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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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업회는 1911년 6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설립된 한인 단체이다. 표면적으로는 농업, 상업, 공업, 교육 진흥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한국 독립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최재형이 초대 회장을 맡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을 발행하며 한인 사회의 결속을 다졌다. 권업회는 교육 활동,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 운동을 펼쳤으나,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1914년 8월 7일 강제 해산되었다. 권업회의 활동은 이후 전로한족중앙회, 대한국민의회 등으로 이어져 독립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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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설립된 단체 - 국제애견연맹
국제애견연맹(FCI)은 1911년 설립된 국제적인 애견 단체로, 순종견의 번식, 전시, 심사에 대한 전 세계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고 혈통서 상호 인정 보장, 견종 표준 제정 및 관리, 도그 쇼 심사위원 관리, 견종 분류 등의 기능을 수행하며 세계 각국 도그 쇼와 콘테스트 결과를 관리한다.
권업회 |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Gwoneophoe |
다른 로마자 표기 | Gweon-eophoe Geun-eophoe |
한국어 표기 | 권업회 근업회 |
러시아어 표기 | Квонъёбхве; Квонъобхве |
개요 | |
창립일 | 1911년 6월 1일 |
해산일 | 1914년 8월 1일 |
목적 | 러시아 연해주 내 한인 대표 및 조정 한국 독립 운동 비밀 지원 |
본부 | 신한촌,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제국 |
2. 설립 배경
1864년 이래 권업회 창립 전후까지 20만 명 가량의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분류 | 설명 | 주요 인물 |
---|---|---|
첫째 | 러일전쟁 이전에 이주하여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러시아에 귀화하여 정치·경제적 지위와 신분을 획득한 인물들. 한인의 이주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로 부상하여 한인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 각 지방 한민회의 풍헌(風憲)·풍속(風俗)·도헌(都憲) 등의 직임을 맡아 한인사회의 자치제 확립에 기여. | 최재형, 최봉준, 김학만, 김도녀, 차석보, 김익용, 김병학 |
둘째 | 국내 및 간도에서 일제와 항전하다 북상한 의병 계열. 1908년을 전후 최재형 등과 연합하여 의병단(義兵團)을 정비, 1910년 5월 13도의군을 편성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전개. |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
셋째 | 국내 등의 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군대 해산 전후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로 삼은 계열. 급진적 의병항전보다는 민족의 실력 양성을 바탕으로 ‘독립전쟁론’에 더 큰 비중을 둠. 연해주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 총회와 그 지회(支會) 등을 결성. | 이상설, 이종호, 신채호, 이동휘, 김하구, 윤해, 정재관 |
1911년 5월 20일 이종호, 엄인섭, 최재형, 홍범도, 김익용, 강택희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권업회를 조직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초기의 최대 한민족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겉으로는 순수한 경제활동을 위한 단체인 것처럼 보였으나, 이는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이었고 실제로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최재형을 비롯하여 연해주에서 한인의 이주 개척과 자치,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해 온 인물들이 13도의군과 성명회를 조직하였다가 핵심들이 일제의 외교공세로 곧 러시아 당국에 체포, 투옥되었지만, 1911년 들어 감옥에서 풀려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재집결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한국은 쇄국 정책을 펼쳤고, 한국인들은 국경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4] 1800년대 후반,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기근을 피해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일본 제국은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고, 결국 1910년 한국을 식민지화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신한촌이라는 한국인 거주 지역이 생겨났고, 이곳은 망명한 한국 독립 운동과 독립 운동가들의 중심지가 되었다.[5][6][7]
3. 조직
창립 당시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두었으며, 연해주 주요 지역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를 선임하고, 각 지방으로 회원권유위원을 파견하여 회세(會勢)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권업회는 대외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러시아 극동총독 곤닷지의 허가를 얻었다. 그 해 12월 17일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을 개정하고,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어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의장에는 이상설, 부의장에는 이종호가 선임되었다.
