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권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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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 권투는 기원전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퓌그메', '퓌크스', '퓌그마키아' 등으로 불렸다. 테세우스와 같은 영웅의 전설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장례 경기에서 권투가 행해진 기록을 통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권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88년 고대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초기에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 끈(히만테스)을 사용했지만, 이후 스파이라이, 옥시스, 그리고 로마 시대에는 금속 너클이 달린 카이토스(세스투스)로 발전하며 경기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훈련은 팔레스트라에서 이루어졌으며, 샌드백과 섀도 복싱, 음악 반주에 맞춰 진행되었다. 고대 올림픽 챔피언으로는 로도스의 디아고라스, 테오게네스 등이 있다. 로마 시대에는 '푸길라투스'로 불렸으며, 잔혹성으로 인해 서기 400년경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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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권투 | |
---|---|
개요 | |
![]() | |
정보 | |
명칭 | 고대 그리스 권투 |
다른 이름 | 고대 올림픽 권투 |
중점 | 타격 |
강도 | 풀 컨택트 |
국가 | 그리스 |
창시자 | 알 수 없음 |
기원 | 알 수 없음 |
파생 무술 | 권투 |
올림픽 | 고대 |
웹사이트 | 없음 |
2. 기원
고대 그리스 권투는 미노스 문명과 미케네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는 권투의 기원에 대한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한 전설에 따르면 영웅 테세우스가 두 남자가 마주 앉아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주먹으로 서로를 때리는 형태의 권투를 고안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권투 선수들은 서서 싸우게 되었고, (가시가 달린) 장갑을 착용하고 팔꿈치 아래 팔에 붕대를 감았지만, 그 외에는 알몸으로 싸웠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688년에 권투를 올림픽 경기에 도입했다. 참가자들은 펀칭백(korykos라고 불림)에서 훈련했고, 손, 손목, 때로는 가슴에 가죽 끈(himantes라고 불림)을 착용하여 부상을 방지했다. 얼굴이나 머리에는 보호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권투는 현대 권투보다 훨씬 위험했다. 여성은 권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 1. 미노아 및 미케네 문명
고대 그리스어로 "주먹"을 의미하는 '''퓌그메'''(πυγμή|퓌그메grc), '''퓌크스'''(πύξ|퓌크스grc)와 "권투"를 의미하는 '''퓌그마키아'''(πυγμαχία|퓌그마키아grc)로 불린 고대 그리스의 권투에 관한 고고학적 및 미술사적 초기 증거는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된다.[1][2]그리스에는 권투의 기원에 관한 수많은 전설이 있다. 아폴론은 델포이로 향하는 도중 젊고 강건한 여행자에게 권투 시합을 강요하고, 진 자를 죽이는 포키스의 야만적인 거인 왕 포르바스를 권투 시합으로 죽이거나, 파우사니아스가 저서 《그리스 안내기》에서 언급했듯이 군신 아레스와 권투로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테세우스가 마주 앉은 두 남자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주먹으로 싸우는 형태의 권투를 발명했다는 전설도 있다.
점차 권투 선수들은 알몸에 징이 박힌 글러브를 착용하고, 팔뚝을 천으로 감싼 채 서서 경기를 치렀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서사시 《일리아스》에 따르면 미케네의 전사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장례 경기에서 권투를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개최한 경기의 내용에는, 권투에 출전한 에우뤼알로스가 심하게 얻어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이 있다.

한편, 고대 로마의 역사가 필로스트라토스는 권투가 원래 스파르타에서 발전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과거 스파르타인들은 병사에게 투구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전투에서 피할 수 없는 머리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안면을 단련할 목적으로 권투를 했다고 한다.[3]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패배는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스파르타인들은 권투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4]
2. 2. 그리스 신화와 전설
고대 그리스어로 "주먹"을 의미하는 '''퓌그메'''(πυγμή|퓌그메grc), '''퓌크스'''(πύξ|퓌크스grc)와 "권투"를 의미하는 '''퓌그마키아'''(πυγμαχία|퓌그마키아grc)로 불린 고대 그리스의 권투에 관한 고고학적 및 미술사적 초기 증거는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 시대의 유물에서 발견된다.[1][2]그리스에는 권투의 기원에 관한 수많은 전설이 있다. 아폴론은 델포이로 향하는 도중 젊고 강건한 여행자에게 권투 시합을 강요하고, 진 자를 죽이는 포키스의 야만적인 거인 왕 포르바스를 권투 시합으로 죽이거나, 파우사니아스가 저서 《그리스 안내기》에서 언급했듯이 군신 아레스와 권투로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테세우스가 마주 앉은 두 남자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주먹으로 싸우는 형태의 권투를 발명했다는 전설도 있다.
