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등공업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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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고등공업학교는 대한제국 시기 설립된 공업전습소를 모태로, 일제강점기인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된 후 1922년 개칭된 관립 전문학교였다. 1907년 공업전습소 개교 이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다시 변경되었다. 조선 유일의 고등 공업 교육 기관으로서, 건축, 토목, 기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양성했으며, 졸업생들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공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흡수되었으며, 학교 건물은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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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공업학교 - [대학]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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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
설립 | 1906년, 1916년 |
폐교 | 1946년 |
종류 | 관립 전문학교 |
위치 | 경기도 경성부 |
웹사이트 |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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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원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상과와 공과를 갖춘 상공학교(商工學校)를 설립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1904년 일본 제국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농과를 추가하여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로 다시 개교하였다. 농상공학교는 예과 1년, 본과 3년제로 운영되었고, 교원 10명과 직원 2명을 두고 80명의 학생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지원 부족으로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 학생 수가 급감했고, 결국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1906년 통감부와 일본인 공업고문 히라가 박사의 기획에 따라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분리, 확대되어 1907년 2월 1일 공업전습소 관제가 반포되면서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로 개편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 4월 21일에 개교하였으며, 1908년에는 교사가 완공되었다. 초기에는 조선인 교관이 있었으나, 이후 모두 일본인 교관으로 교체되었다.
일본은 공업전습소를 도쿄고등공업학교와 같은 수준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직공학교와 같은 단기 실습 위주의 기술전습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전습소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공업교육이 이루어진 곳이었기에 입학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1907학년도 첫 모집에는 50명 모집에 1,200여 명이 지원했고, 이후에도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재학생들은 '공업연구회'를 결성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기술잡지인 '공업업계'를 발간하는 등 조선 최초의 공학도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공업전습소는 1909년 4월 20일 첫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염직과 8명, 도기과 9명, 금공과 7명, 목공과 7명, 응용화학과 3명, 토목과 12명이 졸업했다. 이는 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에 실렸다. 공업전습소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도 동일하게 운영되다가, 1916년 4월 1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어 관립 전문학교가 되었다. 이후 1922년 4월 1일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1944년 4월 6일 '''경성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2. 1. 대한제국 시기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상과와 공과를 갖춘 상공학교(商工學校)를 설립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1904년 일본 제국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농과를 추가하여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로 다시 개교하였다. 농상공학교는 예과 1년, 본과 3년제로 운영되었고, 교원 10명과 직원 2명을 두고 80명의 학생을 선발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지원 부족으로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 학생 수가 급감했고, 결국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 1906년 통감부와 일본인 공업고문 히라가 박사의 기획에 따라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분리, 확대되어 1907년 2월 1일 공업전습소 관제가 반포되면서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로 개편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 4월 21일에 개교하였으며, 1908년에는 교사가 완공되었다. 초기에는 조선인 교관이 있었으나, 이후 모두 일본인 교관으로 교체되었다.일본은 공업전습소를 도쿄고등공업학교와 같은 수준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직공학교와 같은 단기 실습 위주의 기술전습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전습소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공업교육이 이루어진 곳이었기에 입학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1907학년도 첫 모집에는 50명 모집에 1,200여 명이 지원했고, 이후에도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재학생들은 '공업연구회'를 결성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기술잡지인 '공업업계'를 발간하는 등 조선 최초의 공학도로서 자부심을 가졌다. 공업전습소는 1909년 4월 20일 첫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염직과 8명, 도기과 9명, 금공과 7명, 목공과 7명, 응용화학과 3명, 토목과 12명이 졸업했다. 이는 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에 실렸다. 공업전습소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도 동일하게 운영되다가, 1916년 4월 1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어 관립 전문학교가 되었다.
2. 2. 일제강점기 초기
1899년 대한제국 정부는 상과와 공과를 갖춘 상공학교를 설립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1904년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농상공학교로 다시 개교했지만, 또다시 예산 문제로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져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1906년 통감부와 대한제국의 공업고문 히라가 박사의 기획으로 농상공학교의 공과가 분리, 확대되어 1907년 2월 1일 공업전습소 관제가 반포되면서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로 개편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 4월 21일에 개교하였으며, 1908년에는 교사가 완공되었다. 초기에는 조선인 교관이 있었으나, 이후 모두 일본인 교관으로 교체되었다.
일본은 공업전습소를 도쿄고등공업학교 수준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직공학교와 같은 단기 실습 위주의 기술전습기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공업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입학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1907학년도 제1기 모집에서는 50명 모집에 1,200여 명이 지원했고, 이후에도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재학생들은 '공업연구회'를 결성하고, 최초의 전문기술잡지 '공업업계'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09년 4월 20일, 공업전습소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염직과 8명, 도기과 9명, 금공과 7명, 목공과 7명, 응용화학과 3명, 토목과 12명이 졸업했으며, 이는 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에 실렸다.
