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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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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조선-한 전쟁은 위만조선과 전한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연나라 장군 출신 위만이 고조선을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건국한 이후, 고조선이 한나라의 사신을 처형하고 흉노와 연합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109년부터 108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한나라는 승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 전쟁은 한민족이 삼국으로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을 상대로 한 첫 번째 대규모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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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선-한나라 관계 - 한사군
    한사군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의 네 군현을 지칭하며,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와 요동반도 주장으로 나뉘고 특히 낙랑군의 위치는 논쟁의 대상이다.
고조선-한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명고조선-한 전쟁
시기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장소요동반도, 한반도, 발해
원인고조선이 중개 무역을 통해 진국의 왕래와 조공을 간접적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함
결과한나라의 승리, 고조선을 병합하고 그 지역에 한사군 설치
교전 세력
교전국 1위만조선
교전국 2한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위만조선우거왕
성기
노인
한음

왕겹
한나라양복
순체
Xun Zhi
병력 규모
위만조선100,000명
한나라50,000명 이상
피해 규모
위만조선전멸 또는 항복
한나라경미

2. 전쟁 배경

기원전 202년, 유방전한을 건국한 후, 노관은 연왕(현재의 베이징 일대)에 봉해졌다. 기원전 195년, 노관이 한나라에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자, 한 고조는 군대를 보내 그를 토벌했다. 연은 패배했고 노관은 흉노로 도주했으며, 그의 부하였던 위만(衛滿)은 동쪽의 고조선으로 피신했다.[2] 위만은 조선인 복장을 하고, 1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갔다.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위만은 요동군 태수를 통해 한나라의 외번이 되어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고, 한나라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려는 북방 민족의 통행을 허용하는 역할을 맡았다.

위만의 손자 고조선 우거왕은 한나라 조정으로 파견된 한반도 각 부족장들의 사신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왕을 꾸짖었으나, 섭하는 사신들의 안전한 통행을 확보하지 못했다.[3] 귀국길에 섭하는 자신을 호송하던 조수 위장(衛長降)을 살해했고, 분노한 우거왕은 군대를 보내 섭하를 죽였다.[3] 이는 한 무제를 분노하게 했고, 결국 전쟁의 직접적인 명분이 되었다.[4]

위만조선이 진번 등과 한나라 사이의 교역을 막아 한나라와 고조선 간의 관계가 악화된 것도 전쟁 발발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5][7]

2. 1. 위만조선의 성장

위만은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중국 연나라에서 기자조선으로 망명했다.[2] 준왕(準王)의 신임을 얻은 위만은 서쪽 변경을 수비하게 되었고, 박사에 임명되어 100리의 땅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위만은 만족하지 않고 유이민을 모아 세력을 키운 뒤 준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했다. 준왕은 최측근 신하들과 함께 남쪽의 진으로 도망가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위만은 전한을 통해 철기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철기는 농업 생산 도구로 사용되어 피지배층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농업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또한, 철기문화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어져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한(漢)과 한반도 남쪽의 나라들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중계 무역을 통해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5][7] 위만조선은 한나라에서 물건을 들여와 주변국에 이익을 붙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많은 이익을 챙겼다.

고조선 우거왕 시기에는 한반도 각 부족장들의 사신이 한나라 조정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3]

위만이 집권한 이후 위만조선은 철제 무기와 중계 무역(조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독점하며 꾸준히 성장하였다. 이를 본 한(漢) 나라는 동북아시아의 각 나라가 조공을 바칠 때 위만조선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한나라에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우거왕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유목 민족인 흉노와 함께 세력을 키워나갔다.

2. 2. 한나라의 동방 정책

위만(중국어: 衛滿, 병음: Wèi Mǎn)은 연나라 장군 출신으로, 노관의 휘하에 있었다. 기원전 202년, 유방전한을 건국한 후, 노관은 연왕(현재의 베이징 일대)에 봉해졌다. 기원전 195년, 노관이 한나라에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자, 한 고조는 군대를 보내 그를 토벌했다. 연은 패배했고 노관은 흉노로 도주했으며, 위만은 동쪽의 고조선으로 피신했다.[2] 이때 위만은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이것이 위만조선이다.[2]

위만은 혜제·여후 시대에 요동태수의 중재로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에 "수비를 굳게 하여 이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 "주변 국가가 한나라에 조공(入朝)하고자 할 때 이를 방해하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위만은 외신이 된 후 주변 국가를 침략했고, 문제 때 조선 정벌이 논의되었으나 문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위만은 한나라를 통해 철기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철기는 농업 생산성을 높여 피지배층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철기문화는 강력한 군사력을 제공하여 위만조선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고조선 우거왕 때에 이르러 위만조선은 더욱 강한 나라가 되었다.

