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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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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이센은 1566년 스페인 펠리페 2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결성된 귀족 연맹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들은 종교 재판 중단을 요구하며 파르마 공작 부인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이때 한 고문이 이들을 "거지들"이라고 칭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이후 로데베이크 판 나사우와 헨드릭 판 브레데로데를 비롯한 귀족들은 이 명칭을 받아들여, 조국을 위해 거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하며 당의 이름으로 삼았다. 바다의 고이센은 오라녜 공 빌럼 1세가 사략 면허를 부여한 선원들로 구성되었으며, 1572년 브리엘 점령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독립에 기여했다. 고이센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대중문화 작품에 등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네덜란드 저항 단체와 문명 5의 네덜란드 고유 유닛으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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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센
개요
프랑스 할스의 그림
프랑스 할스가 그린 "회전" (1625년 경)
다른 이름바다의 회전
활동 시기16세기
상세 정보
설명16세기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통치에 저항한 귀족 및 반군 집단
어원"거지"를 뜻하는 프랑스어 "gueux"에서 유래
주요 활동종교적 자유 옹호
정치적 독립 추구
스페인 함대에 대한 해상 공격
관련 인물
지도자오라녜 공 빌럼 1세
하르크 후작 앙리 드 브레데로데
주요 인물람부트 발크
얀 판 바텐뷔르흐
빌럼 블뢰이
아데르트 판 뉘엔라르
헤르만 바르트호르스트
조직 및 활동
조직 유형귀족 연합, 해상 게릴라
주요 근거지브릴
플리싱겐
엔크하위전
활동 범위네덜란드, 북해
영향 및 유산
결과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중요한 원동력
상징거지 복장
반달 모양의 메달
회전의 노래
기념네덜란드 역사에서 자유와 독립의 상징으로 기념
관련 용어
바다의 회전해상에서 활동한 회전 단원
숲의 회전육지에서 활동한 회전 단원
기타
관련 사건베스테르헤머 전투
브릴 점령

2. 이름의 기원

고이센의 전통적 상징


"고이센"이라는 이름은 1566년 4월 5일 스페인펠리페 2세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네덜란드의 섭정 파르마의 마가렛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때, 그녀의 고문 중 한 명인 샤를르 드 베를레이몽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거지일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12] 이 말을 들은 귀족들은 오히려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겨 자신들을 "고이센"이라 칭했다.

나사우의 루이와 헨드릭 판 브레데로데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펠리페 2세의 시민적, 종교적 전제 정치에 맞서 네덜란드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귀족 협약"이라는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섭정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궁전으로 행진했고, 이 과정에서 "고이센"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고이센"은 당의 명칭이 되었고, 애국당은 거지 사회의 상징인 지갑과 그릇을 장신구로 사용하고, 게우젠 메달을 만들었다. 이 메달에는 한쪽에 펠리페 2세의 머리가, 다른 쪽에는 "거지의 주머니를 짊어지기까지 국왕에게 충성"이라는 문구와 두 손을 맞잡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고이센"의 원래 동맹은 알바 공작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아 결국 승리로 이어졌다. 네덜란드어에서 "geuzennaam"(회전남)은 언어적 재전유를 위해 사용되는데, 이는 경멸적인 용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육지의 고이센

귀족 협약으로 알려진 엄숙한 동맹에 서명한 귀족 지도자 나사우의 루이와 헨드릭 판 브레데로데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시민적, 종교적 전제 정치로부터 네덜란드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 돕기로 맹세했다. 1566년 4월 5일, 연맹원들은 섭정 파르마의 마가렛에게 '요청'이라 불리는 불만 사항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약 250명의 귀족들이 나사우의 루이와 브레데로데와 동행하여 궁궐로 행진했다. 섭정은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인원의 등장에 놀랐지만, 그녀의 고문 중 한 명인 샤를르 드 베를레이몽이 "''N'ayez pas peur Madame, ce ne sont que des gueux''" ("부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거지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2]