점차 권투 선수들은 알몸에 징이 박힌 글러브를 착용하고, 팔뚝을 천으로 감싼 채 서서 경기를 치렀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서사시 《일리아스》에 따르면 미케네의 전사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장례 경기에서 권투를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개최한 경기의 내용에는, 권투에 출전한 에우뤼알로스가 심하게 얻어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이 있다.
이러한 장례 경기를 기원으로 하여 탄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고대 올림픽에 권투가 경기로 추가된 것은 기원전 688년 (소년 권투는 기원전 616년)이다. 올림픽 사상 최초의 권투 우승자는 소아시아 출신의 스미르나의 오노마스토스이며, 이 인물이 올림픽의 권투 규칙을 정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고대 로마의 역사가 필로스트라토스는 권투가 원래 스파르타에서 발전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과거 스파르타인들은 병사에게 투구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전투에서 피할 수 없는 머리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안면을 단련할 목적으로 권투를 했다고 한다[19].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패배는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스파르타인들은 권투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2. 3. 호메로스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따르면 미케네의 전사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장례 경기에서 권투를 했다.[1]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기 위해 아킬레우스가 개최한 경기에 권투가 포함되었으며, 에우뤼알로스가 권투 경기에서 심하게 얻어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서사시의 묘사는 후세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2. 4. 올림픽 경기
그리스인들은 파트로클로스를 기념하여 기원전 688년에 권투(''pygme / pygmachia'')를 올림픽 경기에 도입했다.[1] 참가자들은 펀칭백(korykos)에서 훈련했다. 격투가들은 손(손가락은 자유롭게 둠), 손목, 때로는 가슴 위에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 끈(himantes라고 불림)을 착용했다. 얼굴이나 머리에는 보호 장비가 없었으므로 고대 그리스 권투는 현대 권투에 비해 상당히 위험했다. 여성은 권투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3]3. 규칙 및 특징
고대 그리스 권투의 규칙과 특징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역사적 자료와 이미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 경기 방식: 고대 그리스 권투는 남성만이 참여할 수 있었으며, 선수들은 거의 알몸으로 전신에 올리브 오일을 바르고 양손에 히만테스(himantes)를 착용한 채 경기를 진행했다.[26] 선수들은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팔을 높이 올려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한쪽 선수가 항복하거나 실신, 피로 등으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될 때까지 경기가 계속되었다.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에도 살아남은 선수가 승리했다. 승자는 그 영예를 칭송받았으며, 로도스 섬의 디아고라스와 같이 뛰어난 격투가를 배출한 가문은 핀다로스의 축승가에 불릴 정도로 칭송받았다.
3. 1. 기본 규칙
고대 그리스 권투의 현재 통용되는 규칙은 역사적 참고 자료와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 권투에서 발차기에 대한 증거가 있지만,[8][9][10]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11][12] 온전한 출처와 스포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규칙은 추론될 수 있을 뿐이다.[13]- 잡거나 레슬링은 금지되었다.
- 손으로 어떤 종류의 타격도 허용되었지만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 링은 사용되지 않았다.
- 라운드나 시간 제한은 없었다.
- 한 선수가 포기하거나 무능력해지면 승리가 결정되었다.
- 체급 없이, 상대는 무작위로 선택되었다.
- 심판은 위반자를 나뭇가지나 채찍으로 때려서 규칙을 시행했다.
- 시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선수들은 방어 없이 번갈아 타격을 선택할 수 있었다.