위만조선은 중국 한나라와 한반도 남쪽 나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중계 무역을 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한나라에서 물건을 들여와 주변국에 이익을 붙여 파는 방식이었다.

위만조선의 성장에 흉노와 결합해 위협이 될까 걱정한 한나라는 위만조선에 대국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동북아시아 각 나라가 조공을 바칠 때 위만조선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한나라에 바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우거왕은 이를 거절하고 흉노와 함께 세력을 키웠다.

한편, 우거왕은 한나라 조정으로 파견된 한반도 각 부족장들의 사신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왕을 꾸짖었으나, 섭하는 사신들의 안전한 통행을 확보하지 못했다.[3] 귀국길에 섭하는 자신을 호송하던 조수 위장(衛長降)을 살해했고, 분노한 우거왕은 군대를 보내 섭하를 죽였다.[3] 이는 한 무제를 분노하게 했고, 결국 전쟁의 직접적인 명분이 되었다.[4]

고조선이 흉노와 연합하여 한나라에 대항하는 가능성을 제거하고, 진번 등과 한나라 사이의 교역을 막은 것도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5][7]

3. 전쟁 경과

한나라의 무제는 흉노를 먼저 친 다음 남방의 남월과 동북방의 위만조선을 차례로 공격했다. 왕검성을 향해 한(漢)의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는 산둥반도와 요동에서 각각 진격하였으나, 우거왕이 이끄는 위만조선의 거센 항전으로 밀려났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를 잃고 열흘 동안 산속에서 숨어 지냈고, 이로 인해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 무제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시도했으나, 우거왕이 거부하여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는 왕검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우거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개월 간 치열하게 저항했다.[6][7]

1년간의 전쟁으로 위만조선 백성들은 지쳤고, 지배층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위만조선 성립 당시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태생적 한계가 전쟁 상황에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분열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한나라는 이를 눈치채고 항복하면 높은 벼슬과 재산을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우거왕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려 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한 뒤 항복하고 한나라로 망명했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8]

우거왕 사후에도 왕검성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거듭된 전투 끝에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기(成已)가 죽은 후에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성기는 한나라에 매수당한 우거왕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8]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상대로 전쟁에서 최종 승리했다. 그러나 한군 지휘부 모두 초기 전투 패배, 화의 무산 등의 이유로 처벌받았다.[7]

시간이 흘러 조선에서는 위만의 손자 위우거가 왕이 되었고, 한에서는 문제의 손자 무제가 황제가 되었다. 위우거는 진국이나 진번 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원봉 2년(기원전 109년), 한나라는 문책 사신으로 섭하를 파견했지만, 협상은 결렬되었다. 섭하가 돌아갈 때 배웅 나온 조선의 부왕을 섭하가 살해했고, 이에 분노한 우거는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요동에서 육로로 좌장군 荀彘|순지중국어가 이끄는 군대(병력 수 불명)를, 산동에서는 수로로 누선장군 양복이 이끄는 5만 수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양 군대는 모두 첫 전투에서 위우거에게 격퇴당해 패배했다. 그 후 왕검성에 육박했지만 위우거의 저항도 격렬했고, 순지와 양복이 서로 공을 독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나라 군대는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전투는 장기화되었고, 공성전은 이듬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순지가 양복을 사로잡아 군 지휘를 일원화하여 총공격을 가하면서 한나라가 우세하게 되었다. 위우거는 대신 에게 살해되었고, 삼은 한나라 군대에 항복했다. 그 후에도 왕검성에서는 저항이 계속되었다.

