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코지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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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코지 사토시는 1936년 출생하여 2010년 사망한 일본의 정치 운동가이다. 그는 1950년대 일본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탈당 후, 1960년 안보 투쟁에서 전학련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후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중핵파 지도자로 활동하며, 1960년대 도쿄 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1년 외무성 심의관 자택 방화 사건에 대한 그의 발언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1969년에는 『역사 선택으로서의 70년 투쟁』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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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코지 사토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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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기타코지 |
이름 | 사토시 |
원어 이름 | 北小路 敏 |
로마자 표기 | Kitakōji Satoshi |
출생일 | 1936년 8월 4일 |
사망일 | 2010년 11월 13일 |
국적 | 일본 |
직업 | |
직업 | 좌익 정치 운동가 |
활동 | |
활동 기간 | 불명 |
주요 업적 | 불명 |
대표작 | 불명 |
2. 생애
기타코지 사토시는 1936년 교토시에서 태어나 2010년 11월 13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초기 생애 및 학생 운동 시기(1936년~1962년)와 중핵파 활동 시기(1963년~2010년)로 나눌 수 있다.[1]
초기에는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전학련 지도자로 활동하며 6·15 국회 돌입 데모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공산주의자 동맹(분트)를 거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 시미즈 다케오와 함께 중핵파 지도자로 활동했다.
중핵파 활동 시기에는 여러 차례 도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67년에는 제1차 하네다 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1991년 외무성 심의관 실부 자택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오폭이 아니다"라며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학생 운동 (1936년 ~ 1962년)
1936년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토 아사히오카 중학교 사건 당시 교두이자 교토부 의회 의원을 지낸 기타코지 타카시였다.[1]1954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56년 교토 시립 무라사키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토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1958년 9월, 일본공산당에서 탈당했다.[1]
1960년 안보 투쟁에서 전학련 지도자로 알려졌다. 가바 미치코가 사망한 6·15 국회 돌입 데모의 최고 지휘자였으며, 당시 공산주의자 동맹(분트)에 소속되어 있었다. 1962년 교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1]
2. 2. 중핵파 활동 (1963년 ~ 2010년)
1960년 안보 투쟁에서는 전학련의 지도자로 알려졌다. (가바 미치코가 사망한 6·15 국회 돌입 데모의 최고 지휘자였다.) 당시에는 공산주의자 동맹 (분트)에 소속되어 있었다. 1962년 교토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안보 투쟁 후 분트의 분파를 거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했다. 시미즈 다케오와 함께 고참 중핵파 지도자로 활동했다.1963년 분열에서는 중핵파에 속했다. 1965년 도쿄 도의회 검은 안개 사건에 따른 자율 해산으로 인한 도 의원 선거에서는 스기나미구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법정 득표수를 넘어 일부 거대 정당 공인 후보도 득표수에서 이길 정도로 선전했다. 1967년 도 의원 보궐 선거, 1969년 도 의원 선거에도 입후보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입후보에 대해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삼파 (공산주의자 동맹, 중핵파, 사청동 해방파) 전학련의 지도자가 왜 의회에 나가려고 하는가, 평소 행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자 "우리는 아나키도, 반 의회주의도 아니다. 혁명적 의회주의다"라고 답했다. 최종적으로 의회는 폐지해야 하지만, 천하를 얻는 과정에서 의회에서 발언력을 갖는 것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스기나미구에서는 그 후에도 중핵파는 일정한 지반을 유지하여, 1989년에는 하세가와 히데노리가 스기나미 혁신 연맹(현: 도정을 혁신하는 회) 공인으로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신좌익 각 파는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 들이닥쳐 기동대와 충돌했다 (제1차 하네다 사건). 이때 기타코지도 체포되었다.
1991년, 옆집을 오폭한 외무성 심의관 실부 자택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해 보도 관계자로부터 사건에 대해 질문받고 "오폭이 아니다", "죄를 물을 사람의 자택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이상, (가족이 말려드는 것은) 아슬아슬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가족에게도 반쯤 책임이 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라고 정당화하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다만, 쓰쓰이 코이치를 노린 이유로 당시 천황·황후의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여러 나라 순방을 주선했다는 이유였지만, 쓰쓰이는 전혀 무관했기에 기타코지 등 중핵파에 의한 명백한 실책이었다. 그 후 눈에 띄는 활동은 없었지만, 항상 공안 경찰의 시찰 대상이었다.
2010년 11월 13일, 입원 중인 병원에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1].
3. 사상 및 평가
기타코지 사토시는 1936년 교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토 시립 중학교 국어 교사이자 교토부 의회 의원이었다. 1954년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8년에 탈당했다.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전학련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을 거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에 가입했다. 이후 시미즈 타케오와 함께 중핵파 지도자로 활동했다.[1]
그는 1965년, 1967년, 1969년 도쿄 도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우리는 무질서도 반 의회주의도 아니다. 혁명적 의회주의다"라고 주장하며, 혁명 과정에서 의회에서의 발언권 확보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1]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려다 체포되기도 했다(1차 하네다 사건).[1]
1991년 외무성 심의관 친아버지 집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오폭이 아니다"라며, "가족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비판을 받았다.[1] 2010년 패혈증으로 사망했다.[1]
3. 1. 중핵파의 폭력 투쟁 정당화
北小路 敏일본어는 1991년 외무성 심의관 실부 자택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해 "오폭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죄를 물을 사람의 자택을 공격 대상으로 하는 이상, (가족이 말려드는 것은) 아슬아슬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가족에게도 반쯤 책임이 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라고 정당화하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1] 이는 명백한 테러행위에 대한 옹호이며,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2차 가해라는 비판을 받았다.3. 2. 비판
기타코지 사토시는 혁명적 의회주의를 주장하며 의회 진출을 시도한 것에 대해 모순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우리는 무질서도 반 의회주의도 아니다. 혁명적 의회주의다"라고 발언하며, 혁명 과정에서 의회에서의 발언권 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또한, 1991년 외무성 심의관 실부 자택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해 "오폭이 아니다", "가족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라며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1]
4. 저서
- 1969년 자유국민사에서 『역사 선택으로서의 70년 투쟁』을 저술하였다.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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