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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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은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며 국호를 정하고, 자주 독립 국가를 표방하며 성립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외세의 간섭이 심화되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 배경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고 군사력 강화, 외교 관계 수립 등을 시도했으나, 일본의 영향력 확대로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멸망했다. 대한제국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를 거쳤으며, 훈장 제도를 운영하고, 간도와 독도가 자국 영토임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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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한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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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대한제국 |
로마자 표기 | Daehan Jeguk (RR)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 Taehan Cheguk (MR) |
일반 명칭 | 한국 제국 |
국호 (한자) | 大韓帝國 |
존속 기간 | 1897년 – 1910년 |
건국일 | 1897년 10월 13일 |
멸망일 | 1910년 8월 29일 |
선행 국가 | 조선 |
후행 국가 | 일제강점기 (조선) |
수도 | 한성 (현재 서울) |
국가 표어 | 광명천지 |
국가 표어 (한자) | 光明天地 |
국가 표어 (영어) | Illuminate Heaven and Earth |
국가 | 애국가 |
공용어 | 한국어 |
종교 | 유교 불교 무속 신앙 도교 기독교 천도교 (1907년 인정) |
통화 | 양 (1897–1900) 원 (1900–1910)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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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
정부 형태 | 단일 전제군주제 |
입법부 | 중추원 (1907년까지) 없음 (법령에 의한 규칙) (1907년부터) |
역대 군주 | |
황제 | 고종 (1897–1907) 순종 (1907–1910) |
총리 | 김홍집 (1894–1895, 최초) 이완용 (1907–1910, 마지막) |
일본 통감 | 이토 히로부미 (1905–1909, 최초) 데라우치 마사타케 (1909–1910, 마지막) |
역사적 사건 | |
제국 선포 | 1897년 10월 13일 |
헌법 채택 | 1899년 8월 17일 |
을사늑약 | 1905년 11월 17일 |
헤이그 밀사 사건 | 1907년 7월 |
일본에 합병 | 1910년 8월 29일 |
인구 | |
1900년 추정치 | 17,082,000명 |
2. 국호
대한제국 국호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일컫는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72][73] 여기서 삼한은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이 아닌 10세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고려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대한'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국'''(大韓國)으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강하게 표방하는 의례상·의전상 국호로 사용되었다. 국명을 “제국(帝國)”으로 한 것은 책봉에서 벗어나면서 국왕의 칭호를 “황제(皇帝)”로 변경했기 때문이다.[54]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은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는 취지로 국호로 재사용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따라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호에도 여전히 그대로 이어졌다.
2. 1. 국호 변경 제안
《고종실록》에 따르면, 청(淸)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조선 왕궁에서는 명(明)으로부터 하사받은 국호 '조선'을 변경하자는 제안이 고종에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조선을 '삼한(三韓)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한(韓)'이 포함된 명칭이 역대 통일 조선 왕조의 국호로 사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大韓)'을 새로운 국호로 결정하였다.[58]3. 역사
조선은 1637년 청에 패배하여 삼전도의 맹약을 맺고 책봉국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제국주의 정책이 동아시아에까지 미치자,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내부에서는 청과의 책봉 체제를 벗어나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개화파)과 청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사대당)이 대립하였다. 그 와중에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일본 공사관이 폭도들에게 불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주장하며 군대를 파병하여, 일청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으로 외세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독립협회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대한제국 성립에 힘을 보탰다.[74]
1897년(광무 원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8월 17일 광무(光武)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했다. 고종은 10월 12일 원구단에서 상제(上帝)에게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74]
대한제국 성립 초기,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부 형태를 두고 대립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며 만민공동회를 통해 백성의 참정권과 국회 설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수구파는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익명서 사건을 명분 삼아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탄압하였으며 조병식을 중심으로 수구파 행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일본 제국이 수구파 행정부에 가담하여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게끔 권고하자 고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만민공동회도 1899년 12월 이후 불법화되었다.
