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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흥 (국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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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천흥은 대한민국의 전통 무용가이자 국악인으로, 해금 연주자이다. 1922년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며, 이후 아쟁과 양금도 익혔다.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의 예능 보유자였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아악과 궁중무의 재현 및 전승에 힘썼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64년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98세에 사망했으며, 2002년에는 한국 전통 음악 관련 자료를 하와이 대학교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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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흥 (국악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천흥
김천흥
이름김천흥
한자 표기金千興
로마자 표기Gim Cheon-heung
분야한국 전통 음악
악기해금, 아쟁, 양금
출생과 사망
출생일1909년 3월 30일
출생지한성부
사망일2007년 8월 18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사망 원인알 수 없음
매장지알 수 없음
발견지알 수 없음
경력
활동 시기1923년 ~ 2007년
종교개신교
기타
각주20131006103041 Wayback Machine
깨진 링크

2. 생애

서울시 남대문 양동 출생이다.[3] 14세 때인 1922년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며, 아쟁과 양금도 배웠고, 이듬해인 1923년 제2기생으로 졸업하였다.[4] 같은 해에 순종황제 탄신 오순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했고,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 아악수, 아악수장을 지냈다.[5]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佾舞,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 부문과 제39호 처용무의 무용과 가면 제작 부문의 보유자였다.[6]

1951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을 지냈다.[5]

아악과 궁중무(宮中舞)의 재현·전승·보급에 힘썼고, 탈춤을 체계화시키고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 5회의 발표회를 가졌으며, 1962년에는 〈처용랑〉으로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에 〈종묘제례악〉으로 기능보유자 제1호로 지정되었고,[4]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5]

국립국악원 이사, 국립국악원 국악사, 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경희대·이화여대 강사 등을 역임했다.[4]

2018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국악인 3명의 모습을 담은 ‘한국의 소리’ 기념우표 3종을 발행했는데 이번 기념우표에는 전통무용가이자 해금 연주자인 김천흥의 모습이 담겼다. 우표 전지에 있는 QR코드를 휴대전화로 찍으면 연주를 들을 수 있다.[7]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의 50세 생일 축하 공연에서 춤을 춰 "조선 왕조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다. 그는 또한 이선용에게서 해금과 아쟁을 비롯한 다른 한국 전통 악기들을 배웠다. 그는 조선 왕조의 궁중 무용을 기존의 12가지에서 40가지로 확장시켰다.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업적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서 해금을 전공했으며, 아쟁과 양금도 배웠다. 1923년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4] 같은 해에 순종황제 탄신 오순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했다.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 아악수, 아악수장을 지냈다.[5]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佾舞,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 부문, 제39호 처용무의 무용과 가면 제작 부문 보유자였다.[6]

1951년부터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을 지냈다.[5] 아악과 궁중무(宮中舞)의 재현·전승·보급에 힘썼고, 탈춤을 체계화시키고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 5회의 발표회를 가졌으며, 1962년에는 〈처용랑(處容郎)〉으로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4년에 〈종묘제례악〉으로 기능보유자 제1호로 지정되었고,[4]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 〈종묘제례악〉,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5]

2018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국악인 3명의 모습을 담은 ‘한국의 소리’ 기념우표 3종을 발행했는데, 이 기념우표에는 전통무용가이자 해금 연주자인 김천흥의 모습이 담겼다.[7]

2002년에는 80년 동안 수집한 약 2,000점의 한국 전통 음악 관련 자료를 객원교수로 재직했던 하와이 대학교에 기증했다.