공업전습소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도 동일하게 운영되다가 1916년 4월 1일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2. 3. 경성공업전문학교로의 승격
대한제국 때 설립된 공업전습소는 1916년 관립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이는 일본의 직공학교 수준을 벗어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공업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고등공업교육의 시작이었다. 1922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다.경성고등공업학교는 조선의 유일한 고등공업기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전문학교에 비해 특수한 학교로 여겨졌다. 초기에는 조선인 학생을 전체 정원의 2/3 가량 선발한다는 내규가 있어 입학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으나, 조선교육령 개정 이후 내규가 폐지되면서 입시 경쟁률이 크게 상승했다. 1935년 입시에서는 토목과에 조선인 학생이 단 1명만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의 조선인 입학난과 함께 경성고공과 경성고상의 입시제도를 조선인에게 유리하게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학교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육연한은 3년이었고, 방직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요업, 염색, 응용화학 세부 전공)가 설치되어 있었다. 1937년에는 전기공학과와 기계과가 신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 중국과 만주로의 대륙침략으로 조선의 병참기지적 공업화가 가속화되면서 기계, 토목, 건축과의 인기가 높아졌고, 만주국의 광산 개발로 광산 경영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광산과의 인기도 높아졌다. 1939년에는 광산과가 분리되어 경성광산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1941년에는 이과양성소가 부설되어 중등교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원동기과와 전기화학과, 전기통신과가 추가 설치되었으나, 같은 해에 다시 경성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졸업생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대부분 좋은 직장에 취업했다. 건축과와 토목과 졸업생은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방직과와 응용화학과 출신들은 일본계 공장 관리자로 취직했다. 당시 기술인력이 희소하여 조선인 졸업생도 차별 없이 취업할 수 있었으며, 이는 입시 경쟁률을 높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40년 무렵 평양에 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고,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1941)가 설치되었으나, 졸업생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 배출된 건축가, 공학자의 대다수가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이었으며,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 공업분야와 공학계를 주도했다. 특히,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 건축가들은 21세기까지 남한 건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한국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함께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공학계에 흡수되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3.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는 대한제국 때 성립된 공업전습소가 승격되어 설립된 관립 전문학교였다. 일본의 직공학교 수준에 불과했던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발전함에 따라 진정한 고등공업교육이 시작되었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공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0년대까지 조선의 유일한 고등공업기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전문학교에 비해 특수한 학교로 여겨졌다.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에는 조선인을 전체정원에서 2/3가량 선발한다는 내규가 있어 조선인의 입학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지만, 교육령 개정 이후 그러한 내규가 폐지되어 입시 경쟁률은 13:1에서 27:1까지 폭증하게 되었고 조선인의 입학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1935년의 입시에서는 토목과에 조선인 학생이 단 1명만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교육계에서는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의 조선인 입학난과 함께 경성고공과 경성고상의 입시제도를 조선인에게 유리하게 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이었고, 학과로는 방직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응용화학과에는 요업, 염색, 응용화학의 세과(細科)가 있었다. 1937년에는 전기공학과와 기계과가 가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 중국과 만주로의 대륙침략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병참기지적 공업화가 가속화되자 기계과, 토목과, 건축과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조선 각지와 만주국의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 경영자 수요가 급증하자 광산과의 인기도 높아졌다. 광업분야 수요가 폭증하여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광산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39년에는 광산과를 분리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41년에는 이과양성소(理科養成所)가 부설되어 수학, 물상, 화학, 생물 중등교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원동기과와 전기화학과, 전기통신과가 추가 설치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대부분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다. 건축과와 토목과 졸업생의 상당수가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채용되었으며, 방직과와 응용화학과 출신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술인력이 희소했기 때문에 조선인 졸업자도 타 전문학교 출신자와 달리 지방관청이나 일본인 기업에 취직하는데 차별을 받지 아니했다. 이와 같은 취직의 유리함은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입시경쟁률을 높이는 데 일조를 했다.
