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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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 창림사지에 위치한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으로, 상부 기단 면석에 팔부신중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탑의 건립 시기는 사리공에서 발견된 자료와 김정희의 기록을 통해 신라 문성왕 때(844년)로 추정되나, 이견도 존재한다. 1976년 복원 과정에서 훼손되었지만, 신라 석탑 조형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보물 지정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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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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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
로마자 표기 | Gyeongju Namsan Changrimsaji Samcheungseoktap |
지정 번호 | 보물 제1867호 |
지정일 | 2015년 3월 9일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6-1 |
상세 정보 | |
시대 | 신라 |
수량 | 1기 |
2. 역사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경주 불국사를 비롯한 통일신라 가람에서 보이는 층별 독립 공간 구조가 확인된 창림사에 위치한다. 이 석탑은 사찰 확장 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 팔부신중이 조각된 형태로 조성되었다.[1]
탑의 조성 시기는 사리공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2]와 '무구정광대다라니'를 김정희가 모사한 기록에 근거하여 신라 문성왕 (844년) 때로 추정되지만, 이 기록에 대한 이견도 존재한다.[1]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이다. 하부 기단은 통돌로 하대면석과 지석을 구분하여 만들었고, 면석마다 3개의 탱주를 설치했다. 탱주 개수는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 석탑 조성 시기를 추정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10개의 석재로 구성된 하층 기단부는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처럼 8개 석재로 구성된 탑보다 오래된 양식으로 평가받는다.[1]
상부 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중상이 양각[3]되어 있고, 1구의 탱주가 있어 화려하다. 그러나 현재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새 부재로 교체되어 원래 모습을 잃었다.[1]
창림사 탑 팔부신중[4]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가 높아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인용사지탑, 진전사탑 등의 팔부신중상, 장항리사지탑의 인왕상, 원원사지탑의 십이지신 및 사천왕상과 비교해도 조각 기량이 뒤지지 않는다.[1]
1976년 복원 과정에서 일부 부재가 교체되고 상륜부가 없어지는 등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신라 석탑 조형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1]
2. 1. 건립 시기 및 배경
창림사지는 발굴 조사를 통해 경주 불국사 등 통일신라 시대 가람에서 나타나는 층별 독립된 공간이 확인되었으며, 확장 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 팔부신중을 조각한 삼층석탑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탑의 조성 시기는 사리공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2]와 '무구정광대다라니'를 김정희가 모사해 둔 기록에 따라 신라 문성왕 (844년) 때로 추정되나, 이 기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1]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개 층의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이다. 하부 기단은 통돌에 하대면석과 지석을 구분하여 만들었고, 면석 각 돌마다 3개의 탱주를 두었다. 이 탱주의 개수는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 석탑 조성 시기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0개의 석재로 구성된 하층 기단부는 비슷한 시기에 8개의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오래된 양식이라는 견해가 있다.[1]
2. 2. 복원 및 보존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1976년 복원될 때 2층과 3층 탑신, 상층 팔부신중상 중 4개, 기단석재 일부가 새 부재로 교체되었고 상륜부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탑의 원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1]창림사지는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절터 발굴로 석탑의 위치도 확인되었다. 경주 남산에 있는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1]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재를 중심으로 탑의 조성 수법을 보면, 탑의 규모, 기단부 구성, 상층 기단부 면석의 팔부신중상 조각 수법 등에서 신라 석탑 조형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1]
3. 구조 및 특징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 가람에서 나타나는 층별 독립 공간이 창림사에서도 확인되었으며, 확장 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 팔부신중을 조각한 삼층석탑이 조성되었다.[1] 탑의 조성 시기는 사리공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2]'와 '무구정광대다라니'를 김정희가 모사한 기록에 문성왕 때(844년)로 추정되나, 이 기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1] 1976년 복원 과정에서 2, 3층 탑신과 상층 팔부신중상 중 4매, 기단석재 일부가 새 부재로 교체되고 상륜부가 없어, 탑의 원형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그러나 창림사지는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사지 발굴을 통해 석탑의 위치도 확인되었다. 경주 남산에 있는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1]
3. 1. 전체적인 형태
2중 기단 위에 3개 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상하 2중으로 구성되었고, 하부는 통돌에 하대면석과 지석을 구분하여 만들었으며, 면석에는 각 돌마다 3개의 탱주를 새겼다. 탱주 개수는 석탑 변천의 중요한 지표로,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 석탑 조성 시기를 추정하게 한다. 하층 기단은 10개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비슷한 시기 8개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오래된 양식이라는 견해가 있다.[1]상부 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중상을 양각[3]하고 탱주 1개를 두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현재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새 부재로 교체되어 원래 모습을 잃었다.[1]
창림사 탑 팔부신중[4]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다른 석탑은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인용사지탑, 진전사탑 등이 있고, 인왕상이 조각된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원원사지탑 등과 비교해도 조각 기량이 뒤지지 않는다.[1]
3. 2. 기단부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3개 층의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형태이다. 기단부는 상하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는 통돌에 하대면석과 지석을 구분하여 만들었고, 면석에는 각 돌마다 3개의 탱주를 새겼다. 탱주의 개수는 석탑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 석탑의 조성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10개의 석재로 구성된 탑의 하층 기단부는 비슷한 시기에 8개의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오래된 양식[1]으로 여겨진다.특히 상부 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중상을 돋을새김[3]하고 1개의 탱주를 두어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나머지 면석은 새로운 부재로 교체되어 원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1]
3. 3. 팔부신중상
상부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중상이 양각[3]되어 있고, 1개의 탱주를 두어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그 외 면석은 새로운 석재로 교체되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1]창림사 탑 팔부신중[4]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대한민국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예는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인용사지탑,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등과 인왕상이 조각된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등과 비교할 때도 조각수법이 기량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1]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재를 중심으로 탑의 조성 수법을 살펴보면, 탑의 규모, 기단부의 구성과 상층 기단부 면석의 팔부신중상 조각 수법 등에서 신라 석탑 조형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1]
4. 의의 및 가치
창림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경주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 가람에서 나타나는 층별 독립된 공간이 확인되었으며, 확장 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 팔부신중을 조각한 삼층석탑이 조성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1]
탑의 조성 시기는 사리공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2]'와 '무구정광대다라니'를 김정희가 모사한 기록에 신라 문성왕 (844년) 때로 추정되나, 이 기록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1]
석탑 하층 기단부는 10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8개의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오래된 양식에 가깝다는 견해가 있다.[1]
상부 기단 면석에는 8부신중상을 양각[3]하고 1개의 탱주를 두어 매우 화려하지만,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신재로 교체되어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1]
창림사 탑 팔부신중[4]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높은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진전사탑 등의 팔부신중상, 장항리사지탑의 인왕상, 원원사지탑의 십이지신 및 사천왕상과 비교해도 조각 기량이 뒤지지 않는 사례로 인정받는다.[1]
1976년 복원 과정에서 일부 부재가 신재로 교체되고 상륜부가 없어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창림사지는 신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석탑의 위치도 확인되었고, 경주 남산에 있는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1]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재를 중심으로 탑의 규모, 기단부 구성, 상층 기단부 면석의 팔부신중상 조각 수법 등을 통해 신라 석탑 조형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1]
참조
[1]
간행물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5-03-09
[2]
문서
무구정탑원기
[3]
문서
양각
[4]
문서
팔부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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