초창기 회원 수는 약 300명이었으나, 1913년 10월에는 2,600명, 1914년에는 8,579명으로 늘어났다.[7]
권업회는 1911년 7월 16일 현지 청년 단체인 청년근업회(靑年勤業會)를 흡수하고, 청년 단체의 기관지인 《태양보》의 운영과 자금 지원을 맡았다.[7] 그러나 내부 분쟁[9] 과정에서 친일파 한국 첩자 엄인섭에 의해 약 15,000개의 활자가 도난당하면서[10][11] 《태양보》 발행은 사실상 중단되었다.[7]
3. 1. 파벌 갈등과 통합
권업회는 1911년 6월 1일 신한촌에서 창립되었다.[7] 표면적으로는 농업, 상업, 공업, 교육 진흥을 위한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7]
권업회 내부에는 함경도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북파(北派)를 비롯해 여러 파벌이 존재했고, 정치적 경쟁이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 1911년 9월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흡수된 서울파(서울派)도 있었다.[7] 이 파벌들은 권업회 이전의 단체들에서도 수년간 존재해 왔으며, 권업회 내에서도 여러 이념적 문제로 초기에는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단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7]
4. 활동
1911년 5월 20일 이종호(李鍾浩), 엄인섭(嚴仁燮), 최재형, 홍범도, 김익용(金翼鎔), 강택희(姜宅熙)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Shinhanchon|신한촌영어(新韓村)에서 조직한 국권피탈 이후 초기의 최대 한민족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겉으로는 순수한 경제활동을 위한 단체처럼 보였으나, 이는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이었고 실제로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7] 1911년 6월 1일 신한촌에서 창립되었으며,[7] 창립총회에서 최재형과 홍범도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다.[7] 초창기 회원 수는 약 300명이었다.[7]
권업회의 근본 목표는 광복군(光復軍) 양성에 있었다. 광복군 양성의 기반이 되는 교육 진흥과 농업, 공업, 상업 등 실업의 권장을 주창하였고, 군대의 양성은 가능한 한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권업회 내부에는 함경도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북파(北派)를 비롯해 여러 파벌이 존재했다.[7] 이 파벌들은 권업회 이전의 단체들에서도 수년간 존재해 왔으며, 권업회 내에서도 여러 이념적 문제로 초기에는 갈등을 겪었으나, 일본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단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7]
1911년 말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지방 정부는 권업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려 시도했으며, 단체의 내부 분쟁을 조정하는 회의를 개최했다.[7] 당시 이 지역의 총독이었던 니콜라이 곤다티는 권업회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9] 단체의 운영 구조가 개편되었고, 12월에 두 파벌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통합되었다.[7] 12월 19일, 권업회는 러시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한인 단체가 되었다.[9]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권업회는 블라디보스토크뿐만 아니라 이 지역 전체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었다.[7][9] 니콜라예프스크, 하바롭스크, 파르티잔스크, 우수리스크 등 한인들이 거주하는 다양한 지역에 지부를 설립, 1914년 7월까지 10개의 지부를 갖추었으며, 회원 수는 약 1만 명에 달했다.[7] 1914년에는 신한촌 거류민회를 흡수했다.[7]
권업회 재정은 1912년 5월 5일에 창간된 기관지 ''권업신문'' 발행에 주로 의존했다.[9] 권업회는 회비와 기부금을 받았지만, 회원 이종호가 단체 활동에 상당한 자금을 기여했다.[7]
4. 1. 언론 활동
권업회는 Kwonop Sinmun|권업신문영어을 창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교민을 단결시키며, 한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7]권업회는 현지 청년 단체인 청년근업회(靑年勤業會)를 1911년 7월 16일에 흡수하고, 청년 단체의 기관지인 《태양보》의 운영과 자금을 지원했다.[7] 그러나 내부 분쟁[9] 과정에서 친일 한국인 첩자 엄인섭에 의해 약 15,000개의 활자가 도난당했고,[10][11] 이로 인해 《태양보》 발행은 사실상 중단되었다.[7]
4. 2. 교육 활동
권업회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기반으로 교육 진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 있던 한인학교인 계동학교(啓東學校)를 대규모의 한민학교(韓民學校)로 확대하여 한인들의 민족주의 교육의 중심지로 삼았다.[7] 또한,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교민을 단결시키며, 한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7]4. 3. 군사 활동
권업회는 광복군 간부 양성을 위해 1913년 동북만 수분대전자의 나자구에 독립운동사상 최초의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 운영하였다. 졸업생이 상당수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광복군의 군영지(軍營地) 확보를 위해 러시아의 극동총독과 교섭을 벌여 적지의 조차(租借)를 추진하였다. 라브류와 밀산부 북쪽에 있는 항카호 주변의 이류가(伊柳街) 및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강구(江口)인 올라까하라는 곳의 토지를 조차하였다. 겉으로는 한인의 집단 이주를 추진하는 것처럼 하였지만, 실제로는 군영지 마련과 광복군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 등으로 불리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를 운영하였다. 양군호와 해도호는 겉으로는 잡화상점에 불과했으나 실제로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범도가 회장으로 있던 노동회(勞動會)도 한인 노동자에게 일터를 마련하여 생활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수입 중 일부를 저축하여 광복군을 양성하는 데 쓰였던 결사로 보인다.
