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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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국제는 전한 초기에 시행된 통치 체제로, 군현제와 봉건제를 혼합한 형태이다. 진나라 멸망 후 항우의 봉건제 부활 시도를 거쳐, 한 고제는 수도 주변에는 군현제를, 나머지 지역에는 제후들의 봉국을 두는 군국제를 실시했다. 초기에는 제후들의 반란과 숙청이 반복되었고, 고황후 사후에는 황족만이 제후가 될 수 있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군국제는 시행 초기부터 제후들의 모반과 한나라 정부의 숙청으로 혼란을 겪었다. 동성 제후들 역시 중앙 정부에 위협이 되었기에, 전한 문제 때부터 제후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전한 경제 때 영지 삭감이 본격화되자 오초칠국의 난(기원전 154년)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이후 제후들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전한 무제는 추은령(기원전 127년)을 통해 제후들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켜, 군국제는 명목상으로만 남고 실질적으로는 군현제가 확립되었다.[1]
전한 초기에 실시된 군국제 하의 제후왕국은 중앙 정부와 유사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왕국에는 상국 대신 승상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의 임명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이하 관리들은 왕이 직접 임명할 수 있었다. 왕은 자국 내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화폐 주조와 세금 부과 등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제후들의 세력이 중앙 정부의 위협이 되자, 한 문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한 경제 시기에는 영지 삭감으로 인해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했으나, 진압 이후 제후들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무제는 추은령을 통해 제후들의 영지를 분할 상속하게 하여 세력을 더욱 약화시켰고, 결국 군국제는 명목만 남고 군현제가 실질적으로 확립되어 중앙 집권이 강화되었다. 제후국은 한나라 중앙 정부와 유사한 체제를 갖추었으나, 오초칠국의 난 이후 국상이 임명되고, 왕의 권한이 축소되면서 군과 차이가 없어졌다.
2. 역사
2. 1. 전한 초기의 군국제
기원전 206년 진나라가 멸망하면서 군현제가 무너지고 전국시대의 여러 왕국들이 부활하였다. 항우는 18명의 제후를 분봉하여 봉건제로 회귀하였으며, 각 왕국들은 전국시대 때처럼 독자적인 영토와 군사력을 갖춘 독립국가였다. 초한전쟁을 통해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의 패권을 잡은 전한 고제는 당시까지 남아 있던 여러 제후들의 봉국을 승인하고 다른 공신들을 추가로 제후로 봉하였다. 그러나 전쟁 당시 고제의 직할령이었던 지역에는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수도 장안과 가까운 지역에는 군현제가 실시된 직할령이 1/3, 나머지 2/3의 지역은 제후들의 영토로 편제되는 군국제가 실시되었다.[1]
군국제는 시행 초기부터 제후들의 모반과 이를 구실로 하는 한나라 정부의 숙청으로 난맥상을 보였다. 고제가 황제로 재위한 7년 동안 장사왕을 제외한 모든 왕국의 군주들이 숙청되었으며, 이들의 후임으로 한나라의 황족들이 임명되고 추가로 봉국이 설치되었다. 고제가 사망하는 시점에서 한나라의 직할령은 15개 군이었고, 연, 대, 조, 제, 양, 초, 오, 회양, 회남, 장사의 10개 왕국이 남아 있었다. 왕에 봉작될 수 있는 것은 황족으로 제한되고 성씨가 다른 공신들은 1개 현을 영지로 하는 열후에 봉작되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고황후는 섭정 기간에 황족 제후들을 제거하고 자기 일가인 여씨를 왕으로 세워 잠시 이 전통에 대항했으나, 기원전 180년에 고황후가 죽고 곧바로 일어난 제여의 난으로 인해 여씨는 몰락하고 전통은 계속되었다.
2. 2. 군국제의 변화와 중앙 집권 강화
전한 문제 때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기원전 177년)과 회남왕 유장의 반란 기도(기원전 174년)를 계기로 제후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영지를 분할·삭감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1] 전한 경제 때 조조가 제후 영지 삭감을 상소한 후 제후들의 비리나 잘못을 이유로 영지 삭감이 본격화되자, 오왕 유비를 중심으로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오초칠국의 난(기원전 154년)을 일으켰다.[1] 태위 주아부가 이끈 진압군에 의해 3개월 만에 진압된 후, 제후들은 봉국의 정치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고, 봉국은 황제가 임명하는 국상(相)이 총괄하고 모든 관리를 황제가 임명하게 되면서 제후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다.[1] 기원전 127년 전한 무제는 추은령을 반포하여 제후들의 영지를 상속할 때 여러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하도록 하여 제후들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켰다.[1] 이로써 군국제는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남고 실질적으로 군현제가 확립되어 중앙집권의 기초가 굳어졌다.
3. 제후국의 체제
오초칠국의 난 이후, 승상은 폐지되고 국상이 설치되었으며, 왕의 관리 임명권 대부분은 황제에게 회수되었다. 왕국령은 분할과 몰수를 거듭하며 내사 관할 지역만 남게 되었다. 왕국의 규모는 군과 비슷해졌고, 추은령에 따른 분할상속으로 실제로는 군보다 작아졌다. 왕은 봉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왕국 관리는 모두 황제가 임명하여 군과 국의 차이는 명칭뿐이었다.[1]
3. 1. 초기 제후국의 체제
전한 초기에 실시된 군국제 하의 제후왕국 체제는 중앙 정부와 유사했다. 왕국은 여러 군을 통치했고, 각 군의 태수는 왕의 지배를 받았다. 왕국의 수도가 있는 군에는 태수 대신 내사를 두었다. 왕국의 지방 행정 체제는 내사 관할 지역과 지군(내사 관할이 아닌 군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왕국에 재상으로 상국을 두었으나, 이후 승상으로 대체되었다. 상국과 승상의 임명권은 황제에게 있었지만, 그 이하 관리들은 왕이 임명할 수 있었다. 왕은 자국 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으며, 법적으로도 왕국은 한나라의 직할령과 다른 나라로 취급되었다. 왕국은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3. 2. 오초칠국의 난 이후 제후국의 변화
오초칠국의 난 이후, 승상은 폐지되고 국상이 설치되었으며, 왕의 관리 임명권 대부분이 황제에게 회수되었다.[1] 다만, 형산왕 유사가 범죄를 이유로 질이백석 관리의 임명권을 빼앗긴 사례를 볼 때 하급 관리의 임명권은 한 번에 회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 이와 함께, 거듭된 왕국령의 분할과 몰수로 왕국은 내사를 제외한 지군들을 모두 상실했다.[1] 그 결과 왕국의 규모는 형식적으로 군과 차이가 없어졌고, 실제로는 추은령에 따른 분할상속 때문에 보통의 군보다도 더 작아졌다.[1] 이에 따라 국상의 권한은 사실상 군의 태수와 유사해졌고, 이는 전한 말 내사가 폐지되고 내사의 직무도 국상이 맡으면서 더욱 확실해졌다.[1] 왕은 봉국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왕국의 관리도 모두 황제가 임명했기 때문에 사실상 군과 국은 관직의 명칭만 다를 뿐 차이가 없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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