서 신학 사전de의 창립자이자 공동 편집자, 10권, 1933–1979
- 칼 바르트와의 신학 서신de(''칼 바르트와의 신학 서신'', 1934, 칼 바르트와 공저)
- 그리스도와 황제de, 1939
- 고대 세계 유대교 – 유대인 문제에 대한 연구de (''고대 세계 유대교 – 유대인 문제에 대한 연구''), 1943, 오이겐 피셔와 공저
4. 나치즘과의 관계
게르하르트 키텔은 나치즘 시대에 활동하면서 그의 학문적 연구와 사회적 발언이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연구를 발표하고, 나치 관련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치즘에 동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활동은 훗날 홀로코스트에 대한 그의 책임을 묻는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의 구체적인 반유대주의적 저술과 활동, 그리고 이에 대한 평가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4. 1. 반유대주의적 저술과 활동
튀빙겐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 및 신약성경 교수였던 그는 유대인을 독일, 기독교,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럽 문화의 역사적 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1933년 6월 강의 Die Judenfragede (''유대인 문제'')는 곧 인쇄되어 출판되었는데, 그는 이 강의에서 독일 유대인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하고, 의학, 법, 교육, 언론 분야에서 추방하며, 비유대인과의 결혼 또는 성관계를 금지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나치 정부가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도입하고 1935년 독일 시민권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하기 2년 전에 나온 주장으로, 그의 주장이 나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발터 프랑크와 가까운 관계였던 키텔은 1935년 프랑크가 독일 신역사 연구소de를 창설하자 여기에 합류했다. 이 연구소에서 그는 유대인 문제 연구 부서de에 소속되어 활동했다.1940년부터 1943년까지 키텔은 빈 대학교에서 복음주의 신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가 빈으로 옮기면서 튀빙겐 대학교의 교수 자리는 오토 미셸(1903-1993)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43년 3월, 키텔은 빈 대학교의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 교수 자리를 되찾기 위해 갑자기 튀빙겐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그의 자리를 대신했던 미셸은 말단 병사로 ''국방군''에 징집되는 수모를 겪었다.
윌리엄 올브라이트는 "1943년까지 이어진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그의 끔찍한 악의적인 공격을 고려할 때, 게르하르트 키텔은 다른 어떤 기독교 신학자보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에 기여한 죄책감을 져야 한다"고 평가하며 그의 반유대주의적 활동이 미친 심각한 영향을 지적했다.
4. 2. 옹호와 비판
튀빙겐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 및 신약성경 교수였던 키텔은 유대인을 독일, 기독교,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럽 문화의 역사적 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1933년 6월에 진행한 Die Judenfrage|유대인 문제deu라는 강의는 곧 출판되었는데, 이 강의에서 그는 독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의학, 법, 교육, 언론 분야에서 추방하며, 비유대인과의 결혼 또는 성관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 정부가 뉘른베르크법을 도입하여 1935년 독일 시민권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하기 2년 전에 이미 예견된 내용이었다. 발터 프랑크와 가까운 사이였던 키텔은 1935년 프랑크가 독일 신역사 연구소(Reichsinstitut für Geschichte des neuen Deutschlandsdeu)를 창설하자 여기에 합류했다. 이 연구소에서 그는 Forschungsabteilung Judenfragedeu(유대인 문제 연구 부서)에 소속되었다.윌리엄 올브라이트는 "1943년까지 이어진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그의 끔찍하고 악의적인 공격을 고려할 때, 게르하르트 키텔은 다른 어떤 기독교 신학자보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에 기여한 죄책감을 져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4. 3. 역사적 평가
튀빙겐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 및 신약성경 교수였던 키텔은 유대인을 독일, 기독교, 그리고 유럽 문화의 역사적 적으로 묘사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1933년 6월에 진행된 그의 강의 Die Judenfrage|de(''유대인 문제'')는 곧 인쇄되어 출판되었는데, 이 강의에서 그는 독일 내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의학, 법, 교육, 언론 분야에서 추방하며, 비유대인과의 결혼이나 성관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 정부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기 2년 전에 이미 나온 주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키텔은 발터 프랑크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1935년 프랑크가 독일 신역사 연구소를 설립하자 여기에 합류하여 유대인 문제 연구 부서에서 활동했다.1940년부터 1943년까지 키텔은 빈 대학교에서 복음주의 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 기간 동안 그의 튀빙겐 대학교 교수 자리는 오토 미셸(1903-1993)이 맡았다. 그러나 1943년 3월, 키텔은 빈 대학교 교수직을 유지한 채 갑자기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 교수 자리로 복귀했다. 이로 인해 오토 미셸은 교수직을 잃고 국방군에 말단 병사로 징집되는 수모를 겪었다.(오토 미셸의 자서전 ''적응 또는 저항''(1989) pp. 88-98 참조)
미국의 저명한 학자 윌리엄 올브라이트는 키텔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비판했다. "1943년까지 이어진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그의 끔찍하고 악의적인 공격을 고려할 때, 게르하르트 키텔은 다른 어떤 기독교 신학자보다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이는 키텔의 학문적 활동이 단순한 연구를 넘어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홀로코스트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5. 참고 문헌
- 올브라이트, W. F. (1947). "유럽 전쟁과 성경 연구의 미래". 윌러비, 해롤드 (편집.). ''오늘과 내일의 성경 연구''. 시카고: 시카고 대학교 출판부.
- 에릭슨, 로버트 P. (1977). "제3제국의 신학자: 게르하르트 키텔의 경우". ''현대사 저널''. 12 (3): 595–622. doi:10.1177/002200947701200309. ISSN 1461-7250. JSTOR 260042. S2CID 15981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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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슨, 로버트 P. (2004). "나치 시대의 기독교인: 문제적인 이야기; 안네트 메르츠, 게르하르트 베지어, 게르하르트 린데만의 논문에 대한 논평". ''교회 시대사''. 17 (2): 352–358. ISSN 2196-808X. JSTOR 43100091.
- 에릭슨, 로버트 P. (2012). ''홀로코스트의 공모: 나치 독일의 교회와 대학''. 뉴욕: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doi:10.1017/CBO9781139059602. ISBN 978-1-139-05960-2.
- 게르드마, 앤더스 (2009). ''신학적 반유대주의의 뿌리: 헤르더와 슐레르에서 키텔과 불트만까지의 독일 성경 해석과 유대인''. 유대 역사와 문화 연구. 20. 네덜란드, 레이던: 브릴. doi:10.1163/ej.9789004168510.i-678. ISBN 978-90-04-16851-0. ISSN 1568-5004.
- 헤드, 피터 M. (2004). "아리아인 예수를 향한 나치의 탐구". ''역사적 예수 연구 저널''. 2 (1): 55–89. doi:10.1177/147686900400200103. ISSN 1476-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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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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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The Hand of God in the World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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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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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ians Under Hitler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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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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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wikipedia.org/[...]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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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행물
Theologian in the Third Reich: The Case of Gerhard Kit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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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07
[5]
서적
The War in Europe and the Future of Biblical studi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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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Das Antike Weltjudentum - Forschungen zur Judenfrage
https://archive.org/[...]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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