독립협회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무개혁은 계속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이용익, 심순택, 윤웅렬, 심상훈과 같은 보수 또는 중도좌파 정치인들이 개혁을 이끌었다. 이들은 보수적으로 국가를 개혁하려 했다.[12] 보수 정치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둘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갑오개혁에서 폐지되었던 많은 소액 세금들이 부활되었다. 이러한 세금 증가는 황실 정부가 개혁을 수행할 만큼 충분히 부유해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12]
새로운 내각은 또한 국가의 독립을 강조하여 대한제국 육군을 확장했다.[12]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제국은 국민을 보호하려 했다. 진위대는 많은 한국인이 살던 간도에 배치되었다.[12] 새로운 내각은 또한 기스 ''양무''호를 451605KRW에 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배를 구입하여 현대적인 해군을 건설하고자 했다.[16]
정부는 많은 학생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 현대 기술을 배우게 함으로써 국가의 산업화를 시도했다. 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한국에 도입되었고 많은 회사들이 설립되었다.[12] 토지 소유권 기록을 공식화함으로써 토지세 징수를 개선할 수 있었다.[8] 이러한 개혁들은 한국을 더 부유하고 강하게 만드는 변화를 가져왔다.
1895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의 세입과 연간 지출은 다음과 같다.[41][42]
연도 | 1895 | 1896 | 1897 | 1898 | 1899 | 1900 | 1901 | 1902 | 1903 | 1904 | 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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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원) | 4557587KRW | 4809410KRW | 4191192KRW | 4527476KRW | 6473222KRW | 6162796KRW | 9079456KRW | 7586530KRW | 10766115KRW | 14214573KRW | 14960574KRW |
연간 지출(원) | 3244910KRW | 5144531KRW | 3967647KRW | 4419432KRW | 6128229KRW | 5558972KRW | 8020151KRW | 6932037KRW | 9697371KRW | 12370795KRW | 12947624KRW |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 속에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어 대한제국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때 재정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는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시켰다. 1904년 10월 메가타 다네타로가 새로운 대한제국 재정 고문이 되어 같은 해 11월, 화폐 주조를 담당하던 전환국을 폐쇄했다. 1905년 7월, 일본은 한국과 동일한 화폐 제도를 채택했고,[63] 주조는 오사카 조폐국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싼 러일 전쟁에서 1905년 일본이 승리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11월 17일,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시작하였다.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은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 즉위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 (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 8월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1909년 7월 12일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권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3. 1. 건국의 배경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으로 외세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독립협회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대한제국 성립에 힘을 보탰다.[74]1897년(광무 원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8월 17일 광무(光武)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했다. 고종은 10월 12일 원구단에서 상제(上帝)에게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74]
3. 2. 대한제국 성립
1895년 명성황후가 암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청의 속국이 아니게 된 이상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건의에 따라 국호 개칭을 포함한 개혁을 실시했다.[60][50]1897년 8월 17일,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꾸었다.[6] 1897년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한 고종은 10월 12일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6] 즉위식에는 서구식 대관식과 전통적인 아시아식 대관식이 모두 포함되었다.[5]
3. 3.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대한제국 성립 초기,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부 형태를 두고 대립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며 만민공동회를 통해 백성의 참정권과 국회 설치를 요구했다. 하지만 수구파는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만민공동회도 1899년 12월 이후 불법화되었다.3. 4. 광무개혁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시킨 직후 고종은 보수 정치인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려 했다. 민영환, 한규설 등 개화파 관리는 해임되었고, 보수파 인사들이 권력을 잡았다. 심상훈은 의정부 참정이 되었고, 유기환은 장관, 민영기는 농상공부 대신, 신기선은 학부 대신, 민병석은 육군부 대신, 이기동은 시위대 제1대대장이 되었다. 더욱이 많은 보부상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46명의 보부상이 관직을 얻었는데, 이는 지방관으로서 그들의 횡포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고통이었다.[11]