현대 권투와 달리, 그리스인들은 근접전을 장려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링 안에 가두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권투 선수들은 공격보다는 방어적으로 싸워 인내심과 주의를 장려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투는 개별 라운드로 나뉘지 않았다. 경쟁자들은 보통 항복이나 상호 기진맥진으로 끝날 때까지 싸웠다. 쓰러진 권투 선수도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약 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5]
권투 선수들을 체급으로 나누는 현대의 관행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시합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은 힘이나 근육량에 상관없이 환영받았고, 참가자들은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서로 경쟁했다.[5]
고대 권투의 정확한 규칙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역사적 참고 자료와 이미지로부터 추론된다. 손으로 어떤 종류의 타격도 허용되었지만,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상대방을 잡거나 레슬링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경쟁자들의 끈기로 인해 시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선수들은 녹아웃이나 항복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서로를 방어하지 않고 번갈아 타격을 선택할 수 있었다. 심판들은 아마도 위반자들을 나뭇가지나 채찍으로 때려서 규칙을 시행했을 것이다.[5]
고대 그리스 권투에서는 발차기 사용이 허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사료가 몇몇 발견되었지만,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당시의 규칙에 관한 확실한 문헌이나 사료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권투의 정확한 규칙은 명확하지 않으며, 현존하는 제한된 문헌이나 사료로부터 추측할 수밖에 없다.[25]
체중에 따른 체급 구분은 없었고, 알파나 베타와 같은 그리스 문자가 적힌 제비뽑기가 만들어져, 같은 문자를 뽑은 사람들끼리 대결했다.[27]
현대 권투와는 달리, 근접전을 유도하기 위한 로프로 구분된 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권투 선수는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으로 싸웠다고 생각된다. 상반신, 특히 코나 뺨, 턱 등 머리 부분을 향해, 때리고, 치고, 찌르는 손을 사용한 모든 타격 공격이 행해졌다.[28] 또한, 바닥에 쓰러진 경우라도, 현대 권투와는 달리 열 카운트를 세는 일 없이, 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그대로 계속 때릴 수 있었다.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그대로 팔을 높이 올리는 것으로 전의 상실의 신호가 되었다. 시합 시간 및 라운드제는 없고, 한쪽이 이 전의 상실의 신호를 하거나, 실신 또는 피로로 전투 불능이 될 때까지, 시합은 속행되었다. 만일, 시합에서 대전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살아남은 선수가 승자가 되었다.
3. 2. 경기 진행 방식
고대 그리스 권투의 현재 통용되는 규칙은 역사적 참고 자료와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 권투에서 발차기에 대한 증거가 있지만,[8][9][10]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11][12] 온전한 출처와 스포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규칙은 추론될 수 있을 뿐이다.[13]- 잡거나 레슬링은 금지되었다.
- 손으로 어떤 종류의 타격도 허용되었지만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 링은 사용되지 않았다.
- 라운드나 시간 제한은 없었다.
- 한 선수가 포기하거나 무능력해지면 승리가 결정되었다.
- 체급 없이, 상대는 무작위로 선택되었다.
- 심판은 위반자를 나뭇가지나 채찍으로 때려서 규칙을 시행했다.
- 시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선수들은 방어 없이 번갈아 타격을 선택할 수 있었다.
