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나카에 요스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카에 요스케는 1922년 오사카부에서 태어나 교토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한 일본의 외교관이다. 프랑스어 연수를 받은 '프렌치 스쿨' 출신으로, 조약국과 유엔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1984년 주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한국과의 실무 협상을 조율했으며,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한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에 관여했다. 2014년 3월 6일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집트 주재 일본 대사 - 가가와 다케히로
    가가와 다케히로는 1956년생 일본 외교관으로, 도쿄 대학교 법학부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아랍어 연수와 중동 지역 연구를 통해 전문성을 쌓았고, 주미국, 주사우디아라비아, 주중화인민공화국 일본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며 주이집트 특명전권대사, 국제무역·경제담당 특명전권대사, 외무성 국제정보국장, 국제법국장,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대책본부 수석 교섭관 등을 역임했다.
  • 이집트 주재 일본 대사 - 오쿠다 노리히로
    오쿠다 노리히로는 일본의 외교관으로, 여러 대사를 역임하고 2018년부터 도쿄 해상 일동 화재 보험의 고문으로 활동한다.
  •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일본 대사 - 니와 우이치로
    니와 우이치로는 이토추 상사의 사장과 회장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일본 대사를 지냈으며, 센카쿠 열도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비판하고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 중화인민공화국 주재 일본 대사 - 미야모토 유지
    미야모토 유지는 '차이나 스쿨' 외교관으로, 중국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국제 연합 일본 정부 대표부 1등 서기관, 주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대사, 주 미얀마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하고 일본일중관계학회 회장, 일중우호회관 회장을 맡아 중일 관계 발전에 기여했으나, 센카쿠 열도 및 신장 위구르 인권 문제 관련 발언과 위자푸 사건 연루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2020년 서보중광장을 수훈했다.
나카에 요스케
기본 정보
나카에 요스케
나카에 요스케
이름나카에 요스케
원어 이름中江 要介
로마자 표기Nakae Yōsuke
출생1885년 12월 25일
사망1966년 12월 23일 (향년 80세)
출생지니가타현
사망지도쿄도
국적일본
학력
출신 학교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경력
소속내무성
대정익찬회
주요 경력아키타현 지사
이바라키현 지사
경시총감
귀족원 칙선의원
가족
친척나카에 조민 (외종조부)

2. 인물

1922년 오사카부에서 태어나 기타노 중학교, 구제 제3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 대학에 진학했다. 교토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성, 1987년에 정년 퇴임했다.[8] ‘차이나 스쿨’이라고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론 프랑스어 연수를 받은 ‘프렌치 스쿨’로, 조약국과 유엔 외교가 길다.

젊은 시절에는 연극 청년으로 학도들을 동원했던 경험이 있고, ‘가즈미 간’(霞完|가스미 간일본어)이라는 필명으로 발레의 대본을 집필한 적이 있다. 《생명》은 도쿄베오그라드에서, 《동과 정》은 도쿄와 카이로에서, 《드넓은 한 줄기 강》은 도쿄와 베이징에서 각각 상연됐다.[8] 저서로는 《중국의 향방: 남겨진 사회주의 대국》, 《일중 외교의 증언》, 자전적인 에세이집으로 《대사답지 않은 대사의 이야기》가 있는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외교 비화를 소개했다.[8]

2014년 3월 6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향년 91세).

3. 에피소드

나카에 요스케는 김대중 납치 사건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한일, 중일 외교 현안에 깊이 관여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나카에는 대한민국과의 실무 협상을 조율했지만, 김대중과 납치 사건을 “일개 외국인”, “하찮은 일”이라며 부정적으로 인식했다.[9]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 측에 문제 제기를 계속하도록 촉구한 사실을 국회에서 스스로 밝혔다.

3. 1.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 나카에 요스케가 외무성 아시아국 외무참사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나카에는 당시 대한민국과의 실무 협상을 조율했다. 그는 사건 당사자인 김대중을 “일개 외국인”, 납치 사건을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9]

3. 2.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일본중국 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양측 모두 언급하지 말고, 85년이든 100년이든 조용히 자연 소멸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카에는 "지금 침묵하면 일본에서는 이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중국 측에 야스쿠니 문제를 계속 문제 삼도록 촉구한 사실을 국회에서 스스로 밝혔다.

4. 주요 경력

연도주요 경력
1947년교토 대학 법학부 졸업, 외무성 입성
1952년프랑스 일본대사관 근무
1954년외무성 조약국 근무
1958년브라질 일본대사관 근무
1961년유엔 대표부 근무
1964년외무성 조약국 법규과장
1967년베트남 일본대사관 공사
1969년주프랑스 일본대사관 공사(유네스코 상주대표)
1971년외무성 아시아국 외무참사관
1974년외무성 아시아국 차장
1975년외무성 아시아국장
1978년유고슬라비아 특명전권대사
1982년이집트 특명전권대사(남예멘 겸임)
1984년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1987년원자력 위원회 위원
2014년노환으로 사망[10](향년 91세), 사후 종3위에 추서됨[11]
기타미쓰비시 중공업 주식회사 사장실 고문, 사단법인 일중우호협회 부회장, 일본일중관계학회 회장 등 역임


5. 저서


  • 《중국의 향방: 남겨진 사회주의 대국 - 내일 일중 관계가 세계의 흐름을 바꾼다(中国の行方―残された社会主義大国 明日の日中関係が世界の潮流を変える일본어)》 KK 베스트셀러즈, 1991년 9월.
  • 《대사답지 않은 대사의 이야기(らしくない大使のお話일본어)》 요미우리 신문사, 1993년 2월.
  • 《아시아인의 전후 50년: 공통 인식을 요구한다(アジア人の戦後50年―共通認識を求めて일본어)》 아시아 대학 아시아 연구소, 1996년 5월.
  • 《일중 외교의 증언(日中外交の証言일본어)》 소텐샤 출판, 2008년 3월.[8]

참조

[1] 웹사이트 われら六稜人【第5回】憂国大使の創作バレエ https://www.rikuryo.[...] 六稜同窓会 2024-11-06
[2] 문서 中江(1993)
[3] 웹사이트 【靖国考】(下)首相が堂々参れる日いつ? いまだ残る「熱狂と偏見」 https://www.sankei.c[...] 2013-08-17
[4] 간행물 第147回国会 参議院 国際問題に関する調査会 第5号 平成12年4月12日
[5] 뉴스 中江要介氏が死去 元駐中国大使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4-03-07
[6] 웹사이트 中江要介氏死去(元中国大使) http://www.jiji.com/[...] 時事ドットコム 2014-03-07
[7] 간행물 『官報』第6269号(平成26年4月14日付)8頁
[8] 문서 나카에(1993)
[9] 뉴스 “일 공안은 납치를 사전에 알았다” http://legacy.www.ha[...] 2007-07-03
[10] 뉴스 中江要介氏が死去 元駐中国大使 http://www.nikkei.co[...] 니혼케이자이 신문 2014-03-07
[11] 간행물 《관보》 제6269호(헤이세이 26년 4월 14일자) p.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