독립협회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무개혁은 계속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이용익, 심순택, 윤웅렬, 심상훈과 같은 보수 또는 중도좌파 정치인들이 개혁을 이끌었다. 이 장관들 중 윤웅렬, 이용익, 심상훈은 독립협회 전 회원들의 미움을 받았다.[8] 이들은 보수적으로 국가를 개혁하려 했다.[12] 보수 정치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둘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갑오개혁에서 폐지되었던 많은 소액 세금들이 부활되었다. 이러한 세금 증가는 황실 정부가 개혁을 수행할 만큼 충분히 부유해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12]
새로운 내각은 또한 국가의 독립을 강조하여 대한제국 육군을 확장했다.[12] 드미트리 푸탸타(Dmitry Putyata) 대령과 일부 장교들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파견되었으나, 푸탸타는 러시아 전 대사였던 민영환과 갈등을 빚었다.[13] 그는 군대 현대화를 지원한 후 1897년 11월 26일 러시아로 돌아갔다.[14] 1898년에는 10개 대대가 더 창설되었다.[15]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제국은 국민을 보호하려 했다. 진위대는 많은 한국인이 살던 간도에 배치되었다.[12] 새로운 내각은 또한 기스 ''양무''(KIS ''Yangmu'')호를 451605KRW에 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배를 구입하여 현대적인 해군을 건설하고자 했다.[16]
정부는 많은 학생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 현대 기술을 배우게 함으로써 국가의 산업화를 시도했다. 많은 새로운 기술들이 한국에 도입되었고 많은 회사들이 설립되었다.[12] 토지 소유권 기록을 공식화함으로써 토지세 징수를 개선할 수 있었다.[8] 이러한 개혁들은 한국을 더 부유하고 강하게 만드는 변화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토지 제도 개혁이 시작되었다. 내무대신 박정양과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의 주도하에 1898년 6월 토지 제도 개혁이 제안되었다. 새로운 제도는 토지나 집 자체뿐만 아니라 토지 주변 환경도 포함했다. 이 제안은 10명의 장관 중 4명만 찬성하여 거부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이 내각 회의를 검토한 후, 제안대로 토지 제도 개혁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17]
대한제국 시대에는 수동식 기계류를 포함한 일부 근대 기업이 등장했다. 그러나 일본 제품 수입과 자본 집약성 부족으로 이들 기업은 위기를 맞았다. 제한적인 금융 인프라가 존재했지만 경제 발전을 충분히 지원하지는 못했다.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두산과 한국전력공사와 같은 대기업들도 대한제국 시대에 시작되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900년 대한제국의 1인당 GDP는 850USD로 세계 26위, 아시아 2위였다.[38] 대한제국의 경제 발전은 하야시 곤스케가 아오키 슈조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 보고서는 대한제국이 세계 무대에서 경제적 주체로 부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39]
대한제국 시대는 근대 기업이 설립된 시기였다. 대한제국 초기에는 개화당의 안경수, 윤치호, 이채연 등이 기업 설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고종의 절대군주 체제가 확립되면서 이용익, 민영환, 이윤용 등 황제와 가까운 인물들이 기업 설립에 큰 관심을 보였다.[40]
1895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의 세입과 연간 지출은 다음과 같다.[41][42]
연도 | 1895 | 1896 | 1897 | 1898 | 1899 | 1900 | 1901 | 1902 | 1903 | 1904 | 1905 |
---|---|---|---|---|---|---|---|---|---|---|---|
세입(원) | 4557587KRW | 4809410KRW | 4191192KRW | 4527476KRW | 6473222KRW | 6162796KRW | 9079456KRW | 7586530KRW | 10766115KRW | 14214573KRW | 14960574KRW |
연간 지출(원) | 3244910KRW | 5144531KRW | 3967647KRW | 4419432KRW | 6128229KRW | 5558972KRW | 8020151KRW | 6932037KRW | 9697371KRW | 12370795KRW | 12947624KRW |
3. 5. 일본의 영향력 강화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 속에서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어 대한제국 내정에 간섭하였다.이때 재정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는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대한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시켰다. 원래 대한제국은 화폐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대한제국 황실이 뇌물 성격의 납부금을 받은 자들에게 백동화 사금을 묵인했기 때문에 백동화의 남용과 밀수가 성행했고, 그 악화로 인해 조선 내 상거래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63] 1904년 10월 메가타 다네타로가 새로운 대한제국 재정 고문이 되어 같은 해 11월, 화폐 주조를 담당하던 전환국을 폐쇄했다. 1905년 7월, 일본은 한국과 동일한 화폐 제도를 채택했고,[63] 주조는 오사카 조폐국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싼 러일 전쟁에서 1905년 일본이 승리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11월 17일,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시작하였다.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사건의 결과로 일본은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 즉위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 (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 8월에는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1909년 7월 12일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권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3. 5. 1. 국권 수호 운동