thumb (기원전 500년경, 뮌헨, 고대 미술 박물관 소장)[24]]]
현대 권투와 달리, 그리스인들은 근접전을 장려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링 안에 가두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권투 선수들은 공격보다는 방어적으로 싸워 인내심과 주의를 장려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투는 개별 라운드로 나뉘지 않았다. 경쟁자들은 보통 항복이나 상호 기진맥진으로 끝날 때까지 싸웠다. 쓰러진 권투 선수도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약 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5]
권투 선수들을 체급으로 나누는 현대의 관행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시합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은 힘이나 근육량에 상관없이 환영받았고, 참가자들은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서로 경쟁했다.[5]
고대 권투의 정확한 규칙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역사적 참고 자료와 이미지로부터 추론된다. 손으로 어떤 종류의 타격도 허용되었지만,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은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상대방을 잡거나 레슬링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경쟁자들의 끈기로 인해 시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선수들은 녹아웃이나 항복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해 서로를 방어하지 않고 번갈아 타격을 선택할 수 있었다. 심판들은 아마도 위반자들을 나뭇가지나 채찍으로 때려서 규칙을 시행했을 것이다.[5]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남성뿐이었으며, 거의 전라의 모습으로 시합을 했다. 전신에 올리브 오일을 바르고, 양손에 히만테스를 착용하고 진행되었다.[26] 체중에 따른 체급 구분이 없고, 알파나 베타와 같은 그리스 문자가 적힌 제비뽑기가 만들어져, 같은 문자를 뽑은 사람들끼리 대결했다.[27]
현대 권투와는 달리, 근접전을 유도하기 위한 로프로 구분된 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권투 선수는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으로 싸웠다고 생각된다. 상반신, 특히 코나 뺨, 턱 등 머리 부분을 향해, 때리고, 치고, 찌르는 손을 사용한 모든 타격 공격이 행해졌다.[28] 또한, 바닥에 쓰러진 경우라도, 현대 권투와는 달리 열 카운트를 세는 일 없이, 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그대로 계속 때릴 수 있었다.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그대로 팔을 높이 올리는 것으로 전의 상실의 신호가 되었다. 시합 시간 및 라운드제는 없고, 한쪽이 이 전의 상실의 신호를 하거나, 실신 또는 피로로 전투 불능이 될 때까지, 시합은 속행되었다. 만일, 시합에서 대전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살아남은 선수가 승자가 되었다.
4. 장비
씨:케스투스 (권투)
손과 너클에 사용된 보호 방식은 경쟁자들의 싸움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일리아드》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경까지는 히만테스가 너클과 손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다. 히만테스는 길이가 약 3m에서 3.7m인 황소 가죽 끈으로, 손과 너클을 여러 번 감쌌다. 끈에는 일반적으로 선수가 손가락 4개를 넣고 주먹을 쥘 수 있는 고리가 있었다. 히만테스는 호메로스 시대부터 기원전 5세기 말까지 참가자들이 착용한 유일한 형태의 보호 장비였다. 고전 자료에서는 이를 "부드러운 장갑"이라고 묘사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이 끈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손을 보호하여 더 강력한 펀치를 날릴 수 있게 해주는 현대식 패딩 장갑과 마찬가지로, 타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클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5]