이상설을 비롯한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이 주가 되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을 규합,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추어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건립하였다. 이상설과 이동휘를 각기 정·부통령으로 선출,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광복군정부는 그 해 9월에 그 모체인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확립에 따라 탄압을 받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8]
한편, 권업회는 비밀리에 한국 독립을 위한 무력 활동을 계획했다.[12][9] 1912년 6월, 이종호, 신채호, 윤해는 한국 병합을 감독하고 당시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2]
1913년 6월, 권업회는 1914년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의 5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 제안을 승인받았다. 이 제안에는 기념비 건립, 역사 연구, 텍스트의 러시아어 및 한국어 번역 등이 포함되었다.[7] 실제로는 이 자금이 권업회의 비밀 무력 조직이자 한국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에 사용될 예정이었다.[7] 이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전역의 한인 단체들과 활동을 조율했다. 그들은 만주 왕청현에 군대와 무력 훈련 학교를 설립했다.[7]
4. 4. 대한광복군정부 수립
1913년 권업회는 동북만 수분대전자의 나자구에 독립운동사 최초의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하여 광복군 간부 양성을 추진하였고, 상당수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보인다.러시아 극동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 군영지 확보를 위한 적지 조차(租借)를 추진, 항카호 주변 이류가(伊柳街) 및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 합류 지점인 강구(江口)의 올라까하라 토지를 조차하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한인의 집단 이주 추진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군영지 마련 및 광복군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 등 광복군 양성 비밀결사도 운영되었다. 이들은 잡화상점으로 위장하였으나, 실제로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활동을 전개하였다.
홍범도가 회장으로 있던 노동회(勞動會) 역시 한인 노동자에게 일터를 제공하고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수입 일부를 저축하여 광복군 양성에 사용하는 결사로 추정된다.
1914년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은 중국과 러시아의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추어 블라디보스톡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건립하였다. 이상설과 이동휘를 각각 정·부통령으로 선출, 국내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고자 하였으나, 대한광복군정부는 그해 9월 모체인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확립에 따른 탄압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12][9]
한편, 권업회는 비밀리에 한국 독립을 위한 무력 활동을 계획했으며,[12][9] 1912년 6월, 이종호, 신채호, 윤해는 한국 병합을 감독하고 당시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다.[12]
1913년 6월, 권업회는 1914년 러시아 이주 한인 5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 제안을 승인받았다. 이 제안에는 기념비 건립, 역사 연구, 텍스트의 러시아어 및 한국어 번역 등이 포함되었으나,[7] 실제로는 이 자금이 권업회의 비밀 무력 조직이자 한국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에 사용될 예정이었다.[7] 이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전역의 한인 단체들과 활동을 조율했으며, 만주 왕청현에 군대와 무력 훈련 학교를 설립했다.[7]
5. 해체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 정부는 권업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권업회가 정치적 목적을 띠고 있음을 간파하고,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을 탄압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러시아 주재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관에서는 러시아 당국에 권업회와 권업신문 등의 폐지와 이종호, 이동녕, 김하구, 오주혁, 이갑, 안공근 등 블라디보스토크, 연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는 한인 운동자들의 추방을 요청하였다.[7]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맹국이 된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1914년 8월 7일 권업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기관지인 『권업신문』도 정간되었다.[7] 그러나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의 창설로 이어졌다.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이러한 활동을 통한 유대와 항일독립투쟁 의지는 1919년 3월 17일 성립된 대한국민의회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9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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