3. 1. 초기 전투 (기원전 109년)

한나라의 무제는 흉노를 먼저 친 다음 남방의 남월과 동북방의 위만조선을 차례로 공격하려 했다. 이에 따라 기원전 109년, 왕검성을 향해 한(漢)의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는 산둥반도와 요동에서 각각 진격하였다.[6][7] 양복이 이끄는 5만 명 규모의 군대는 산둥 성의 기(齊)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 고조선으로 향했고, 순체는 요동 반도를 거쳐 육로로 행군하여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으로 향했다.[7]

그러나 양군 모두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이끄는 위만조선의 거센 항전으로 밀려났다. 양복의 지휘관 중 한 명인 다(Duo)라는 인물이 다수의 병력을 지휘하며 선봉 부대로 나섰으나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양복은 왕검성에 도착했을 때 7,000명밖에 남지 않았고, 적군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본 우거왕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양복의 군대를 격파하고 격퇴했다. 양복은 그 후 10일 동안 인근 산으로 도망친 군대의 잔당을 수습했다. 한편 순체는 압록강 서쪽에서 고조선 군대를 격파하지 못했다.

이러한 패배 소식을 접한 한 무제는 고조선과의 평화 관계를 재건하길 원했다. 우거왕은 이에 동의하여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과 말 5,000필을 한나라 조정에 보냈다. 왕자 및 10,000명의 병력 호위대가 압록강에 이르자, 순체는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자는 순체가 자신을 살해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여 다시 왕검성으로 돌아가 전쟁을 재개했다.

이후 순체는 다시 고조선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에 성공했다. 순지와 양복은 왕검성에 집결하여 포위했지만, 성은 견고하게 방어되었고, 몇 달이 지나도 함락되지 않았다.

3. 2. 교착 상태와 협상 시도

한나라의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은 산둥반도와 요동에서 각각 왕검성을 향해 진격했지만, 위만조선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를 잃고 열흘 동안 산속에 숨어 지내는 등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6] 이에 한 무제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시도했으나,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여 실패했다.[7]

1년 간의 전쟁으로 위만조선 백성들은 지쳤고, 지배층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항복하면 높은 벼슬과 재산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우거왕과 그의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려 했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항복하면서,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은 멸망했다.[8]

우거왕 사후에도 왕검성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대신 성기(成已)마저 우거왕의 아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8] 한나라는 최종 승리했지만, 지휘부 모두 초기 전투 패배와 화의 무산 등의 이유로 처벌받았다.[7]

3. 3. 위만조선의 내분과 멸망 (기원전 108년)

기원전 109년, 한나라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산둥 성에서 발해를 건너는 5만 명의 수군과 요동 반도에서 육로로 진격하는 육군(병력 수 불명)을 동원하여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했다.[6][7]

한나라의 양 군대는 모두 위만조선의 거센 저항으로 패배했다. 누선장군 양복은 군사를 잃고 열흘 동안 산속에 숨었고, 순지는 압록강 서쪽에서 고조선 군대를 격파하지 못했다.

한 무제는 평화 관계를 재건하고자 했고, 우거왕도 이에 동의하여 화친을 시도했다. 그러나 우거왕의 아들이 한나라 사신 순지를 의심하여 왕검성으로 돌아가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순지는 다시 고조선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왕검성을 포위했지만, 함락에는 수개월이 걸렸다. 순지와 양복은 지휘권을 두고 갈등했고, 한 무제는 공손수를 보내 상황을 정리하려 했으나 오히려 공손수가 처형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원전 108년, 1년간의 전쟁으로 위만조선은 지배층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갈등이 주전파와 주화파의 분열로 이어졌다. 노인, 한음, 삼(고조선), 왕협 등은 한나라에 항복을 주장했지만, 우거왕은 반대했다. 결국 주화파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했다.[8]

우거왕이 죽은 후에도 왕검성은 대신 성기(成基)의 지휘 아래 저항했으나, 성기 또한 암살당하면서 결국 함락되었다.[8]

4. 전쟁의 결과

한나라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정복지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려 했다.[2][8] 이 과정에서 고조선 내부 인물들에 대한 처우는 달랐다. 고조선에서 항복한 귀족과 대신들은 제후로 봉해졌지만, 순지는 양복을 함부로 체포한 죄로 기시형에 처해졌고, 양복은 수많은 병사를 잃은 죄로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4. 1. 한사군 설치

기원전 108년, 한나라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을 설치하였다.[2][8] 임둔군진번군은 설치된 지 20여 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 이 지역들은 낙랑군현도군에 소속되었다.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신흥세력의 저항으로 만주흥경 방면으로 옮겨졌다.[4]

한사군 외에도 대방군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요동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가졌던 공손씨가 설치하여 낙랑군 남부 지역 일부를 관할하게 하였다.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이동한 후에도 낙랑군은 유지되었으나, 후한한족(韓族)과 예족(濊族)이 성장하면서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313년에는 낙랑군대방군이 각각 고구려백제에 의해 소멸되었다.[6]