기원전 400년경에는 히만테스와 매우 유사한 '''스파이라이'''(σφαῖραι|스파이라이grc)가 도입되었다. 스파이라이는 손을 감쌀 때 패딩된 내부가 포함되어 있고, 끈의 외부가 훨씬 더 단단하고 뻣뻣하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도록 "날카로운 끈"도 도입되었으며, 서기 200년경까지 사용되었다.[5][6]
'''옥시스'''는 손, 손목, 팔뚝을 감싸는 여러 개의 두꺼운 가죽 띠로 구성되었다. 팔뚝에는 땀을 닦기 위한 양털 띠가 있었고, 팔뚝 위로 뻗어 펀치를 날릴 때 더 큰 지지력을 제공하는 가죽 보조대가 있었다. 너클 부분도 가죽으로 보강되었다.[7]
'''코리코스'''는 현대식 샌드백과 같은 역할을 했다. 팔레스트라에서 연습에 사용되었으며, 모래, 밀가루 또는 좁쌀로 채워졌다. 당시 권투를 묘사한 예술 작품에 흔히 묘사되었다.[5]
4. 1. 히만테스 (Himantes)
히만테스는 소 가죽으로 만든 가죽 끈에 올리브 오일이나 수지를 발라 사용했다. 길이는 약 3m에서 3.7m였으며, 현대 권투 글러브와 달리 상대에게 가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손과 주먹을 보호하여 더 강력한 펀치를 날릴 수 있도록 손과 주먹 부분에 여러 겹으로 감아 사용했다.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는 메이리카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500년경까지 사용되었다.[5]기원전 400년경에는 스파이라이("구"의 의미)가 등장했다. 스파이라이는 히만테스와 매우 유사했지만, 안쪽에 쥘 수 있는 안감이 있었고, 바깥쪽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한 가죽 끈이었다. 게다가 더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해 "날카로운 가죽 끈"이 도입되어 서기 200년경까지 사용되었다.[5][6]
스파이라이가 도입되기 직전에 옥시스가 나타났다. 이것은 두껍고 폭이 넓은 가죽 밴드를 손과 손목, 팔뚝에 감는 것으로,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었지만, 펀치를 날릴 때 더 확실하게 보강하기 위해 가죽 밴드를 감는 범위는 팔뚝까지 연장되었고, 마찬가지로 주먹 부분의 보강도 더욱 강화되었다. 양모로 만든 손목 밴드와 같은 벨트가 팔뚝에 부착되어 땀을 닦는 데 사용되었다.[7]
히만테스의 변천은 고대 그리스 권투의 경기 스타일에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에는 속도, 민첩성, 기교를 갖춘 것이 승리로 이어졌지만, 옥시스 도입 후에는 강력한 펀치의 공방이 벌어지게 되었고, 지구력이 있는 더 체격이 큰 선수가 유리해졌다. 이후 히만테스는 고대 로마에서 철이나 납으로 만든 징이나 칼날 모양의 것을 넣은 보다 살상 능력이 높은 권투 글러브인 카이토스(세스투스라고도 불림)로 발전하게 된다.[21]
4. 2. 스파이라이 (Sphairai)
기원전 400년경, 히만테스와 매우 유사한 스파이라이(σφαῖραι|스파이라이grc)가 도입되었다. 스파이라이는 '구(球)'라는 뜻을 가졌으며, 손을 감쌀 때 안쪽에 패딩이 들어가 있었고 바깥쪽 끈은 훨씬 더 단단하고 뻣뻣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도록 "날카로운 끈"도 도입되어 서기 200년경까지 사용되었다.[5][6]4. 3. 옥시스 (Oxys)
옥시스는 손, 손목, 팔뚝을 감싸는 여러 개의 두꺼운 가죽 띠로 구성되었다. 팔뚝에는 땀을 닦기 위한 양털 띠가 있었고, 팔뚝 위로 뻗어 펀치를 날릴 때 더 큰 지지력을 제공하는 가죽 보조대가 있었다. 너클 부분도 가죽으로 보강되었다.[7] 스파이라이가 도입되기 직전에 권투에 도입되었다. 옥시스 도입 후에는 강력한 펀치의 공방이 벌어졌고, 지구력을 갖춘 더 체격이 큰 선수가 유리해졌다.[20]4. 4. 코리코스 (Korykos)
코리코스는 현대식 샌드백과 같은 역할을 했다. 팔레스트라에서 연습에 사용되었으며, 모래, 밀가루 또는 좁쌀로 채워졌다. 당시 권투를 묘사한 예술 작품에 흔히 묘사되었다.[5] 선수들은 코리코스라고 불리는 샌드백을 쳤다.[22]5. 로마 시대의 권투 (Pugilatus)
로마 제국의 권투 형태는 '주먹'을 뜻하는 라틴어 'pugnus'에서 유래된 ''pugilatus''라고 불렸다(그리스어 ''pygme'').[14] 그리스의 영향은 에트루리아인을 통해 전해졌다. 권투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였으나, 폭력성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해 서기 400년경 금지되었다.[14] 로마 권투에 대한 증거는 고대 문학, 조각, 벽화 및 모자이크에서 발견된다.
기술과 규칙은 그리스 권투와 유사했다.[15]
다음 행위는 위반 사항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용된 장갑이었다. 로마인들은 ''oxys'' 대신 금속 너클이 달린 ''caestus''를 사용했는데, 이는 어깨까지 감싸는 양가죽 보강재가 필요했다. ''caesti''의 여러 묘사에서 스파이크나 칼날이 부착된 모습이 나타난다.[16]
또 다른 주요 차이점은 권투 선수가 몸을 구부리는 대신 위를 보고 서는 자세였다.