일본의 강압적인 침략에 맞서 을사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양반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순국 자결과 상소 운동으로 항거했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여 일본과 을사오적을 규탄했다.[26] 민종식, 신돌석, 최익현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무장 항전을 벌였다.[26]독립협회 해체 이후에도 헌정연구회, 대한 자강회, 신민회 등 개화 자강 계열 단체들이 설립되어 교육, 산업, 언론 활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일본 제국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실패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여러 비밀 사절단을 파견하여 지원을 호소했다.[24] 빌헬름 2세, 조지 5세, 니콜라이 2세와 같은 유럽 군주들에게 메시지를 보냈고,[27]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다.[28] 1906년 6월, 니콜라이 2세는 고종에게 1907년 헤이그 협의회에 대한 비밀 초청장을 보냈고, 고종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특사들은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29] 이러한 일련의 저항은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졌고, 1907년 7월 19일 순종이 즉위하게 되었다.[29]
1905년 8월 22일 고종이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에는 "대한제국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진 독립국가"이며 "일본에 글자를 가르치고 풍습도 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64]
3. 6. 멸망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이후 1907년 한일신협약,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9년 기유각서 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국권은 점차 일본에 넘어갔다.[31][30][32][33][34]1907년 한일 협약에 따라 일본인들이 한국 중앙 정부에 고문으로 들어와 한국 관료 체계에 배치되었다. 1908년 12월 31일까지 전체 관리의 40.7%, 고위 관료의 36.9%가 일본인이었고, 그 결과 많은 한국 관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지휘 아래, 일본은 한국 병합을 준비했다. 결국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탄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했다.[35]
4. 군사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1893년 강화도에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을 설립하고 영국 해군 대위와 부사관을 초빙해 해군 생도들에게 근대식 군사훈련을 시켰다.[79]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식 군대가 편제되고 계급과 군복이 갖추어졌다. 군대 계급은 장교, 부사관, 병졸로 나뉘었고, 장교는 다시 위관급, 영관급, 장관급으로 세분화되었다.
1899년에는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적 실권을 갖도록 했다. 원수부 관제는 "대황제 폐하께서는 대원수 군기를 총괄하시고 육군과 해군을 일률적으로 통솔하신다"라고 규정하여, 황제가 군 통수권자임을 명시했다.[79] 1903년에는 일본에서 양무호를 구매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을 도입했고, 1904년에는 광제호를 추가로 도입했다.[79]
대한제국군은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되었으며, 1907년 이전까지 중앙군과 지방군을 합쳐 2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대한제국군은 조선군과 수군을 계승하여 광무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서구식 군대로 재편성되었다. 조선 시대와 달리 징병이 아닌 자원입대 방식이었으며, 병사와 사관을 포함하여 약 3만 명 규모였다.[36]
그러나 1907년 일제의 강압적인 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다. 이에 박승환 참령이 자결로 항의했고, 이는 옛 황실 군인들이 주도하는 남대문 전투로 이어졌다.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5. 외교
1899년 청나라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1]
대한제국은 간도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토인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기도 했다.[1]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일본 제국은 이를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이후 1905년 일본 제국은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1]
5. 1. 수교 국가
대한제국은 1876년 일본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기 전까지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1892년), 청나라(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과 수교하였다.[1]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이후에는 외교권이 박탈되어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와 단교했고, 일본의 경우는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이후 국가의 소멸로 인해 단교했다.[1]
6. 역대 황제
7. 훈장 제도
1900년(광무 4년) 4월 17일 대한제국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가 반포되면서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대훈위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 태극장(太極章), 자응장(紫鷹章)이 제정되었다.[80] 1901년 4월 16일 칙령 제10호로 조례가 개정되어 팔괘장이 추가되었다.[81] 1902년 8월 12일 대훈위서성대수장(大勳位瑞星大綬章)이 추가되었다.[82] 1907년 3월 30일 칙령 제20호로 조례가 개정되어 서봉장(瑞鳳章)이 제정되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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