한나라고조선 정복은 원삼국 시대로 이어졌다. 한사군 중 가장 중요한 군은 낙랑군(현재의 평양 근처)이었다.[9] 한편, 고조선에서 항복한 귀족과 대신들은 제후로 봉해졌으나, 순지는 귀국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양포 또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벌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4. 2. 한반도 정세 변화

한나라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사군이 설치되었다.[2][8]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하였다.[8] 이 중 낙랑군은 현재의 평양 근처에 위치했으며,[4] 서기 313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6]

기원전 82년, 임둔군진번군은 폐지되었고, 관할하던 지역은 낙랑군현도군에 소속되었다.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신흥세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주흥경 방면으로 옮겨졌다.

이후 요동에서 독립한 세력인 공손씨가 대방군을 설치하여 낙랑군 남부 지역의 일부를 관할하게 하였다. 후한 말, 한족(韓族)과 예족(濊族)이 세력을 키워 낙랑군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였다. 313년에는 낙랑군대방군이 각각 고구려백제에 의해 소멸되었다.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은 결국 원삼국 시대로 이어졌다.[9] 한편, 고조선의 항복한 귀족과 대신들은 제후로 봉해졌지만, 순지는 귀국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양포 또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벌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5. 역사적 의의

고조선-한 전쟁은 위만조선과 한나라 간의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이 전쟁은 중국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전쟁이었고, 초기에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습 공격과 항전으로 승리한 점이 의미있다.

이 전쟁을 통해 여러 나라로 분리되었던 한민족은 삼국으로 정립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후 중국과의 전쟁은 고구려가 담당하여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한민족으로 거듭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또한, 강대국 중국을 상대로 위협을 가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5. 1. 한국사의 관점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최대의 전투로, 그들의 땅에 한나라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세워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중국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벌인 전쟁이라는 점과 수적으로 밀렸던 초기 전투에서 기습 공격과 항전으로 승리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조선-한 전쟁은 위만조선과 한(漢)나라의 전쟁으로,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있던 한민족이 삼국으로 정립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후 중국과의 전쟁은 고구려가 담당했으며, 고구려는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로써 한민족으로 거듭나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또한 강대국이었던 중국을 상대로 위협을 주었던 첫 사례였다.

5. 2. 동아시아 국제 관계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최대의 전투로, 그들의 땅에 한나라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세워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중국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벌인 전쟁이라는 점과 수적으로 밀렸던 초기 전투에서 기습 공격과 항전으로 승리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조선-한 전쟁은 위만조선과 한(漢)나라의 전쟁으로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 있던 한민족이 ‘삼국(三國)으로 정립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후 중국과의 전쟁은 고구려가 담당했으며, 고구려는 한반도의 방파제 역할로써 ‘한(韓)민족'으로 거듭나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또한 강대국이었던 중국을 상대로 위협을 주었던 첫 사례였다.

5. 3. 한사군의 위치와 성격

한사군은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개의 군을 가리킨다. 『사기』에는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뒤 한나라가 그 지역에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들 중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 후 20여 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 관할하던 지역은 낙랑군과 현도군에 소속되었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은 신흥세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주흥경 방면으로 옮겨졌다.[2][8]

이상의 4개 군 이외에 대방군이라는 군현이 등장한다. 대방군은 요동에서 독립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손씨가 설치한 것으로, 대방군을 통해 낙랑군 남부 지역의 일부를 관할하게 하였다.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이동할 때 낙랑군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후한 말 한족(韓族)과 예족(濊族)이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군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후 313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각각 고구려백제에 의해 소멸되었다.

가장 중요한 군은 낙랑군(현재의 평양 근처)이었으며,[4] 서기 313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6]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은 원삼국 시대로 이어졌다.[9]

5. 4. 위만조선의 정체성

위만은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중국 연나라에서 기자조선으로 망명했다.[1] 준왕(準王)의 신임을 얻은 위만은 서쪽 변경을 수비하고 박사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하사받았다.[1] 그러나 위만은 유이민을 모아 세력을 키운 뒤 준왕을 쫓아내고 정권을 차지했다.[1] 준왕은 최측근 신하들과 함께 한(韓)으로 도망가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1]

참조

[1] 서적 North Korea: A Country Study Federal Research Division 2015-06-15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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