이 호칭은 잊혀지지 않았다. 사흘 뒤, 약 300명의 연맹원들이 호텔 쿨렘부르크에서 개최한 큰 잔치에서 브레데로데는 필요하다면 모두 조국의 대의를 위해 거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이 이름은 당의 칭호가 되었다. 애국자 당은 걸인들의 상징인 지갑과 그릇을 모자에 착용하거나 허리에 매는 장신구로 채택했고, 한쪽 면에는 펠리페 2세의 머리가, 다른 쪽에는 "Fidèle au roy, jusqu'à porter la besace"("왕에게 충성하여, 걸인의 주머니를 들 때까지")라는 모토와 함께 두 손이 맞잡힌 게우젠 메달이 만들어졌다. 걸인들의 원래 동맹은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알바 공작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 원칙은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어에서 ''geuzennaamnl''이라는 단어는 언어적 재전유#언어적 재전유 또는 회복을 위해 사용된다. 즉,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사용하는 경멸적인 용어이다.

1477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된 네덜란드 17주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사후, 아들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았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펠리페 2세는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종교 재판을 실시하고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했다. 또한 도시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시민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대해, 오라녜공 빌럼 1세의 동생 나사우 백작 루트비히와 브레데로데 백작 헨드릭이 중심이 되어 동맹을 결성,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에서 하급 귀족 약 400명이 집결했다.

1566년 4월 5일, 그들은 브뤼셀 궁정에 가서 총독 파르마 공작 부인 마르가레타에게 트리엔트 공의회 결정 사항의 강제를 중단하도록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때, 당황한 마르가레타에게 신하 베를레몽이 "고이센(거지) 무리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고이센"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또한 그들도 이렇게 자칭했다. 이후 "고이센"은 네덜란드의 애국자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항의 행동은 신교도, 특히 칼뱅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칼뱅파의 이칭이 되기도 했다.

고이센은 각지에서 야외 설교를 하고 스페인의 폭정을 비난했으며, 일부 과격파는 교회를 습격하여 성상을 파괴했다. 치안 불안을 우려한 펠리페 2세는 1567년에 알바 공작을 총독으로 파견 ( - 1573년). 80년 전쟁 (1568년1648년)의 개전과 맞물려 알바 공작은 이전보다 더욱 가혹한 압정을 펼쳤다. 박해가 강화되면서 항의 행동은 진압되었다.

4. 바다의 고이센 (Watergeuzen)

1569년 빌럼 1세 판 오라녜는 여러 국적의 무법자들로 구성된 선박들에 나포 면허를 부여했고, 이들은 "바다의 거지들" (Watergeuzen|바터르회전nl, Gueux de mer|귀외 드 메르프랑스어)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위그노 항구 라로셸을 기지로 삼았으며, 빌럼 2세 판 더르 마르크 등 대담한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활동했다.[3][4]

바다의 거지들의 지도자 빌럼 2세 판 더르 마르크


초기에 바다의 거지들은 바다와 육지에서 약탈을 일삼고, 잉글랜드 항구에서 전리품을 처분하며 함선을 정비했다. 1569년 말에는 84척의 배가 활동할 정도로 성장했다.[3]

브리엘 점령, 1572년 4월 1일 (프란스 호헨베르크)


2012년 4월 1일 브리엘 점령 54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퍼레이드. 바다 거지 지도자: 빌럼 2세 데 라 마르크(가운데), 빌럼 블로이스 반 트레슬롱(왼쪽), 레나르트 얀스 데 흐라프(오른쪽).


1572년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항구 이용을 금지하자, 바다의 거지들은 4월 1일 브리엘을 기습 점령했다.[5][6] 이어서 플리싱언도 점령하며, 이는 네덜란드 독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573년 자위더르해 전투에서 바다의 거지들은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고, 각 도시에서 알바 공작에 대한 저항을 확산시켰다. 1574년에는 레이던 공방전을 푸는 데도 기여했다.

코르넬리스 에버르트선 1세의 할아버지 에베르트 헨드릭스전 등, 훗날 네덜란드 해군 영웅이 되는 인물들 중 일부는 바다의 거지 출신이었다.