경기 종료 방식 또한 변경되었는데, 초반에는 항복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안전을 위해 항복이 추가되었다.[17] ''pugilatus''가 나중에 금지된 이유 중 하나는 잔혹성으로, 경기가 종종 한 선수의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권투 선수들은 또한 타박상, 뇌진탕, 뇌 손상, 내부 출혈 및 골절을 포함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6]
6. 훈련
훈련은 복싱이나 고대 그리스 레슬링 등 격투기를 위한 연습장인 팔레스트라에서 이루어졌다. 고대 그리스의 다른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문 트레이너와 마사지사가 있었고, 부유한 가정의 자제들은 개인 트레이너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선수들은 모래나 밀가루, 잡곡 등을 채운 코류코스라고 불리는 샌드백을 쳤다. 시합장을 설치하기 위해 땅을 파는 것이 훈련의 일부로 행해졌고, 곡괭이는 복서의 상징이 되었다[22]。 이 외에도 스키아마키아라고 불리는 섀도 복싱 훈련도 이루어졌다.
아르카이크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신체 단련과 음악을 불가분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훈련 시 아울로스 연주자의 반주에 맞춰 운동했다[23]。
7. 고대 올림픽 챔피언
- 로도스의 디아고라스
- 타소스의 테아게네스
- 클레이토마코스 (운동선수)
- 멜랑코마스
- 아르메니아의 바라자다트
- 스미르나의 오노마스투스
- 트리타이아의 아게사르쿠스
- 피타고라스 (권투 선수)
- 카리스토스의 글라우코스
- 아우렐리우스 조피로스
- 다마르쿠스
- 아티아나스
- 호루스 (운동선수)
- 테오티무스: 엘리스 출신의 권투 선수. 올림피아에는 그를 기리는 조각상이 세워졌다. 그의 아버지 모스키온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에 동행했다.[18]
- 바라자다트
로도스의 디아고라스는 고대 올림픽에서 2번 우승했다. 디아고라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셋 모두 고대 올림픽 우승자였다. 장남 다마게토스는 판크라티온에서 2번 우승했고, 차남 아코우실라오스는 복싱에서 1번 우승했다. 삼남 도리에우스는 판크라티온에서 3번 우승을 차지했다. 장남 다마게토스와 차남 아코우실라오스가 동시에 우승한 기원전 448년의 고대 올림픽에서 디아고라스는 두 아들의 어깨에 들려 경기장을 돌 때 관중들로부터 환호와 함께 "지금 여기서 죽어야 한다, 디아고라스! 다른 곳에서는 올림포스 산에 오를 수 없다!"(인간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영예에 도달하여, 앞으로 이 이상의 영예는 없을 것이라는 최상급의 칭찬의 의미)라고 칭송받았다.
타소스 섬의 테오게네스는 고대 올림픽에서 복싱과 판크라티온에서 각각 1번 우승했으며, 복싱에서 1400번의 경기에 승리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대전 상대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사후에 공적을 기려 세워진 조각상에 대한 전설이 있다.
테베의 클레이토마코스는 고대 올림픽에서 기원전 216년과 212년에 각각 판크라티온과 복싱에서 우승했다. 이스토미아 축제에서는 같은 날 열린 레슬링, 복싱, 판크라티온, 3개 종목 모두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클레이토마코스는 상당히 금욕적이었고 성행위도 금욕했으며, 개의 교미에도 눈을 돌릴 정도였다고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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ボクシ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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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若者の教育における運動競技の役割
[24]
문서
イタリア、[[ヴィテルボ県]]にある[[エトルリア]]都市遺跡、ヴルチで出土した[[アンフォラ]]の[[壺絵]]には、戦意を喪失したボクサーが立てた指を高く上げるところ、その相手になおも攻撃を続ける選手が審判に鞭で打たれる様子が描かれている。[[アウロス]]奏者の姿も見られる。
[25]
문서
Craig, Miller, ''op. cit.''(原註) ''cf.'' スワドリング、前掲、pp. 89 - 9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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メゾ―、前掲、pp. 253 - 257.
[27]
문서
メゾ―、前掲、pp. 253 - 257.
[28]
서적
走る、戦う
岩波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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