1940년 무렵 평양에 공업전문학교가 하나 더 설립되고[1],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1941)가 설치되었으나, 이 두 학교 모두 시기상 졸업생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배출된 건축가, 공학자의 절대 다수가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이었으며, 경성고공 출신은 해방 이후 남북한에서 공업분야와 공학계를 주도해나간다. 특히,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의 건축가들은 21세기가 되기까지 남한의 건축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현대 한국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해방이후에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함께 대학기관인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공학계에 흡수되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3. 1. 교육 과정
경성고등공업학교는 3년제 학교였다. 초기에는 방직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응용화학과에는 요업, 염색, 응용화학 세부 전공이 있었다. 1937년에는 전기공학과와 기계과가 신설되었다.1930년대 중반, 중국과 만주로의 대륙 침략으로 조선의 병참 기지화가 가속화되면서 기계, 토목, 건축과의 인기가 높아졌다. 또한, 조선 각지와 만주국의 광산 개발로 광산 경영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광산과의 인기도 상승했다. 이러한 광업 분야 수요 증가로 인해 1939년 광산과는 경성광산전문학교로 분리, 설립되었다.
1941년에는 이과양성소가 부설되어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분야의 중등 교사를 양성했다. 1944년에는 원동기과, 전기화학과, 전기통신과가 추가 설치되었다.
3. 2. 입시 경쟁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에는 조선인을 전체 정원에서 2/3가량 선발한다는 내규가 있어 조선인의 입학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지만, 교육령 개정 이후 그러한 내규가 폐지되어 입시 경쟁률은 13:1에서 27:1까지 폭증하게 되었고 조선인의 입학이 매우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1935년의 입시에서는 토목과에 조선인 학생이 단 1명만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교육계에서는 경성고등상업학교(경성고상)의 조선인 입학난과 함께 경성고공과 경성고상의 입시제도를 조선인에게 유리하게 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3. 3. 졸업 후 진로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대부분 좋은 직장에 취업했다. 건축과와 토목과 졸업생의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채용되었으며, 방직과와 응용화학과 출신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기술인력이 희소했기 때문에 조선인 졸업자도 타 전문학교 출신자와 달리 지방관청이나 일본인 기업에 취직하는데 차별을 받지 아니했다. 이와 같은 취직의 유리함은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입시경쟁률을 높이는 데 일조를 했다.3. 4. 사회적 영향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일제강점기 조선 유일의 고등 공업 교육 기관이었다.[1] 대한제국 때 설립된 공업전습소가 승격된 학교로, 1940년대까지 조선의 유일한 고등공업기관이었다. 조선교육령 개정 이전에는 조선인 입학 비율이 2/3 정도였으나, 개정 이후 입시 경쟁이 치열해져 조선인의 입학이 어려워졌다. 1935년 입시에서는 토목과에 조선인 학생이 단 1명만 합격하기도 했다.졸업생들은 대부분 좋은 직장에 취업했으며, 특히 건축과와 토목과 졸업생들은 조선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채용되기도 했다. 당시 기술인력이 희소하여 조선인 졸업생도 차별 없이 취업할 수 있었고, 이는 경성고등공업학교의 높은 입시 경쟁률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배출된 건축가, 공학자의 대다수가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해방 이후 남북한의 공업 및 공학계를 주도해나갔다. 특히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 건축가들은 현대 한국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4. 교사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숭동에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전환국 기계시험소가 있던 곳이었다. 1906년 통감부 건축과의 설계에 의해 1908년에 공업전습소 교사(본관)와 기숙사, 관사가 완성되었다. 교사는 르네상스식의 목조 건물이며, 대한제국 때 건설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1912년 4월부터는 공업전습소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함께 교사(본관)을 사용했고, 1916년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면서 본관 전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상공부 국립공업연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4. 1. 건립 배경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숭동에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전환국 기계시험소가 있던 곳이었다. 1906년 통감부 건축과의 설계에 의해 1908년에 공업전습소 교사(본관)와 기숙사, 관사가 완성되었다. 교사는 르네상스식의 목조 건물이며, 대한제국 때 건설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1912년 4월부터는 공업전습소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함께 교사(본관)을 사용했고, 1916년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면서 본관 전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상공부 국립공업연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4. 2. 건축 양식 및 특징
1906년 통감부 건축과의 설계에 의해 1908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사(본관)와 기숙사, 관사가 완성되었다. 교사는 르네상스식의 목조 건물이며, 대한제국 때 건설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1912년 4월부터는 공업전습소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함께 교사(본관)을 사용했고, 1916년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면서 본관 전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상공부 국립공업연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4. 3. 변천 과정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동숭동에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전환국 기계시험소가 있던 곳이었다. 1906년 통감부 건축과의 설계에 의해 1908년에 공업전습소 교사(본관)와 기숙사, 관사가 완성되었다. 교사는 르네상스식의 목조 건물이며, 대한제국 때 건설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목조건물이다. 1912년 4월부터는 공업전습소와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함께 교사(본관)을 사용했고, 1916년 공업전습소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승격되면서 본관 전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상공부 국립공업연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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