5. 고이센의 상징



"고이센"이라는 이름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시민적, 종교적 전제 정치에 맞서 네덜란드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결성된 "귀족의 타협"이라는 동맹에서 유래했다. 1566년 4월 5일, 이 동맹의 지도자였던 나사우의 루이와 헨드릭 판 브레데로데는 약 250명의 귀족들과 함께 섭정 파르마의 마가렛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때 섭정의 고문이었던 샤를르 드 베를레이몽이 이들을 "거지들"이라고 칭한 것이 고이센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7]

이후 호텔 쿨렘부르크에서 열린 잔치에서 브레데로데는 조국을 위해 필요하다면 모두 거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고, 이 명칭은 당의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고이센은 거지 사회의 상징인 지갑과 그릇을 모자나 띠에 착용하는 장신구로 사용했으며, 한쪽에는 펠리페 2세의 얼굴이, 다른 쪽에는 "거지의 주머니를 짊어지기까지 국왕에게 충성"이라는 문구와 두 손을 맞잡은 모습이 새겨진 게우젠 메달을 만들었다.[7]

거지 훈장, 주조 은, 1570년경, 슬로건 LIVER TVRCX DAN PAVS ("교황보다 튀르크가 낫다") 및 EN DESPIT DE LA MES ("미사에도 불구하고")


고이센은 반스페인, 반가톨릭 정서를 표현하며, 오스만 제국을 스페인보다 덜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오라녜 공 빌럼은 펠리페 2세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7] 1579년과 1582년 사이에는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대표단이 이스탄불에서 안트베르펀으로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8]

플랑드르 해안으로 스페인의 갤리선을 충돌시키는 네덜란드 함대들


당시 네덜란드 반란군과 오스만 제국은 모두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양측의 협력은 스페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Liever Turks dan Paaps" (차라리 교황보다 튀르크가 낫다)라는 슬로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컸으며, 실제로 고이센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9]

네덜란드어에서 ''geuzennaamnl''(게우젠남)은 경멸적인 용어를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언어적 재전유의 예시로 사용된다.

6. 대중문화 속 고이센

고이센은 샤를 드 코스터의 소설 ''틸 울렌슈피겔의 영웅담''과 밥 드 무어의 만화 시리즈 ''코리, 데 스히프스종겐'', 윌리 반데르스틴의 ''틸 외일렌슈피겔''과 ''데 거이젠'', 한코 콜크와 피터 드 비트의 ''길레스 데 거스''와 같은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대중 소설에 매우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영어로는 세실리아 홀랜드의 소설 ''바다의 거지들''에 등장한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 점령기(1940-1945) 동안 블라르딩겐, 마슬루이스, 로테르담 지역의 반독일 저항 단체가 '고이센'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1]

바다의 거지는 문명 5에서 네덜란드 제국의 독특한 유닛이기도 하다.[1]

바다의 거지는 프로비던스 크리스찬 칼리지의 마스코트이다.[1]

7. 갤러리



오라녜 공과 바다의 거지들이 포위전 이후 레이던에 입성하다.

참조

[1] 서적 Bandits at sea: a pirates reader https://books.google[...] NYU Press 2001
[2] 서적 English/British naval history to 1815: a guide to the literature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3] 서적 The Battles That Changed History https://books.google[...] Courier Corporation 2000
[4] 서적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The Counter-Reformation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1968
[5] 서적 De Opstand 1568–1648: De strijd in de Zuidelijke en Noordelijke Nederlanden, by Arnout van Cruyningen https://books.google[...]
[6] 서적 Chronicles of the Dutch Republic 1567–1702, by Albert Valente https://books.google[...]
[7] 서적 New Turkes: dramatizing Islam and the Ottomans in early modern England https://books.google[...] Ashgate 2005
[8] 서적 Palais de Hollande in Istanbul: the embassy and envoys of the Netherlands since 1612 https://books.google[...]
[9] 서적 Innocence abroad: the Dutch imagination and the New World, 1570–167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10] 문서 バイエルン・オーストリア語、オーストリア語の発音により近い(正確に実際の発音は「ゴイスン」(Geusn))。
[11] 문서 「ヘーゼン」とも表記できる。
[12] 문서 スペイン王としてはカルロス1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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