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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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동면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하는 면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고목근현으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군으로 존속하다가, 1895년 강화군과 합쳐졌다가 분리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강화군에 통합되었고, 1934년 화개면, 수정면과 합면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연백군 출신 실향민들이 정착하였으며,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현재 13개의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동초등학교, 교동중학교, 교동고등학교가 있다. 대룡시장, 교동읍성, 교동향교, 연산군적거지, 화개사 등 역사적 유적지와 고구저수지, 교동도 망향대, 화개산 등의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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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면 | |
---|---|
기본 정보 | |
이름 | 교동면 |
한자 표기 | 喬桐面 |
로마자 표기 | Gyodong-myeon |
광역시도 | 인천광역시 |
시군구 | 강화군 |
면적 | 47.151 |
세대 | 1,469 (2017.12.31. 기준) |
인구 | 2,854 (2022년 2월 기준) |
법정리 | 대룡리, 읍내리, 상용리, 봉소리, 고구리, 삼선리, 인사리, 난정리, 양갑리, 동산리, 서한리, 무학리, 지석리 |
행정리 | 17 |
반 | 127 |
면사무소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동로 485-13 |
2. 역사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으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군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강화군에 통합되었다.[2]
1911년 한일강제병합 당시 송가면은 송남면으로 개칭되었고, 본도는 4개 면 13개 리로 구획되었다. 1914년 합군 이후, 송남면은 삼산면에 부속되었고, 교동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 면이 되었다. 1934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다.[2]
2. 1. 고대 ~ 조선
교동도는 원래 대운도(戴雲島)라고 불렸으며, ‘고림’ 또는 ‘달을신’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을 두어 ‘고목근현’이라 하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군으로 존속하였다.[2] 1895년 고종 32년에는 읍을 폐하고 강화와 합군하였다가 다음 해 7월에 다시 읍으로 하고 군수를 두었다.[2]2. 2.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1934년 4월 1일 강화군 화개면과 수정면이 합병하여 교동면이 되었다.[3]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4]교동도는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우며, 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은 연백군(현 연안군)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직후 남북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교동도와 38도선 남쪽에 있던 연백군의 왕래는 활발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연백군에서 온 피난민이 교동도로 쇄도했고, 전쟁이 휴전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연백군은 북한의 영역이 되었고, 연백군 출신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교동도에 정착했다.
교동도 일대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 되면서 외부와의 교류도 제한되었고, 섬 내의 발전은 섬 밖보다 늦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룡시장 등 옛 한국의 풍정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2014년에 교동대교가 완공되자 섬 안도 향수를 찾는 관광객에 의해 관광화되어 옛 풍경은 사라져가고 있다.
2011년 6월 17일에는 해병대 민항기 오인 사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2014년 7월 1일 교동대교가 완공되었다.
2. 3. 대한민국
- 1995년 3월 1일 : 강화군에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4]
- 2011년 6월 17일 : 해병대 민항기 오인 사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 2014년 7월 1일 : 교동대교가 완공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이후 교동도는 향수를 찾는 관광객을 위한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옛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3. 지리
교동도 일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우며, 강을 사이에 두고 연백군(현 연안군)과 마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직후 남북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이었기 때문에 교동도와 38도선 남쪽에 있던 연백군의 왕래는 활발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연백군에서 많은 피난민이 교동도로 몰려왔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연백군은 북한 땅이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연백군 출신 피난민들은 교동도에 정착하였다.
이후 교동도 일대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되어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되었고, 섬 내부의 발전은 더뎌지게 되었다.
4. 행정 구역 (법정리)
5. 교육
교동도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있다. 초등학교는 교동초등학교, 지석초등학교, 난정초등학교가 있고, 중학교는 교동중학교, 고등학교는 교동고등학교가 있다.
6. 명소 및 관광지
한국 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만든 대룡시장은 과거 한국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1] 교동읍성, 교동향교, 연산군적거지, 화개사 등 역사적 유적지가 있다.[1] 고구저수지, 교동도 망향대, 화개산 등 자연 경관도 훌륭하다.[1]
2014년 교동대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교동도 일대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되어 섬의 발전이 더뎠다.[1] 이 때문에 대룡시장 등 옛 한국의 풍경이 보존될 수 있었으나, 교동대교 완공 이후 관광객이 늘면서 옛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강화도 > 행정 > 교동면
http://www.ganghwado[...]
2021-12-23
[2]
웹사이트
교동면의 유래 및 지역특성
http://www.ganghwa.i[...]
2012-07-05
[3]
간행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
조선총독부
1934-03-10
[4]
법률
서울특별시광진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광역시·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
199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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