4. 경력

1922년 이왕직 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 해금 전공으로 입학하여 아쟁과 양금도 배웠으며, 이듬해인 1923년 제2기생으로 졸업하였다.[4] 같은 해에 순종황제 탄신 오순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했고, 1926년부터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 아악수, 아악수장을 지냈다.[5]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해금과 일무(佾舞,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던 춤) 부문과 제39호 처용무의 무용과 가면 제작 부문의 보유자였다.[6]

1951년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을 지냈다.[5]

아악과 궁중무(宮中舞)의 재현·전승·보급에 힘썼고, 탈춤을 체계화시키고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 5회의 발표회를 가졌으며, 1964년에 〈종묘제례악〉으로 기능보유자 제1호로 지정되었고,[4] 19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5]

국립국악원 이사, 국립국악원 국악사, 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 서울시 문화위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경희대·이화여대 강사 등을 역임했다.[4]

2018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국악인 3명의 모습을 담은 ‘한국의 소리’ 기념우표 3종을 발행했는데 이번 기념우표에는 전통무용가이자 해금 연주자인 김천흥씨의 모습이 담겼다. 우표 전지에 있는 QR코드를 휴대전화로 찍으면 연주를 들을 수 있다.[7]

연도내용
1922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2기생으로 입학
1923순종황제 탄신 오순 경축공연에 무동으로 출연
1926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2기 졸업(해금 전공, 양금, 아쟁 겸공)
1926-1940이왕직 아악부 아악수보, 아악수, 아악수장 역임
1951-2007국립국악원 예술사, 연주원, 자문위원을 거쳐 원로사범으로 재직
1955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 소장
1958김천흥 무용연구소 개설
1961문화재 위원
1964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 제1호 지정
1968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 지정
1971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
1973재단법인 대악회 회장
1973-1993(사) 대악회 이사장
1978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78-2007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83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단체 대표
1983-1993무형문화재예술단 단장
1992~1993대한민국 예술원 연극, 영화, 무용 분과 회장
1998대한민국 예총 명예회장
200280년 동안 수집한 약 2,000점의 한국 전통 음악 관련 자료를 하와이 대학교에 기증
2004심재 정악단 창단 고문
2007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40이화여자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한양대학교 음악 강사


5. 수상

연도수상 내역
1960년서울시 문화상
1968년무형문화재 보존 공로상
1969년제2회 한국문화대상
1970년제15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3년국민훈장 모란장
1983년제2회 한국국악협회 한국국악대상
1992년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
1997년제4회 방일영국악상
2002년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6. 저서


  •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종묘 일무》
  • 1969년: 《한국무용의 기본무보》
  • 1982년: 《정악양금보,대악회》
  • 1988년: 《정악해금보》
  • 1995년: 《심소 김천흥 무악 칠십년》 (서울: 민속원)
  • 2002년: 《정재무동홀기 창사보 1》 (서울: 민속원)
  • 2003년: 《정재무동홀기 창사보 2》 (서울: 민속원) 외 14편 집필.

7. 기타

서울시 남대문 양동 출생이다.[3] 1958년부터 ‘김천흥 무용연구소’를 개설, 5회의 발표회를 가졌으며, 1962년에는 〈처용랑〉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4]

2018년 4월 우정사업본부는 국악인 3명의 모습을 담은 ‘한국의 소리’ 기념우표 3종을 발행했는데, 이 기념우표에는 전통무용가이자 해금 연주자인 김천흥의 모습이 담겼다. 우표 전지에 있는 QR코드를 휴대전화로 찍으면 연주를 들을 수 있다.[7]

참조

[1] 뉴스 [삶과 추억] 한평생 우리 춤과 소리 지켜온 김천흥 선생 별세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7-08-20
[2] 백과사전 김천흥 http://100.nate.com/[...]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백과사전 인물 http://encykorea.aks[...]
[4] 백과사전 김천흥 글로벌 세계 대백과
[5] 백과사전 김천흥 글로벌 세계 대백과
[6] 웹인용 우리문화신문 /음악과 무용의 명인, 김천흥을 기린다 / 2018.7.31. / 한성훈 기자 http://www.koya-cult[...] 2018-11-14
[7] 웹인용 전파신문/ ‘우본, 국악인 기념우표 '한국의 소리' 3종 발행’ / 2018.04.30. http://www.jeonpa.co[...] 201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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