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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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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민왕릉은 고려 시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으로, 1365년 노국공주 사망 후 9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능은 화강암 기단 위에 언덕을 얹은 형태이며, 양과 호랑이 석상, 문무관 석상이 배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유물이 약탈되었으나, 현재는 북한에 의해 보수되어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지리, 석조 건축, 조형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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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공민왕릉 전경
유형국보
국보 번호123호
소재지개성시 개풍구역 해선리
시대고려
정보
로마자 표기Gongminwangneung
한글 표기공민왕릉
다른 이름현정릉 (Hyeonjeongneung)
현정릉 한글 표기현정릉
세계유산 정보
유산 이름개성역사유적지구 - 공민왕릉
공민왕릉 담벼락
지정 번호1278-008
기준(ⅱ), (ⅲ)
영어 명칭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
프랑스어 명칭Monuments et sites historiques de Kaesong
회차제37차
등록 년도2013년
소재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록 구분문화유산
위치 정보

2. 역사

공민왕은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난산으로 죽자 큰 슬픔에 빠졌다. 이에 충렬왕 비인 제국대장공주고릉을 본받아 더 화려하게 자신의 능을 직접 만들기 시작하여 1372년에 완성했다. 1366년에는 자신의 능인 현릉도 함께 만들기 시작했다.[5] 완성된 능은 조각된 화강암 기단 위에 작은 언덕이 얹혀진 형태이며, 주변에는 양과 호랑이 조각상이 배치되어 음양을 상징한다.[1] 능으로 이어지는 "신도(神道)"에는 무관과 문관 석상이 늘어서 있다.

2. 1. 고려 시대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은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비통함을 참지 못해 충렬왕 비인 제국대장공주고릉을 본받되 그보다 더 화려하게 9년간 본인이 직접 주관하여 정릉을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인 1366년 정릉과 나란히 수릉[6] 현릉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5]

2. 2. 일제강점기와 현대

1905년 러일전쟁 시기에 공민왕릉은 일본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은 능의 뒷부분을 폭파시켜 도굴을 감행했는데, 이때 능 내부의 대부분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파괴된 능은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의해 시멘트로 수리되었다.[5]

북한 정권은 공민왕릉을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공민왕릉에 대한 현지지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꾸준한 관심과 관리가 있었다.[5] 이러한 노력은 2013년 공민왕릉이 포함된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결실을 맺었다.[5]

2. 3. 풍수지리와 관련된 전설

공민왕은 왕비가 죽자 왕비의 묘 자리를 찾기 위해 지관들을 고용했다. 그러나 지관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자,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자가 성공하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패하면 즉시 처형하겠다고 엄포했다. 한 젊은 지관이 개성 밖의 한 장소를 검토해 보라고 하자, 공민왕은 몰래 측근들에게 자신이 손수건을 흔들면 지관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1]

지관이 왕의 신하들을 현재 능이 위치한 곳으로 데려가는 동안, 공민왕은 반대편 산에 올라 그 장소를 검토했다. 산 정상에 다다라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본 그는 그곳이 완벽하다고 기뻐하며 젊은 지관을 직접 칭찬하려 했다. 그러나 산을 내려와 보니, 지관은 이미 처형된 뒤였다. 신하들은 그가 땀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지관을 처형하라고 지시하는 신호로 오해했던 것이다. 어리석음을 깨달은 왕은 "아, 이런!" 하고 외쳤고, 신하들은 이 이야기를 기리기 위해 그 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1]

3. 특징

공민왕릉은 당대 고려의 수학, 천문지리, 석조 건축, 조형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능의 위치 선정에는 풍수 사상이 반영되었으며, 이를 위해 많은 지관, 점성가, 수학자들이 자문하였다. 능 터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공민왕은 최고의 묏자리를 찾기 위해 지관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내렸고,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 뛰어난 지관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능이 위치한 산의 이름에 얽힌 전설로 전해진다.

1905년 능실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능의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다.[1] 능 내부의 대부분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민왕의 관은 현재 개성 고려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1. 건축 양식

이 능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고려의 수학, 천문지리, 석조건축물, 조형예술 수준이 집대성된 것이다. 고려 시대 궁전이나 무덤 등의 건축물을 웅장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건축 구획을 여러 층단으로 배치하는 기법을 도입하여, 제일 윗단에 봉분을 두고 그 아래로 여러 층단을 구성하면서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하여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쌍분인 현릉과 정릉의 봉분 높이는 약 650cm, 지름은 약 1300cm이다. 봉분 아래쪽에는 12면 병풍석이 있고, 그 위아래로 다양한 종류의 석재를 배치해 병풍석을 고정하고 있다.[5]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묻힌 묘실은 봉분에 맞춰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두 묘실 측면 중심부에는 묘실들을 내부에서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7]

1365년 인덕왕후가 사망한 후 시작된 공민왕릉 건설은 7년 뒤인 1372년에 완료되었다. 능은 조각된 화강암 기단 위에 작은 언덕이 얹혀진 형태이며, 주변에는 양과 호랑이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호랑이는 맹렬함을, 양은 온순함을 나타내며, 이는 음양을 상징한다.[1] 능으로 이어지는 "신도(神道)"에는 무관과 문관 석상이 늘어서 있다.

돌 양 (양석)


문인석 석상

3. 2. 석물

묘역 주변에는 양과 호랑이 모양의 석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1] 호랑이는 맹렬함을, 양은 온순함을 나타낸다. 능으로 이어지는 "신도(神道)"에는 문관과 문인석 석상이 늘어서 있다. 석상의 배치는 왕에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으며, 능 터가 좋은 풍수를 갖추도록 하기 위해 많은 지관, 점성가, 수학자들이 자문을 받았다.

4. 현대적 의의

공민왕릉은 고려 시대 왕릉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고려의 뛰어난 예술과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증거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 특히 능 주변에 배치된 양과 호랑이 조각상, 그리고 문무관 석상은 고려 시대의 조각 기술과 풍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공민왕릉은 남북한 모두에게 중요한 민족 공동의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1]

하지만 1905년 능실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약탈당하면서 많은 유물이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공민왕의 관은 개성 고려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약탈된 유물들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이다.[1]

참조

[1]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11-08-11
[2] 웹사이트 문화재의 뒤안길(85)-공민왕릉(서울경제, '21.4.5) https://www.cha.go.k[...] 2023-06-09
[3] 문서 寿陵とは生前に作っておいた墓のことである。
[4] 웹사이트 공민왕릉 http://contents.hist[...] 중앙일보 2008-05-04
[5] 웹인용 문화재의 뒤안길(85)-공민왕릉(서울경제, '21.4.5) https://www.cha.go.k[...] 2021-04-05
[6] 문서 수릉(壽陵)은 생전에 만들어놓은 무덤을 말한다.
[7] 웹인용 공민왕릉 http://contents.hist[...] 중앙일보 2008-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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